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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교회의 3박사
중세편(Catholic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유일신앙 종교에 빠진 자들은 약간의 자폐증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자폐증이란 대인공포증이나 광장 공포증 같은 외부만남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부류와 만남만을 좋아하는 경우이다. 야간은 방콕적(오타구)인 성향이 있다. 이들은 외로움이 아니라 외골로서 고립적이다. 크리슈나므르티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교단을 폐쇄한 것도 각 지부장들이 자폐증을 지닌 자들 같은 이가 지부장이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들이 고립적이고 폐쇄적 단위를 설정하는 경우에 파라노이아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은 동일성에 근거한 한 가지 방법만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세상을 배치하려 들기 때문이다. 현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권력을 받쳐주는 판관으로서 근본주의 종교도 이런 양태인 것으로 보인다.
근본주의가 동일성을 기초 논리로 절대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게 되면 거의 파라노이아로 빠지는 것 같다. 그들이 맞다 틀리다는 잣대를 이미 가지고 모든 것을 잴려고 든다. 이 편집증자들은 건전하게 확장하거나 연대할 때 사랑은 공적인데, 자신들의 이익에 위배되는 경우에 사적이 된다. 사적인 상황과 사건들도 그들의 파라노이아 속에서는 공적으로 비친다는 것이 문제다. 요강공주가 그러하지 않는가? (50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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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교회의 3박사 506-529
서로마 교회에서 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넷 있었다. 성 암브로시우스(340-397), 성 제롬(347-420),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그레고리오 대교황(Grégoire Ier, 540경-604, 재위 590-604)이다. (506)
이들이 죽은 후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의 주인공은 오직 야만인들과 아리우스파의 이단들이었다. .. 이들에 견줄만한 인물이 다시 배출하게 된 것은 거의 1000년을 기다린 후였다. .. 그리고 종교개혁이 있은 후에도 루터와 칼뱅의 교리의 주요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었다.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준 사람들 중에서 이 세 명을 능가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506-507)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신학 논쟁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와 얀센파(Jansenists)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고 정통파에 속하는 가톨릭에서는 그를 반대하였다. (507) [로만가톨릭이 아퀴나스 주의에 빠져서 주지주의 형식으로 흘렀다. 벩송도 이를 비판하였으나, 로만가톨릭은 세계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결과가 된 주지주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가톨릭 자체가 인도주의가 아니라 배타적 인본주의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50OKF)]
4세기말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으며,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는 이곳의 주교였다. (507). [아리우스파 상황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가톨릭을 미는 밀라노 주교였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2-337) - 승리의 여신상 제단 제거
율리아누스(Julien, Flavius Claudius Julianus, 331/332 -363) - 승리 여신상 복위
그라티아누스(Gratian) - 여신상 제거
로마시 총사령관 심마쿠스(Sigmmachus) - 여신상 복위
발렌티니아누스2세/발렌티니엔 2세(Valentinien II) - (여신상 복위 청원 들어옴) 509
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 복위 반대
참주 유게니우스(Eugenius) 참주 - 여신상 다시 세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éodose Ier 재위 379-395) 다시 폐지
황후 유스티나는 아리우스파였으므로, 밀라노의 한 교회를 아리우스파에 양도하도록 요구해 왔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국민들은 암브로시우스의 편을 들고 떼를 지어 그 교회에 몰려왔다. 아리우스파인 고트족의 군사들이 교회를 점령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백성들과 충돌을 일으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자매에게 다음과 같은 대담한 편지를 보내었다. / “귀족들과 장군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교회를 즉시 양도할 것을 독촉하였다. .. 내 소유물, 즉 내 토지나 내돈, 그 밖의 무엇이든지 나 개인에 속하는 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이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신에게 속하는 것은 결코 황제의 권한 안에 있지 않다. ... 교회를 점령하기 위해 무장한 군대가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실로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백성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동안에 로마 전체를 해칠 정도로 큰 살육이 벌어질 터이니 말이다. 나는 기도하였다. 이 큰 도성이 파멸된 연후에 내가 살아남지 않도록, 그리고 이탈리아 전체가 파멸되고 나서 살아남지 않도록.” (511)
“이들[백성들]을 흥분하게 하지 않는 것은 나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을 조용하게 하는 것은 신의 손에 달려있다.” / .. 군인들은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력 쓰기를 거절하였으므로, 황제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국가가 교회에 양보해야 하는 문제가 있음을 실증해 보여 주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의 새로운 원칙이 확립되고, 이 원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 (512) [왕권의 군대가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칙, 나중에 피히테가 황제의 군대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이 원칙을 깨고 군대가 학교에 들어갔다.]
