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모시짜기 문정옥
살을 째고 피를 매어 오뉴월 짧은 밤을
왈캉달캉 베를 짜서 논을 살까 밭을 살까
베를 걸어 한필 짜면 닭이 울고 날이 샌다
피를 매어 짠 모신데 어찌 이리 곱고 희냐
베틀에서 허리 펴니 이 내 몸은 백발이라
- 베틀노래 중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모시, 곧 저포(苧布)는 우리나라 상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모시풀, 곧 저마(苧麻)의 섬유를 가지고 제직(製織)하여 옷감으로 사용하여 온 동시에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제직기술은 고도로 발달하여 일찍이 40새(升, 피륙의 날을 새는 단위) 이상의 모시를 생산해냈는데 정교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중국만 하더라도 30승포는 고귀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길복(吉福)으로 15승포로 사용하여 왔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모시(紵苧)는 마(麻)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草本)으로 삼(麻)을 가늘게 하여 만든 베를 전(絟)이라 하고 전이 가늘고 하얀 것을 저(苧)라 한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모시는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삼베와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모시베(苧布)라 하고 날이 아주 가늘게 짜진 모시베를 세모시베(細苧布)라 한다. 모시는 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직물로 사용되어 의류(衣類)로 발전되어 왔다. 또한,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등의 타 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모시 생산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한산지역의 모시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신라시대 한 노인이 건지산에서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여 이를 이 지방에서 재배하여 모시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산모시의 명성은 이미 삼한시대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를 차지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인근의 변한과 진한 지역에서도 이미 광폭세포를 직조하였고 변한포 등이 진상품으로 강대국에 바쳐졌던 기록이 있으므로 예나 지금이나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모시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유리한 자연 환경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던 한산지역이 인근 지역과 함께 질 좋은 모시를 생산하였음은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 모시의 용도는 여름용의 소재로써 모든 종류의 옷에 사용되며 특히 외출용 겉옷과 의례용 포류, 그리고 여자들의 속바지류 등에 주로 많이 보인다. 또한 상복(喪服)과 군복(軍服)에도 사용되었다. 모시옷은 특히 하얗게 표백되고 잘 손질된 정갈한 옷 맵시 때문에 사대부가의 기품을 돋보이게 하는 고급의료이지만 이같이 표백한 흰색의 모시 외에도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들여서 입기도 하였는데 주로 쪽염과 치자염 그리고 홍화 염색을 많이 하였다.
근래에는 염소표백을 하여 흰 모시를 만들기도 하며, 섬유공업의 발달과 함께 수요가 줄어들어서 모시짜기 기술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 6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택견, 줄타기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모시. 삼국시대 문헌에도 등장하며 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홍색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모시 잘 짜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문정옥 선생
문정옥 선생은 1928년 9월 9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 교율마을 302번지에서 부친 문팔봉 선생과 모친 신순철 여사의 5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형제였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 연유로 큰아버지가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였는데 아이들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여자아이들은 가르치면 못 쓴다’는 어른들의 편견 때문에 손아래 남동생들은 학교를 다녔으나 선생은 집에서 가사 일을 도왔다. 당시 화양면 교율마을에서는 모시를 많이 짰다. 문씨 집안에서는 선생의 모친만이 모시를 짰는데, 솜씨가 좋아 보름새 등 고운 세모시를 많이 짰다. 힘든 모시 짜기를 일부러 시키지 않았지만 선생은 모친의 어깨너머로 모시 째기, 삼기 등을 스스로 배웠다. 타고난 눈썰미 덕분에 또래들보다 수도 잘 놓고, 골무도 잘 만들어서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칭찬을 듣곤 했는데, 모시 자기 역시 그러했다. 선생이 모친의 가르침대로 모시를 짜서 처음으로 1필을 완성한 것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21세 되던 해(1948년)에 한산면에 살던 김기태 선생과 혼인하였다.
혼례를 치른 뒤에는 남편인 김기태 선생이 베틀을 짜주어 다시 모시 짜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평생 모시를 짜왔던 선생이 잠시 손에서 모시를 놓았던 적은 한국전쟁 때뿐이었다. 시댁은 가난했던 까닭에 소유한 밭이 없어 모시를 별도로 재배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시장에서 태모시를 사다 짜거나 삯모시를 짰다. 당시, 무엇보다도 모시를 잘 짜면 며느리를 잘 얻었다고 하였고, 모시를 못 짜면 며느리를 못 들였다고 했을 정도로 모시를 잘 짜는 며느리들이 인기였다. 그런 까닭에 식구들 식사준비나 다른 집안 일들, 들일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모두 맡아서 하고 선생은 모시만 짰다. 모시를 잘 짠다는 소문이 돌면서 먼 곳에서도 모시를 맡기러 오곤 했는데 보통 모시 한 필 가격의 2~3할 정도를 공임으로 받았다. 삯모시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사정하면 짜주곤 했는데 삯모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다 날아 가져오면 제일 어려운 모시매기와 짜기 과정을 해주었다. 모시 짜기를 한 지 20여년이 넘자 그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1967년 1월 16일 마침내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에 오르게 되었다. 그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온 것뿐, 보상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에는 선생의 뒤를 이어 첫 제자 방연옥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이외에도 전수교육 조교인 박승월, 고분자 선생이 활동하고 있다. 선생은 현재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어 한산면 지현리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모시 일을 하고 싶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산모시(Hansan mosi)
문정옥 선생은 모시의 전통과 현재화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산을 중심으로 한 모시 활성화 노력이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도 선생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선생의 작품은 같은 일을 하는 분들과 비교할 때, 기술의 숙련도는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에서도 빼어나다. 옷감의 차이는 눈으로 변별되지 않더라도 써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용두머리 : 베틀 선다리 위쪽에 가로로 놓여 있으며 중간과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쇠꼬리와 눈썹대를 끼우도록 된 나무이다.
베틀신대 : 베틀 신 끝에 달려서 잉아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나무 막대
벱대 : 도투마리에 날실을 감을 때 날 올들이 서로 붙지 못하도록 하며, 매기를 할 때 날실의 중간 중간에 끼워 넣는 직경 2~3cm 정도의 통으로 잘라서 만든 대나무 막대기
도투마리 : 날실을 감아 두는 틀
채머리 : 선다리 뒤쪽에 있는 누운다리로 도투마리를 얹도록 한 지지대
비경이 : 잉아올과 사올을 벌려주며 북실이 잘 통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
선다리 : 베틀을 수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위에는 용두머리가 가로로 놓여 있다.
북 : 씨실인 실꾸리를 넣고 북 바늘로 고정시켜 바디 바로 앞 날줄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실을 짜는 도구이며 옆에 작은 구멍이 나서 실을 통과시키게 되어 있다. 무명실용 북은 크기가 크고, 모시용 북은 작다.
누운다리 : 베틀을 수평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앞은 높고 뒤는 낮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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