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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요한 4:23-24, 롬 12:1/주승중 목사(주안교회 담임목사)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시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이다”(칼 바르트)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주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일평생 수없이 많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보통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낮 예배, 저녁예배(찬양예배), 수요예배(수요기도회), 그리고 매일 새벽예배(새벽기도회) 그리고 구역예배와 금요철야 또는 심야예배(심야기도회)를 드린다. 물론 모두가 다 새벽예배와 구역예배 그리고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열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든 예배를 빼고도 최소한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예배 그리고 수요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평균적으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일에 최소 3회, 일년에 156회, 10년이면 1560회, 그리고 인생을 70이라고 할 때(시편 90:10) 무려 10,920회의 예배(80세이면 12,480회)를 드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얼마나 많은 예배의 숫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평생을 통하여 이토록 수많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볼 때에, 충격적인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미워하신다는 말씀까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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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이런 말씀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예배를 드려왔고, 지금도 드리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위의 말씀들에 의하면 우리가 이렇게 많은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예배를 싫어하시며, 기뻐 받으시지 않는 것일까?
문제는 또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수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거기에 아무런 감동도, 변화도, 치유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감격의 상실, 즉 무감각한 예배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케 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예배 현장에 이런 만남과 은혜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진정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바뀌어야 한다. 전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더 사랑하게 되며, 더 기뻐하게 되며, 더 감사하게 되며, 더 감격이 넘치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현장에는 이런 변화가, 이런 감격이, 이런 감사가, 이런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오히려 우리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이 여전히 싸우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
(강남의 한 교회에서의 경험 이야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시며,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저들의 삶에는 그 어떤 변화도, 치유도, 거듭남도 보이지를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난 예배, 즉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예배, 예배드리는 자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예배란 무엇인가?
1)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먼저 많은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해 정의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표현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침례교 예배학자인 지글러(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에서의 정성 어린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정성 어린 우리의 응답의 행위라는 것이다.
장로교 예배학자인 폴 훈(Paul Hoon)도 예배의 현장을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바로 예배라고 말한다. 즉 그는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결국 훈(Paul Hoon)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에 있다.
루터교 신학자 피터 부르너(Peter Brunner)는 앞서 언급한 훈(P. Hoon)과 비슷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책에서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Gottesdienst”(예배)라는 말을 가지고 예배의 이중성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회중의 봉사로서의 예배”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훈(P. Hoon)의 주장과 유사하며, 그는 구체적으로 “예배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인간인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성공회 예배학자인 에벨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역시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다른 예배들과는 달리 “분명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행동이며, 초자연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전주 한일장신대 전총장인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은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 주신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계시이기에 구속받은 인간들은 그분 앞에 나아와 감격적인 응답의 행위”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전통의 예배학자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예배에서 두 가지의 중심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요,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예배란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찾아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응답의 대열에 나선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고(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What God will do)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기쁨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혜가 주어지므로 죄인 된 인간들이 그 은총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참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그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축복을 은총으로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현존, 임재와 복주심의 은총에 대해 믿음을 응답하고 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하나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응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무리들을 찾고 계신다(“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응답의 행위”인 예배는 하나님께만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그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worship)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또다시 만나 주시고, 다시 한 번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감격과 감사가 넘쳐흐르게 되며, 그 결과(예배드린 결과) 우리는 전보다 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헛된 예배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예배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예배의 모습이 여러 가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는 많은 모습이 있지만 오늘 우리의 예배의 현장과 관련된 것 다섯 가지 만을 생각해보자.
1)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해 감격과 감사로 응답하지 않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신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있다. 거기에 보면 사마리아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남들이 상대해 주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 가셨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던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주신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행실이 깨끗하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요, 예수님을 만나던 순간에도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으나 그도 역시 남편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보아 생활이 난잡했던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그녀에게로 찾아가셨고, 결국 그녀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구원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응답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현장에서 이런 감격스러운 응답의 행위가 점점 더 결여되어 가고 있다. 십자가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감격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점점 더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죄인을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있다. 그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모습이다. 왜 우리의 그 수많은 예배에 감격이 없는가? 우리가 주 앞에 나아오는 근본적인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구원의 은총에 대한 아무런 감격과 감사가 없이 습관적으로 나오는 예배에 어떤 감격과 감사가 있겠는가?
