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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산란하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내면에서 온갖 생각과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해서 쫓아가고 따라가고 끌려가는 것. 그래서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 그것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정(定)이라는 것이지요. 본성은 스스로 깨끗하고 안정되어 있지요. 본래 청정하고 본래 뭐 안정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이 안정되어 있는데,
단지 대상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면서부터 마음은 산란해집니다. 바깥 경계를 보고 좋다 나쁘다, 이건 더 가져야지 저건 버려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부터 마음은 산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온갖 경계를 보고서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참된 정(定)이다. 바깥 경계를 보고 그것에 끌려가서 뭐 좋다 나쁘다, 취사 간택하는 마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정(定)이다.
그러니까 바른 정(定)은 외부 바깥 대상에 대해서 그걸 전혀 분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별은 분별대로 다 하지만 분별에 심하게 끌려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분별된 대상을 진짜라고 여기지 않고 그것을 좋은 거는 과도하게 집착하고 싫은 것은 과도하게 밀쳐내지 않는 것, 그것을 바른 선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육조단경에서 육조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에 앉아라.” 뭐 이런 얘기 없습니다.
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앉아 있는 것을 그동안 선(禪)이라고 착각해왔었던 것이지요. 다음에 보면 돈오와 점수라는 게 있는데,
법은 본래 하나의 종지(宗旨)일 뿐이지만,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이 있다. 법은 한 종류밖에 없지만, 법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빠르고 느림이 있다.
무엇을 돈(頓)과 점(漸)이라고 하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지만, 사람의 근기에 영특함과 우둔함이 있기에 돈점이라고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43)
이제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뭐∼ 이런 얘기들이, 이제 많은 논란들이 선(禪)에서 되고 있는 것들인데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같은 얘기입니다. 같은 얘기를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얘기할 수 있지요. 또 뭐 돈오냐 때로는 점오냐 뭐 이런 얘기도 하는데 그 또 뭐 같은 얘기입니다. 조금 더 방편의 본질에 가깝게 얘기한다면 돈오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데. 돈오라는 건 몰록 깨닫는다는 겁니다.
몰록 한 번에 깨닫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게 돈오거든요. 그런데 이제 우리 중생들의 그거는 깨닫는 입장에서는 돈오지요. 한순간 딱 깨닫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제 예를 들어 우리 중생들 입장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발심을 하고 법문을 듣고 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속적으로 마음속에서 이 ‘모를 뿐’ 하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도대체 ‘법이 무엇인가?’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풀어야 할 어떤 것을 마음속에 이렇게 화두 같은 것을 품고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을 굳이 또 표현한다면 뭐 점수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일단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깨닫는 것은 몰록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돈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몰록 오는 것이지 점차적으로 닦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고 또 기도 수행도 보면 이렇게 점차적인 어떤 단계 비슷한 것처럼 우리는 느껴요. 기도하는 사람은 조금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고, 기복적으로 비는 사람은. 나는 수준이 좀 높다 보니까 나는 수행을 해. 뭐 다라니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싸워요. 다라니가 더 영험이 있느냐? 뭐 광명진언이 더 영험이 있느냐?