다음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Théodose Ier 재위 379-395)와 충돌이 일어났다. 유대교 교회 하나가 불탔는데, 이것은 그 지방 주교의 선동으로 일어났다는 보고가 동방주재 지사(Count)로부터 들어왔다. (512) [암브로시우스는 불태운 행위에 대해 언급 없이 불신자 유대인에 대해, 관용도 배교이고 교회[시나고게]지어주는 것도 배교행위이라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기독교의 악랄한 방식이 전승되고 있다. 이승만이 제주 4.3에서 서북청년단들의 행위 정당화, 전두환이 광주봉기에 진압군의 발포행위, 세월호의 유족에게 어벙이 연합과 일베충들의 폭식행위.. 그들의 잘못에 대한 사죄없이 반대자의 행위만을 (종북으로) 비난하는 행위 도 암브로시우스와 마찬가지이다. - 예수의 말을 빌면 자기 눈에 대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티끌을 나무라는 식이다. (50OLD]
성 암브로시우스의 견해는 유대교의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나중에 권력을 잡고 나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촉진하기 시작하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게 될 것인가를 짐작케 하는 하나의 예이다. (513)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있는 동안에 데살로니카에서 폭동[봉기]이 일어나 주둔군 대장이 학살당한 일이 있다. ... 무차별한 학살에서 자그마치 7,000명이 살해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미리 제지시키려 노력했다. ..//.. 다윗왕은 계속하여 죄를 범했지만 번번히 회개하였다. (513)
[평가] 그는 학자로서 제롬보다 못 하며, 철학자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지 못하지만, 정치가로서는 특히 능력과 용기로서 교권을 확립한 사람으로서는 일인자에 속할 것이다. (514)
제롬(Jérôme, Hieronymus Stridonensis, 347(5)-420)은 주로 불가타 성경(Vulgate)을 낸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이 불가타는 오늘날까지 가톨릭교회에서 공인된 성경이 되어 있다. 이때까지 서방교회의 구약성경은 주로 70인 역 성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514)
제롬은 345년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멀지 않은 스트리돈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 골(Gaul)지방을 여행한 후에 아퀼레이아(Aquileia)에 정주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그 후 5년 동안은 시리아의 광야에서 은둔자의 생활을 하였다. / “광야에서 보낸 그의 생활은 괴로운 고행자의 그것이었다. 눈물과 신음과 때때로 체험하는 영적인 무아경과 로마의 생활에 대한 추억에서 오는 유혹과 투쟁이 그의 생활이었다. 그는 때로는 조그마한 골방[토굴]에서, 때로는 동굴 속에서, 하루하루의 빵을 손수 벌면서 베옷을 걸치고 살았다.” (515)
이 시기가 지나서 콘스탄티노플로 여행을 가고, 로마에서 3년 동안 살면서 다마수스(Damase Ier, 재위366–383)교황의 친구가 되고 동시에 고문이 되었다. 그가 성경을 번역하게 된 것은 다마수스 교황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와는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성 바울이 말한 베르드의 다소 문제되는 행위에 대하여 언쟁을 하였다. / 그는 오리게네스에 관하여 논쟁하던 끝에 자기 친구 루피누스와 헤어지게 되었으며, 펠라기우스와는 열렬히 격론을 벌여 그의 수도원이 펠라기우스파의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할 정도였다. (515)
다음 교황과 다투었고 ... 로마를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서(384) 죽을 때(420)까지 살았다. / 그의 여자 개종자들 중에 두 사람이 특히 유명하다. 그것은 과부인 파울라와 그녀의 딸 유스토기움이다. 그들은 그의 베들레헴까지 순례에 동행하였다. (516)
그는 플라우투스(Plautus)를 읽었다.
