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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규 시집/ 봉화산의 소리, 발문)
선진규 시인의 삶과 문학 세계
-여래사의 삶, 발심과 전법 그리고 문학 인생-
들어가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5년차 임기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17대 대선정국에다 레임덕에 밀려 국정장악력에서 상당부분 힘을 잃어가던 2007년 8월 하순 어느 날, 한국불교문인협회 임원 10여 명이 봉화산 정토원에 모였다. 협회 김두희 회장께서 전임 림영창 회장의 별세(2001.01.25.)로 이어받은 회장직도 어느덧 6년이 지나 후임 회장으로서 협회 운영을 책임질 만한 인사를 물색하던 차 장봉호 부회장께서 전년도에 상임고문으로 위촉하여 입회시킨 선진규 봉화산 정토원장을 적극적으로 추천함으로써 이루어진 임원회의 성격의 자리로서 필자 또한 이날 처음으로 선진규 원장을 뵙게 되었다. 그런데 선진규 원장께서는 당시 민주당 노인위원장으로서 최고위원의 중책을 맡고 있는 상태라서 당시로서는 문학단체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상황임을 알리고 훗날 좋은 기회에 좋은 인연으로 협회 운영에 참여하겠다는 완곡한 고사의 말씀을 피력함으로써 김두희 회장께서는 이후 4년이나 회장직을 더하였다.
그리고 2011년 5월 14일 제25차 한국불교문인협회 정기총회에서 필자를 포함한 5인의 회장추대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만장일치로 선진규 회장추대서를 작성하여 5월 22일 전달하였다. 이어 6월 10일 마포구 서교동 사무실 인근에 조촐하게 마련된 취임의 자리에서 선진규 회장은 “향후 일 년간은 추대위원들을 비롯한 운영위원들께서 회장 직무를 공동으로 책임져 줄 것”을 부탁하고, “불교 믿음을 근간으로 작품 활동하는 협회 성격상 편협된 생각은 버리고 불교를 폄하하지 않는 문인이면 모두 받아들여 포용력을 갖고 운영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정식으로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시에 필자는 협회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어 지근거리에서 선진규 회장을 현재까지 보필하고 있다. 선진규 시인은 78세 때 『한국현대시문학』 여름호(2011.06.01, 홍윤기 추천심사)에 시부문 신인으로 추천되어 지금은 한국문인협회와 국제PEN한국본부 등 문학단체의 회원으로서 문단활동을 하고 있다. 더불어 필자는 그간 선진규 회장의 문단 일에서부터 가족사까지 사사로운 일뿐만 아니라 정당 사회단체와 관련된 업무까지 제반사항을 공유하는 데 이르렀기에 이 시집을 상재함에 있어 발문을 집필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선진규 회장의 불교 포교사(법사)로서의 불교인생과 시인으로서의 문단활동을 망라하여 필자가 아는 내용 모두를 상세하게 기술할 것이며, 시집의 발문인 만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호칭은 ‘시인’으로 쓸 것임도 밝혀둔다.
고행의 청소년시절, 전장에서의 깊은 사유
선진규 시인은 1934년 우리 민족 말살책이 극으로 치닫던 일제강점기 시절에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3대 외동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3명의 아이가 태어나면 한 명 꼴로 홍역 또는 기타 질병으로 죽어가던 때다. 이때 신심이 돈독한 선진규 시인의 할머니께서는 명이 짧은 손자라며 애지중지 등에 업어 키웠고, 좀 더 자라서는 손자의 손을 잡고 멀리 있는 절에 데리고 가서 “부처님께 절하면 명이 길어진다”고 당부하며 부처님께 절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선진규 시인에게는 불교와의 첫 인연이 된다.
집안이 곤궁하여 생계마저 위협받던 시절인지라 선진규 시인의 선친께서는 일본 홋카이도 탄광 인부로 돈을 벌러 떠났고 곧이어 그곳으로 아내와 자식 모두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으로 치달아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으로 탄광에 강제로 차출되어 모여들 무렵, 선진규 시인의 선친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자 곧장 가족 모두를 데리고 일본 본토의 고타나카(小田中)라는 농촌 마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농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가족 모두 귀국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 홀로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자그마한 암자를 지어 수행하고 계셨는데 덕분에 귀국과 더불어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정착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선진규 시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여 3학년 재학중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각 학교마다 의용군 모집이 있어 비교적 키가 컸던 선진규 시인도 상급생을 따라 트럭에 실려 부산 동래까지 갔다는데 “너는 아직 어리니 집에 가라! ”고 돌려보내 귀가하였다지만 가족들에겐 큰 걱정을 안겨 일대 소동이 일었다고 한다.
