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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9
하나님의 성전
2013년 8월 4일
우리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걸어 다니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오늘 아침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집을 지을 때도 건축가의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당신에 대해서 오늘 계시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으면서 너희를 집으로 삼고 있다.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안에 걸어 다닌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과 관계 없는 온갖 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탐심과, 음란과 온갖 죄악,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벗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직분자가 먼저 거룩의 모범을 보이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령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모든 성도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11-13절에서, 직분자의 말씀을 잘 듣고 복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4-7:1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가 깨끗게 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14-15절은 세상의 악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합니다.
16-18절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성전이기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으로서 더 가까이 있고 그들에게 걸어 다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7장 1절은 이 약속에 근거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거룩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거룩한 일을 이뤄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인데 너는 거룩한 성전이다하고서 우리를 특별하게 따로 때어놓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우리 성전으로 만들어가기에 우리는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11-16절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첫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으로서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잘 받아들입시다. (11-13)
둘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으로서 더러운 것을 버리고 거룩하게 살도록 합시다. 성도들치고 거룩한 것을 좋아하지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탐욕입니다. 탐욕 때문에 이것이 죄인데, 죄인데 하면서도 에이 괜찮겠지 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얄팍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온전히 자신을 깨끗게 하는 거룩함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함으로 자신을 깨끗게 하십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고, 우리 안에 걸어 다니시면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교제 나누고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집으로서 말씀을 듣고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 된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잘 받읍시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정직성을 의심했습니다.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1-10절에서 말했듯이, 사도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복음을 전해서 복음의 열매를 그들에게 맺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1절에서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이 ‘열리고 넓었으니’는 오래 전부터 열려온 상태에서 계속 있고 넓어 진 것도 넓은 상태로 계속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부터 고린도 교인들에게 입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다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좀 싫어하더라도 회개하라는 복음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음행을 멀리하십시오. 우상신전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우상신전에 신전 음식 먹는 것 그만하세요. 그러다가 음란에 관여하는 것을 그만하세요. 싫어해도 계속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입이 열려졌다는 것은 가슴이 열려졌다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서 자신 안에 있는 거룩에 들어오도록 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넓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12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이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딱 닫고 좁아져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마음을 활짝 열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그들은 닫고 있습니다. 이 좁아 졌다는 것은 6장 4절에 나와있는 곤란이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이 곤란이라는 것은 꽉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이 꽉 닫혀 있으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번에 책망하는 편지를 강한 책망의 편지로 썼습니다. 고린도 후서 2장 4절에서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를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요 오직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편지 가운데 아주 강하게 책망했기 때문에 이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하고 마음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닫혔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책망하고 근심하게 한 것이 그것이 근심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너희들 사랑 때문에 한 것이다. 그 때 고린도 교인들은 오해하고 관계가 힘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부모가 자녀에게 하듯이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주었으니까 자녀는 무엇을 하죠? 효도하지 않습니까? 늙은 부모가 이제 별로 도움이 안되고 귀도 안 들리고 부담이 된다고 한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릴 때부터 부모가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보답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보답하는 양으로 내 말을 잘 들어달라 고린도 교인들과 인간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5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너희를 권면하는 것으로서” 말합니다. 우리,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의 관계는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는 데에서 대리자 인 것입니다. 6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말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된 고린도 교인들은 먼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장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교회에 나올 때는 인간과의 불편이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가정에서도 매일 어느 정도는 관계의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안간 관계의 문제로만 보면 우리는 너무 부분적으로만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도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선포되고 있습니다. 직분자를 통해서 말씀이 오고 있습니다. 친한 사람이 많으니까 좋고 불편하니까 나쁘고 그건 사실입니다. 친한 것이 많고 불편한 것이 적으면 좋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직분자와 친하다. 친하지 않다가 아닙니다. 남편과 친하다. 친하지 않다. 그것은 두 번째 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말씀이 꾸준히 선포되고 그 선포되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분자 된 목사나 가정의 가장들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서 계속 복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순종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마음이 멀어지지만 그러나 직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서 계속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직분자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할 때 직분자들은 더 성령의 사람으로서 열린 상태로 나아갑니다. 우리 교회도 가정도 말씀이 계속 잘 선포되고 열린 마음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계속 말씀이 선포되고 또 말씀이 선포될 때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으로서, 더러운 것을 버리고 거룩하여 집시다.