제롬의 편지는 어느 누구의 편지에서보다도 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396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서간(letter」, 60) / “ 나는 우리 세대가 당할 큰 환난을 생각할 때,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로마인의 피는 20여년 동안에 콘스탄티노플과 유리아누스 앨프스 사이에서 매일 같이 흘러내렸습니다. 스키티아, 트라키아(Tjrace), 마케도니아, 타키아, 테살리아, 아카이아, 에피루스, 달람티아, 파노니아 등등 이 모든 지역이 침략과 노략질과 강탈당하였습니다. 고트족, 사르마티아인, 쿠와디족, 알란족, 훈족(Huns, 흉노 匈奴), 반달족, 마치족들의 침입을 받아온 것입니다. .. 로마세계는 지금 몰락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머리를 높이 쳐들고 숙일 줄을 모릅니다. 코린트인들이나 아테네인들, 스파르타인들 아르카디아인들, 또흔 야만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리스의 어느 도시의 시민들에게서건 용기를 어디 찾아볼 수 있습니까? 나오는 오직 몇몇 도시만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한때에는 큰 나라들의 수도였습니다.” (518)
그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가능한 정책을 생각해 내거나, 국가의 재정에 관한 제도 중에서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거나, 야만인들의 용병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것은 위험하다던가 하는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심한 흔적이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암브로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 이와 같이 당대에 가장 유능하고 훌륭한 인물들이 세속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처럼 완전히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제국이 파멸에 직면하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519)
이 장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단진 인간됨만을 말하고자한다. ... /그는 354년에 태어났다. 제롬보다 9년 후의 일이며 암브로시우스보다 14년 후의 일이다. (520)
그는 한때 마니교도였다가, 가톨릭교도가 되어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카르타고에서 멀지 않은 히포(Hippo)의 주교가 되었다(396년경). 그 후 430년에 그가 죽기까지 이곳 주교로 있었다.
그의 고백록(Confessions) ... 이 책을 모방해 쓴 유명한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루소(Rousseau, 1712-1778)와 톨스토이(Tolstoï 1828-1910)의 참회록[고백록]이 유명하다. (520) - [윤구병은 중학교 시절 출가하려고 하였는데, 프란체스코와 톨스토이의 가상대화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집을 나갔다고 한다.]
고백록에 ... 같은 나이의 친구들과 이웃집 배나무에서 배를 훔친 모양이다. 그것도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자기 집에 더 좋은 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그는 일생동안 무척 악한 일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이 행위는 악 자체를 즐겨 행하는 악이었다. 그 일이 그를 괴롭힌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있다. (521)
간디의 자서전에도 이와 비슷한 글이 쓰여 있다. (521) [간디가 동네 애들과 언덕 너머 고기 구워 먹으로 간 이야기인가? ...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 루소에게는 주인 딸의 머리핀 없어진 것을 하녀에게 몰아간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민족 대신에] 교회를[신앙자를] 선민(選民)의 위치로 바꿔 놓았다. ... 죄의식[문제] ... 교회는 영적인 본체로서 죄를 범할 수 없지만, 개개의 죄인은 교회와 연결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죄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죄는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자기존중(self importance)과 관련되어 있다. (522) [자기존중 이기심을 의미한다. 루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여, (자연, 섭리에 따라)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 신앙이 이기심인지 이타심인지 간에, 들뢰즈가 이중집게의 의미를 지닌다. / 그런데 온자아와 개별자아 사이의 연속은 자연(숙명)을 따르는 것이다. ]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은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교회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영혼에 관한 것이다. 