전장은 북한 인민군이 거침없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진을 치고 서쪽으로는 마산 진동까지 밀고 들어옴으로써 김해와 부산은 피란민과 후퇴한 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 상황에서 선진규 시인의 가족이 기거하던 암자 뒷산에 미군부대가 주둔해 천막을 쳤는데 절마당까지 그들의 주둔지가 되어 버렸다. 이때 할머니께서 “이제 우리는 다 죽는다. 손자 하나만은 살려야겠다”며, ‘미군을 따라 보내면 나중에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통역병에게 “제발 우리 3대 외동 장손만은 살려 주소”라며 매달림으로써 선진규 시인은 미군 24사단 일선보급부대 군속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부대는 울산 어느 야산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곳도 피란민과 군인들로 포화상태였다. 취사장에서 청소하고 그릇 닦는 일, 감자 깎기, 부식 다듬기 등이 주된 임무였는데 날이 갈수록 일이 늘어나 혹독한 노무자가 되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참을 수밖에. 어린 시절 그토록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건만 미군 부대에는 먹을 것이 무진장 많아 참으로 풍요로웠고, 맛있는 과자, 빵, 고기 등이 배식되면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9.28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가 뒤바뀌어 주둔지를 경주로 옮겼는데 인민군이 들어왔다가 후퇴한 곳이었다. 다시 하루가 멀 정도로 북진하여 영천, 경산, 대구를 지나 신동, 약목, 영동, 서대전에 주둔하였다. 낙동강을 건너면서부터는 전쟁을 치른 폐허와 죽은 시체에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가옥들이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루가 멀게 천막치고 거두며 장호원, 이천, 수원을 지나 영등포교도소 자리에 진을 쳤다가 38선을 넘는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줄곧 이동하여 새벽에 도착한 곳이 개성이었다. 개성에서 하루 지나 해주에 주둔하고, 3일만에 평양비행장, 그리고는 평안남도 숙천의 어느 과수밭에서 1개월 정도 머물렀다.
이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군속이 장교용 45구경 권총을 분해해 닦은 후 탄창에 총알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장난삼아 앞에 앉아 있는 선진규 시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데, 불이 번쩍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넘어졌다가 깨어 보니 야전병원이었다고 한다. 총알이 왼쪽 볼을 스치고 귀 뒤로 관통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 없이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야전병원에서 치료후 상처는 아물었다.
전황은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그해 12월 말에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博川 벌판에 주둔해 꽁꽁 언 땅에 쇠말뚝을 박고 천막을 친 후 슬리핑백에 들어가 잠이 들 무렵 갑자기 중공군이 가까이 내려왔다며 긴급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1.4후퇴가 시작된 것인데 선진규 시인을 비롯한 군속들에게도 무기가 보급되었다. 후퇴 도중 후방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참으로 긴박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길거리 거리에서 수많은 피란민들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그가 3일간 트럭을 타고 남하하여 도착한 곳이 경기도 의정부였다.
의정부에서 10여 일만에 다시 후퇴하여 양평, 원주, 청주에 머물다가 또 다시 전세가 바뀌어 청평, 화천으로 북진하던 1951년 초였다. 휴전 협상이 시작되고, 3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회담 중이니 학생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있었다는데 선진규 시인은 이 소식을 뒤늦게 전달받고 8월에서야 귀가하여 곧바로 복학을 위해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에겐 전쟁을 겪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같은 민족끼리 왜 싸워야 하나? ’, ‘잘못도 없는 선량한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수없이 죽어야만 했는가? ’ 착시처럼 스쳐 지나가는 피눈물로 울부짖던 피란민 행렬, 수많은 시체 더미에서 보아온 주검들의 처참한 몰골과 소름 끼치는 공포 분위기, 그리고 강대국들의 싸움판이 되어 버린 한반도를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는 선진규 시인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주말마다 집을 오갔는데 그의 눈에 비친 거리는 휴전중이라지만 전쟁의 연장선상으로 보였다. 특히 부모를 잃고 거지가 되어 몰려다니는 어린 군상들, 가족을 잃고 방황하는 노인들, 부상당해 몰골이 흉물스런 상이용사들, 피란 와서 살기 위해 소리 지르며 골목을 누비는 노점상 등 모두가 불쌍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하루는 부산진역에서 귀가길 기차를 기다리다 몰려다니는 한 무리를 보고는 “얘들아 너희들 나와 한 번 이야기하자”고 접근하여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던 이들과 의형제를 맺으며 친해졌다. 그리고는 집에서 동생들이 입던 옷가지를 비롯해 먹을거리를 갖다 주다가 자력으로 한 번 일어나 보라고 구두닦이통과 작은 지게를 구해 주어 짐꾼 노릇도 하게 했다.