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항상 받으려고만 하는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모른다. 즉 오늘 우리는 많은 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예배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 다가오면 “이번에는 무엇을 달라고 할까?”를 생각하면서 예배에 참석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많은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하나님을 향한 “청구서”를 가지고 나아온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아쉬운 사정을 한 아름씩 가지고 와서 몸부림치고 기도하지만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 멕아더(John MacArthur, Jr.)목사는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 함께 모이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모인 것이다...따라서 당신이 무엇인 가를 얻기 위해서, 예컨대 ‘축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면 그것은 동기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면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타는 듯한 열망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마음의 태도와 우리의 소유를 드리는 것까지 포함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림으로 무엇인가 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는 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리려 나오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혹시 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의 결과로 뒤따라 올 수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예배의 목적이 아니다. 왜 우리의 예배에 감격이 없는가? 그것은 우리 예배의 근본적인 방향성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의 예배는 과연 누구를 향해 방향 지어져 있는 예배인가? 하나님인가? 우리 자신인가?
3) 셋쨰로,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신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동기의 문제이다. 우리가 말라기서를 보면 거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여러 가지 죄를 고발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죄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잘못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다만 예배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을 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말라기의 고발에 의하면(1:6-7), 그들은 예배를 경멸이 여기고 있었다. 예배는 그들에게 있어서 판에 박힌 의식이었고, 하나의 습관일 뿐이었다. 그들의 예배에는 그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았고, 말라기 1:8-9절에 의하면 저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있어서도 최상의 것이 아닌, 병든 것, 눈먼 것 등 가장 최하의 것을 드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반문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 1:9) 다시 말하면 “너희가 이같이 하나님을 대우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대우한 것보다 더 낫게 너희를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말 1:10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으니 곧 우리의 잘못된 동기와 태도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의 태도(혹은 우리가 찬양 드리고 있는 태도)는 진정 어떠한가? 오늘 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매일, 그리고 주일마다 예배(찬양)드리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찬양할 때에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을 드리는 찬양을 드리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몸짓으로 찬양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 어떤 감사도 감격도 없이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물을 드릴 때에 우리는 진정 어떠한 마음의 동기로 드리고 있는가? 혹은 내가 이 만큼이나 바치니까! 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무엇인가를 더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배드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자세가 참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면 우리의 예배는 열납 될 수 없는 헛된 예배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4) 넷째로, 두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여러 번 책망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0)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을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긴 하였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적하시기를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네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고 하셨다. 그들은 의식과 형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안에 담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암 5:21-27, 호 6:4-7을 참고할 것). 거기에는 그들의 진실된 마음, 하나님 앞에 감격스런 마음으로 나아와 일치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없었다.
이렇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저 몸짓만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때가 바로 말라기 선지자 때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며 예물을 드리는 것을 매우 귀찮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배드리면서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말 1:13)라고 불평을 했다. 아마도 그들은 예배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에이 귀찮아! 또 예배를 해야 하니, 그래, 저 눈멀고 절름거리는 어린 양이나 없애버리자. 그 놈은 우리에게 필요 없으니까! 매번 이렇게 예배드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말 1:8, 13절 참조).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말 3:14)”라는 말까지 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필자의 새벽기도회 경험)
이런 예배를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는가?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정죄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 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마태 15:7-9)고 책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오늘 우리는 진정 하나님만을 향한 일치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모두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나뉘어진 마음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이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야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마음은 모든 종류의 생각으로 넘쳐흐른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행동, 우리의 필요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기보다는 예배드린 후의 약속이나, 집안 일, 또는 사업 걱정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왜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이 없는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5)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닫힌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신다.
시편 139:23-24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 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여기서 그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에 회개해야 할 것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려진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어렵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에는 나는 모르고 그냥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역들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깨우쳐 지는 것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상하고 뉘우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이사야 6장).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또한 정결케 함, 씻어냄, 정화, 고백함 등에 대해서도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란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러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며,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활활 타오르는 숯불을 우리 입술에 대셔서 우리를 정결케 해 주시고(사 6:6-7), 우리가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
왜 우리의 예배에 감격이 없는가?