나중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양자 중에서 전자만을 강조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에서는 후자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똑 같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양자 사이에 아무런 조화도 느끼지 않고 있다. ... 교회는 영혼과 신 사이의 중계자가 된다. (522) [불교의 불법승(佛法僧)에 비하면 기독교 신학이 부분적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불법승과 유사함이 있다. 불은 진리이고 법은 욕망의 추구과정이며, 퀴니코스는 승(僧)인 셈이다. 플라톤은 불(佛)을 가정하여 먼저 상층에 두고 법이라는 도구(수레)를 타고 론을 통해서 나아갔다면, 퀴니코스는 걸승이라 인민들 안에서 추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승(僧)은 관념론자가 아니라 실천자이며, 재가 불자도 승(僧)의 범주이다. 그래서 유마경이 있는 것이다. (50OLA)]
배(梨, 이)[배교(背敎) 또는 숭배(崇拜)]에 대해서는 ..(523) <- 배(拜) - [ㅋㅋ 이화여대(梨花女大) ... 배화여대 ?? ]
아우구스티누스 .. 교육[론] / “학습은 어려운 굴레를 씌우는 것보다 자유로운 호기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 굴레만이 주의 유법에 의해 자유의 유동을 붙듭니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의 율법만이 스스로의 채찍으로부터 순교자의 고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해 필요한 쓴 맛을 혼합해 주는 효과를 가져 오며, 당신에게서 떠나게 하는 저 악한 안락에서 우리를 건져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523) - [교육에서 채찍의 필요성(도그마 때문일 것이고) ... 루소는 달리 생각할 것이다.] [라틴문화권이니 라틴은 당연히 잘 했으리라 러셀의 표현으로 그가 희랍어는 잘 몰랐다고 한다. 그가 아테네 유학을 갔을 정도면 희랍어도 좀 됐을 것 같은데 ... 알렉산드리아를 잘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
“나는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빛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습니까? 내 육신의 나이가 16세에 이르렀을 때, 육욕의 광증이 나를 지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그 특권을 인간 사이에서 누리게 하지만 당신의 율법은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육욕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버렸습니다. 이때에 나는 당신의 빛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고백록, 2권, 2장. (524) - [15세를 기준으로 삶의 전환기인 것은 분명하다. 여성은 좀 빠르고 남성은 좀 늦을 수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이지만 숙명적이다. 공자는 15세를 기준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여성의 강박과 분열증 13세 경우 월경과 연관이 크다. / 공자(孔子)의 경우, 공자(孔子) 열다섯에 지학(志學), 서른에 이립(而立), 마흔에 불혹(不惑), 쉰에 지명(知命, 知天命), 예순에 이순(耳順), 일흔에 종심(從心: 從心所欲 不踰矩)를 생각해보라. ]
그는 16세가 되었을 때 ...“나는 아직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도사린 욕구를 억제하고 있는 나 지신을 미워하였습니다. ... 나로서는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은 판이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때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우애의 샘물을 음욕의 우물로 더럽혔으며, 우애의 빛을 육욕의 지옥으로 어둡게 하였습니다.” 고백록, 3권, 1장. (524) [애인으로부터 아들하나 있는데 헤어지고, 약혼을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2년을 기다리는 동안에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하였다. 이 양심의 가책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마쳤다고 고백한다. / 이런 인간이 나중에 또 하나 나오니 그가 키에르케골이다. - 희랍인 조르바가 보면 이 두 종교인은 똥작대기로 흠씬 두둘겨 맞았을 것이다. (50OLC)]
19세(열아홉)때 그는 수사학(修辭學)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고, 키케로를 통하여 철학에 관심을 갖는다. 성경을 읽었으나 키케로에 있어서와 같은 권위를 찾지 못하였다. 그가 마니교를 믿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 한동안 점성술에 몰두하였으나... 그는 라틴어로 읽을 수 있는 철학 서적을 모조리 읽었다. (525) [수사학부터 : 연설과 선전(선동)의 기초인데 말이다.]