토요일엔 이들과 함께 돈벌이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로 그의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심적 갈등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다니는 학교도 학업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다.
초발심
선진규 시인은 복잡한 내면의 갈등 속에서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고자 심사숙고하다 결국 찾아간 곳이 절이었다. 매일 하숙집에서 나와 학교는 가지 않고 시내 암자를 찾아 법당에 들어가서는 “부처님,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저 불쌍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습니까? ”라 외치며 엉엉 울었다.
어느 순간 이곳 스님이 다가와 “학생 왜 울고 있나? 연애에 실패했나? 부모님이 돌아가셨나? ”라고 물었다는데 그의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질문인지라 “아닙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다시는 그 절에는 가지 않고 다른 절을 찾았다. 이런 사실을 담임선생님께서 아시고는 불러 세우더니 “선 군은 일선 전쟁터를 다녀왔기에 생각이 깊은 학생이라 상담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는가? ”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적 갈등을 소상히 말씀드린 후 “스님이 되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다면 좋은 정치인이 되어 보라! ”고 권하셨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정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두 마음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음 고치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허허, 꿈같은 소리야! ”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선진규 시인의 초발심이 불꽃처럼 일어난 때가 아닌가 싶다.
《화엄경》의 핵심 내용을 추린 「법성게」에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처음 발심한 그때가 바로 정각正覺을 이룬 때’라는 뜻을 담고 있다. 초발심의 순간은 일체 공덕이 다 갖춰져 ‘내가 이미 부처’라는 절대 확신의 단초를 제공한다. 해탈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든 불자들이 가슴 한 편에 간직하고 있을 초발심, 바로 그것이다.
선진규 시인은 2학년 말 고민 끝에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그때 잘 알려져 있던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계셨던 권상로 스님을 찾아뵙기로 결심하고 서울 조계사(당시 태고사)를 찾았다. 조계사는 입구 쪽 한쪽 지붕이 폭격으로 허물어져 나갔고, 스님은 요사채의 작고 컴컴한 방을 사용하고 계셨다.
학생이 한 명 찾아와서 “중이 되고 싶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라고 청하니 스님께서는 “뜻은 훌륭하나 이곳은 대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학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지 말고 다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승려가 되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출가의 길을 소상히 밝혀 주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이곳까지 스님을 찾아왔는데 저 하나 받아 주실 수가 없습니까? ”라며 눈물로 간청하니, “학생, 울지 말고 내 말을 듣는 것이 학생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다”라고 타이르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선진규 시인의 공부 목표는 오직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진학하는 것이었고, 그때부터 이미 일반 학생과 달리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 출가한 불교학도란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심적으로 외딴섬에 홀로 있는 사람이 되어 더욱 심한 고독과 고뇌의 나날을 보내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야말로 곧 승려가 되는 관문이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서는 남산자락 판잣집에 하숙을 정해 놓고 외롭게 숲속으로 들어가 출가자의 고뇌와 세상을 떠나는 섭섭한 마음을 계속하여 울음으로 달랬다.