14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멍에를 같이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좀 특별한 말입니다. 원래는 상이한 멍에를 매지 말라는 뜻입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않는 뜻이 아니라 원래 다른 멍에를 매지 말라. 이것은 구약의 헬라어에 딱 한번 나옵니다. 레위기 19장 19절에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 교미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끼리 교합을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 유전공학이 있어서 새로운 종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지요. 교합시키려면 무엇 때문에 했겠습니까? 재미로 했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양과 다른 동물과 교미를 시키면서 그걸 보며 즐기는 그런 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하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이 멍에를 다른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 말인데 이 히브리어는 또 어디에 적용되냐면 사람과 짐승이 같이 관계를 맺지 말라는 데에 쓰입니다. 이 가나안 땅은 음란한 사회였기 때문에 동물들끼리로 다른 종끼리 교미시켜놓고 심지어 사람들도 짐승과, 참 입에 담기 못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을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게 확장되니까 가나안 땅에는 가족끼리도 짐승처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19장 19절에선 다른 짐승과 이렇게 교미시키지 말라고 했지만 19장 4절에선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헛 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의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 이것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다른 종끼리 교미시키는 데에는 사람과 짐승과 또 가족끼리 잘못이 있고 더 나아가서 우상숭배에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다 망가진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 남편에 대한 신앙을 바치지 않고 그런 우상숭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지 하지 말라는 것은 이 작은 것, 믿지 않는 자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 결국 성적인 문제도 일으키고 우상숭배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9절을 가지고 교회는 항상 신자는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 웨스트민스터 25주에도 보면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근거 구절로 이 말을 들고 있습니다. 언뜻 멍에를 같지 하지 말라 하면 이상하다하는데 원래 원문을 따지고 들어가면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불신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결혼한 사람이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혼한 사람은 결혼에 머물러서 서로를 거룩케하라고 말합니다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것보다 더 큽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말고 결혼하지 말라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냐? 우상숭배하지 말고 음란하지 말라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고대에 가나안 땅이 우상숭배와 연결되었듯이 고린도 교인들도 우상숭배에 참여하며 음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고린도 교회는 설립된 지 4년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보통 일상생활이 그냥 신전에 가서 제사 지내고, 축제로 놀면서 고기 맛있게 먹고, 술 한잔하고 신전에 있는 여사제들과 성적인 것을 노는 그냥 아무 죄책감 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믿은 지 4년되었는데 아직도 변화되지 않아서 그런 습관이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우상은 나는 섬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니까 우상에게 섬긴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괜찮지 않느냐? 거기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괜찮다. 그래서 우상숭배는 안하지만 우상신전의 음식은 먹어도 된다. 하면서 옛날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은 우상숭배하고 나중에 설명합니다.
그리고 거기 신전음식을 먹으면서 음란까지도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이 말속에서 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6장에서는 신전의 창녀들과 음행을 하지 말라고 이미 권고했습니다. 또 고린도 전서 10장에서 구체적으로 신전의 우상음식을 먹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14절에서 “의와 불법이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이 함께하며와 사귄다는 두 단어가 어디에 쓰인 단어냐? 고린도 전서 10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의와 불법이 함께하지 말고, 빛과 어둠이 사귀지 말라는 이 두 단어를 고린도 전서 10장 16절에서 여러 번 쓰고 있습니다. 우상신전의 제사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자 10장 16절에 성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때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여기 “참여한다. 참여한다. 참여한다.” 이것이 오늘 고린도 후서에 쓰인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앞쪽에 참여한다는 것은 ‘코이노니아’고 17절에 한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메토코이’인데 코이노니아, 메토코이 이 두 개를 갖다가 그대로 사도 바울이 오늘 14절에 써서 “우리가 어떻게 불법에 메타코이하고, 빛과 어둠이 어떻게 코이노니아 하느냐?”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한 우리가 어떻게 어둠과 참여하겠느냐?