왜 우리가 예배드림으로 인하여 변화되지 않는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4. 예배의 기본정신과 그 방향성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 예배의 형태가 많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이러한 모든 형태의 잘못된 예배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닌 자기 중심적인 예배, 즉 인간 중심적인 예배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받으려고 하는 예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 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모이는 것이다. 그 분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다시 말하면 예배의 기본정신은 “드림”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지 무엇인가를 그분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잘못 생각한다. 즉 예배를 마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엇인가를 받는 순간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드림에 있다.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 우리의 삶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찬양을 드리고, 우리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밝히려니와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찾아 주셨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셨고, 지금도 지키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영접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린다면, 우리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림에 맞추어져야 한다. 참 예배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소유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오늘 우리는 예배드리는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있는가?(롬 12:1-2) 당신은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척 하면서 내 자신의 유익만을 꾀하는 것은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라기 보다는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보다는 우리가 만족해야 한 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보다 아래로 놓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그분 자신의 영광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
5.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그것은 바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인가?
1) 신령(πνευματι: spirit)으로 드리는 예배
여기서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바울은 롬 1:9에 보면 “내 심령으로(with my spirit)으로 ‘섬기는’ (리트류오: 예배하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라고 하여 자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시편 103:1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의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본성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기만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상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전에 가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주일 아침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찬송을 부르고, 혹은 촛불을 밝히고, 혹은 성호를 긋고 통로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행위가 예배 행위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 자체가 진정한 예배일 수는 없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수단이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일 아침에 우리가 행하는 특정한 관행과 예배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 우리의 껍데기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예배라면, 습관적으로 앉아 있는 예배라면, 그것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혼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예배를 감정과 혼동하고 있다. 우리의 혼은 감정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예배는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더 나아가서 혼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때때로 감정이 고무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에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언제나 그렇지 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이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하는 현상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양을 부를 때는 감동하다가도, 말씀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서의 청년부 예배 경험)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과 흡사한 인간의 영이(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정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이루어진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인간이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이루어진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식이나 기도를 통해 드리는 것도 아니며, 어떤 예물을 가져와 바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썩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인 영이, 역시 썩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신령으로,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신령으로 예배드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들어 오셔야 한다. 고전 2:11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을 자극해 주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며, 우리의 영과 혼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감격에 넘칠 수 있도록 열어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며, 날마다 순간마다 교훈해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감격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고전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즉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깨달을 수 없고(Boston에서의 고등학교 후배의 이야기),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이렇게 먼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도록 도우시며,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방해물들을 밝히 드려내 주셔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깨끗이 물리친 마음으로 예배할 때 그것이 바로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2) 진리(αληθεια: truth)로 드리는 예배
이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의 두 번째 특성에 대해서 말해보자. 모든 예배는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예배란 진리 위에 기초된 응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란 무엇일까? 이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17:17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시편기자는 119편 142, 16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이렇게 우리가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즉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근거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려면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사역을 통한 한없는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놀라우신 하나님과 또 그의 사랑과 은혜를 완전히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 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응답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예배드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골 3:16-17)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저들 속에 풍성하게 거하여, 저들을 주장할 때 저들은 비로소 바른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바른 기도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며, 묵상을 하여야 한다. 주중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다가, 주일이 되서야 먼지 묻은 성경책을 털고 나아오는 것은 참된 예배의 자세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6. 삶의 방식으로서의 예배
이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 받으시는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자. 예배를 뜻하는 단어들 가운데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노동(ergon)과 백성(laos)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희랍에서 시나 국가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실시하는 공익사업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예배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단어는 성경에서 섬김, 봉사 등을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로마서 15장 27절(“...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전 13: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행전 24:14(“...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등에서 “섬기는”이라는 단어가 바로 “레이투르기아”이다. 결국 이 단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일을 행하여 세상을 향해 섬기는 것이 일종의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들이 하는 봉사 내지는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는 말로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가운데서 계속하여 행동으로 나타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생활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행사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하나의 의식이나 행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어떤 태도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든,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개인의 경건 시간만 잘 가지면 자신들의 삶이 온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 가운데서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생활 방식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절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한국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광주리 교인”들이 있다고 했다. 광주리가 물 속에 있을 때는 그 속에 물이 가득 차지만, 광주리를 물 속에서 올리면 광주리 속의 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새어 버린다. 이같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교회 안에 있을 때, 특별히 예배를 드릴 때에는 신앙이 충만한 것 같으나, 세상 속으로 나아가면 도무지 신앙을 찾아 볼 수 없는 교인들이 많다. 신앙과 생활,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출퇴근 시간 동안 도로 위에서, 전철 안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주부가 밥을 지으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학생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즉 교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 못하다면 그들은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 못한 것이다.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통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에서의 예배가 훌륭하고 경건하게 드린다 해도 그 예배는 열매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말이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전 생활을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배당 안의 예배와 세상 속에서의 생활이 일치될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주일 예배 시간의 축도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상당히 크다. 로마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미사(Mass)라는 용어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된 예배는 주일 예배 시간의 축도 후에 시작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미사라는 말은 예배의 마지막에 선언하는 “Ite Misa est”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예배는 이로써 마친다”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는 이것으로 마치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서 섬김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세상 속에서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다. 결국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해서 행동으로 나타나고 연장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기 위해서, 그의 몸을 바쳐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마가 10:45)고 말씀하셨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 세상에서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 4:34)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주님의 뜻을 이 세상 가운데서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은 그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럼으로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섬김과 순종의 삶은 결코 예배와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예배(worship)이라는 영어의 뜻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앵글로 색슨어인 “weorthscipe”에서 나온 말로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그 분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며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이다.(시편 29:2)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께만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행위인 예배는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한 봉사와 죽기까지의 섬김이 없다면(막 10:45, 요 4:34)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항상 이 세상의 생활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로 드려야 하고, 그리고 세상 속에서 섬기는 일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다.
