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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5월 4일(제18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레위기 13:1-8
제목 : 내 믿음이 나병이 걸리지 않게 하라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레위기를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읽어보셨나요? 현대 성도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 성경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레위기를 읽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레위기를 읽으라고 하면 큰 위기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힘든 시대인데, 거기다가 레위기를 읽으라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는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정결 규례가 11장에서 15장까지 총 다섯 장에 있습니다. 11장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즉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에 대한 규례이고, 12장은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 즉 월경 및 아기를 낳았을 때의 정한 상태와 부정한 상태에 대한 규례이고, 15장은 몸의 유출병에 대한 규례입니다. 즉, 죽음 및 생명과 관련한 정결 규례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13장과 14장은 나병에 대해 규례입니다. 나병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어떤 상태가 나병인지 말하고, 또한 나병에 걸린 상태는 부정하며, 이에 나병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규례입니다.
나병은 몸속의 뼈까지 침투하는 세균의 활동으로서 눈썹, 얼굴, 코 및 귀가 일그러지는 병입니다. 심지어 뼈가 녹아내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피가 흐르지 않아서 지체가 떨어져 나가도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나병에 걸려 죽게 되는 극한 상태는 눈, 코, 입, 귀, 손가락, 발가락 등 온 몸의 피부 등이 일그러지고 제자리에서 떨어집니다. 역한 냄새와 함께 진물이 나고 그 모습은 극한 흉측함으로 비정상 및 불균형, 그리고 무질서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나병에 걸린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역겨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징그럽고 또한 더러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멀리 피하거나 도망치게 됩니다.
특히 나병은 신경 조직에 균이 침입함으로 국부적으로 마비 증세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나병이 침투한 부분은 바늘로 찔러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나병의 특징은 그 병의 원인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동물들에게서는 나병에 걸린 사례가 역사 가운데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있었던 질병이 나병입니다.
따라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나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들이 전부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나병이 걸린 사례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사역을 맡기실 때 몇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 기적이 나병입니다. 출애굽기 4:6-7절을 보면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출 4:6-7) 고 하였습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에게 명하시기를 나병에 대해서는 따로 특별하게 다룰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24:8은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신 24:8) 고 하였습니다.
이 나병은 고대사회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질병입니다. 나병은 자신이 모르고 3년, 자신이 알고 3년, 남들이 알고 3년이란 말이 있듯이 긴 잠복기간 후에 표면에 드러나게 됩니다. 제3기가 되면 눈썹이나 머리털이 다 빠지고 눈과 코와 성대와 수족이 파괴되어 면모가 추악하게 되며 몸에서 악취가 나게 되어 혐오의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병을 히브리어로 ‘짜라아트(때려눕히다) 라고 하는데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나병은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병의 진단을 의사가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하게 한 것은 이것은 의학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종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나병이 나았을 때는 고침 받았다고 하지 않고 깨끗해졌다고 한 것도 믿음적 의식의 견지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죄와 연관하여 생각했는데 작은 죄가 온 몸과 영혼을 멸망하게 하는 것과 나병이 오랜 잠복기간이 있는 것처럼 죄는 아무도 모르게 잠복하여 있다가 나타나는 것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나병을 제사장이 진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인간의 죄를 판단하고 해결하신다는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제사장은 나병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진단해야 하는데 나병인가, 단순한 피부병인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나병으로 판단되면 진영 밖에서 격리되는데 병이 나을 때까지 격리됩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어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과 격리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 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로 쳤으며 건강한 사람이 모르고 나병 환자 쪽으로 오면 입을 손으로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며 격리된 장소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죄는 성도들을 정상적인 삶에서 떠나게 하며 축복에서 격리시킨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은 성결하지 못한 부정한 병으로서의 나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13장은 나병의 진단에 대해서, 14장은 나병에 대한 결례법을 말씀합니다.
