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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동강(東江)변이라 경치가 좋을 듯해서 가 보는 것이다.
언덕을 넘어 "영월향교"(寧越鄕校)를 왔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다.
문이 열려 있을것이라고 기대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어느 곳의 "향교"를 가든 문이 열린 곳은 없다.
향교좌측에 큰길도 있지만 우측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본다.
호젓한 길이 나오는데 여기에 "장돌뱅이길" 표가 나타난다.
이 "장돌뱅이길"도 걸어보면 재미있을듯하다.
혹시 "제천"이나 평창까지 가는 것은 아닐까? 해서 알아보았더니
내가 처음 보았던 "청령포"앞 다리에서 시작하여 이곳까지 오는 코스라고 한다.
언덕에서 강쪽으로 내려오니 아주 큰 정자가 나온다.
"금강정"(錦江亭)이다.
저 현판은 옛날 이승만 대통령 당시의 글씨라고 한다.
안에는 옛 유명인사의 시가 걸려 있다.
1428년(세종 10)에 김복항(金福恒)이 세웠다고 하나 영월제영(寧越題詠)에 의하면
장정공(莊靖公) 이무(李堥)가 영월군수로 있을 때 금강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사재를 들여 정자를 짓고 "금강정"(錦江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앞의 "동강"(東江)을 "금강"(錦江)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영월 군수 "이야중"(李野重)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세우고,
1792년(정조16년)에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축형식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출입하는 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는 "머름"이 둘러져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안동에서 춘천으로 가던 중 금강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강정"이라는 시(詩)와, 황희(黃喜)가 지은 "금강정"이란 詩도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錦江亭"
鵑啼山裂豈窮年 견제산열기궁년
蜀水明同非偶然 촉수명동비우연
明滅曉詹迎海旭 명멸효첨영해욱
飄蕭晩瓦掃秋烟 표소만와소추연
碧潭楓動魚遊錦 벽담풍동어유금
靑壁雲生鶴踏氈 청벽운생학답전
更約道人携鐵笛 갱약도인휴철적
爲萊吹破老龍眼 위래취파노용안
산이 터져라 울어대는 두견이는 어느 세월에나 멈추려나
금강이 촉나라물 이름과 같음도 우연이 아니리라.
밝아오는 새벽 처마는 떠오르는 햇살을 맞이하고
쓸쓸한 바람은 저녁지붕 기왓골의 가을연무 쓸어낸다.
맑은 못에 단풍나무 일렁이니 고기들이 비단폭에서 노니는듯
이끼푸른 벼랑에서 구름일어나니 학이 푸른 융단을 밟고 서 있는듯
다시 도인과의 기약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때는 피리라도 들고와서 불게하여
못속에 잠든 노룡을 깨워보게 하리라.
황희(黃喜)의 금강정(錦江亭)
軒高能却暑 헌고능각서
簷豁易爲風 첨활이위풍
老樹陰垂地 노수음수지
遙岑翠掃空 요잠취소공
누대가 우뚝하니 더위피하기 충분하고
처마들이 탁트여 바람도 잘 통한다
수령많은 나무들은 땅에 그늘 가득 드리웠고
멀리 산들은 푸르름으로 허공을 쓸고있네.
또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1684년(숙종 10)에 "금강정" 주위의 펼쳐진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고 한다.
금강정(錦江亭)앞에서 보는 동강(東江).
저끝 산아래서 서강(西江)과 합류하여 남한강이 된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이게 실화(實話)라고 한다.
영월(寧越)에 "낙화암"(落花岩)이 있고, 더구나 "영월판 춘향전"도 있다니,,,,,
"越妓 瓊春 殉節 之處" 碑(월기 경춘 순절 지처)비.
낙화암에 있는 "越妓瓊春殉節之處"(월기경춘순절지처)碑의 후면.
약 200여년 전 영월부사 신광수(申光洙)의 수청을 거절하고 낙화암에 몸을 던져
순절한 기생 경춘(瓊春)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라고 한다.
"경춘"(瓊春)의 본명은 "노옥"(魯玉)이라고 한다.
평소 단종을 추모하며 자식을 얻고자 했던 아버지 고순익(高舜益)이 단종 사후 300년이 되던 해 기일(1757년 10월 4일)에
딸을 얻게 되자 "노산군"(魯山君)이 점지해준 "옥(玉)같이 귀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선비 집안으로 글을 배우며 성장하던 "노옥"은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뒤에는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살길이 막막했다.
