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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6장 프랑스에서 사회철학(연속): 프루동 La philosophie sociale en France: Proudhon 779-782
조셉 푸르동(Joseph Proudhon, 1809-1865)은 브장송의 공방의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인쇄소의] 식자공(typographe)으로 시작하였으며, 독학자였다. 그의 작품과 행동은 중요한 여러 사회 운동들, 호사회주의 출발점이 되었다. 즉 조합주의, 상호부조주의(mutualisme), 평화주의, [아나키즘] 등은 그로부터 운동들의 방향을 잡았다. 그는 다음 책들을 출판했다.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1840), 경제적 제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la philosophie de la misère, 1846), 혁명과 교회에서 정의론에 대하여(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Église, 1858), 전쟁과 평화(La Guerre et la Paix, 1861), 기예의 원리(Du principe de l'art, 1865). (779)
프루동은 철학자인가? 이러한 질문은 기-그랑(Georges Guy-Grand, 1879–1957)이 혁명과 교회에서 정의에 대하여(1858)의 새로운 판본의 서문에서 제기되었다. 프루동은 직업적인 철학들에 대하여서 생경하다(dur). 그가 쓰기를, “추상작용으로부터 어떤 열정에 의해, 한 인간은 오로지 스스로 형이상학자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세기에 순수 철학의 교수들 중에, 그리고 젊은이에게 과학, 문학, 산업 전체의 바깥에서 철학하기를 가르치는 실행자자들 중에, 한마디로 직업을 가지면서 세계에서 가장 의식적으로 절대자를 판매하는 실행자들 중에, 한 인간이 또한 어떻게 현존하는가? 철학하기 위하여 철학한다는 것은, 건전한 정신 속에는 들어있지 않을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202, 205쪽), 순수 사변은 낭만주의의 결실이며, 소위 천재적 직관들을 주장하는 또한 [비밀을] 전수하지 않은 자에게 유보된 다른 세계의 계시를 주장하는 “퇴폐 문학”의 결실이다. 그런데 [한편] 모든 사람들에 동등하게 속하는 인간적 확실함이 있다. 왜냐하면 확실함은, 게다가 인식들의 너비[폭]가 어떤 것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장 학식있는 수학자는 2 + 2 = 4를 아는 자보다 더 많은 확실함을 갖지 않는다. 다른 한편 철학은 모든 인간적 활동성을 동반한다. 이런 이유로 철학은, 우리의 생각[관념]을 보장하는 원리와 우리의 행동들의 규칙을 찾는 것과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 직업의 훈련 속에서 증거작업의 수단들을 하나 또는 여럿을 사용하지 않는 그런 기능인(artisan, 장인 匠人)은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작업들에서 스스로 처리를 위하여, 자와 추, [수평계] 등등을 갖고 있다. 아마도 비슷하게, 자기 작품[일거리]에 대한 사명을 말할 수 없는 노동자는 없으며, 그 작품[일거리]가 필요[수요]들과 생각들 일체의 것에 연결되어 있다… 기능공이 자기의 전문성에서 일하는 것, 그것을 철학자가 사물들의 보편성에서 찾는다.”(209) (780)
따라서 사변적인 철학은 “실천적이고 대중적”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초등 교육에 속한다. 그러나 영감보다 더 많이 있는가? 프루동은 사유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의 자유로 로부터 철학으로 가게 되었던 논쟁들의 열기를 필요했다. 도처에 적들을 만났던 그는 자기의 생각들[관념들]을 정합적인 체계로 이끌어갈 시간도 취향도 없었다. 소화시키기 어려운 독서들의 요약들 가운데에서 폭발하는 섬광들이 있었다. 기-그랑이 말했던 것처럼, “그 프로테우스(Protée, Πρωτεύς)가 파악하는데 쉽지 않았다.”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의 적(敵)임과 동시에, 마치 인민 주권에 대한 것처럼 전제 군주제와 보편 선거의 적인, 그는 혁명적이면서도 반쟈꼬방이었으며, 그럼에도 중도정치에 속하지 않고 또한 절충주의에는 보다 적대적이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토지의 신비주의가 들어있다, 그 작품에서 전쟁은 마치 일종의 신의 심판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가정에 대한 그의 이론은 매우 보수적이며, 이 이론에서 결혼은 마치 최소할 수 없는 계약처럼 생각하지않고, 오히려 일종의 인격들의 혼융처럼 생각하였다. 그 인격들은 정의론의 합리주의와 일치하는가? 질서의 창조에 대하여(De la Création de l'Ordre, 1843)에서 그에게 모순들의 화해시키는데 이용한 헤겔주의는 (그가 맑스로부터 이 헤겔주의를 알았는데 결코 그것을 완전하게 인정하지는 않았다) 정의론(1858)에서 포기되었다. (780)
