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성모송' 번역 잘못되었다
이제민 신부
현행 '성모송' 번역 잘못되었다 |
예수의 '어머니'만 강조해 의존적 신앙 키워.. 묵주기도는 보고용, 선물용, 때론 협박용으로 전락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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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비중은 대단히 크다. 특별히 한 해 가운데 5월은 ‘성모성월’로 지정되어 관련행사가 줄을 잇고 있지만, 정작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제대로 된 성모신심이 있는지 의문이 들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천주교회에서 바치고 있는 ‘성모송’ 자체의 번역상 오류 문제마저 지적되고 있다.
마산교구 명례성지의 이제민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성모송>(성서와 함께, 2009년 개정판)을 통해 “성모송이 원문과 달리 암송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먼저 현행 한국교회 기도문과 원문을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행 성모송 전반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성모송 원문 번역 전반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나이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성모송은 본래 천사의 인사(루카 1,28)와 엘리사벳의 인사(루카 1,42), 그리고 교회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수태를 알리는 천사의 인사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나이다”까지다. 그리고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까지가 집에 방문한 마리아를 반가이 맞으며 엘리사벳이 전해준 인사말이다. 그런데 현행 ‘성모송’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천사) 여인 중에 복되시며(엘리사벳)”라고 번역해 천사의 말과 엘리사벳의 인사를 잘못 연결하여 놓았다.
현행 성모송, 천사와 엘리사벳의 인사말을 잘못 연결하여 놓았다
이제민 신부는 성모송을 바치면서 “천사의 마음과 천사에게서 인사를 받는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으며,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어디까지가 천사의 말이며 엘리사벳의 인사인지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기도를 외워버리고 만다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신자들이 원문과 다르게 외우면서 원문이 뜻하는 지향으로 기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천사와 엘리사벳의 마음을 알리는 성경구절을 잘못 연결시킨 한국교회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원문대로 하자면,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았던 분이니 기뻐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고, 그 결과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할 수 있었으니 복되다는 것이다.
이제민 신부는 “만약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제 곧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고, 그 아기가 인류가 기다리는 구세주임을 알렸기 때문에 비로소 마리아가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마리아의 믿음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믿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리아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디흔한 일류병 걸린 어머니나 다름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기뻐한 것이 아니다. 천사가 인사를 건네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었다. 이런 여인에게서 주님께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을 듣고 충분히 겸손할 수 있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할 수 있었다.
잘못된 번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모송 후반부 ‘교회의 기도’ 부분에서 현행 한국교회 번역본은 “천주의 성모(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님!”이라고 되어 있으나, 라틴어 원문은 ‘Sancta Maria Mater Dei’(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님!)이다. 즉, 예수의 어머니라서 마리아가 거룩한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리아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먼저 거룩했으며, 거룩한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조점은 '성모'가 아니라 '성 마리아'다
우리가 성모송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폐해는 참으로 심각할 지경이다.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의 거룩한 품성을 배우기보다, 먼저 ‘어머니(성모)’에게 기대서 무엇을 얻어낼 지 먼저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듯’ 잘못 번역된 성모송을 외우며 양적으로 많은 기도를 바치면 최고인줄 착각한다. 예컨대 교회지도자들은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도록 신자들에게 강조하면서, 성모송과 묵주기도를 ‘보고용’이나 ‘선물용’으로 전락시켜왔다. 심지어 ‘협박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활동보고 시간에 경쟁적으로 묵주기도를 몇 꾸러미나 돌렸는지 보고한다. 추기경이나 주교, 본당사제의 영명축일이나 서품기념일에 맞춰 ‘묵주기도 합계’를 내서 봉헌한다. 때로는 성당신개축을 위한 헌금을 모으면서 ‘묵주기도 천만 단 바치기’ 운동 같은 것을 통해, 마치 이렇게 기도했는데 성당신립금이 제때에 제대로 안 걷히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을 하는 사제들도 있다. 이게 ‘은근한’ 하느님 협박용 묵주기도다.
이제민 신부는 천사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인사한 배경과 교회가 아름다운 칭호로 마리아를 칭송한 배경을 잊지 말라고 조언했다.
“구유에 아기를 뉘어야 했던 동정녀 마리아의 심정, 시메온에게서 가슴을 찌르는 아픈 예언을 들어야 했던 젊은 어머니의 심정,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애끓는 어머니의 심정 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만을 생각하면서 은총의 여인, 복 받은 어머니라는 점만 떠올리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이다.”
성모송을 외기 전에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려야
지금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모송은 6세기경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천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6세기경 시리아교회의 세례예식에 천사와 엘리사벳의 인사가 사용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재임)는 대림 제4주일 봉헌기도에 성모송의 이 부분을 도입했다. 그리고 후반부인 교회의 기도는 1568년 교황 비오 5세 때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모송을 비롯해 마리아 신심을 받아들인 것은 가난한 신자들의 신앙 감각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마리아처럼 가난했으며, 세상의 고통 가운데 있었다. 숱한 전쟁에서 자식을 잃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은 마리아가 겪은 고통을 피부로 느끼면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러니, 마리아를 두고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라고 칭송하며 묵주알을 굴리면서도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이제민 신부는 성모송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구세주를 세상에 탄생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 안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뜻이라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이천 년 전에 마리아 시대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잉태된 하느님(나라)의 씨앗을 날로 자라게 하여 마리아처럼 세상에 탄생시켜야 한다”고 전한다.
마리아처럼 인류의 고통에 동참하며, 마리아처럼 마니피캇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성모송을 이해하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심정을 공감하고, 교회의 호소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던진 첫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Ave Maria”(마리아님, 기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