“나는 이것을 그들[천문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비교해 보았다. 마니케우스 같은 문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썼다. 결국 그[마니케우스]가 설명하는 춘분이나 추분, 일식과 월식, 속세와 철학에서 내가 배운 이와 같은 종류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믿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주장은 계산에서 얻는 것과 맞지 않고, 내가 관찰한 것과도 부합되지 않을뿐더러 오리혀 정반대였다.” 고백록, 5권, 3장. (526)
그는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파우스투스라는 마니교의 주교를 찾아갔다. 그는 이 종파 가운데서 가장 학식이 많고 고명한 인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나자 우선 그가 교양학과에 있어서 전혀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만 일반문법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툴티의 연설집의 일부와 세네카(Sénèque, 전4-후65)가 쓴 몇 권, 시인들의 몇몇 작품, 그의 종파의 서적 중에 라틴어로된 책 몇 권을 읽고 일상대화에 익숙하여 일종의 웅변술을 채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더 유쾌하고 더 미혹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읽는 것을 재치있게 이용하고 있었으며, 화술에 있어서 일종의 선천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고백록, 5권, 6장. (526-527)
그는 아카데미 학파의 주장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는 인간은 일단 모든 것을 다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백록, 5권, 17장) .. 이들도 마니교와 마찬가지로 .. / “죄를 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른 어떤 본성(나는 이것을 알 수 없다)이 우리 안에서 죄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527)
그는 약 1년 동안 로마에 있다가 [로마] 총사령관 심마쿠스[아리우스파]에 의해 밀라노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수사학의 교사로서 초빙하였으므로 이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아타나시우스파]와 알게 되었다. (528)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리를 갖지 못한 이 철학자들[아카데미의 회의학파]에게, 영혼을 맡기기를 거부하였다.” (고백록, 5권, 14장). (528)
고백록에는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고백록, 7권, 9장] ..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교리와 비교가 있다. “플라톤주의자들의 어떤 책을 주셨다. 그 책도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목적은 같지만 여러 가지 이론으로 이를 지지하고 있으는 것을 보았으나, 아래와 같은 말을 읽지 못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느님이시라. 신의 창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은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들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니라. 또한 사람의 영혼이 그 빛에 대하여 증거했으되, 그 자체는 빛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 즉 하느님의 말씀이 참된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치는 참빛이니라.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올 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으나,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니라.’ 나는 이런 말씀을 거기서 읽지 못하였다.” (528-529) - [별로 재미없는 대목이다. 럿셀도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 철학에서 로고스, 체화, 구원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오르페우스도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플로티노스도 잘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 뒤에 나오지만 플로티노스를 플라톤주의자로 여겼던 것 같다. - 50OLC) / 코스모고니와 코스몰로지는 다르다. 전자인 우주 발생론은 통시적 관점이며 동적이고, 우주론은 공시적 관점으로 정(停止)적이다. 어느 날 말씀으로 만들어 진 것은 마치 이와 같다. - 수 억겁이 지나 라고 말할 때 수억을 로그함수로 쓰면 몇 번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말랑 제니(malin génie)가 수억겁의 속도로 바뀌어도 지구공전의 공식은 변함이 없다. .. (50OLA)]
그는 심한 내적 투쟁 끝에 개심(改心)하였다(386, 서른둘). [공자(孔子)가 서른에 선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박사학위 논문 낼 때 쯤 되다.] 그는 교수직도 애인도 신부도 다 버리고, 은퇴하여 한때 명상에 잠기다가 성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388년(서른넷)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 여러 이단들, 즉 도나티스트(Donatist),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에 대해 논쟁적인 글을 쓰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529) (50OKLA)
제4장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 530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로 신학 문제에 대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의 논재 중에는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있었다. ... 가치가 인정되는 것만 논하려고 한다. .. /첫째 그의 순수철학 특히 그의 시간론. / 둘째 신국론에 나타난 그의 역사 철학. 셋째 펠라기우스파에 반대하여 제창한 그의 구원론. (530)
1. 순수철학 530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체로 순수철학(Pure Philosophy)에 몰두한 일은 없다. .. 그는 처음으로 순수 사변적인 견해와 성경을 일치시키도록 한 사람으로 그 이전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가령 오리게네스(Origen, 185?-254?)와 같은 사람도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는 서로 병립되며 결코 융합되어 있지 않았다. (530)
가장 순수한 철학적 작품은 고백록의 11권이다. (530-531)
만일 그의 해명을 이해하려면,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의] 신은 조물주라기보다 기술자요[플라톤 티마이오스], 건축가라 하겠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정통적인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어떤 질료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신은 오직 질서와 정돈(arrangement, 배치)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531)
무에서 창조는 불가능하다는 그리스인들의 견해는 기독교 시대에도 때때로 반복되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것은 범신론(汎神論)으로 이끌려 갔다. 범신론에서도 신과 계시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즉 신의 분신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스피노자에 있어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누구나 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고 있다. (531) [엇나간 점이 있다. 자연주의자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 자연은 자기에 의해 자기 생성을 지속하고 있다. 그 두께는 지층에 실재로 남아있다. (50OLA)]
신은 영원한 존재이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신에게는 이전[어제]이나 이후[아제]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이제]만이 있을 따름이다. 신의 영원성은 시간 관계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시간이 동시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조보다 더 앞서지 않았다. (532)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 .. “나는 아무도 나에게 이에 대하여 묻지 않을 때, 나는 알고 있지만, 나에게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모르게 된다.” (532) [마치 영혼의 생성론을 따져서 물으면, 모르게 된다. 그게 고르기아스의 논법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의 고민이기도 한다. 이뭣꼬?]