그럼에도 그의 신비주의는 한계들이 있다. 꽁트처럼 그는, 전쟁은 과거에 속한다고, 그리고 평화의 시대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종속관계와 위계질서는 단지 구성적인 부분인 가정의 내부에서만 현존하지만, 사회의 모델이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그의 헤겔주의 찰나적이고 피상적이었고, 정의론(1858)의 학설이 남는다. 그 학설은 그의 사회 개혁에 대한 관념들에게 가장 잘 응답한다. 프루동은 1849년에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1801-1850)에 반대하여 자신의 “상호부조주의(mutuellisme)” 체계, 즉 신용의 무상에 대한 체계를 주장하였다. 그는 맑스처럼 자본을 제거할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불의[비정의] 하다는 이유로 자본의 이자(l’intérêt)를 제거하기를 바랐다. 자본은 자연적으로는 불임이며, 이윤(un bénéfice)을 마땅히 생산하지 못한다. 이윤은 자본가에게 노동하지 않고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순”이라고 한다. 이런 개혁은 맑스주의의 물질론의 정신에 대립되는 관념론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것이 정의론에서 프루동의 철학 대한 정신 그 자체이다. 이 책에서 그의 모든 잡동사니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번쩍이는 것이 있는데, 프루동은 우주의 개념작업에 자발적으로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개념작업은 헤라클레이토스와 스토아학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들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올바른 이법”은 물질을 이끄는 자연적 힘인 동시에, 인식의 기준이며, 그리고 도덕적 품성과 사회의 원리이다. 마찬가지로 프루동에서 온정의(la Justice)는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구축한 품행의 이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프루동은 또한 도덕적 관념들에 대해 발생적인 설명과 공리적인 설명에 만큼이나 태생주의에도 적대적인데) 오히려 자연 속에서 평형의 법칙에 의해 표출되고, 사회 속에서는 개인들의 평등성에 기초한 상호성에 의해 표출되는 우주적[보편적] 실재성이다. 따라서 온정의는 철학이 제기하는 두 문제에 응답한다. “정의는 합리적인이 존재를 위하여 사유의 원리이자 형식임과 동시에, 정의 보증자, 품행의 규칙, 지식의 목표, 현존의 목적이다. 온정의는 감정이자 용어이며, 표출작용이며 법칙이고, 관념이며 사실이다. 그것은 생명이며, 정신이며 우주적 이법이다.” (정의론, 기-그랑판, 223쪽) 그의 도덕적 형식 아래서, 온정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자발적으로 증거 되며 상호적으로 보증되는 존경이다. 어떤 인격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정의는 타협되어 있다.” 그것은 정의를 발견하는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집단적 자발성의 작품이다” 철학은 개인의 작품보다 더 많은 인민의 작품이다. 철학은 “집단의 형이상학(une metaphysique de groupe)”이다. (781)
그 깊이에서, 프루동에 따르면 집단 형이상학과 다른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토대에서 분할되어 있을 뿐이고, 또한 이점에서 상반된 두 체계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초월(la transcendance)의 체계이며, 신에서 이든지, 권리의 주제 또는 주제자로서 교회 또는 국가라는 구성된 권위에서 이든지, 인간 밖에 위치해 있다. 카톨릭 교회는 이런 체계의 완성된 전형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루소, 칸트, 스피노자의 학설들, 정신주의자들의 학설들, 사회주의자들의 학설들, 그리고 ”신을 부정하면서 인류애의 위대한 존재에 연결하는 꽁트의 학설과도 아주 분명하게 다르다 [또한]. 다른 체계가 있다. 그것은 내재성(l’immanence)의 체계이며, 그것의 전형은 혁명이다. 그 체계는 법적인 주체를 인간의 동일한 의식과 사실 속에 자리 잡게 한다. 그것은 인간이 따로 떨어진 상태로 고려될 수 있고 그리고 이기주의와는 다른 법률이 없이도, 고려될 수 있는 추상작업에 의해서만 있다. 내재성은 원리의 인간에게 응용이며, 그 원리는 아마도 원리 그 자체로 온정의의 형식일 뿐이다. 꽁트의 교육에 따르면, 마치 과학으로부터 절대자의 탐구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처럼, 도덕과학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행해야만 했다. 