선진규 시인은 1학년 1학기말 학과 선배들의 주선으로 불교대학 기숙사인 기원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동료들과는 다른 길, 자신의 길은 세상 모두의 고통을 해결해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들어왔기에 모든 일상이 다르다고 자임하며 이것을 이해 못하는 불교과 동기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므로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기숙사에 입사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선배들의 허락으로 입사한 터라 마음을 고쳐먹고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 결과 혼자만의 정신적 외로움을 달래던 울음은 차츰 사라졌고,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그가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불교학과 위상이 교내에서 너무나 미약하여 그의 장기인 웅변을 활용하여 위상을 부각시키기로 다짐하고 전국웅변대회에 출전했다. 두 번을 출전하여 모두 우승하고 그 트로피를 학교 당국에 전달했더니 전국웅변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며 그를 총장실로 불러들여 총장님께 우승컵 전달식도 거행함으로써 불교학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밖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이긴 하나 태권도도 배워 익혀 젊은 혈기에 불교학과를 ‘목탁과’라고 비하하는 선배에게 폭력을 가해 이빨 세 개를 상하게 하여 경찰에 입건되었으나 원만하게 해결하면서 이후 불교학과의 위상은 높아졌다. 어쨌든 그의 불교학과에 관한한 남다른 열정만큼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재발심
선진규 시인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3학년 때 해인사 강원에서 경전을 배우겠다고 다짐하고는 머리 깎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학교 당국으로부터 느닷없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전갈과 함께 학생처에서 담당자가 직접 데리러 왔다. 결코 학업현장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강변하자 학생처 직원 말이 “4학년 중에서 총학생회장을 뽑는 과정에서 후보자간에 큰 싸움이 일어나 총장님의 직권으로 4학년은 공부하고 3학년에서 선출하라는 엄명을 내려 불교대학 대의원들이 선진규 시인을 불교대학 회장으로 뽑았고, 다시 각 대학 회장 중에서 불교대학 회장인 선진규 시인을 총장님 재량으로 총학생회장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꼼짝없이 상경하여 총장실에 들렀다는데 당시 백성욱 총장님께서 선진규 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시고는 “이곳 총장실을 해인사 강원이라 생각하고 나에게 금강경 강의를 들으라”시며 타이르셔서 꼼짝없이 매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총장실에서 1년간 단독으로 금강경 강의를 받으며 수행하는 총학생회장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선진규 시인은 이때부터 ‘삭발염의’의 출가와 같은 재가불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어쨌든 선진규 시인은 이후 총학생회장으로서의 활동이 대외적으로도 모범적인 학생운동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삭발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남산대사’라는 별명을 얻어 그마저도 명예롭게 불리고 있었는데, 한 해 연상인 이화여자대학교 김기업 총학생회장이 불교운동을 하는 도반이 되겠다고 나선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이듬해(1958년) 가을 이 도반과 선진규 시인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고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남다르게 추구하는 미래를 향하여 참으로 열심히 활동해 왔다. 그러다 2004년 이 도반은 췌장암 진단을 받고 황망히 이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 동안 불교 포교밖에 모르는 남편 대신 가정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말단 공무원에서부터 승진을 거듭하여 여성공무원으로서는 당시 최고의 직급인 전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보건복지부 가정복지국장에 이르기도 했다.
김기업 여사는 공무원 재직 당시에 우리나라 복지의 틀을 마련하는 데 실무 책임을 다 했으며 황무지와 같은 우리나라 불교계 복지기반 구축에도 숨은 역할을 다한 것이 오늘날 다시 회자되고 있다. 특히 여성공무원의 직급이 차별화되어 있던 것을 평준화 하는 법을 제정하여야 한다며 1990년대 초반 당시 노태우 대통령 영부인 김옥숙 여사의 지원을 받아 중앙부처 여성 과장급과 시·도 가정복지 과장을 국장으로, 계장은 과장으로, 계장 빈 자리는 우수 여성공무원들 중에서 승진할 수 있는 조직개편법을 만드는 데 앞장섰으며 끝내 관철시키는 쾌거도 이루었다. 그러나 여권신장에 있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공로가 높은 활동을 하였으면서도 자신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선진규 시인의 사회활동에 장애가 될까 염려스러워서였다는데 이 부분에서 선진규 시인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었던 사람인데…’라며 지금도 무척이나 미안해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그늘에 가려 운신의 폭을 넓히지 못한 아내를 회억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회한에 젖어 있던 선진규 시인에게 최근 여성가족부로부터 새삼 김기업 여사의 재직 당시의 업적이 여성계에 널리 홍보되고 있다는 전언을 받고는 저세상에서 편안하게 미소 짓는 아내가 그려져 참으로 포근한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선진규 시인은 1959년 2월에 대학 졸업을 하게 된다. 당시는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에다 빈궁한 농토, 자유당의 독재정치, 불교계 대처비구의 분쟁이 극에 달해 있던 때다.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는 참으로 처절한 배고픔 속에 민심은 흉흉해지고, 정치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으며, 정신을 차려 중생을 제도하여야 할 불교계마저 대처비구의 싸움이 심화될 무렵이었다. 졸업 1년 전인 1958년부터 선진규 시인을 비롯한 기원학사 불교학도들이 모여 ‘세상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라는 거대담론을 앞에 두고 모두들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현실적으로 합당한 돌파구로 채택한 것이 ‘대중불교를 선도한다는 측면에서 호화찬란한 기와집 안에 군림하며 중생의 보시만을 받을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받들어 이 어려운 때 폐허가 된 중생계에 불교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시대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4대 개발 구호로써 ‘심신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을 담은 대중적인 생활불교를 선도할 상징성을 지닌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을 세우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는 실행 대표를 맡아 건립 추진에 앞장섰고 졸업하면서 그해 4월 5일 청명절에 31명의 불교학도들과 간절한 모두의 염원을 담아 김해 봉화산 정상에 봉안하였다.
