(2005년 개봉 당시 '왕의 남자'를 보고 썼던 감상문입니다.)
줄 위에 서 있던 장생과 공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반 허공인 줄 위에서 땅을 버리고 허공으로 함께 날아오른다. 그 순간 장생은 이 생(生)에서 그의 균형을 잡아주던 부채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는데 슬그머니 눈물이 고였다. 현실을 뛰어 넘지 못하고 이런 파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광대의 최후가 애절하고 불쌍해서만은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 이 영화의 결말은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광대들이 맹인 놀음을 할 때 수없이 되풀이 되는 대사이다. 두 맹인이 길을 가다가 만났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는 사람이다. 반갑다. 서로에게 다가가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고 안아도 보고 싶어 앞으로 달려 나가지만 서로의 모습을 볼 수가 없는 탓에 번번이 엇갈린다. 엇갈리고 나서 또 말한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모습, 바로 앞에 두고 수없이 엇갈리는 모습, 바로 우리의 사는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생과 공길은 서로를 만난다. 그리고 공길은 장생을 통해, 장생은 공길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들은 기꺼이 함께 떠나간다.
장생은 비천하게 태어나, 자라는 동안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혼자 살아왔다. 장터의 광대였다가 왕의 광대가 되었다. 왕에게 눈을 빼앗겼고, 한 때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던 공길(장생이 공길을 대하는 호칭은 '놈'이 되기도 하고 '년'이 되기도 한다.)의 마음마저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으로 살았다. 광대라는 천한 신분의 사회적 위치에 수긍하지 못하고, 왕을 데리고 놀아야 이 세상의 중심 또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 나갔다. 그는, 순간적인 손놀림과 표정 하나로 자신과 광대패의 목숨을 쥐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왕 앞에서도, 역대로 이어온 온갖 이론과 관념과 그들 나름의 가치기준과 진리로 무장한 기세등등한 중신들 앞에서도, 겁도 없이 백성들이 비웃는 왕의 정체를 까발릴 정도로 광대로서의 재질과 배짱이 있었다.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장생은 세상에 대한 이 반항적 성격 때문에 결국에는 주변 광대들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연산보다 힘이 센 사람이다. 비록 왕의 손에 의해 눈을 빼앗겨서 맹인이 되고 '공길이를 놓아버려라'고 했던 내시 처선의 마지막 충고를 무시해서 파국으로까지 치닫지만 그는 자신을 짓밟고 적대적이었던 이 세상에 대해 연산보다는 오히려 자유로운 사람이다. 눈을 빼앗기고 나서 "맹인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라고 말하며 마침내 공길과 더불어 마지막 길로 오른다.
장생보다, 무의미하게 죽어 거적에 둘둘 말려 대궐 밖으로 실려 나간 광대 육갑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은 연산으로 보인다. 반 허공인 줄 위에서 놀다가 허공으로 함께 가볍게 날아오른 광대들에 비해 이를 데 없이 무거운 존재가 연산이다. 그는 하기 싫은 왕 노릇에 눌리고, 극복해야하는 아버지 선왕의 무게에 눌리고, 모성 결핍에 덧붙여 금삼에 토한 피로 원한 맺힌 죽음 이라는 짐까지 지워 주고 간 어머니에 눌리고, 세상에 먼저 나와 자리 잡고서 그의 자리와 자유와 의지와 감정을 억누르는 신하들의 권세와 기득권에 눌리고, 심지어 처선의 이성적 애정에 눌려서 한없이 무거운 영혼의 무게를 지녔다. 가장 오래 옆에 머물면서 그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가졌던 처선조차 왕이라는 역할에 그를 가장 잘 적응시킬 수 있는 존재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대들을 불러들여 부패한 신하들을 풍자하고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동원하면서까지 연산이 신하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해서 현실적인 진짜 왕이 되기를 바랐던 처선은 실패했다. 그러기에는 연산은 너무 유약했고 너무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왕보다는 차라리 광대가 되었으면 나았을 것 같은 사람이다. 연산의 피비린내 나는 패악과 잔인한 행위들은 그의 내면의 허약함의 반동인지도 모른다. 장녹수의 치마에서 어미의 그림자를 본다한들 녹수는 그가 도저히 채울 수 없었던 허기, 어머니와 같은 성(性)을 가진 또 하나의 타인이었을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자신의 영혼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공길이 손목을 긋고 자살시도로 그의 곁을 떠나려 했을 때 연산은 외롭게 외친다.
"……왜!……"
그는 적막한 표정으로 겹겹이 닫혀 있는 문의 문살을 손가락으로 주르륵 훑으며 다시 녹수의 치마폭에 묻히러 간다. 무기력한 태아의 모습과 텅 빈 늙은이의 표정으로……
공길은 바람이다. 항상 놀이의 마지막이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공길은 패거리들 중 가장 빼어난 광대이다. 자신을 알아주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순응적이고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아주 민감한 사람 같아 보인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장생의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 또한 연산의 마음을 읽고, 연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손가락으로 그 찝찔한 눈물을 닦아보는 유일한 인간이 공길이다. 그는 바람과 같아서 한 자리에 머물 수도 없지만 자신의 이익과 계산에 따라서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권력 지향적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연산을 가슴 아파하고 연산 옆에 머물고 싶을 때 그 옆에 머물고, 장생을 사랑하고 장생과 함께 떠나고 싶을 때 떠날 만큼 현실적인 힘 또는 권력은 갖지 못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살아'라고 했던 그는 결국 주변과 상관없이 자기가 누구인지, 누구로서 가장 자기 자신으로 충실했고 어떤 모습으로 살 때 가장 충만했는가를 깨닫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너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으냐?"
고 묻는 장생에게
"나야 다시 태어나도 광대지, 이놈아, 나는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살 것이고 광대가 될 것이야!"
라고 대답한다.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까? 바람처럼 이리 저리 내 사랑과 내 삶과 내 존재를 옮겨 다니는 공길일까? 비록 현실적으로 최하의 계층에까지 떨어져 있어도 삶과 영혼과 사랑과 예술적 갈망을 일치시키는 삶을 살고자하는 장생과 닮은 존재일까?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무거운 존재의 짐을 기어이 내려놓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다가 타인의 의지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될 연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