다시 말하면 ‘과거’는 기억과 동일하게 볼 수 있으며,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 할 수 있으며, 기억이나 기대는 현재 사실들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사물들의 현재, 현재 사물들의 현재, 미래 사물들의 현재” ... “과거 사물들의 현재는 기억[추억], 현재 사물들의 현재는 목격하는 것이며, 미래 사물들의 현재는 기대이다”(고백록 11권, 20장) (532)
“나의 영혼은 이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안타까워합니다.” .. “오 주여, 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아직도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시간은 기대하고 생각하며 기억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앞의 책 28장),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도 있을 수 없고(앞의 책 30장) (533)
이 학설에서 시간이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보는 점에 대하여 나[러셀]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 / 시간이 사유의 한 국면에 지니지 않는다는 주장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이후로 점점 발달되어 온 주관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라고 하겠다. (533) [러셀은 칸트의 인식론(과학론)의 시간을 좋게 보고, 자연의 시간론은 주관론으로 거꾸로 폄하하는 것 같다. 게다가 풀라톤식으로 영원이 먼저이고 시간이 나중이라는 견해가 철학적으로 먼저인 것으로 여기는 것도 고르기아스-소크라테스 전통의 내재성과 실재성을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며, 추억이 아닌 기억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의 실재성은 의학에서도 유전학 또는 면역학에서, 게다가 이제는 미토콘드리아와 소포체 등의 연구에서도 논의 중이다. (50OLC)]
“너는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아느냐?”, “나는 그것을 안다.”, “너는 자신이 단일하다고 생각하느냐 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모른다.”, “너 자신이 움직였다는 것을 아느냐?” “너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나는 안다.” / 이것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cogito)”를 포함하고 있을뿐더러, 가상디의 “나는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에 대해서도 해답을 준다. 따라서 아우구스트누스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도 높은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533-534)
2. 신국론 534
410년에 로마가 고트족의 침략을 당하자, 이교도들은 이 재난의 원인을 고대의 신들을 저버린 데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로마가 제우스를 경배하고 있는 동안에 강력하였지만, 지금은 황제들이 제우스를 멀리하기 때문에 ... 이러한 이교도의 주장에 .. 신국론은(412-427년 사이에 씀) 성아우구스티누스의 답변이었다. (534)
재난이 기독교 때문에 일어났다고 비난하는 이교도들도 침입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떼를 지어 교회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지고 있다. 고트족도 기독교인들이라, 교회는 소중히 여겨, 그리고 피하는 자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535)
세계에는 두 개의 도성 – 세상의 도성과 하늘의 도성 – 이 병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중에는 예정한 자와 버림받은 자는 구별될 것이다. 이 삶에서 외관상 원수로 보이더라도 – 누가 최후의 택함을 받은 자 가운데 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536)
로마는 사비네(Sabine) 부녀들을 강탈한 후로 언제나 사악하였다. 그는 로마의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악을 드러내는데 많은 장(章)을 소비하고 있다. 이 국가가 기독교화되기 전에는 재잔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골(Gaul)족에게 받은 고난과 내란으로 당한 환란은 고트족에게 당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심했던 것이다. (537)
점성술은 고약할뿐더러 허위에 가득 차 있다. 이 허위성은 가령, 쌍둥이는 같은 천체의 위치 아래서 태어나지만, 그 운명이 다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플라톤에 대하여 공감을 하고 있다. 그는 플라톤을 모든 학자들의 우위에 놓는다. ... “최근에 생존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보았다.” (538)
제11권에는 신국의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국이란 택함을 받은 자들의 사회이다. 신에 대한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539)
세계의 연수는 6,0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는 어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기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보상하기 위해 단 한번 죽으셨다.”(「로마서」 6:10, 「히브리서」 7:27) (539)
포르피리오스(Porphyry)가 천국에서는 성인들(Saints)이 신체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육체보다 더 좋은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 (540)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와 그 제자 포르피리오스의 책들을 읽지 않은 것 같고, 지난 시대의 이야기 정도로 듣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50OLC)] .