고린도 전서 10장 20절에서 우상신전에서 먹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제가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사도 바울이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귀며 할 때, 빛과 어둠이 사귄다는 것은 우상신전에서 먹는 것은 우상신전에 귀신과 코이노니아 하는 것이다. 또 21절에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고린도 전서 10장 21절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이 참여하지 못하리라 하는 것이 의와 불법이 함께하며 거기에 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전서에 잘 설명했기 때문에 고린도 후서에선 잘 설명하지 안지만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의와 불법이 어찌 사귀며” 이 말을 통해서 너희가 어찌 우상신전에 거기 제사 음식을 먹고 있느냐? 그것은 빛과 어둠을 섞는 것이다. 그것은 의와 불법을 섞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지금 꼬집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합리화하면서 욕심 때문에 우상신전에 그런 축제 의식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신 적인 제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지 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음란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넓은 뜻이 있는 것이지요. 우상숭배와 음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있으면서 친구들이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악한 것을 계속 따라가지 마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라고 뒤에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완전히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5장 10절에서는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과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친구들, 음행하는 친구들, 우상숭배하는 친구들과 도저히 만나지 말아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악과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만나지만 그들이 행하는 악한 행위에 참여하지 말고 악한 일을 하는 그곳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 직장 다니는 여러분들은 술집에 아주 유흥적인 2, 3차의 술집에 따라가는 것 그건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친구들과 사귀고 또 알아야 전도도 하지만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 회식을 할 수 있지만 또 그들이 식사하면서 술 한잔 하는 데에는 있을 수 있지만 2, 3차 다니면서 점점 나아가는 그곳은 그 친구들과 만나서 술자리 가지면 사업 정보도 얻고 친해지고 승진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이 나서서 술자리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참 우리 성도들 중에 이런 식으로 사업상 대접을 하다가 하나님께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것을 싹 그만 둔 성도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접대 안 하면 사업이 망하지 않겠느냐? 걱정했는데 주께서는 그 사업을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최근에 자기가 직장 아랫사람하고 그런 약간 풀어줬더니 2, 3차 가가지고 더 나쁘게 해서 앞으로는 그렇게 안하고 그 돈, 회식비를 절약해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쓰겠다고 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가면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물론 우상숭배는 하지 않죠. 그렇지만 우상숭배가 끝난 다음에 회식하는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섞여 들여있습니다. 문제는 확실하게 우상숭배이면 가지 않을 탠데 여기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그 섞여 있는 것을 통해서 의와 불법에 공유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불법에 코이노니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에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너희가 어떻게 불법의 코이노니아에 가느냐? 또 빛이 어둠을 향해 어떤 코이노니아가 있겠느냐? 어둠을 향해서 너희는 섞는 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는 의와 불법은 다르다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의 지체를 의에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 의와 불법을 대조 시킵니다. 전에는 불법에 드렸습니다. 이제는 너희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의에 이르라 거기 불법하는 자들에게 붙어 있는 조그만 좋은 것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고 하려고 불법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순결하게, 더 성결하게 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애매할 때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애매할 때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 삼풍 백화점 무너진 95년에 그 때 제가 거기서 자원봉사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불도저로 다 밀수 도 있지만 혹시 그 밑에 사람이 살아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밀고 안간 겁니다. 혹시 잘못이 생길까 봐서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조심스러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장에 아랫사람으로서 따라갈 때는 따라가야 하지만 내가 스스로 주관을 가지고 갈 때는 그런 불법 적인 자리에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애매한 그 회색지대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후서 4장 6절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비취고 있는데 어찌 어두움과 친교를 향해서 들어가겠습니까?