의지할 데가 없는 "노옥"은 이웃에 사는 "추월"(秋月)이라는 늙은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나 양모 조차 나이가 들어 생활이 넉넉치 않자 "노옥"은 어쩔 수 없이 경춘(瓊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경춘"은 영월 부사(副使) "이만회"(李萬恢)의 아들 "이수학"(李秀鶴)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영월 부사 "이만회"가 한양으로 영전하자 "이수학"(李秀鶴)은 3년 후 과거에 급제를 하고 나서
백년가약을 맺자고 약속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후임으로 문장가인 "신광수"(申光秀)가 영월에 부임하여 경춘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했다.
경춘은 전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고 거절을 하였으나,
"신임"(新任)부사(副使)는 이를 허락치 않고 볼기를 때리는 등의 벌을 내렸다.
또한 계속 수청을 들지 않을 경우 죽이겠다고까지 하자 "경춘"은 부모님의 산소에 가
하직인사를 한 후
동생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빗겨주고 "이수학"이 한양으로 가며 준
사랑의 증표를 몸에 지닌 채 낙화암 절벽에서 투신하고 만다.
이때 경춘의 나이 16세인 1722년(임진년) 10월 이었다.
"경춘"이 순절한지 24년이 지난 정조 19년(1795년)에 순찰사 손암(遜岩) 이공(李公)이
영월을 지나는 길에 "경춘"의 절개를 듣고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비석을 세워 후세에 귀감이 되게끔 했다고 한다.
이에따라 평창 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鼎運)이 글씨를 써서
"경춘"이 투신한 "낙화암"에다 "越妓瓊春殉節之處"라는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碑文 : 越妓瓊春殉節之處
越妓瓊春 故李侍郞莅越時 所眄以其初許身也
故欲自潔以守 及後官之來 衙內人有强之者 數被箠楚 殆不能堪
一日盛服而入 言笑自如曰
倘無數日呼喚 當調病軀 一聽所欲
翌朝遂往訣其父墳 歸爲諸弟梳
仍起往錦障江邊 坐於絶石崖歌數闋 泣下沾裳
悲恨不自勝時 稚弟在傍 乃詒而使之去
卽奮身投水死歲壬辰十月 其年十六
家人奔往 拯之衣衿 有隱映物 裂縫視之 乃李侍
郞筆嗚呼其死也 視古之從容就義者何如哉
今都巡察使巽菴李公 以大冢宰出按關東節行部
過越州聞而奇之曰 以賤籍而乃能辨此 此眞烈女也
烏可無樹風聲之道乎 遂捐俸屬越守俾立一片石識其處 又屬余記其顚末
余惟瓊春之死 距今爲二十四年 始得表顯之
微我公瓊春之節 其將湮沒而已也乙卯八月
平昌郡守南羲老記 寧越府使韓鼎運書
해역 : 월기경춘순절지처
영월기생 경춘(瓊春)은 예전 이 시랑(李侍郞)이 영월 땅에 부임해 왔을 때,
(서로)눈에 들은 바 되어 처음으로 몸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런 고로 스스로 몸을 정결히 하여 수절코자 하였는데,
후임 관리(부사)가 오게 되자 관아 내의 사람으로 그녀를 강제하는 자가 있어서,
수차례 추초(箠楚: 볼기를 치는 형벌)를 당하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서 (관아에)들어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하기를:
“만약 수일간만 부름이 없다면, 마땅히 병난 몸을 잘 조섭하고는
원 하는 바(욕구)를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마침내 아버지 묘소로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와
여러 동생들을 위해 머리를 빗겨 주었다.
이어서 일어나 금장강(동강)변으로 가서는 벼랑 끝 단애에 앉아서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은 치마를 적시는데, 슬픔과 한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린 동생이 옆에 있었기로, 이에 그를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고는,
즉시 분연히 몸을 일으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니, 때는 임진년 10월로 그녀 나이 16세였다.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가 옷깃을 건져 올리는데, 무엇인가 은연히 비치는 것이 있어서
꿰맨 자리를 뜯고서 보니, 과연 "이 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녀의 죽음은 지난날 의(義)를 위해 의연히 목숨 바쳤던 이들과 견주어 볼 때, 못함이 없지 않은가!