아미타불 염불이 더 영험이 있느냐? 아니면 관세음보살이 더 영험이 있느냐? 아미타불이 부처님이니까 더 힘이 세다.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직접 내 옆에서 도와주는 분이니까 관세음보살이 더 세다. 뭐 이제 이런 방편을 가지고 다투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제 수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수행을 통해 특정한, 예를 들어 우리 신도님들끼리도 이제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신도님들도 서로서로 그러실 겁니다. 주변에 이제 도반들이 “야 나는 기도하다가 또 수행하다가 막 이런 걸 체험했어.” “야 이런 일이 있었어.” “기도하다가 뭐 깊은 어떤 이걸 삼매라고 하나?” “너무 고요한 마음을 느꼈어, 경험했어.” 뭐∼ 오만가지 체험들을 하니까 그런 걸 들으면서 ‘야 대단하다.’ ‘와∼ 저 사람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구나.’ 그러면서 이제 부러워하기 시작하고
또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한 것을 또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런 것을 뭔가 다시 한번 경험해볼 수 없을까? 하고 그걸 또 다시 좇아가고. 혹은 더 놀라운 체험을 한 사람들의 체험을 좇아가고. 이 체험 뭐 삼매 뭐 이런 것들, 뭐 신비주의적인 어떤 체험들, 이런 것을 좇아가는 것 자체가 그것을 좇아가려 했을 때 그건 병이 되는 줄 모르고. 그게 그냥 일어나는 채로 내버려 두면 그건 그냥 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스님들이 말하듯이 저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여기는 온통 괴로움의 바다잖아요. 힘들고 괴로운 온갖 괴로운 일이 벌어지지만 저 피안으로 가려고 마음만 내면 저 피안으로 가는 과정에 벌써 주변 경치부터가 여기와는 다르다. 아주 아름다운 경치와 그러니까 일단 발심해서 마음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깨닫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만도 벌써 이 차안,
이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이 괴로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행복감이 있고 평화로움이 있고 참으로 어떤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 그런 어떤 주변 경치와도 같은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내가 진짜 목적지를 가는 사람이 이 경치에 혈안이 되어서 목적지를 가지 못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치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딱 좋은 경치가 있다고 거기에 눌러앉아서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병이 되어서 그게 나를 붙잡고 있는 집착하는 대상이 되어서 저 길로 가는 것을 방해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삼매를 체험하거나 뭐 놀라운 체험을 하거나 이런 것은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수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이 다 다르잖아요. 예를 들면 이럴 수도 있어요.
또 이것도 다는 아니지만, 삶이 너무 힘들었던 사람은요. 너무너무 힘들고 괴롭고 막 고통이 많았던 사람은 명상이나 수행을 조금만 시키면 뭐 한 30분 안에 뭐 10분 20분만 명상이나 염불을 해도 놀라운 체험들을 막 합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중학생 고등학생 수련대회를 해주다 보면 염불수행을 딱 앉아가지고 한 30분만 딱 시키면 그중에 한 반수 이상 한 60, 70%정도는 오만가지 체험을 다 해요.
어떤 아이들은 펑펑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 뭐 너무 개운해졌다고도 하고. 뭐 어떤 아이들은 밖으로 뛰쳐나가가지고 막 뭘 토해내기도 하고요. 막 놀라운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고 온갖 체험들을 다 합니다. 그럼 그 친구들은 대단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러느냐?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너무너무 고통이 큰 사람은 작은 명상에도 큰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또 내가 그런 다양한 체험을 한다고 ‘그럼 내가 고통이 많은 사람인가?’ ‘업이 많은 사람인가?’ 그게 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할 수가 없어요. 정해놓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단 한 번의 신비체험도 삼매 같은 체험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런 것도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이 수행에 소질이 없구나.’ ‘나는 이 수행이 내 체질에 안 맞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사람마다 다 취향도 차이가 있고 체질도 차이가 있고 이러듯이 그냥 서로 다른 것이지. 어떤 것이 필수이거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왜? 그것은 어차피 왔다가 가는 허망한 거니까. 내가 수행하다가 뭔가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체험이 있으면 수행 잘하는 사람. 체험이 없으면 수행 못하는 사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제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게 선(禪)을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몰록 깨닫는 돈오의 체험이 일어나는데 돈오의 체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실은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도 이제 억지로 말하자면 그것도 하나의 수행이라고도 뭐 굳이 표현하려면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실 그것은 그냥 수행이라기보다는 모르는 거지요,
모르는 것. 모르는 거. 즉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공부를 할 때 알아야 된다고 여기면서, 세상 공부는 다 아는 공부잖아요. 뭔가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얻거나 공부해서 기술을 얻거나 뭔가를 많이 얻고 많이 알면 그것을 써먹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지식이 생겨요. 그래서 대상을 파악할 때는 그 대상을 알고 모르고를 가지고 파악하거든요. “너 저 알아?” “저 사람 알아?, 몰라?” “나 알아.” “나 몰라.”