애매한 지대로 계속 나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15절
그런데, 그리스도가 벨리알을 향해 어떤 조화가?
애매한 것이 나쁜 것 같지만 완전히 나쁘지 않고 문제가 있는 걸로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벨리알, 벨리알은 사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사탄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좋은 것들 것 탐내다가, 작은 악을 탐내다가 결국 어두움의 왕인 사탄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혹은 믿는 자에게 믿지 않는 자와 함께 어떤 기업이?
천국 기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은 자들과 함께 기업을 같이 한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 살 동안에 돈을 벌고 같은 조직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우리는 천국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쩌면 우리 젊은이와 학생들은 인터넷 여기저기 뒤지고 있는 것 스마트 폰 여기저기 시간 낭비하듯이 뒤지고 있는 것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목적 없이 그렇게 하다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냥 갑자기 툭툭 튀어나오는 것들 관심 있어서 그냥 한 번 잠깐 보다가 끌려갈 수 있습니다.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애매한 데에서 벗어나십시오. 16절에서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게 우상들과 어떤 연합이?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는 데 도대체 성전을 가지고 어디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렇게 낮게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실력을 가지고, 여러분의 재정 상태를 가지고, 여러분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여러분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늘 성령님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귀한 사람이 어떻게 작은 유익을 위해서 더러운 곳에 가려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들과 어떤 연합이”이 연합이라는 것은 출애굽기 23장 32절에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애매한 것을 계속 양심으로 약간 거리낌이 있는데 계속하는 것은 결국은 귀신과 언약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여러분이 어떻게 그런 우상들과 언약을 맺겠습니까? 오늘 사역에 나와있는 데로 “공유”, ”친교”, ”조화” 이 단어는 구약의 성전의 성막에 대해서 쓴 말입니다. 오전 성경공부에 온 여러분들은 알겠지만 성전의 성막은 작은 천을 다섯 개를 하나의 천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또 나머지 다섯 개로 하나의 천을 만듭니다. 그리고 다섯 개씩 연결된 두 개의 천을 다시 또 연결합니다. 이 성막의 천을 연결한다는 거기에 쓰는 히브리 단어를 세 개로 번역하는 데 공유, 친교, 조화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여러분 한 명 한 명은 성막의 천 조각 하나하나처럼 성막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성전의 천 조각을 가지고 가서 애매한 데 끌고 가서 귀신의 제사하는 축제 자리에 가느냐? 어디 성전의 한 부분인 여러분들이 그렇게 욕심 때문에 술자리를 행할 수 있겠느냐?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책망이 아니라 너희가 성전의 한 조각인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막의, 성전의 한 조각 된 것이 우리가 잘해서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냥 턱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시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 말씀을 깨닫게 해주셔서 여기 오늘 교회 와서 예배 드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냥 갑자기 지나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데 “너 와서 십자가지라”해서 십자가 진 그 사람처럼 우리도 똑같아요. 모태 신앙인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별히 잘라서 우리를 신앙인 삼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턱 금을 그어서 너는 아니다. 너는 내가 사는 집이다. 너는 성막을 이룬다하고 은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게 느낌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느낌대로 살아가다 보면 거룩하지 않은 일에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지요? 그냥 여러분 생각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여러분일 지라도, 초라해 보이는 여러분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지요? 오늘 여기서 예배 드리고 있는 우리입니다. 참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죄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여러분들, 바로 우리, 그런 조그마한 진보가, 조그마한 거룩만 있는 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냥 한 마디로 아무 수식 없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오래 전 구약성도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레위기 26장 11절에서 구약성도들에게 너희가 나의 성막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때 레위기에서 26장 11절에서 이 축복의 말씀을 하는데 이 말씀을 오늘 고린도 후서에서는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여 두루 행하며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위기의 이 말씀은 이미 성막을 다 세운 뒤에 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40장에 이미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출애굽기에서 또 레위기에서 어떻게 제사를 지낼지 잘 설명을 하고 제사장이 이미 제사 드리기를 시작한 때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 말씀을 주시고 또 십계명 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언약의 말씀을 다 주셨습니다. 