요컨대 농경사회에서 삶의 원천을 상징하는 호미는 마음의 밭을 올곧게 가꾸고픈 진심 어린 서원으로서 실천의 의지가 듬뿍 배인 매개체가 되어 선진규 시인이 오랜 동안 가슴 깊이 품어왔던 실용적인 생활불교를 비로소 만천하에 천명했던 것이다.
여래사의 삶, 전법 포교
《법화경》 「법사품」에는 ‘여래사如來使’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 독, 송, 서사, 해설’하는 일 중 한 가지만 실천해도 그를 여래사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심부름이란 다름 아닌 전법 포교의 공덕을 말한다. 단적으로 누군가에게 법회를 소개하거나 부처님의 법어가 담긴 책자 하나만 전하더라도 여래사라 지칭되는 것이다.
선진규 시인이야말로 유년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부처님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고, 부처님의 존재를 인지하고부터는 그 누구보다 부처님께 깊이 천착하며 평생을 여래사로 살아온 것이다.
아무튼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을 봉화산 정상에 봉안한 후 선진규 시인은 불교 저변을 넓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불사를 시작한다. 백성욱 총장님의 지원을 받아 봉화산 주변의 땅 3만 5천 평을 마련하고 신용리의 신용사를 병합한 뒤 절 이름도 ‘봉화사’라 개명하며 사찰의 터밭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식목과 개간에 이은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면서 가족들의 도움으로 5차례에 걸쳐 24만 평의 넓은 부지도 확보했다.
1972년에는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되어 총무원내에 근무하며 1년에 전국순회 280회라는 대단한 법회기록도 세웠다. 1975년부터는 봉화사를 어느 스님에게 의탁하여 운영하게 하였는데 1983년에 2회에 걸쳐 화재가 발생하여 법당과 요사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1978년에는 선진규 시인이 대한불교청년회의 10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 직함 역시 포교의 원력을 품은 그에게는 또 다른 날개가 되어 선진규라는 이름 석 자가 한국 현대불교에서 진하고 굵은 획을 긋게 만든다. 그는 대한불교청년회 초대회장이신 만해 한용운 시인의 묘소를 찾기 위하여 한겨울에 망우리 공동묘지를 헤매다 1979년 2월에 초라하게 내팽개쳐진 만해 한용운 시인의 묘소를 찾아내고 한국일보에 찾아가 취재 보도하게 함으로써 당시 매스컴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 여세를 몰아 그는 불교청년회의 출발이자 지주라고 말할 수 있는 만해 한용운 시인을 선양하기 위해 전국만해백일장을 기획하고 홍보하여 1980년 3.1절을 기해 제1회 대회, 뒤이어 청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卍해 한용운 스님의 뜻을 기리는 운동으로 크게 일으키면서 매년 3.1절 기념 전국만해백일장은 대통령상을 대상으로 시상하며 초대형 백일장으로 자리 잡아 매년 성황리에 개최되어 2018년 현재 39회 대회까지 이어져 왔다.
그 당시 선진규 시인은 불교 관련 강연회와 세미나를 연이어 마련했다. 또 설법회 개최와 찬불가 제작 등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위한 사업을 펼쳐나갔다. 찬불가 ‘부처님 오신 날’, ‘연등’, ‘제등행진곡’ 등 우리 불자들 귀에 익은 찬불가는 남다른 불사관佛事觀을 지니고 있던 선진규 시인의 노력으로 탄생한 곡들이다. 기존의 찬송가풍 흐름에서 우리 고유의 가락이 짙게 배여 있는 범패가락, 굿거리장단, 자진모리장단 등을 가미하여 작곡하고 편곡한 찬불가로서 발상 전환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이때부터 불교합창경연대회도 개최하여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른바 법당 세우는 일만이 불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 생활불교의 실천이었다.
