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잡다
강현자
뭉게구름은 유혹이다. 한여름 장마가 그치고 난 뒤의 하늘은 선물이다. 어렸을 때의 그런 구름하늘은 동화나라였다. 갖가지 동물 모양을 만들었다 사라지는 뭉게구름을 보며 혼자서 스토리를 꾸며내곤 했다. 문득 올려다본 오늘 하늘이 그렇다. 겹겹이 몽글몽글 피어오른 구름 떼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손에 잡힐 듯 낮게 뜬 솜구름을 볼 때마다 대바구니에 담아 폭신폭신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지금 내게 있는 건 대바구니가 아니라 카메라다. 맞아, 지금이야.
나는 그렇게 유혹에 걸려들고 말았다. 아니 내 스스로 유혹에 빠져버렸다. 구름은 그저 떠 있을 뿐인데 ……. 내게로 다가오는 유혹이건 내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유혹이건 내게 유혹의 문은 한없이 열려있나 보다. 배고픈 어린 내게 빠알갛게 익은 뱀딸기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던 것처럼 여태껏 살면서 크고 작은 유혹에 걸려 헤어나기 힘들었던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예닐곱 마리의 거대한 악어 떼가 시퍼런 호수를 향해 기어들어 가는 악어섬 사진을 보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적이 있다. 퍽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잊지 못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서 찍으면 되는지 이리저리 검색 끝에 결국 알아내고야 말았다. 도착하고 보니 과연 장관이었다. 가슴이 탁 트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섬 허리 실루엣이 하늘빛과 호수에 황톳빛 경계를 그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 이 거대한 광경을 보고도 왠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밋밋한 파란 하늘을 하얀 구름으로 채워보면 어떨까. 자연을 인위적으로 어쩌지 못하는, 자연의 신비에 의존해야만 하는 사진 작업의 한계를 아쉬워했다. 만약 내가 화가라면 그냥 구름을 그려 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오늘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 사진은 타이밍이다. 나는 점점 유혹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작품이 다 그려졌다. 문제는 거의 두 시간 거리의 충주호까지 구름이 제자리에 있어 주겠냐는 거다. 바람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 바람의 속도를 자동차로 따라잡을 수 있을까. 설마 저렇게 많은 구름이 두 시간 만에 모두 사라지진 않겠지. 이미 머릿속에 그려진 풍광에 무게 중심이 쏠리자 잽싸게 장비를 챙겨 출발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야.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욕심은 굉음을 내며 시동을 걸었다. 목표가 서면 욕심을 내기 마련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겠다고 마음이 서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것은 최선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결과야 어쨌든 미적지근한 것보다는 화끈해야 후회가 없다.
‘제발 천천히, 천천히’ 하늘을 가득 메운 몽실 구름이 그대로 머물러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악세레이더를 밟았다. 눈은 하늘을 향하는데 단속카메라가 자꾸 목덜미를 잡는다. 구름은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 저쪽 에는 이미 구름이 걷히고 민 하늘을 드러낸다. 자동차보다 마음이 앞선다. 경쟁이라도 하듯 마음이 조급하다.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 근처 휴게소 앞에 차를 세우고 장비를 둘러멨다. 등산용 스틱 대신 묵직한 삼각대를 들었다. 입구부터 급경사다. 코가 발등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한 번 와봤던 길이라서 이미 각오는 했지만 헐떡이는 숨은 어찌할 수가 없다. 허벅지가 팽팽하다. 산속 그늘에서도 척척 감기는 더운 열기가 숨통을 막는다. 아직은 구름이 남아있으니 그거라도 잡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급경사 등산로를 거의 뛰다시피 오른다. 쉴 틈이 없다. 구름을 잡아야 한다. 저놈을 잡아야 해.
이러는 내 모습이 우습다. 어디서 이런 체력이 나오는지 스스로 놀랍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면 죽을 맛이라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엔 에너지가 샘솟기 마련이다.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느긋할 수가 없다. 내 머릿속엔 호수로 기어드는 악어 떼와 그 위로 몽실몽실 떠 있는 흰구름의 조화가 다 그려져 있으니까.
이마에 솟은 땀이 볼을 간지럽히며 흐르다 턱 아래서 뚝뚝 떨어진다. 땀은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막연한 희망인가. 땀 흘린 뒤의 보람이란 말을 굳게 믿고 싶었다. 휘어진 산길을 돌아서자 소나무 숲 사이로 잔잔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개를 들었다. 몽글몽글하던 구름은 솜사탕 흩날리듯 이미 다 풀어졌다. 파란 하늘에 옅은 구름이 차츰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 많던 구름은 다 어디로 갔는가. 몇 개만이라도 떨어뜨리고 갈 순 없었는가. 파랗게 갠 하늘이 이렇게 허망하게 보인 적도 없었다. 멍하니 악어 떼만 무심히 바라본다.
세상사가 어차피 뜬구름 잡는 것이라지만,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 극구 해보고야 마는 나는 정말 바보인가. 매번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대가를 치르며 사는 것이 인생이런가.
그동안 한 길을 걸으며 열정을 쏟아왔던 일을 얼마 전 접었다. 그 방면에는 나름 전문가라고 자처할 만큼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과연 지나온 길을 제대로 온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뜬구름을 잡느라 나는 여태 그리도 치열하게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내가 성실하게 걸어온 이 길이 누군가에는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뜬구름일지라도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후회는 없다. 해보지도 않고 구름을 잡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뛰어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어야 아쉬움이 없다. 다시는 미련을 갖지 않을 테니까.
첫댓글 뜬구름 잡고, 지나온 길을 제대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