성막을 다 세워놓고서 다시 오늘 레위기 26장 11절에서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미래로 말하고 있어요. 이미 성막을 세워놓고 앞으로 성막을 세운다고 합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눈에 보이는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성막을 세웠지만 이것은 무엇에 대한 약속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막 그것을 백성들 가운데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성막이라는 것은 원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집, 하나님께서 한 곳을 눈에 보이는 성막을 나의 집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하나님의 집은 너희들 가운데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고린도 후서에서는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며”로 바꾸고 있습니다. 거하며, 거주지. 은혜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해서 너를 거주지로 삼아주셨습니다. 미래입니다. 이미 거주지로 삼아주셨지만 앞으로 거주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살기 시작했지만 앞으로 더 살게 되겠다는 것입니다. 더 풍성하게 살게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들의 삶이 더 풍요하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가득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구약성도들의 관계는 그냥 가만있는 관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그분의 백성과 함께 그들의 영혼 가운데 그들의 집 가운데 집을 삼고, 그들의 일터 가운데 집을 삶고, 그들의 일터 가운데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 오늘 고린도 후서 16절에 성전이라는 것은 ‘나오스’인데 이는 궁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런 궁궐로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복음에 반응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라고 반응하는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우리 안에 계십니까?
성령님을 통해서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0, 11절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은 이미 너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여러분 안에는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죽을 몸을 살려주십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예수님 재림할 때 다시 삽니다. 우리 육체는 썩지만 다시 삽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삽니다. 죄와 죽음으로 점점 벗어버리고 우리 삶 안에서 성령님이 지배하는 삶이 살아있고 점점 많아 집니다.
오늘 고린도 후서에서는 성령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시지만 앞으로도 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골로새서 3장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성령님이 거하신 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 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도망 가지 않고 내 영혼에 딱 들어와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과 함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디모데 후서 1장 5절은 “믿음이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증거는 말씀을 듣고 믿음 안에 있는 데에서 성령이 거하십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성령이 거하시고 성전이 되었는데 그래서 고린도 후서 6장 14절에 “믿지 않는 자와 상이한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고린도 후서 6장 15절에 “믿는 자에게 믿지 않는 자와 어떤 기업을 함께 하겠는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착하고 부자고 훌륭하더라도 거기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같이 할 수가 업습니다. 다른 것들은 같이 할 수 있지만 내 영혼의 깊은 것을 내어주고, 깊은 우정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만큼만 관계를 맺는 것이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더 풍성하게 거하시기 원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깁니다. 참, 청와대에 초대 받아서 간다면 예배 시간보다 늦지 않을 거예요. 부끄러워 해야 되요. 아마 최소한 10분전에는 거기에 가있겠지요. 음악회에 가더라도 훨씬 단정하게 미리가서 종 땡 치기 전에 들어갈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 말씀을 받읍시다. 좀 주일에는 아무일 하지 말고 내 몸을 편안하게 놔주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시다. 졸리니까 할 수 없다. 왜? 몸을 주일에도 졸리게 만듭니까? 정말 주님께 간구하시면서 주중에 내일을 조절해주셔서 주일에는 온전히 예배 드리고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고 성령이 풍성히 거해서 이 말씀이 이뤄지게 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일에는 가족이 함께 모여서 성경 읽고 주중에도 아침 저녁으로 가족이 성경을 읽읍시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를 빠진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과외도 시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오늘도 읽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두겠습니까? 정말 성령님께서 은혜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성령님이 교회에 풍성히 거하도록,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믿음이 풍성해 지도록 간구합시다.