13장과 14장에 나병이란 말이 60번이나 나옵니다. 나병을 개역성경에서는 문둥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을 경상도 사람은 문디 또는 문둥이라고 멸시하는 욕설로 쓰기도 했습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들과 듣기에 거북한 말들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그러한 말 중의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에 관련된 말입니다. 예컨대 ‘벙어리’를 ‘말 못하는 사람’으로 고쳤고, ‘귀머거리’를 ‘말 못 듣는 사람’으로, ‘소경’을 맹인으로, ‘곱사’를 등굽은 사람으로, ‘앉은뱅이’를 ‘못 걷는 사람’으로, ‘난쟁이’를 ‘키 못자란 사람’으로, ‘병신’을 ‘몸 불편한 사람’으로, ‘불구자’를 ‘장애인’으로, ‘문둥이’를 ‘나병 환자’로 고쳤습니다.
지금 이 세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은 암입니다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가장 무서운 병은 나병이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나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이며 고독하고, 절망적인 병인지 보셔서 아실 것입니다.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내 믿음이 나병이 걸리지 않게 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나병은 무서운 질병
성경에는 여러 질병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 질병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발생한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협오스럽고 무서운 질병이 나로 나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나병은 출애굽 직전 모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기 4:6절,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나병은 고대 이스라엘,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 흔한 병이었다고 합니다. 나병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막론하고 자주 나오는 질병이며 특히 앞에서 말했던 모세나 미리암, 웃시야 왕, 게하시나 나아만 장군 같은 사람들도 나병에 걸렸다가 나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환자를 깨끗케 고쳐주신 일도 있으며,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나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은 일이 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나병에 결려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나병에서 깨끗이 낫게 되는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이 나병을 흔히 ‘한센씨’(Hansen)병이라고 합니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작은 박테리아 나병 세균에서 감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연구에 따라 치료하므로 나병은 서서히 감퇴하기 시작하여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천100만 명 정도이고, 우리나라에는 약 2만 2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병이 박멸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합니다. 이 나병은 자신이 모르고 3년, 자신이 알고 3년, 남들이 알고 3년이란 말처럼 긴 잠복기간 후에 표면에 나타나게 되고 제3기가 되면 눈썹과 모발이 빠지고, 눈과 코와 성대와 수족이 파괴되어 면모가 추악하게 되며 몸에서 악취가 나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병은 감각과 피부가 마비되고 육체의 기능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나병 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폴 브랜드’ 박사는 나병은 아픈 것을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치료가 더디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브랜드 박사는 심하게 아픔을 느낀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나병을 히브리어로 ‘짜라아트’라고 하는데 ‘때려 눕히다’ 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나병은 하나님이 때리시는 심판의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흑인인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자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 비방을 들은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고 했는데 비방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안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부르시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모세를 비방한 것을 크게 진노하시며 책망하시고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뒤 미리암을 보니 나병에 걸려 온 몸이 눈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미리암은 진영 밖에서 7일간 격리되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부르짖어 기도하자 미리암이 나병이 치료되어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 진행이나 나타나는 현상이 무서운 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내리시는 병이기에 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세상에 고통스럽지 않은 질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데 나병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을 더하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이 나병에 대하여 성경 곳곳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3:9절에 보면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시대에는 피부병이 늘 문제였고 특히 나병이 심했습니다. 피부는 몸 안과 몸 밖의 세상과의 경계입니다. 이 피부에 문제가 생기는 나병은 요즘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의 심각성 또한 무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병이 심각한 것은 그토록 심각하게 고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손상시켜 피부에 어떤 상처가 났을 때 적절한 반응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급기야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그제 서야 보고만 있게 만드는 병입니다.
이런 육체적 나병 못지않게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 영적 나병입니다. 육체적 나병은 그로 인해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달프겠지만 영적 나병은 그로 인해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나병은 육체적 나병처럼 죄에 대한 반응을 무디게 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믿음과 세상의 죄악의 경계에서 늘 반응하고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한 자책감과 통회하는 마음을 적당히 편안하게 하고 전혀 죄에 대해 느끼지 못하게 하여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인 나병은 영적으로 행동하고 일할 영적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모르고 있게 만드는 믿음의 질병입니다. 결국은 믿음을 무너뜨리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의 감각까지도 없애는 무서운 질병이 영적인 나병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나병이 없을까요?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영적인 나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만하면 됐어’하는 영적 자만심이고, 늘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영적인 나병입니다.
