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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노르웨이, 1863-1944
1863년 12월 12일 뭉크의 아버지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근교
빈민가에서 그당시 군의관으로 의사였다.
아버지 크리스티안 뭉크
(peter christian munch, 1817~1889)와
젊고 착한 로이라 카트리네 비욀스타 사이에서
누나 소피에 다음으로 태어났다.
1868년 겨울 뭉크가 5살 되던해에
어머니는 뱃속에 아이를 가진체
패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에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점점 더 슬픔에 빠져들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는 점점더
광적인 신자가 되었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뭉크에게
죽음과 지옥에 절망적인 공포를 갖게되어
의사가 되어라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한편 아버지의 지극한 신앙심을 물려받은
뭉크의 여동생 로이라는
종교에 극도로 심취하여 결국 정신병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873년 열세 살 때 뭉크는
심하게 앓았었다.
"열세 살 되던 크리스마스날 밤
나는 피를 토했었다.
열이 온몸을 흔들고
끔찍한 쇼크가 나를 삼켰다.
그러자 다음 순간
네가 최고의 심판자 앞에 서게 되다니,
넌 영원한 저주받을 거야."
이 소년은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맹세했었다.
"이제 그는 신과 계약을 맺었다.
- 신에 봉사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그가 다시 건강해진다면
- 어지럼증이 없어진다면
- 이전처럼 그렇게 마냥 즐겁게 살 수
없으리라고."
-에드바르 뭉크-
얼마 있지 않아 뭉크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누이이자 어머니 역활을
해 주었던 소피에 마져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동생 잉게르의 초상』
1892년, oil canvas
그의 어릴적 두려움과 고통은
후의 그의 글에서 알수 있다.
"나의 모친의 가계는
농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뿌리까지
어지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의 선조들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시인었지만
이들도 이미 타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태어났을 때
곧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죽음의 씨앗을
몸 안에 갖고 있었다.
6년 후 어지럼병이
다섯 어린 아이들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갔다.
그렇게 병과 정신착란과 죽음이
마치 검은 천사처럼
내 요람을 지키고 있었고
일생 동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울하고 신경질적이 되었다.
부담에 겨워 핼쓱해졌고주기적으로
종교적인 발작을 보였는데,
그것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신을 불러대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일찍
이 지상의 삶의 비참함과 위험요소들을
알아버렸고 또 죽음 이후에 오는 삶과
죄진 인간을 기다리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종교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우리와 장난치고 놀며
우리에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벌을 줄 때 그 영혼의 고통을 감내하기가
두 배나 더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의 신경증적인 광포함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에드바르 뭉크-
1879년 아버지의 등쌀에 못이겨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공과대학을 자퇴한다.
그후 그는 오슬로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미술·공예 학교에 잠시 다니게 된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노르웨이의 중요한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1852~1925)는
뭉크를 지도했으며
그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소개했다.
1885년 뭉크는 파리를 여행하게 된다.
인상주의를 접하게 된것이다.
『병든아이』
1885년, oil canvas, 119.5×118.5cm
아르누보 디자인을 접하게되고
고갱, 로트랙, 드가와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게된다.
아르누보 디자인
이후 뭉크는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로 간 그는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뭉크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과 같은 작가들을
사귀게 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빠지게 된다.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게질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나는 숨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랑하는 사람,
즉, 살아 있는 사람들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업의 신성함을 이해할 것이고,
교회에 있을 때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봄』
1889년, oil canvas 263.5cm x 169cm
오슬로 국립미술관
『생클루의 밤』1890년, oil canvas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1892년 9월 24일 뭉크는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아델스텐 노르만(adelsten normann)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매우 정중한 어조의 전시 초청장이었다.
뭉크는 자신의 최근작 55점과 함께
베를린으로 향했다.
11월 5일 토요일 오전 10시
'베를린 건축가의 집(장소)'에서 사람들은
뭉크의 그림을 보고 야유를 보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 창작의 자유와
예술에 대학 모욕 사이에서 사람들은
찬반 논쟁이 치열해져갔다.