또 구약 교회를 집으로 삼고 두루 행한다고 했고 오늘 고린도 후서에서는 안에 걸어 다닌다. 그 두 “행한다”를 직역하면 안에 걸어 다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 안에 그냥 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걸어 다니십니다. 안에 걸어 다닌다는 말, 히브리어의 원래 말은 제일 처음 쓰인 것이 창세기 3장 8절에서였습니다. 서늘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거니시는, 거기 거니시는 데에 쓴 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진짜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에덴 동산 안에 걸어 다니셨어요. 아담이 사는 집안에 걸어 다니셨어요.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 쫓겨 났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에덴은 없어졌지만 우리가 사는 곳곳 마다 하나님께서 걸어 다니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장 12절에는 세례 요한이 환상 중에 큰 나팔 소리가 나길 때 돌아봤더니 위 쪽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서있었습니다. 걸어 다닌 다는 말은 없지만 촛대 가운데서 인자가 걸어 다니신다고 했습니다. 이 촛대를 다시 교회로 말합니다.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걸어 다니시고 있습니다. 이 영이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이기 때문에 안보이지만 걸어 다닌 다는 것입니다. 에덴은 잃어버렸지만 교회 안에서, 성도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께서는 걸어 다니시고 있습니다. 일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정말 눈에 보이게 걸어 다니시면서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드립시다. 저도 오늘 예배 준비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하나님 느낌은 오지 않지만 에덴 동산에서 걸어 다니셨던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걸어 다닌 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집안에 오늘 가셨을 때 하나님, 에덴동산에 걸어 다니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집 응접실에 걸어 다니신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제가 영적으로 체험하게 해주세요. 아마 우리도 부분적으로는 체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정말 내 안에서 일하시구나 어쩔 때는 큰일 날 뻔 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 인생에 관여하시는 구나 깜짝 놀랄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 몇 번씩은 우리에게 강렬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없는 지금 이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우리 가운데 걸어 다니십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17절부터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걸어 다니시니까 우리가 할 일은 뭐라고요? 첫째는 말씀을 받아야 하고, 둘째는 따라 나오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에서 빨리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너희를 영접하리라 나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다니고 있는 이곳으로 거룩의 곳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약속의 말씀을 또 주십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들과 딸로서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더 아들, 딸이 되어야 하고 더 아버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7장 1절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핵심 단어는 육과 영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 이것이 주가 되는 명령입니다. 그 결과로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는 장소 중 어떤 곳은 안가고 떠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만지던 것 중 어떤 것은 더 이상 안 만져야 합니다. 내 아내도 아닌데 슬쩍 다른 사람의 아내의 손을 만졌다면 더 이상 만지지 마십시오. 만지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그런 것을 버리십시오. 마음으로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마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거하시고 더 거룩하게 영광을 드러내 주십니다.
육체적인 더러운 것도 떠나야 하고, 마음의 더러운 것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가운데 거룩함을 이룹시다. 교회는 좋은 이야기 듣는, 교양 강좌 듣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잘 수련해서 강하고 담대하게 돼서 돈 많이 벌려고 힘 얻는 곳이 아닙니다. 그 축복도 있지만 교회의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성전 삼으시고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을 깔보지 마십시오. 얕잡아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있는 어디든지 아무리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영광스런 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잘못하더라도 너는 나의 거룩한 성전이다 하면서 결코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거기에 있으면 계속 더러운 것을 만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체험을 못합니다. 은혜는 여러분을 붙들고 있지만 여러분은 체험은 못합니다. 우리가 떠날 곳은 어딥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옛날 친구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네트워크 만들기 위해서 우상신전의 축제 놀이에는 꼭 가야 되었습니다. 조금 즐겁기 위해서 거기에 가고 싶었습니다. 네트웍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즐거움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안했지요. 제사 시간엔 없었지만 다 끝난 다음에,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연결 됩니까? 결국은 사탄 숭배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은 음란으로 넘어졌습니다.