나병의 진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찰입니다. 진찰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나의 내면이 영적인 나병에 걸리지 않도록 늘 확인하고 진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나병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적 진찰입니다. 나의 영적 상태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해야 합니다. 믿음을 무너뜨리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의 감각까지도 없애는 마음들이 계속 반복되는 단어 ‘퍼졌으면’과 같이 누룩처럼 번지고 있는지 영적 청진기를 대보아야 합니다.
이 영적 청진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청진기를 대는 것이 말씀에 대한 묵상입니다.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영적 나병을 막아내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됩니다. 왜요? 영적인 나병의 무서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좋은 성도라도 영적인 나병에 걸리면 그 믿음이 죽어갑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나병의 진단은 제사장
나병은 의사가 진찰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진찰하고 판단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의사가 진단하고 판단하지만 나병은 제사장이 진단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나병의 진단을 제사장이 하게 되는 이유는 나병을 의학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종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나병의 치유에 대해서는 치료해주었다거나 고침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깨끗하게 되었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병은 신체적 질병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죄와 연관하여 생각하고 나병과 죄는 그 특성이 유사하기 때문에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병과 죄의 유사한 점이 무엇일까요? 나병은 오랜 잠복기간이 있는 것처럼 죄는 아무도 모르게 오랜 기간 비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의 시작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작은 반점, 뾰로지 같은 작은 종기, 피부의 사소한 발진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나병의 첫 신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병으로 판정되면 엄청난 불행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 정도야 뭐’ 하면서 시작하지만 죄의 결국은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또 나병이 감각기관이 마비되는 것처럼 죄는 성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마비시킵니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 죄에 대한 고민, 죄에 대한 가책이 점점 마비되어 영과 육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를 나병처럼 무섭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는 암보다 더 무서운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죄는 그 사람을 죽게 하는 나병과 같습니다. 내 속에 품은 악한 생각, 아무런 생각 없이 남을 정죄하는 말,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판단력 없는 결단, 이런 것들이 점점 자신의 믿음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영적인 나병입니다.
나병이 전염병이듯이 죄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죄가 하와에서 시작하여 아담에게, 또 가인에게 퍼졌고,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홍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거역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나병의 진단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제사장이 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진단은 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죄는 신령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판단하시고 사유하시며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도사린 크고 작은 죄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주일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내내 불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나요? 형제를 헐뜯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노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았습니까? 이것은 영적인 나병입니다.
다윗은 시편 51:7절에서 자신의 죄를 나병으로 상징하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는 영혼과 믿음을 썩게 하는 죄를 그대로 안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의 집에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여종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땅에 사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나병을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이 소녀의 말을 마음에 담고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 앞에 도착하였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엘리사 선지자가 뛰어 나와 상처 위에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병을 고쳐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자 불쾌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아람의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강보다 낫지 않느냐, 그런데 요단강에서 몸을 씻겠느냐 하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종들이 나와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큰일을 하라고 해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렸습니다. 그때 나아만이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씻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선지자가 씻으라고 하면 씻어야 합니다. 불순종했다면 깨끗이 고침 받을 수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돌아갔다면 일평생 나병 환자로 고통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는 이 성전에 나왔으면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방해요소 가운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자존심과 불순종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별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주님의 종들의 말을 잘 안 듣습니다. 들은 척도 안하고 돌아서면 불순종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건강한 몸과 건강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여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나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 믿음이 영적인 나병에 걸렸는가를 진찰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나병에는 걸렸다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병은 격리되는 병
제사장은 환자의 환처가 단순한 피부병인지 나병인지를 신중히 진찰해야 합니다. 진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나병으로 판명되면 그 사람이 누구라 할지라도 진영 밖으로 내보내서 격리시켜야 합니다. 만약 나병이 낫지 않으면 평생 진영 밖에서 격리된 채 비참하게 지내다가 죽습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으로 가족들과 격리되었습니다. 친구들과도 격리되며, 모든 소유와도 격리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로 칠 수도 있습니다. 6m 이내에 접근하면 돌로 쳐 죽여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병환자가 있는데 나병환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지나게 되었을 때 가까이 오면 나병환자는 입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성도는 죄로부터 격리되는 삶, 즉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병에 걸리면 반드시 진영 밖으로, 마을 밖으로 격리시켰습니다. 질병의 오염성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면 ‘내 믿음이 나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병은 우리가 아는 대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는 병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여자들은 다른 것은 아껴도 화장품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장품 회사에서 광고하는 것을 보면 ‘여자는 피부다’라고 합니다.