이렇게 안다 모른다, 라고 파악을 하거든요. 안다고 여기니까 이건 나한테 좋은 거야, 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좋은 거는 집착해서 내가 가지려고 애써요. 이거는 나한테 안 좋은 거야, 라고 생각해요, 안다고 여기니까. 사실은 나한테 안 좋은 거라고 여기는 이게 나한테 더 좋은 건지 알 수 없으면서 안다고 여겨요. 내가 뭐 자식이 좋은 대학교 a라는 대학교에 반드시 가야 돼.
그래서 a라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막 공부를 시켜요. 그거는 어떤 일이냐면 어리석은 일인 이유가 뭐냐면 사실은요 우리는 많이 알면 지혜롭다고 여기고 모르면 어리석다고 생각하잖아요. 전도몽상입니다. 거꾸로입니다, 거꾸로. 안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왜냐면 알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모른다,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왜냐면 알 수 없잖아요.
제가 이런 비유를 많이 들었듯이 여기 아카데미 끝나고 여러분이 집에 돌아갈 때 이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이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이 길로 가는 게 더 좋은지 조차도 여러분은 알 수 없어요. 이 길로 가는 게 좋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이 길로 가다가 대형사고가 나서 내가 괜히 거기서 사고로 다칠 수 있을지 어찌 알겠어요. 알 수가 없는 일이에요. 내가 이 사람하고 친한 게 좋은지 안 친한 게 좋은지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는 거지요. 자식이 좀 사고를 쳐서 어딜 다쳤다. 무조건 나쁘다, 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자식이 a라는 대학에 가는 게 반드시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a라는 직장에 취직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그 직장 시험에 떨어지는 게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살아왔던 경험에 비추어서 안다고 여기는 거거든요.
그런데 과거에는 옳았는데 지금은 틀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는 일도 많고요. 또 같은 일이 어떤 경우에는 옳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틀릴 수도 있거든요. 특히 우리들이 이제 아이들에게 그런 우(愚)를 범하기도 하지요. 내가 살아왔을 땐 이렇게 사는 게 맞았어. 하니까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강요를 하는데
그럴 때 아이들은 ‘아 이거 대화가 안 된다.’ ‘우리 엄마하고는 대화가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열려있다고 생각을 했고 상당히 젊은 감각이라고 저는 이제 생각을 했는데. 20대 장병들하고 항상 만나다 보니까 제가 그걸 인정하기가 싫더라고요. 이 애들이 저를 “아이 무슨 나이 든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건 옛날 생각이다.” 이런 얘기가 아 저는 인정하기가 싫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야 이게 저 친구들 생각하고 내 생각이 아 정말 다른 부분들이 꽤 있구나.' 정말 다른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인정하기 싫더라고요, 처음에는. “야 그건 네가 좀 다른 거 아니야.” “아이 아닙니다.” “우리시대는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닌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옳고 쟤네들은 틀렸으니까 내가 너를 가르쳐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하지요.
그것처럼 우리는 우리 삶에서 내 인생에서 나는 안다, 라고 착각합니다. 나는 안다, 라고 착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인생을 누구보다 내가 내 인생을 잘 알아.’ ‘내가 나를 잘 알아.’ ‘그러니까 내 미래는 이렇게 돼야 돼.’ ‘내 인생 이렇게 되는 게 최악이야.’ ‘내 인생은 반드시 이렇게 돼야 돼’ 하고 자신의 인생에 계획을 잡고 플랜을 세워놉니다.