이 삶의 방식으로서의 예배 문제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아마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믿음 따로, 삶 따로의 현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Yes & No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배드릴 때 하는 행동들(찬송을 부르거나 기도하는 것 등)은 물론 예배 행위이다. 그리고 삶속에서 하는 일반적인 행동들(접시 닦기, 잔디 깎기 등)도 우리의 마음에 따라 예배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하는 거룩한 행동들도 때로는 자동적으로 예배행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 행위를 한다고 자동적으로 그것이 예배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한다고 그것이 항상 예배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날에 있을 축구 경기나 야구 경기에 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한 순간 진실되게 기도하지만, 그 다음 순간 우리의 마음이 주식 시장의 시세에 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 때로는 성경봉독 시간에 우리의 눈은 성경책을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성경과 상관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배의 행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성스러운 행동을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가 세속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세속적인 일이 아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면서 설교하는 것보다 더 영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진실로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일상 업무(접시 닦기 등)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배와 관련된 행동(교회에서 찬송 부르기, 기도하기 등)에 참여하면서도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힘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삶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17세기의 수도사 로렌스 형제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했다. 그는 위대한 설교가나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수도원 부엌에서 냄비를 닦거나 단조로운 잡일을 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저는 부엌의 온갖 번잡함과 달그락거리는 소음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몇 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다른 일을 시킬 때에도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나님을 소유합니다. 제게는 프라이펜으로 계란을 뒤집는 일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일을 마치면 언제나 부엌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 때는 세상의 어떤 제왕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일이나 수도원 부엌에서 지푸라기 한 가닥 줍는 일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매일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1) 아무 생각없이 하는 활동들을 예배의 순간으로 바꾸라
우리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활동들을 예배의 순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실로 많은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때를 활용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오늘 아침에 면도할 때 무엇을 생각했는가?”
“오늘 아침에 화장을 할 때 무엇을 생각했는가?”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하면 그런 순간과 시간들은 낭비된 시간이다. 의미 없이 보낸 시간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시간들을 줄여야 하고, 그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할 수 있다. 로렌스 형제가 접시를 닦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상적인 일을 하는 시간에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예배를 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얼마만큼 이와 같이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많은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반드시 교회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 또한 거룩한 분위기에 젖을 필요도 없다. 단순히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결심만 있으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은행에 가는 경우 우리는 번호표를 받고 적어도 3분에서 5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기다리는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당신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함당하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나에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나의 가족을 위하여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오늘도 그들을 축복하옵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다리는 시간에 기도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읽은 성경 구절들을 생각하며 그 진리의 말씀을 묵상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한 귀중한 시간에 대해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교통 체증으로 차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빨간불 예배”를 드려본 적이 있는가? 빨간불 예배란 신호등이 파란 불에서 빨간불로 바뀔 때마다 차를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식료품 가게에서 줄을 서거나, 은행 창구에서 기다릴 때나, 미장원에서 머리를 다듬을 때에도 우리는 잡지책을 뒤질 것이 아니라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예배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예배는 로렌스 형제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과 있기 위해 항상 교회에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당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 부드럽고 겸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2) 규칙적인 활동을 하고 일하는 시간에도 예배하라.