아담의 범죄는 전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은
므두셀라(Methuselah)의 죽음에 대한 논의 ... 모드셀라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14년 동안이나 더 산 것으로 되어 있다. (541) [이 ‘중동의 전설 따라 삼천리’는 이야기의 수집이다. 물론 수집자의 의도가 있지만, 사건들 사이에 부조리와 대립 등이 많다. / 환제국이 천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
부활(復活)에 두 가지가 있다. 죽을 때의 영혼의 부활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심판 때의 육신의 부활이다. (543)
이상에서 요약한 것으로는 이 책의 중요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해서였다. 거기에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어야만 신국을 이를[룰]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중세 교황권이 점차 고개를 드는 동안, .. 서로마 교회의 그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 동로마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강했으므로, 이러한 전개 과정은 찾아 볼 수 없다. (544-545)
종교개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의 결의를 다시 강조하였지만, 그의 신권정치에 대한 주장은 포기하여 에라스투스(Erastus)파로 되었다. 이것은 가톨릭과의 투쟁이라는 절박한 사정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은 거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재침례파, 제5왕국파(Fifth Monarchy Men), 퀘이커(Quakers)교도들은 다 그의 교리의 일부분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비중에 대해서는 보다 덜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설(豫定說)을 고집하고, 구원을 위한 세례의 필요성을 고집하였다. 이 두 교리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후자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만은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었다. (545)
유대의 역사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서 어느 시대에나 압박을 받아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유형을 기독교에 적용시키고, 맑스는 사회주의에 적용시켰다. .. 여호와=변증법적 유물론, 메시아=맑스, 선민=프롤레타리아, 교회=공산당, 재림=교회, 지옥=자본가들의 형벌, 천년왕국=공산주의 세계 .. (546)
3. 펠라기우스 논쟁 547
펠라기우스(Pelagius)의 본 이름은 모르간(Morgan)으로 그리스어로 ‘펠라기우스’가 의미하는 것과 같은 ‘바다사람’이란 뜻이다. .. 그는 자유의지를 믿고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의심하여, 인간이 덕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올바로 행하고, 그 행위가 정통적일 경우에는 그 덕행의 보수로서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547)
펠라기우스가 정죄 된 후에도 .. 완전히 승리를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특히 529년 이르러 비로소 오렌지 공의회(the Council of Orange)에서 유사 펠라기우스파가 이단이라고 정죄되었다. (547)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죄를 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들은 타락하게 되고, 그것은 모든 후손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아무도 자기 힘으로 죄에서 떠날 수 없고, 오직 신의 은총만이 인간을 덕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은 누구나, 어린이들까지도 지옥에 떨어져 끝없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547-548)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나머지 사람은 멸망당하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 멸망은 신의 의로움을 나타낼 뿐이며, 구원은 그 자비를 나타낼 따름이다. 어느 것이나 전부 그의 선함을 보여주고 있다. / 이 잔인한 교리는 칼뱅(Calvin, 1509-1564)에 의해 부활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교리를 주장하지 않게 되었지만, 성 바울의 서신에서 그러한 주장을 찾아 볼 수 있다. (548)
그러나 죄에 대한 확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갓 태어난 유아까지도 사탄의 지체(肢體)라고 믿게 하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일어난 가장 잔인한 일들의 대부분이 그 기원을 찾아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보편적인 죄에 대한 음울한 의식에 이르게 된다. (548)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실제로 괴롭힌 한 가지 지적인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을 창조한 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를 괴롭힌 문제는 이러하다. 만일 원죄가 성 바울의 가르침대로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라면, 영혼도 육체와 더불어 부모로부터 번식되어 왔어야 할 것이다. 죄는 영혼에 속한 것이며,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교리로 그는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549)
교회가 개종한 야만인들에게 전해 준 것이 이러한 편견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 뒤에 오는 세대가 그 잔인성과 미신에 있어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심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못된다. (549) [교회의 잔인성은 삼위격의 성립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고, 독단적 교리를 상위에 두고 교회와 그것을 믿는 성직자들의 오만과 편견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을 잔인하게 다루었던가...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조차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제일철학)의 이해 없이(플로티노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서) 권력과 권위에 의존한 억압을 토대로 종교만을 정립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오류가 있더라도 믿는다”고 한다. 이 말은 무지의 오류를 범하는 말이긴 하지만, 관례의 존중이라면서 요강공주 옹호자에게는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을 것 같다. (50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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