결국 전시회는 일주일 만에 중단되고
독일 미술가 협회는 이일을 계기로
분열되고 만다.
『칼 요한 거리의 저녁』1892년, oil canvas,
라스무스메이에르 컬렉션
베를린에서 첫번째 전시회때 출품작
일명 '뭉크 스캔들' 이후 뭉크는
1893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에서 머물면서 독일에게
인상주의의 회화를 경험하게 한다.
『흡혈귀』
1893년, oil canvas,110cm x 100cm
고텐부르크 미술관
『병실에서의 죽음』1893년,
oil canvas, 160cm x 134.5cm
오슬로 시립 뭉크 미술관
『불안』1894년, oil canvas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담배를 든 자화상』<1895년, oil canvas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뭉크는 결혼을해 가족을 갖는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1902년, 결혼을 조르는 그의 애인 튤라와
실랑이 중에 권총이 잘못 발사되었고
뭉크는 이때 왼쪽 가운데 손가락 절반을
부상 당하게 된다.
『마라의 죽음』1907년,
oil canvas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총기 오발로 인해 부상당한 뭉크
이때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the sick one rises』1907~1908년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1908∼1909년에는
신경쇄약 증세를 보이게 된다.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그후 1910년 뭉크는
다시 노르웨이에 정착한다.
1920년대 뭉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중 한명이 되어있었다.
그의 작품은
다리파(독일 표현주의의 한 유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starry night』1923~1924년,
oil canvas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1933년 7월 19일 독일, 5000여점 회화와
1만 2000여점의 그래픽 작품이 전시된
'퇴폐미술전(일종의 분서갱유 사건)'을 열게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dr. paul joseph goebbels,
1897.10.29~1945.5.1)
뭉크의 그림 뿐만 아니라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샤갈, 들로네,
키리코. 앙소르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경매를 통해 헐값에 팔아 버렸고 불 태워졌다.
1944년 뭉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근처 집에서
홀로 은둔생활을 하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뭉크의 스튜디오 』(1944)
'노르웨이 최초의 인상파 화가이자
유일한 인상파 화가'인 뭉크. 평생을
생에 대한 절망과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그는 죽음보다 격렬한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을
화폭 위에 옮겨놓았다.
『절규』
1893년, oil canvas,
73.5cm x 91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 줌의 우울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고 너무나 피곤해서
난간에 기대었다.
흑청색의 피오르드와 도시 너머에는
불로 된 피와 혀가 걸려 있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었으나
나는 불안에 떨며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울리는 커다랗고
끝이 없는 비명 소리를 느꼈다."
-에드바르 뭉크-
화가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곡선으로 표현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구름으로 나타내었으며,
화면 하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형태의 왜곡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절규> 연작은 도난과의
지독한 악연으로 유명하다.
1994년 4명의 괴한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의
창문을 깨고 사다리를 타고 넘어와
유화 버전의 작품을 훔쳐갔었다.
그들은
"Thanks for the poor security".라는
메모를 남겨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3개월 뒤 구매자를 가장한 경찰의 함정수사로
다행히 붙잡혔고
작품은 손상되지 않은 채 돌아와
다시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2004년에는 3명의 복면 무장강도가
백주대낮에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 난입해
당시 관람중이던 수십여명의 관람객을
위협한 뒤 너무나 간단하게 템페라 버전의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었다.
이들 두 작품은 2006년에
다행히 되찾기는 했지만 노르웨이 경찰은
되찾은 과정에 대한 발표를 거부했고
이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절규>는 왼쪽 하단부가
약간 습기로 손상되었고,
<마돈나>는 오른쪽 테두리 부분이
좀 찢어지고 마돈나의 팔에 두개의 구멍이
뚫린 채 회수되었다.