이제 도순찰사(都巡察使) 손암(巽菴) 이공이 대총재(大冢宰)로서,
관동의 절행부(節行部)를 살피던 차에 월주(영월)를 지나다가 보고를 접하고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천적(賤籍)에 오른 몸으로서 이 같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니 이는 참으로 열녀로다.
어찌 "무수풍성지도"(無樹風聲之道)의 본으로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봉급을 내어 영월군수에게 그녀가 순절한 곳에 일편 비석을 세워 표지를 남기도록 부탁하고,
또한 나에게는 그 전말의 내용을 기(記)하도록 부탁하였다.
생각하건대 "경춘"이 죽은 지 오늘로 2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드러내어 표장하게 되었으니,
우리 공(巽菴 李公: 李秉鼎)이 아니었다면 경춘의 절행 그것은 어쩌면 인몰되어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을묘(1795년, 정조 19년) 8월 평창군수 남희로(南羲老)가 기문을 짓고,
영월군수 한정운(韓鼎運)이 비문을 쓰다.
"낙화암"(落花岩)에서 투신하는 경춘(瓊春)
그런데 여기에 "낙화암"(落花岩)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미 이곳이 "낙화암"이란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낙화암(落花巖)
앞면 : 落花巖
뒷면 : 碑文
端廟朝諸侍女及諸從人 同日投水殉節
英宗戊寅 愍忠祠賜額
英宗壬戌知府洪聖輔 始立碑刻落花巖三字
隆熙庚戌夏 碑頭半落沉水
同年冬有何不良之人 投碑于水忍不可言
今玆本郡守李錫僖·保勝會長池昌永 詢謀僉同
上報李王 特蒙激勸之恩允 不日告功 立于舊址爾
甲子 參月 日
本郡守 李錫僖 保勝會長 池昌永 石工 李聖心
음역 : 音譯
단묘조제시녀급제종인 동일투수순절
영종무인 민충사사액
영종임술지부홍성보 여입비각낙화암삼자
융희경술하 비두반락침수
동년동유하불량지인 투비우수인불가언
금자본군수 이석희·보승회장 지창영 순모첨동
상보이왕 특몽격권지은윤 불일고공 입우구지이
갑자(1924년) 3월 일
본 군수 이석희. 보승회장 지창영. 석공 이성심.
풀이.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같은 날 (동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영종 무인(영조 34년, 1758)년에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이보다 앞선 영종 임술(영조 18년, 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융희 경술(1910)년 여름에 비석 머리 부분 절반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았는데,
동년 겨울 어떤 못된 부랑자가 나머지 비석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차마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본 군수 이석희(李錫僖) ‧ 보승회장 지창영(池昌永)이 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이왕(李王)에게 보고를 올리고, 특별히 격려하는 윤허를 받은바 힘입어,
얼마 아니 되어, 일을 모두 마치고, (낙화암)옛터에 비를 세우게 되다.
갑자(1924년) 3월 일
본 군수 이석희. 보승회장 지창영. 석공 이성심.
현재의 낙화암 비석은 1924년에 세웠다.
1726년 영월부사를 지낸 윤양래의 탁본첩에 있는 원래의 낙화암 비석은 금강(錦江) 물속에 잠겨버렸다.
금강정(錦江亭) 맞은쪽에 있는 절벽이 "낙화암"이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觀風軒)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宮女)자개(者介)", "궁비(宮婢)불덕(佛德)", "궁비(宮婢)아가지(阿加之)", "무녀(巫녀)용안(龍眼)",
"무녀(巫女)내은덕(內隱德)", "무녀(巫女)덕비(德非)"등 6명과 시종 1명이 이곳에서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이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하여 "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와 시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영조 13년(1742년)에 "홍영보"가
"금강정" 바로 뒤 언덕에 "민충사"(愍忠祠)를 창건했으며, 정조 15년(1791년) 부사 "박기정"이 개축하였다.
"민충사"(愍忠祠)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자료 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절비(殉節碑)
순절비 뒷면.
李朝 端廟 駐蹕寧越
丁丑十月 二十四日 天命不休 奄遭昇遐
侍從侍嬪 九十餘人 一體殉節
花落成仁 忠貫日月 哀拯江山
名登靑史 千秋不朽 舊址不變 立碑表忠
寧越面長金南圭
面議員一同
檀紀四二八八年十一月 日 建立
이조 단묘 주필영월
정축시월 이십사일 천명불휴 엄조승하
시종시빈 구십여인 일체순절
화락성인 충관일월 애증강산
명등청사 천추불후 구지불변 입비표충
영월면장 김남규
면의원 일동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순절비 뒷면 설명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不休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도다.
