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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절망의 선택
오민수가 사건이 나기 이틀 전 원당읍의 낭만장에서 설희주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몸을 피해 있있습니다. 설희주와 몰래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며칠 동안 그곳에 피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설희주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민수는 벤딩 머신에서 뽑아온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거기에 피신을 하고 있었나? 그땐 자네를 잡아 넣으려하지 않았을 텐데."
추경감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회사 측에서 계속 저를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피해 있다기보다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옳지요."
"회사측에서?"
"예, 그것이 고사장이 시킨 일인지 혹은 자발적으로 구사대가 생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노조가 계속해서 말썽을 일으키면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는 대자
보가 계속 나붙었어요.
그뿐 아니라 나한테도 전화로 여러 차례 협박을 했습니다."
"뭐라고? 누가?"
강형사가 성급하게 물었다.
"노조에서 빨리 손을 떼라. 병신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밤길 조심해라.
너희는 장난으로 노조를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생계가 달렸다.
오민수는 노조의 대부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지들이 나는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덤벼든 자동차에
치일 뻔했습니다. 그 이후 원당의 낭만장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노조 간부 몇 사람과 긴급한 연락만 했지요."
"그래서 그리로 설희주를 불러 들였구먼.
여관에 혼자 있으니까 옛날 애인이 생각난 거야?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남의 아내야, 남의 아내!"
강형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식으로 야비하게 이야기하지 맙시다.
그렇게 생각 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오민수는 대단히 화가 났다. 마침내 꺼내려던 이야기를 중지하고 말았다.
"자, 점심이나 먹고 이야기하지."
추경감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를 썼다.
강형사를 불러내 서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야단을 쳤다.
오민수 같은 사람들은 가장 겁내는 것이 비겁자나 부도덕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란 것을 명심하라고 이야기했다.
오후부터 오민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설희주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회사 형편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설희주가 저를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설희주가 회사에 한번 들렀다가 마침 농성하고 있는 우리 집행부 동지들을 만난 뒤."
"그때 오민수는 없었다는데?" 추경감이 물었다.
"예, 그때 저는 여기 와 있었습니다.
희주가 내가 거기 없는 것을 보고 만날 수 없느냐고 우리 동지에게 얘기했다는 겁니다.
나는 처음에 그 전갈을 듣고 희주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 일에 그녀를 끌어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만나야 한다는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마지막에는 직접 편지를 보내 왔는데."
오민수가 기억하고 있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그런 방법으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나도 여러 가지로 오민수 형을 도우려고 노력해 보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하려던 숭고한 뜻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눈 떠 있는 우리들이 모른 척하면 아직 깨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이 영원히 시들고 맙니다.
오형! 내가 동지를 버렸다고 생각치 마세요.
모든 동지가 다 그렇게 생각해도 오형만은 꼭 나를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만나야 합니다.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면 오형이 나를 배신자로 생각한다고 믿겠어요.'
편지를 본 오민수는 자기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직접 전화를 걸어 여관으로 오도록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은 좁은 여관방에서 마주서자 서로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이 오민수의 모습을 초췌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만은 학생 시절의 그를연상하게 했다.
불타는 가슴으로 수십만 명의 군중 앞에 서서 사자 울음을 토하던 오민수가 아닌가.
설희주는 펄펄 뛰던 사자가 초라한 우리에 갇혀 썩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형!"
설희주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었다.
수수한 블라우스에 받쳐 입은 블루진 스커트와 아무렇게나 뒤로 묶은 그녀의 머리는
여학생 시절을 연상하게 했다.
거의 화장기가 없는 그녀의 얼굴은 옛날처럼 청순한 향기를 풍겼다.
"희주."
오민수는 설희주가 남의 아내라는 것을 잊었다.
옛날 동지이며 연인 시절의 그녀를 다시 본 것이다. 오민수는 설희주를 덥석 껴안았다.
설희주도 자연스럽게 오민수의 품에 안기었다.
"우리."
설희주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오민수가 자기의 입술로 그녀의 작은 입을 덮었다.
설희주는 까칠한 오민수의 수영을 뺨에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갑자기 눈물이 펑평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좌절과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기의 위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희주, 나쁜 여자."
오민수는 설희주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신음처럼 뱉었다.
설희주는 아무 말도 않고 계속 눈물만 쏟았다.
오민수는 설희주를 껴안은 채 침대로 넘어졌다.
오민수는 미친듯이 설희주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설희주는 아무 말도 않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오민수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를 배신한 회한의 눈물인지도 몰랐다.
"희주, 나쁜 여자!"
오민수는 같은 말을 계속 되뇌이며 설희주를 껴안고 몸부 림쳤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희주의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블루진 스커트의 지퍼를 열었다.
설희주는 오민수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두었다.
얇은 슈미즈도 달아오른 오민수의 손길 앞에 쉽게 벗겨져 달아났다.
검은색 브래지어와 검은색 팬티만 걸친 설희주의 나신이 백열등 아래 눈부셨다.
설희주는 눈을 꼭 감고 모든 것을 오민수에게 맡겼다.