도덕과학에서 절대자는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된 개별자일 것이다. 개체적 절대자들은 평형상태(l’équilibre)가 스스로 생산되기 위하여 충돌 속에 들어가야만 했다. 평형상태에서 그들 중에서 공통적인 것만이, 즉 “공공의 이법(la raison publique)”, 즉 “집단적 이법”만이 존속한다. 이러한 견해들에서 프루동은, 마치 부글레가 지적했듯이, 이 단어의 현실적 의미에서 한 사회학자이다. 그는, 정의가 “사회의 본질”임과 동시에 “인간 영혼의 고유한 형식”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갈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혁명에서 프루동은 교회와 투쟁하였다. 그것은 마치 볼테르처럼 부정자(un négateur)가 아니다. 그는 신념의 부재에서 그리고 그 부재 결과로서 전횡(l’arbitraire)에서 그의 시대의 사회의 잘못을 보았다. 나폴레옹 3세를 요약하여 말하는데, “어떤 정신적인 것이 카톨릭의 정신적인 것을 대체한다고 그는 이해한다.” 그는 물질만을 그리고 힘들만을 믿는 이들에 대해 반대한다. (782)
프루동의 철학은 문제들의 제기와 분류에서 하나의 체계라기보다 근본적인 변형작업이다. 그 변형작업 속에는 정의라는 용어에 의해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분열에 끝을 맺기 위한 그의 노력도 있고, 그리고 유신론이든 범신론이든, 이것들 사이의 상호 적대성은 그 당시에는 철학의 중대한 업무들이었는데, “초월적” 모든 체계들 사이에 그가 확립한 등가성도 있다. 이것들은 그의 사상 속에 위대한 가치를 알게 해주며, 그 사상의 암시들은 고갈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782) (57SMD) (3:32, 57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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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Bibliographie 782
Proudhon(1809-1865), Oeuvres complètes, éd. C. Bouglé et H. Moysser, 1926…; Carnets, éd. P. Haubtmann, 1960.
E. Dolléans(1877-1954), Proudhon, 1948
H. de Lubac(1896–1991), Proudhon et christianisme, 1945.
G. Gurvitch(1894-1965), Dialectique sociologie, 1962: Proudhon, 1965.
Pour les chapitres XIII à XVI: Maxime Leroy(1873-1957), Histoire des idées sociales en France, t. II, 1960, et t. III,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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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 논쟁가, 기자,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인, 사회학자, 그는 노동환경 출신의 유일한 이론가이자, 혁명가이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anarchiste)라 부른다.
1870 부글레(Célestin Charles Alfred Bouglé, 1870-1940),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La sociologie de Proudhon, 1911, Proudhon et notre temps, 1920.
1873 르르화(Maxime Leroy, 1873-1957) 프랑스 역사가, 사회 법학자.
1875 므와세(Henri Moysset, 1875-1949) 프랑스 역사학 교수, 정치가.
1877 돌레앙스(Edouard Dolléans, 1877-1954), 노동 운동 역사가. Proudhon. 1948
1894 귀르비치(Georges Gurvitch, né Guéorgui Davidovitch Gourvitch, 1894-1965), 러시아 사회학자(프랑스 귀화, 1928).
1896 앙리 드 뤼박(Henri-Marie Joseph Sonier de Lubac, Henri de Lubac, 1896–1991), 프랑스 제수이트 출신, 신학자, 추기경, Proudhon et le christianisme, 1945. « Le Dieu de Bergson. Deux Thèses de Doctorat sur Bergson », Études (1933/07) (A70,T216) (1933/09)
1912 하우프트만(Pierre Haubtmann, 1912–1971) 카톨릭 신부, 신학자. (57SMC)
(4:24, 57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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