우리는 또한 규칙적으로 활동하고 일하는 시간에도 예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준비할 때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 샤워, 면도, 화장...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유명한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매일 아침 옷을 입을 때 기도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똑같은 길을 운전할 때 차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하여 jogging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우리는 식사할 때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꼭 경건의 시간과 같이 어느 정도 긴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루 중 쪼개진 시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느헤미야의 “순간적인 기도”를 들어보았는가?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고하되...”(느 2:4-5)
이처럼 짧은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의 짧은 일과 중에서도 하나님께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될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3) 구체적인 삶의 모든 순간마다 예배하라
언젠가 한번은 영국에서 신학자들이 한 집에 모여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하심에 대하여 거창하게 토론을 하게 되었다. 고상하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어려운 말들로써 서로 말을 주고 받았지만, 도무지 의견이 합하여 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하다느니, 하나님이 침묵을 지킨다느니,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죽은 것이 아니냐 하는 등의 말까지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그 집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가 차를 끓여 들어오다가,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주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님들, 제가 들으니 선생님들께서는 ‘하나님은 침묵한다’, ‘하나님은 돌아가셨다’라는 말씀들을 하시는데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저의 경우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에는 하나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세수를 할 때에는 `하나님, 제 마음도 이처럼 깨끗하게 씻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청소를 하거나 설것이를 할 때에도 ‘하나님! 제가 이렇게 방을 깨끗이 하고, 그릇을 깨끗이 함과 같이, 이 세상도 모든 더러움과 악이 없어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드립니다. 밥을 지을 때는 ‘하나님! 저에게 육의 양식뿐만이 아니라, 영의 양식도 풍성하게 허락해 주세요’라고 기도드립니다. 선생님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내 주위에서, 내 삶의 가장 사소한 부분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물론 그녀의 기습적인 말에 그 자리에 모인 신학자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렇게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심을 느끼면서, 그분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바라보고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간 순간을 감사하면서, 기도하면서 그리고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운전을 하든지. 산보를 하든지, 밥을 짓든지, 전철을 타고 가든지...어떤 순간마다, 어떤 장소에서도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오직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 복종시키고(고후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런 행위야말로 주님의 주님 되심(Lordship)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주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Worship)이며, 그런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받으시는 영적예배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삶을 통한 영적인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때, 한국교회가 변하고, 이 민족과 사회가 변화되지 않겠는가? 한국의 국민의 25%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오늘 한국사회는 왜 이렇게 부정과 부패가 많은가? 네 명 중 한 명이 "절대로 안돼"라고 외치면 오늘 한국 사회에 이렇게 비리가 판칠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즉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영역 속에서 사역하고 섬기는 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라면,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어떻게 살고 행동하겠는가? 만일 내가 학생이라면 시험 때에 부정을 하겠는가? 학생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친다면 컨닝을 하겠는가? 내가 만일 공무원이라면 뇌물을 받겠는가? 내가 만일 학교의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편애하며 촌지를 받겠는가? 내가 만일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겠는가? 내가 만일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국민의 뜻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저렇게 폭력을 휘두르고, 정치적인 야합을 서슴없이 하겠는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통해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행동하고 있는 대로 계속 하겠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결국 우리는 지금 예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림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예배에 실패하면 결국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요,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7. 나가는 말(Gordon 목사 이야기)
오늘 우리는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고 있는가? 진정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깨닫고 신령과 진정으로 감격해 하면서 예배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는가? 이 삶으로서의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과 같다. 결국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 동안 수십 만 번 예배 드렸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너는 왜 나에게 한 번도 예배드리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여기 한 예배학자의 꿈이 있다. 우리들도 이런 꿈을 꾸어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도 그런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예배의 영광이 회복되고, 온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예배, 하나님의 거룩한 광채와 능력 앞에서 가슴 터질 듯한 감격과 희열을 맛보는 예배, 그리고 예배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가 이 나라 구석구석에 드려지는 그런 꿈을 한번 꾸어볼 수는 없을까? 그래서 매주일 드리는 예배마다 유배지 밧모 섬에서 드렸던 사도 요한의 영광스런 예배가 펼쳐짐으로 비록 고달픈 삶의 현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감격스러움을 맛보게 될 그런 예배부흥의 꿈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