갸름한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뒤로 묶은 머리채는 어느 새 풀려 풍성한 볏단처럼 그녀의 긴 목을 휘감고 있었다.
동그스름한 어깨가 한껏 수줍음을 먹은 듯했다.
가는 허리와는 대조적인 볼륨 있는 그녀의 허벅지가 놀라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오민수는 어느 새 자기 옷도 벗어 던진 뒤 설희주의 브래지어를 서툰 솜씨로 잡아당겼다.
잘 벗겨지지 않았다. 설희주가 손을 뒤로 비틀 듯이 돌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어 주었다.
깜장 브래지어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자 봉긋한 그녀의 두 젖무덤이 부끄럼없이 노출되었다.
오민수는 그녀의 유두 색깔이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입술 빛과 같다고 생각했다.
오민수의 떨리는 손이 마지막 남은 그녀의 팬티를 움켜쥐었다.
설희주는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오민수의 손길은 집요했다.
설희주는 왼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 라이트 스위치 끈을 당겼다.
방안은 갑자기 희부연 설희주와 오민수의 맨몸만이 어렴풋이보일 뿐 어둠으로 가득 찼다.
어둠은 두 사람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보다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조그만 창문으로 달빛이 한아름 쏟아져 들어왔다.
두 남녀는 어둠에 익숙해짐과 동시에 포옹에도 익숙해졌다.
"희주, 사랑해!"
오민수는 그녀의 가슴 위에서 몸부림쳤다.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설희주는 눈물을 그쳤다. 그녀는 오민수의 뜨거운 가슴을 두팔로 안았다.
달빛을 가슴에 받아들이듯 온화한 감정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희주."
오민수가 신음을 토했다.
그 짤막한 말과 함께 설희주는 가장 깊숙한 곳에 그가 와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옛날 아득한 먼 곳에서 느낀 감정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풋풋한 풀냄새를 맡으며 20여년 동안 간직해 온 귀중한 보석을 오민수에게 기꺼이
주던 일을 되새겼다.
그들은 그해 여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여주의 어느 연수원에 엠티(MT)를 갔었다.
하루 종일 학생 운동의 장래를 위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마지막 날 밤 캠프 파이어의 불은 꺼졌지만,
그들은 더욱 굳은 투지의 불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던 설희주는 총총하게 뜬 별에 매혹 당했다.
그녀는 살그머니 동료들 몰래 밖으로 나갔다.
벌써 풀벌레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연수원 마당가 벤치에 앉아 별에 심취되어 있었다. 저 많은 별무
리 같은 우리 젊은이가 흐르는 유성처럼 자기 몸을 불태우며 민주주의를 위해,
고통받는 민초를 위해 사라져 간다고 생각했다.
"별을 헤이는 밤이군요."
굵직하고 정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학총련 회장인 오민수였다.
"오형도 별에 반했나요?"
설희주는 좁은 벤치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두 사람의 몸이 옆으로 맞닿았다.
따스한 오민수의 체온이 피부를 뚫고 설희주의 심장으로 전해져 왔다.
"희주! 우리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거야.
우리의 이상이이 한반도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동행자야."
오민수가 가만히 설희주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희주, 사랑해!"
오민수의 무겁고 다정한 목소리가 설희주의 귓전을 스쳤다.
그녀는 그 소리가 멀리 있는 별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했다.
자기의 보잘것 없는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일어서서 천천히 걸었다. 하늘의 별만이 내려다볼 수있는 강변 숲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껴안은 채 숲에 쓰러졌다.
뜨거운 남자의 입술을 느끼며 설희주는 정신이 더욱 아득해졌다.
오민수가 서툰 솜씨로 그녀의 스커트를 벗겨 내릴때 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로 별을 바라보았다.
육체의 중심부에 생후 처음인 충격을 느꼈다.
그녀가 오민수의 어깨 너머로 춤추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풋풋한 풀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기분 좋은 풀냄새는 그녀의 하반신을 가득 채우고 위로 위로 차올라 마침내 심장에까지
가득 찼다.
그녀는 춤추던 별이 갑자기 멈춘다고 느낀 순간 가슴 위에 오민수의 얼굴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풀냄새는 이제 설희주를 가득 채우고 오민수의 온 몸을 적셨다.
"희주, 사랑해!"
설희주는 꿈을 꾼다. 생각했다.
그렇게 청순하고 아릅답던 그날 밤을 다시 어두운 여관방 침대 위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뜨거운 두 영혼은 달빛 아래서 몸부림쳤다.
그들의 사랑은차라리 육체가 아닌 영혼의 갈망이었다.
"미안해, 희주! 정말이야."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오민수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 얼굴을 숙이고 흐느끼듯 외쳤다.
조금 전의 무분별한 그의 행동을 자책하고 있었다.
설희주는 아무 말 않고 일어나 앉아 옷을 챙겨 입었다.
"미안해, 희주. 이건 아니야! 희주는 남의 아내야.
우리 위대한 사장님의 사모님이란 말이야! 그런데 내 가."
오민수는 갑자기 외치면서 자기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오형! 비겁한."
설희주가 오민수의 뺨을 때렸다.
"내가 고봉식의 아내라는 게 그렇게도 걸려?