그의 남다른 불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1979년 9월 1일, 선진규 시인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불교청년회는 제1회 전국불교청년대회를 개최한다. 대회 주제는 ‘우리는 참회합니다’로서 불교계 분쟁의 모든 원인을 불교청년회가 책임지고 참회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로 인한 온갖 불행한 시대적 아픔을 모두의 참회로 인식하는 차원 높은 보살행을 실천해 보이고자 여는 대회였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회향했고 그 성과는 매우 컸다. 대한불교청년회 11대 회장으로 재신임 받아 다시 선출된 선진규 시인의 열정적인 불사는 더욱 활기차게 이어져 그가 임기를 마쳤을 당시 대한불교청년회는 16개 지회에서 152개의 지회로 대폭 늘어나는 장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83년에는 봉화사 법당이 불탄 자리에 천막을 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던 곳에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이 건물을 법당과 청소년회관으로 사용하면서 ‘봉화사’란 명칭을 ‘봉화산 정토원’이라 개칭하고 믿음의 바탕을 ‘정토신행淨土信行’에 근거하여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미래이며 불교의 미래이기도 한 청소년 불사에도 진력했다. 청소년수련원 건물을 건축하고 청소년 교육불사에 힘을 쏟았다. 당시 그가 개발한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한 예절프로그램인 ‘봉화산예절서당’은 수련포교프로그램경진대회에서 전국 1,200여 출품작 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현재까지도 최상의 모델로 일선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 공로로 선진규 시인은 200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그 밖에도 전국의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한 ‘학교에 죽비 보내기 운동’, ‘봉화산 청소년 축제’ 등을 개최하였는데 청소년을 위한 불사로서 선진규 시인이 걸어온 포교의 길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청소년시설협회(현재 공·사설 850여 개 시설) 회장, 호법포교사단 창립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88서울올림픽 때는 10만 유등 문화행사 기획홍보 총책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러 전세계적인 문화행사가 되어 매스컴에 오르기도 했다.
불교계 최초로 봉화산 불교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였고, 1972년 동국대학교 강사로 위촉받으면서 ‘불교포교이론’을 정립시켰으며, 이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객원교수, 대학원 겸임교수 등으로 초빙되어 후학 지도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선진규, 그의 이름 석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2002년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18대 회장으로 선출되더니 새로운 신도운동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하고 지도자수련대회를 열어 조직을 재정비함으로써 신도회가 조직으로만 끝나지 않고 불법홍포에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도 다졌다. 특히 중앙신도회와 하나로 통합시키는 등 재가포교사로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해 왔으며 초지일관初志一貫 현재까지 그의 열정은 지속되고 있다.
또한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2009.05.23.) 후 봉화산 정토원에서 정성 들여 올린 49재에는 전국에서 수십 만 명이 참배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 단 한 건의 안전사고 없이 행사를 말끔하게 치러 성숙된 불교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봉화산 정토원을 인지도 높은 사찰로 제고시켰으며 그에 따른 유명세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시인 등단, 그리고 문단활동
2011년 6월 1일, 선진규 시인은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 취임을 열흘 앞두고 계간 『한국현대시문학』(여름호) 신인문학상에 시 〈봉화산 사자바위〉와 〈신년송〉이 당선되어 정식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문학박사 홍윤기 교수는 심사평에서 ‘불심佛心의 눈부신 서정시화抒情詩化’라 제題하고 절제된 의인화 수법으로 승화시킨 〈봉화산 사자바위〉는 시인이 ‘사자바위’를 제재로 하여 돈독한 불심을 리리시즘으로 눈부시게 서정시화 하였는데 청유형 메타포 수법은 공감도를 더욱 높여준다고 평했다. 특히 제3연의 “모두야 오너라!/ 아픔일랑 달래고/ 원망일랑 이곳에서 풀어 버리자/ 헤일 수 없는 욕망, 끝없는 번민/ 이곳에서 털어 버리자/ 동서남북 뿔뿔이 헤어짐도/ 하나 되게 이곳에서 기원 드리자”는 메시지는 불교적 관념을 초극한 문학성 넘치는 인류애·인간애의 평화적 메시지로서 독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흥을 안겨준다고 호평하였다. 