『마돈나』 1893년 ~ 1894년,oil canvas,
70.5cm x 91cm 오슬로 시립 뭉크미술관
뒤돌아선 그녀는 음탕하고 요부의
관능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팜므파탈의 치명적인 여성이다.
뭉크가 만났던 여인들이 하필이면(?)
모두 그랬던 것일까..
질투, 1895
화면 앞의 남자가 뒤에 보이는 두 연인의
불타오르는 관계를경직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판에 따라서는 앞의 남자의 눈이
초록색에 가까운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연인의 관계는 이미 육체적 관계를 넘어선
뜨거운 관계인 것이 여인의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나신을 통해 암시되있다.
붉은 드레스라는 코드가 에로스가
충만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붉게 상기된 남녀의 얼굴..
남자가 들고있는 붉은 꽃의 정열..
배경으로 서있는 선악과를 연상시키는
붉은 열매가 달린 과수목..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봐야만 하는 남자..
그는 바로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였다.
질투. 연작
남이 사랑을 하건 말건
뭉크에게 무슨 상관일까...
상관이 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다그니 유을(Dagny Juel)
뭉크의 유년시절의 절친이었다가
성인이 된 후 베를린 유학 중에
다시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 다그니 유을(Dagny Juel) -
그녀는 음악을 전공하고 있었고
세련되고 지적이며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비극의 시작은 그녀를 뭉크 자신이
속해 있던 <검은 돼지>라는
진보적이고 보헤미안적인 예술가 클럽에
초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자유분방한 기질의 예술가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자신의 여인을
초대한 것은 어찌보면 자폭한 결과...
다그니의 미모와 지성은
수많은 연적을 낳았고 결국 그녀는 하필이면...
뭉크와 가장 사이가 가까웠던
폴란드 출신의 상징주의 작가
프시비지예프스키 와 사랑에 빠지는데
프시비지예프스키는 화가이며
건축, 의학, 문학, 철학에 이르는
다방면에 걸출한 남자였다.
키스, 1902
그녀와 나누었던 뜨거운 키스도
이젠 어언 옛일이 되었고
뭉크는 지옥과 같은 시절을 보낸다.
뭉크는 유년시절부터 평탄하지 못한
삶의 연속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랑하던 누이도 병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뭉크..
그 자신도 몸이 약했고..
언제든지 죽음이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린 시절의 사랑하는 여인들의 죽음은
그에게 여성은 죽음과 가까운 존재라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누드 1, 1913
뭉크의 첫사랑조차 순탄치 못했다.
보헤미안 기질의 유부녀,
헤이베르그 부인과 사랑에 빠져
그의 순정을 바쳤지만
그러나 상대는 육체적 사랑을
잠시 탐닉했을 뿐...
사랑에 있어서는 초보였던 뭉크에게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나갔다.
뭉크에게 다시 한번 여성은
죽음이라는 이미지..
자신의 순정마저도 짖밟고 심장을
찢어놓는 존재로 인식이 되었다..
고통의 꽃, 1897
심장은 마치 총맞은 것처럼...
선혈이 흘러내린다.
첫사랑의 아픔과 두번째 찾아온
사랑마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에
뭉크는 점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든다.
여자의 세 시기(스핑크스), 1894
여성의 세가지 시기는
스핑크스의 인간에 대한 질문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시간적인 변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얘기한다.
작품의 원래 의도와는 별개로
뭉크가 이해하고자 했던
여성의 다면적인 모습을 그려낸
한 여성이 갖고 있는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
그리고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의 것이 될수 없음을..
다른 남자에게로 떠나기 위해
길 위에 서는 여인..
뭉크에게 여성은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남자와 여자
뭉크에게 여성은 스트레스이며
풀지못한 숙제였음이 분명하다.
여성앞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자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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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르웨이의 화가인 뭉크의 그림과 설명을
잘 보고, 읽고 갑니다.
뭉크 하면 떠오르는 "절규" !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많이 궁금했었는데. 저녁님 덕분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을 감상하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