형네 회사 사장 아내를 범했다고 후회하는 거야? 겁내는 거야?"
설희주는 갑자기 히스테리컬한 함성을 질렀다.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나 회한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난 죽어야 할 여자야. 죽어서 마땅한 여자야. 그렇고말고.
오형 지금 오형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간통, 부정 하하하, 난 누구에겐가 죽게 될 거야."
여관 종업원이 두 사람이 죽음이란 말을 밸으면서 싸웠다는 것은 이 대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설희주의 시체에서 며칠 된 남자의 정액이 발 견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고봉식과 오민수는 혈액형이 같았기 때문에 2일 내지 1주일 전 남편과의 정사에서
남겨진 정액으로 생각한 것은 수사의 실수 였다.
혈액형이 같다고 포기하지 않고 유전자 검사를 했다면 그것이 고봉식의 정액이 아니란
것을 알아냈을것이다.
그들은 격한 감정을 정리하고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너무나 밝은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오형,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지쳤나 봐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오산이었어요. 내가 재벌집 며느리가 되면 가능할 줄 알았어요.
불쌍한 노동자의 월급부터 올려 주고 회사를 더욱 민주적으로 운영하여 모든 이익금을
공평하게 갈라서 가지게하고."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모든 게 엉망이에요. 세상이 그렇게 간단히 바뀔 수가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떠나고싶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 땅 위의 한 여자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난 최루탄과 싸우는 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택한 길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어요.
난 이제 더 큰 절망 속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죽음! 그래요,
죽는 길만이 나에게 남아 있어요."
설희주는 오민수의 손을 꼭 쥐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옛 동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없어요. 오직 배신자일 뿐이에요.
오형한테는 신의의 배신자임과 함께 사랑의 배신자예요.
이제 돌 이킬 수 없어요. 오형!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어요.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더가 할 수 있는 최후의 길을 택하겠어요."
"무슨 소리야?"
오민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오민수는 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그녀는 죽음을 택한 것이란 말이지?"
추경감이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오민수에게도 건네주며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 대한 복수가 되지 않는다,
불쌍한 한 여자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렸습니다.
내가 더 말려야 하는건데. 그날 집에 보내지 말고 영원히 내 곁에 있게 해야하는 건데."
오민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강형사가 누구에게도 아닌 고함을 지르고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는 명백했다.
설희주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은 것이었다.
연인을 배반하고 딴 남자를 남편으로 택한 것은 그녀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 짓이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도로에 그치는 것이다.
그녀는 연인을 배반한 죄책감에 몸부림쳤고 동지를 배신한 괴로움으로 울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세상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그녀는 학생운동 시 절보다 더 두꺼운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회한의 세월을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요, 내가 가진 마지막 재산, 내 목숨을 이용하 겠어요. 나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설희주가 오민수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죽음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목 하도록 하고 싶었다.
왜 그녀가 죽었는가를 캐는 동안 한 부르조아 집안의 비리를 낱낱이 세상에
폭로하고 싶었다.
노사의 갈등에 수사의 조명을 비쳐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한 젊은 여자가 자살했다고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선 매스컴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재벌 집안의 돈으로 감추지 못하도록 박민재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며 부탁해 놓았다.
그리고 그녀 시집의 모든 식구가 그녀를 죽인 혐의자처럼 보이도록 꾸며 놓았다.
남편 고봉식의 와이셔츠에 피를 묻혀 숨겨 놓고,
시누이 부부 고정혜와 정정필의 방에 보조 열쇠를 가져다 놓았다.
또한 그 녹음 테이프에는 최화정의 지문이 묻도록 했다.
고영혜는 학생 시절의 연적이고,
양 경숙은 남편의 정부니까 자연히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옛 애인 오민수가 수사받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처절함이
세상에 폭로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녹음 테이프 플레이어의 타이머를 조작하여 자기가 죽은 지
한 시간 40여분 뒤에 비명 소리가 나오도록 해놓았다.
고봉길이 뒤늦게 비명을 들어 사건 시간이 헛갈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허탈한 기분으로 시경 문앞을 걸어나왔다.
"반장님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 목숨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칠 수 있습니까?"
강형사가 자못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건 장난이 아니야. 목숨을 건 처절한 절규야."
"예?"
"자네 혹시 추사(秋史)라고 아나?"
"예? 추사요? 성이 추시니까 경감님의 선조쯤 되시는 분이겠군요."
"예끼, 이 사람! 성이 추씨가 아니고 아호가."
"완당이라고도 하지요. 조선조 말기 병조판서를 지낸 명필 김정희 아닙니까?"
강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추사의 그림 중에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라는 것이 있다네."
"제주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린 소나무 말이죠?"
"그 세한도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풍상고절(楓霜苦節)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시대가 잘못 되어 가고 있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고쳐야 하는 걸세.
꾸준히 끈질기게 말이야.
우리 시대는 참고 견디는 시대야. 섣불리 결단을 내리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서는 안 되지."
"어쩐지 개운치 않은 사건 종말인데요."
고개를 떨구고 걷는 강형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추경감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때, 쐬주 한잔 하면서 기분 풀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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