선진규 시인도 당선소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말기에 퇴임하면 봉하마을로 귀향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이곳의 상징어인 사자바위를 가슴에 담아 시작詩作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노무현 대통령’과 ‘사자바위’를 동일시한 메타포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홍윤기 교수는 〈신년송〉 역시 원숙한 불심을 바탕으로 새해와 더불어 온갖 사상事像이 중생의 희망 어린 터전에서 발아하고 승화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초극적인 분위기에서 진지하고도 화기和氣로운 서정시화의 이미지 처리 또한 알찬 부분이라고 격려하면서 한국시단에서 연년세세 더욱 정진하기를 축하와 함께 권유 드린다고 했다. 이에 선진규 시인은 역시, 이젠 접어야 할 것과 아직 못 다한 것들에 대한 희생적 삶을 남은 여생동안 문학을 통해 전력투구하라는 소명으로 알고 헤일 수 없는 문학의 심해深海에 발을 들여 놓는다고 자못 비장하게 당선의 변을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과거 군사정부 시절 김춘수 시인이 국회의원으로 일한 바 있긴 하지만 당시 대중의 주목은 거의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현재는 도종환 시인이 재선의원으로서 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서 왕성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데 역시 문인이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선진규 시인은 1990년대 초반 지방정부인 경상남도 도의회 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도의회 무소속동우회를 만들어 교섭단체장까지 역임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바 있다. 이후 민주당 노인위원장 겸 당무위원을 역임하면서 노인복지, 청소년 정책 개발 등에 힘써 왔으며, 현재는 중앙당 고문겸 전국노인위원장으로 당무에 임하고 있다.
4년 전(2014.06.04.) 필자는 계간 『한국불교문학』 특별기획으로 도종환 시인을 인터뷰한 바 있다. 그 당시 도종환 시인은 천주교 신자임에도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여느 불교학자보다 해박하게 인터뷰에 임하여 무척이나 놀라게 하였으며, 정치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라 정치인으로서도 대성할 것을 이미 예견하게 했었다.
“물은 바가지에 담아 부뚜막에 놓거나 유리잔에 담아 식탁에 놓거나 본연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라는 곳이 정치 주체마다 이해관계가 달라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그야말로 아수라의 현장이지만 시인의 마음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균형감각을 최우선으로 하여 정치에 임하고 있다”는 그의 정치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세계적으로 문인으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여 성공한 정치가로는 체코의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을 들 수 있겠는데 그가 중심이 되어 공산당 정권에 저항한 77헌장이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민주화의 대명사인 ‘프라하의 봄’을 불러왔고, 이후 그는 당당하게 대통령에도 당선되었다. 체코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영화화 되어 우리에게는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바로 하벨의 체코 민주화 과정을 심층 취재한 작품이다. 또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도 프랑스 상원의원으로서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다양한 정치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소설에 고스란히 반영하여 국민적 영웅이 된 작가이며 성공한 정치인이다.
선진규 시인 역시 그간 시민운동을 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서민 속에 오랜 동안 파묻혀 지내며 이루 형언하지 못할 고된 역할을 감당해 온 밑바닥 정치인으로서 시대적 상황을 시로 표출한 시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일반 대중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그의 구도자적 인생관을 담은 시로서 2013년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직후에 발표한 〈울음〉을 인용해 본다.
구도求道의 길 떠나는
아들 손 잡고 우시던 어머니
새벽길 뻐꾸기 소리와 함께 울었습니다
배고파 보릿고개 넘지 못하는
헐벗은 산야에 할 수 없이
우리는 부처님 손에
호미를 들게 하고 울었습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비 오듯 총알이 퍼붓는 속을
넘어져도 전진하는
젊음과 함께 울었습니다
민주주의 찾는 길에 몸 바친 망월공원
혼자 거닐며 후퇴하는 민주주의 생각에
분함을 손에 쥐고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부엉이바위에서 그간 온갖 물의
모두 책임지고 떠나간 추모 49재
함께 목놓아 울었습니다
수만 년 흘러내린 4대강 곳곳에
산소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는 한없는 생명들
답답하고 안타까워 발 구르며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지행일치知行一致 양익양륜兩翼兩輪
지식과 도덕성은 양날개 양바퀴와 같다!
청소년들의 사람됨을 소리치고 다녔는데
갈수록 험한 세상 어버이를 해害하고
자식을 버리는 지경까지 왔으니
목메인 울음 그칠 수가 없습니다
분단 60년 허리 잘린 국토 위에
헤어진 부모 형제 아직도
눈 부릅떠 싸우고
권력유지 수단으로
한쪽은 종북! 한쪽은 반동!