낙화처럼 몸 던져 인(仁)을 이루니, 충절은 해와 달을 관통하고, 슬픔은 강산을 흔들었네.
이름은 청사에 올라 천추를 두고 없어지지 않으리.
구지(舊址: 옛터)에 변함이 없도록 비를 새워 충절을 표지(表識)하노라.
영월면장 김남규
면의원 일동
단기4288년(1955) 11월 일 건립.
이 비석이 근래에 만들어진 것에 대한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이 절벽아래에 "落花岩"이란 각자(刻字)가 있다고 한다.
단종애사가 서린 영월 낙화암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암각 글씨가 근래에 발견됐다고 한다.
20여년째 단종관련 유적들을 관찰해온 엄태일씨(71)가 영월군 영월읍 동강변 절벽에서 발견한 "落花巖" 刻字는 풍화작용으로 훼손되긴 했으나 글자체는 뚜렷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단종 복위후 영조18년(1742년)에 영월부사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이 일대 절벽 위에
"낙화암"이란 비석을 세웠으나 일제때 파괴된 이후 정확한 "낙화암"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위치가 알려졌으면 하루빨리 위치를 쉽게 볼수 있게 만들어야 할것이다.
근래에 몇몇 분들이 절벽으로 내려가 확인을 했지만 상당히 위험하여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발견된 "落花巖"刻字 인터넷 발췌.
다음 지도에서 건너펀에서 보는 "낙화암".
암벽이 길게 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봄이 오기전에 건너편에서 망원렌스로 살펴봐야 하겠다.
"민충사"(愍忠祠)
"민충사"(愍忠祠)를 끝으로 첫번째 영월 여행을 끝낸다.
이제 천천히 주변 구경을 하며 버스 터미날로 돌아간다.
蘭皐詩碑
영월의 외진 산골자기에 김병연(김삿갓)의 묘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웠는가보다.
금강공원 길에는 여러 기념비가 서 있다.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죽일기) :
개다리 소반에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
해와 구름이 얼 비치는데.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
주인은 조금도 미안ㅎ다 말하지마소.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
나는 청산이 거꾸로 비친 물을 좋아한다네.
김삿갓이 어느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는데 워낙 가난한 집이라
멀건 죽 한그릇을 내고 주인이 미안해 어쩔 쭐을 모른다.
김삿갓은 기쁘게 죽을 먹으며 시 한수를 읊는다.
의병장 정대억(丁大億)
1872년 11월 6일 ~ 1908년 6월 10일
정대억은 1872년 11월 6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용기와 장부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삶에 대한 뜻이 분명했다고 한다.
1907년 8월 19일 영월 주천에서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한 그는
주천면 판운리 및 덕포리 독산 전투와 제천, 단양, 충주 등지에서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했다.
주천 관운리의 왜병 싸움에서는 일본군 36명을 죽였고, 충주 가흥에서는 12명을 죽였다.
또 이강년과 설창해 등이 연합하여 영월읍에서 30여명의 왜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정대억은 1908년 1월 15일 제천 송학원 입석리 백평에서 왜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 일본군 6~7명을 부상시키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6월 3일 다시 포로가 되어 영월로 연행되었고 6월 10일 눈이 도려진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정대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동강 근처에는 자연림이 많아 구렁이도 나오는가보다.
이외에도 많은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공덕비(功德碑)가 있는 곳을 지나 큰길로 나오면 "영월성당"이 나온다.
영월 성당은 1952년에 설립된 오래된 성당이란다.
빙그시 웃으시는 성모님.
"어서 와. 잘 왔어" 하시는듯하다
내가 간 날은 월요일이라 아무도 만날 수가 없어 성당 안은 못보고 말았다.
성당의 종탑.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시내를 여기 저기 둘러보고 저녁을 먹고나니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렸다.
고속버스 터미날 앞의 야간 풍경.
하룻만의 짧은 여행이였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택시로 여행하는 방법이 있단다.
다음에 한번 더 와서 택시관광을 해 보련다.
먼저 영월역 앞으로가서 정확한 낙화암 위치를 확인하고 난 후
택시를 타고 "정종대왕 태실" - "충신 엄흥도 묘" - "하송리 은행나무" - "영모전"을 보고,
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걸으면서 다른 구경을 해보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