저는 요즘 텔레비전 방송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남자연예인들 방송에 나오는 것을 잘 보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서 보기에 흉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리하는 요리사들도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출연합니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방송인이든 얼굴은 예쁘게 꾸미는데 마음은 나병에 걸려서 썩어져가는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나병과 죄악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철저히 격리시켰듯이 성도들은 정상적인 생활에서 죄를 격리시켜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있어도 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지으면 가족과의 친근함과 화평의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부부 사이에도 죄를 범하면 서로 마음이 멀어지고 정이 멀어지고 사랑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끝내 죄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아 격리시킵니다.
죄가 없으면 함께 즐겁게 살고 행복하게 함께 지냅니다. 그러나 죄는 마음과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습니다. 형제와 형제를 갈라놓습니다.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습니다. 죄는 부정하기에 모든 것을 격리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6:7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을 것을 거두게 됩니다.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악하여서 나쁜 것을 심고도 좋을 것을 거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절대로 그런 법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쁜 것을 심어놓고 지금 밖으로 나타나지 않고 잠복하여 있어도 언젠가는 나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심으면 반드시 죄를 거둡니다. 죄를 심고서 영생을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육의 것을 심으면 육신에게서 사망을 거둡니다. 그러나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둡니다.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의 열매를 거둡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죄와 싸우고 경건하게 살며 믿음으로 살아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나병과 같은 무서운 죄악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게 격시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허물과 죄악을 주님 앞에 내놓고 십자가 보혈로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은 성결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나병의 치료자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 8:1-4절과 마가복음 1:40-45절과 누가복음 5:12-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치료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5:12-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격리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료하신 사건입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도움 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마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눅 4:34). 그때 예수님께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누가는 그가 온 몸에 나병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이 온 몸에 퍼져있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을 괴롭히는 여러 질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병은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나병은 사람의 몸, 모든 조직에 영향을 미칩니다. 피부를 상하게 하고, 피를 더럽게 만들고, 뼈를 썩게 만듭니다. 당시에는 나병에 대한 치료 방법이 없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질병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리면 그 사람은 마을에서 추방됨은 물론이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즉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인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율법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했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추방당했고, 가정에서도 떠나야 했습니다.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없고, 삶의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립니다.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수용소에서 그들을 돌보는 일을 했던 의사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나병환자는 수치와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상한 일이지만 나병환자들은 일종의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멸시했기에 어떤 나병환자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려고 했으며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했다.”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받는 미움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나병환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결과적으로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비참한 상태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산다고 말할 수 없는, 단지 움직이는 시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나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까요? 그만큼 이 나병환자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엎드립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12). 나병환자의 지금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겠습니까?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치기를 원하시느냐, 원하시지 않느냐 입니다. “나 같은 자를,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자를, 고치려고 하실까?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나를, 고치시려고 하실까?” 이 나병환자에게는 이것이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간절함으로 겸손히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이렇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낫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행동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의 모든 소망은, 그의 인생은 이제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지금 나병환자 앞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립니다. 이렇게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간청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실 마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거절했던 그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보란 듯이 나병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대셨습니다. 마치 “그 어떤 병도, 그 어떤 것도 내가 너를 품어주는 것을 막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병든 피부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고치는 것과 손대는 것, 둘 다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순서를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굳이 손을 대야 한다면, 고치고 나서 그다음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을까요? 나병환자의 온 몸에는 나병이 덮여있습니다. 잘못하면 옮을 수 있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쫓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저리가라고 소리치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간절한 요청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았을 때, 나병환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자신을 만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손길일까요? 