벌벌 떠는 공포 속에 통일의 암담함
이제는 양쪽 모두
눈물이 마르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가고 오고
울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이 못난 남편 만나 46년 고생하다
몹쓸 병 얻어 세상 떠난 아내에게
“참으로 그간 고생 많이 하였소! ”라는
말 한 마디 못한 것이
영원한 울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울기 위해 태어난 운명인가
울지 아니 하면 아니 되는 운명인가
이제는 어떤 운명의 울음이라도 좋습니다
이 울음이
모두의 아픔을 씻을 수만 있다면
세세생생 피할 수 없는
울음이 아닙니까
- 〈울음〉 전문
‘울음의 정치학’이라 하면 문득 ‘바보 노무현’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니까 2002년 16대 대선정국에서 초반에는 노무현 후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 그의 고집스럽게 올곧은 정치행보가 새삼 대중의 인정을 받고는 진심으로 펑펑 울던 그의 모습에서 ‘참정치인상’이 발현되고 그 사람 냄새나는 모습이 널리 회자되면서 끝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고 대선 본선에서도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던 것. 최근 이스라엘의 진화생물학자 오렌 하손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울음은 주위 사람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 내는 도구로써 생겨났기 때문”이라는데 사실 눈물로 표출되는 그 울음의 진정성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랜 여운을 남기며 진한 공감을 유도해 낸다.
위에 인용한 시 〈울음〉이야말로 평생 떨쳐 버리지 못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선진규 시인의 절절한 인생역정이 그대로 묻어나 천생 포교사로서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그의 연치만큼이나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대사가 시대적 아픔을 듬뿍 머금은 채 확연하게 그려지고 있다.
6.25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절박한 시대적 아픔을 치유할 방책으로 불교대학에 입학하고는 졸업과 동시에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을 봉안하고, 3.15부정선거에 이은 4.19혁명의 현장에서 시대적 아픔에 젖어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눈물, 수 많은 인명이 희생된 광주민주화운동을 회억하면서 부엉이바위에서의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따른 49재의 여운, 그리고 환경파괴의 대명사가 된 4대강사업, 사회계층 전반에 만연하는 도덕성 실종에다 고착화 되어가는 남북분단의 현실, 특히 가족생계에 있어 너무나 큰 짐을 안겨 일찍 이승을 하직한 아내에의 안타까운 회한의 눈물은 선진규 시인을 평생 울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결국 선진규 시인은 “울기 위해 태어난 운명인가/ 울지 아니 하면 아니 되는 운명인가/ 이제는 어떤 운명의 울음이라도 좋”다고 받아들이면서 “이 울음이/ 모두의 아픔을 씻을 수만 있다면/ 세세생생 피할 수 없는/ 울음이 아닙니까”라 반문하고 있다. 즉 세상 모두의 아픔을 씻을 수만 있다면 평생 동안 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면서
卍海 한용운 시인을 존경하며 문학적인 일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만해사상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선진규 시인은 한국불교문인협회 회장 외에 한국문인협회 재정분과위원장,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등으로 문단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정치력이 상당부분 작용하는 卍해통일문학축전 총괄본부장으로서, 또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로서 이 시대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한용운 시인이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고 살다 가신 심우장을 중심으로 그 분의 정신을 살려 매년 卍해통일문학축전 개최와 국가문화재로서의 심우장 확장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더욱이 선진규 시인은 현재 우리 나이로 85세라는 연치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오늘도 첨단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며 부처님 말씀을 Facebook, 카톡, Band 등을 이용하여 대중을 향하여 쉬지 않고 올리면서 SNS 전법활동에 임하고 있다. 이마저도 어쩌면 지난날 청년시절에 일으켰던 초발심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출가 독신수행길을 가지 아니한 초발심이 재발심으로 다시 응결되어 초발심 때 품은 화두와 초발심 때 접한 문제의 해결점을 찾으려고 평생을 부단히도 노력해 왔다.
선진규 시인은 내일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움직이고 있는 초심의 에너지가 뒷받침하고 있는 한 위대한 부처님의 출가동기를 되새기고 근본서원인 사홍서원과 불교 중흥을 위해 결코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아니 할 것을 굳게 다짐하며 오늘도 쉬지 않고 정진, 또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 김 재 엽/정치학(북한학) 박사·한국불교문인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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