우리들이 끊어야 될 우상신전, 그 친교의 곳이 어딥니까? 아까 잠깐 이야기 했지만 내가 정말 친하게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과연 나에게 경건에 도움이 되는 가 냉정히 평가 하십시오.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만나서 좋지만 사업상 정도로 만나는 것 아니면 더 나아가서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들 간의 친교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감을 찾고 있다면 당장 그만 두십시오. 그 가짜 안정감을 통해서 결국 여러분을 함정에 빠뜨려서 결국 여러분을 사탄에게 끌고 갑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안정이 있으니까 불안하고 마음이 우울하고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교회로 나오고, 예배하러 나오십시오. 믿지 않는 자와 어울리고, 믿지 않은 자와 술 마시면서 거기서 가짜 만족을 얻지 마십시오. 우상신전에서 축제 참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쓸데 없이 많은 시간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카카오톡, tv와 영화, 내가 보는 영화를 다시 평가하십시오. 지금 15세 관람가 영화도 우리 옛날로 치면 성인 관람가 정도 입니다. 과연 꼭 거기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 있어야 됩니까?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까?
왜 영혼을 더럽게 합니까? 창녀촌에 가는 것은 잘못이지만 영화에 나오는 창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괜찮습니까? 정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질지를 잘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큰 해는 되지 않지만 결국 여러분을 사탄으로 코 끼워서 끌고 갑니다. 하루에 이유 없이 즐기기 위해서 스마트폰 하는 시간 거기에 비해서 성경 읽는 시간은 얼마나 있습니까? 이유 없이 그냥 켜지 마십시오. 목적이 있어서 보십시오. 스마트폰 하는 것도, 친구들 만나는 것도, 술자리도 결코 여러분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만약 예배하지 않고 성경 읽지 않고 거기서 공허함이 체워진다면 여러분은 이미 반쯤 사탄에게 코가 끼인 것입니다. 당장 떠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 안에 행하고 있다. 저희 집 안에 있고, 네가 있는 커피숍, 술집에 내가 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안정감을 갖지 말고 가족들에게 돌아오십시오. 가족들과 시간 보내지 않고 친구들과 시간 보낸 것 당장 그만 두세요. 우리 어린이들도 부모님과 성령 읽는 시간은 가지지 않으면서 친구들 만나서 게임하는 시간 당장 줄이세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고 둘째는 그리스도 인의 가정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는 자들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감이 와야지 불안해서 인터넷 뒤지고, 불안하다고 친구들 만나고 당장 떠나십시오. 떠나야 옵니다. 떠나기 전까지 여러분은 절 때 안정감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계속 불안할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또 인터넷 뒤지고 불안하니까 또 친구들 만나고, 또 술에게 의존하고 당장 그만 두세요. 정말 집에서 여러분이 가볍게 아내와 술 한잔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깥에서 술집에는 가지 마세요.
우리나라 전체 퇴폐 문화가 여러분이 가는 술집의 돈을 통해서 부패가 유지되고 있고 이 모든 애매한 여성들이 그런 향락 산업에 몰리고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정말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전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도대체 누구인데 거기 가있느냐? 성전에 한 조각인 너희들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느냐? 이 세상에 있는 것 악한 자들과 필요할 때 사업상 만나서 거래하지만 결코 여러분의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받을 때입니다.”
영과 육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여러분을 깨끗게 하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나의 것이라고 거룩한 성전을 만드셨으니까 이제 여러분도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니 감사 찬양하는데 그 시간을 보냅시다. 세상에서 욕먹고 소외되더라도 하나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걸어가고 외롭다고 느껴지더라도 여러분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구원의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받을 때도 더욱더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사탄과 악과 연합된 여러분 악과 단절하고 이제 그리스도와 더욱 연합되길 바랍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한 여러분은 결코 우상신전의 놀이와 같은 것에 여러분을 연합시키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더러움과 악과 단절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