자식들은 ‘너는 내가 너를 몰라?’ ‘내가 너를 잘 알아.’ ‘넌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돼.’ ‘엄마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야 그 대학 그 과는 안 좋은 데야.’ ‘일단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되고 과도 좀 좋은 과를 실용적인 과를 가야 돼.’ 이런 식으로 이제 안다고 여기니까 아는 것이 진짜라고 여기고 안다고 여기니까 오만을 부리는 겁니다. 안다고 여기니까 거기에 집착하는 거지요. 그래서 ‘내 인생은 이렇게 돼야 돼’ 라고 계획을 세워놓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이 그렇게 돼야 되는지 그렇게 되면 안 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 지금까지는 이렇게, 이렇게 착 착 성공의 길을 걸어왔는데. 지금은 이 길이 아니라 맨 날 걸어오던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야 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뭔가 새로운 삶의 전환을 맞아야 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공부를 알고 나서 이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나서 어떤 분은 너무 큰 절망, 너무 큰 괴로움을 겪었다 보니까 너무 충격에 빠져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본인은 종교는 절대 믿지도 않았다. 종교를 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같이 느꼈다. 속으로 되게 싫어했데요. 뭐 또 tv에 나오는 옛날에 뭐 지금도 그렇지만 뭐∼ 무슨 종교인들이 막 싸우고
뭐∼ 돈을 착복하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 ‘봐라, 내 생각이 옳아.’ ‘다 사기꾼들이야.’ ‘종교는 다 나쁜 놈들이야.’ 이렇게만 굳게 믿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인이 너무 괴로워 죽을 거 같이 괴로우니까 어쩔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법회 와서 법문을 들었는데 법문을 들으면서 너무나도 이제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아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사로잡혀서 살았었구나.’
하면서 이제 되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아주 너무나도 행복해졌어요. 그러면서 이제 마음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던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이제 어떤 표현을 쓰셨냐면. 되돌아보니까 제 인생에 가장 최악이었던 가장 크게 괴로웠던 그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제 인생에 가장 큰 스승이었고 가장 놀라운 어떤 내 인생에 보배스런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그때였다.
물론 그때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라고 여겼지만 그 최악의 괴로움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마음공부 이 불법이라는 참맛을 결코 알지 못하고 오히려 옛날처럼 욕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욕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안다고 여겼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거든요. 냉정하게 따져서 여러분이 내일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습니까?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니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나에게 더 좋은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한 개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점심에 뭐 드실지 알 수 있을까요? 뭐 내가 먹을 건데도 뭘 먹을지 사실 알 수 없어요. 나는 뭐 짜장면을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가다가 오랜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가 식당을 하느라고 거기서 사준다. 이래서 딴 걸 먹게 될 수도 있고. 갑자기 복통이 나서 못 먹게 될 수도 있고.
근자의 한 달 사이에 제 주변 혹은 뭐 건너 건너서 한 네댓 분 정도가 이렇게 돌아가시게 됐고요. 그것도 또 아주 건강하시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 분도 계시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분도 계시고. 또, 또 몇 분이 생각지 못했던 그 사고를 당해서, 제 바로 밑에 동생스님이 있는데 사제스님이 있는데.
갑자기 그 사고를 당해가지고 가만히 서있는데 차가 와서 박아가지고 다리를 절단해야 된다고 그랬다가 차마 절단할 수 없어서 이제 더 큰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한번 일단 수술해보자. 뭐 확률은 작지만 그런데 어쨌든 수술이 좀 잘돼서 절단은 안 해도 될 거 같다. 하고 경과를 좀 지켜보자. 이런 상황도 있었고.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일어났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정말 어제 만났는데 어제 그저께 만나서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에 대해서 재밌게 이야기 나누고 그랬었는데. 갑자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저 세상 사람이 된 사람도 있고, 아주 젊은 데도 불구하고. 또 갑자기 그 멀쩡하고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꼼짝 못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게도 되는 것이지요. 알 수 없는 겁니다,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다고 여김으로써 그 안다고 여기는 오만한 마음 때문에 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지요. ‘나는 내 미래를 알아.’ ‘내 미래는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돼.’ ‘내가 계획한 삶의 계획대로 착착 착 이루어져야 돼.’ 이렇게 여기니까 내일은 이런 일이 벌어져야 되고 모레는 저런 일이 벌어져야 되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을 때 괴로워합니다.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야 돼’ 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벌어지지 않을 때 괴로워해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벌어지는 거지? 사실은 법계의 인연 따라 이 우주법계 계획대로 착착 아주 아름다운 장엄한 삶이 하나도 문제되지 않는 삶이 벌어지고 있을 뿐임에도 우리는 이 머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 계획대로 돼야 돼’ 라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이건 뭔가 문제 있는 삶이고 뭔가 내 인생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라는 강력한 어떤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느낌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내가 특정한 방식의 삶을 원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내 인생은 벌어져야 된다, 라고 고집하니까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할수록 내 자식은 절대 이런 정도의 대학은 가야 돼. 내 남편은 반드시 진급을 해야 돼.