나병환자에게 이 일이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마음이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 나를 붙잡아 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와서 손잡아주는 것만으로 말할 수 없는 힘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베푸는 마음도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려는 긍휼의 마음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의식적인 면에서 부정하게 됨은 물론, 실제로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을 대자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병환자의 더러움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신이 깨끗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하나님 뜻이면, 하나님이 하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바로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병환자가 그 즉시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4: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 그런데 오늘 적어도 한 명이 추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치유 받은 나병환자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5:1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이 명령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과, 둘째,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과, 셋째,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명령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행동입니다. 깨끗하게 된 것을 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것은 제사장의 확인과 희생 제사를 통해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는 율법이 정한 규례를 따라야 했고, 그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는 스스로 침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 절차에 따르기를 명하셨고,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깨끗하다고 선언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절차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도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확인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17:14절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도 이와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가 자세히 나옵니다. 제사장이 나병환자를 깨끗하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데는 7일 동안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 나병환자는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친 다음에, 나병 들렸던 사람은 깨끗함을 인정받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선언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의 선언은 그가 나음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병환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완전히 치료하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은 물론, 그 마을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였던 그에게 육체적인 회복은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적인 회복도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멀리,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눅 5:15절을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누가는 예수님의 영향력과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널리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 소문이 갈릴리 지역을 넘어서 유대와 예루살렘까지 퍼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6절을 보면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으려고 모여들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다니요? 지금 사람들을 고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바쁜 활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거나,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거나, 그들에게 소유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사역을 이루어가셨습니다.
누가복음 5:12-14절에서 반복해서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가 12, 13절은 동사로, 14절은 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깨끗하게, 깨끗함을 받으라, 깨끗하게 됨”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떤 병에서 나으면,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병에서 치료되었다, 치유되었다, 회복되었다, 나았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표현은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15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 병을 어떻게 하고자 예수님께 모였습니까?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4:40절에도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합니다. 병은 고치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나병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병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나병에 대해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왜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나병에 대해서 그냥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병에 대해서 가지는 기본적인 생각은 더러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나병은 더러움, 죄에 대한 결과로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에서 낫는 것은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나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걸렸느냐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나병을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회개시키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 죄인을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병환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나병이 온몸에 덮여있었습니다. 가까이하기 힘든 지독한 냄새와 쳐다보기 힘든 혐오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기꺼이 받아주셨습니다. 그 어떤 더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금 나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을,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지금까지 맛볼 수 없었던 참된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 죄인에게 다가가 그 넓은 품으로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단지 눈에 보이는 질병만을 고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망가진 나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고장 난 나의 마음을 고치시며, 죽은 나의 영혼을 다시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에게로 돌아가십시오. 그분께 겸손히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미 그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은혜와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나 조건을 두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을 가리며 사람을 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고,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자를 받아주십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러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세상에서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오직 나병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적인 나병이 깨끗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나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나병이란 감각이 무뎌지는 질병입니다.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떨어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아무 아픔도 없이 떨어져 나갑니다. 셋째, 흉측하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피부가 짓물이 납니다.
영적인 나병은 영적으로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나병은 바로 내가 짓는 죄입니다. 죄를 짓고 짓고 계속해서 지으면 영적인 감각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느끼지 목합니다. 하나님의 다가옴도 알 수 없습니다. 무감각해진 죽은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성도가 행여 영적으로 무감각해졌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나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느끼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복음전도, 공예배 참석 같은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사망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믿음에 있어서만큼은 나병에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