뭐 이런 식의 집착을 하고.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일수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같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은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거지요. ‘내 미래에 병이 나면 어쩌지?’ ‘내 노후가 불안정하면 어쩌지?’ 하는 온갖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가 머릿속으로 계획해놓은 미래에 집착하거나 그 미래에 계획해놓은 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빠져서 지금 이 순간을 온갖 두려움과 집착과 탐진치 삼독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 완전한 삶의 진실이 완전한 삶의 진리가 매 순간 펼쳐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낮에는 좀 덥다가 오후 나절에 이렇게 단청이 얼마나 잘 되고 있나 해서 이렇게 한 바퀴 돌려고 밖으로 나갔더니 그늘은 아주 시원하더라고요. 또 여기 3층 부분을 이렇게 한 바퀴 도는데 꼴랑 그것도 3층이라고 약간 높이 올라가니까 바람이 아주 살랑살랑 불어오는 게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그렇게 바람이 불어올 때 여러분들 혹시나 어느 인생의 어느 순간에 뭐 여행지에 있었던 어느 순간이든지.
그런 순간에 막 땀을 흘리고 났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내 몸을 확 적셔줄 때의 아주 너무나도 좋았던 순간들이 혹시 계셨는지 모르겠어요. 풍경을 바라보면서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 지구별이라는 이 땅에서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는 아침 해가 이렇게 아름다웠었단 말이야.’ ‘지는 노을이 한강에서 지는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웠었어?’ 하고 깜짝 놀라는 순간이 간혹 있잖아요?
자주 있으면 좋고요.(웃음) 그러한 내 눈앞에는 매 순간, 매 순간 정말 부처님을 꼭 빼닮은 너무나도 놀라운 내 아들이라는 놀라운 한 분의 부처님이 내 눈앞에 항상 있는데. 우리는 그 부처님과 싸우기 바쁘고 잔소리하기 바쁘고. 매 순간 우리 앞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생각을 옳다고 믿지 않고 내가 안다고 여기는 오만 심을 버리고 안다, 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모른다,
라는 참된 지혜를 신뢰하기 시작하면 자식하고 싸울 필요도 없어져요. 자식하고 왜 싸우겠습니까? 공부해야 되니까. 공부하는 건 좋은 거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건 너를 위한 최선이라고 그것을 난 알고 있다, 라고 여기니까. 이걸 100% 옳다고 여기니까. 잠시도 쉴 틈을 안 줘요. 좀 쉬어야지 공부도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대로 공부를 하고 있어야 뭔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거 같고 게임을 하고 있으면 이거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만 같은.
이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게임을 하니까 나쁜 거야, 라는 이 생각. 같이 게임을 배워가지고 좀 “야 자주는 하지 말고 엄마랑 같이 야 가끔 한 번씩 하자.” 차라리 그렇게 해보시든 게임을 취미로 한번 해보시든. 그런데 내가 옳다고 여기게 되면 게임은 나쁜 거 공부는 좋은 거 이렇게 옳다고 여기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싸웁니다. 자식이 문제가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옳다,
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거든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안다고 여기는 것 때문에 내 스스로 괴로워집니다. 그런데 정작 진실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모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모를 뿐, 미지의 거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큰스님께 제자가 “제 미래가 어떻게 될까요?” “저는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렇게 시간만 보내느니 나가서 옛날 사귀던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게 안 나을까요?” “다시 가면 그 여자 친구가 저를 만나줄까요?” 온갖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 스승님이 “나도 모르겠다.” “아니 왜 큰스님인데, 큰스님이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제 미래를 어떻게 좀 알려주십시오.” “그렇다면 내가 이런 얘기는 쉽게 안 하는데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확실한, 확실한 너의 미래를 얘기해 줄 테니까 믿겠느냐?”
“아이고 큰스님 말씀인데 제가 안 믿겠습니까?” “100% 믿습니다, 믿습니다.” “좋다, 100% 확실히 믿어야 된다.” “알겠습니다.” “잘 들어라.” “너의 미래는 매일, 일주일 뒤,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 완전히 확실한 답이다.” “너의 미래는 완전히 불확실하다.”(웃음) 그것만이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거지요. 완전히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한 유일한 답입니다.
정해진 확실한 답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게 진정한 스승이거든요. “그래 너 보니까 그래 사업투자해도 되겠다.” “성공하겠다.” “야 너 어느 방위로 이사를 가야 되겠다.” “뭐 방에 책상을 요렇게 좀 바꿔봐라.” 뭐 어쩌고저쩌고. 미래에 뭐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겠다. 다 사기꾼입니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아는 것처럼 하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진실이라니까요.
그런데 아는 것처럼 하는 사기꾼들에 혹해서 거기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모른다, 라는 사실을 딱 자각하고 나면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할 필요도 없고 계획은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계획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대충 내가 미래를 이렇게 살면 되겠다, 라고 가(可)안은 있어야지요, 삶에. 가(可)안은 있는 건 좋습니다. 없으면 더 좋고.
그런데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스님들께 보통 인터뷰 같은 거 많이 할 때 저도 그런 질문할 때마다 이런 답을 했던 거 같은데. 스님들이 보통 전형적으로 답변하는 패턴이 있어요. 인터뷰하고 마지막에 “스님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십시오.” 뭐라 그럽니까? “그냥 인연 따라 사는 거지.” “뭔 계획이 있느냐.” 다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미래에 계획이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계획은 어디까지나 가(可)안일 뿐이고.
큰 가(可)안. 나는 첫째 말 그대로 상구보리 하화중생,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난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최선을 다하겠다. 나머지는 삶에게 맡긴다. 삶이라는 진실. 나라는 개체적인 자아가 가지는 이 아상이 가지는 내가 안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 라는 그 계획은 믿지 않는다. 삶을 믿는다. 삶이라는 이 장엄한 진실. 입처개진, 내가 서있는 이 자리의 진실을 믿는다.
그러니까 미래를 머리를 가지고 안다고 여겨서 계획해놨던 것은 허망한 것인데 반해서 참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진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서있는 이 자리라는 진실. 이것만이 확실한 진실이에요. 해석하지 않은 채 지금 이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 지금 이대로 서있을 때 이대로 완전합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데 제 말을 (죽비를 친다) 이 소리를 억지로, 억지로 막 들어야지만 듣는 사람은 없지요? (죽비를 친다) 이 소리를 듣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듣지 않고 싶어도 그냥 저절로 듣게 돼요. 완전하게 듣게 됩니다. 완벽합니다. 이 소리를 듣는데 애쓸 필요가 없어요. 저마다 이미 갖추고 있는 능력이에요. 눈으로 저를 보는데 막 엄청 노력을 해야지만 아주 엄청난 노력을 해야지만 저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눈만 뜨면 보고 있어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밥을 찾아 먹게 돼있습니다. 저절로 삶은 살아지게 되어 있어요.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고 배부르면 싸게 되고 자연스럽게 삶은 완전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이 완전한 삶이 그야말로 주어져 있는 이 완전한 삶에 입처개진으로 온전한 진리가 진리의 삶이 피어나고 있는 부처가 저절로 부처의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에다 대고 내 머리를 가지고 자꾸 중계방송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오늘 잘 살았다.’ ‘야 너 오늘은 좀 이건 안 좋았고 저건 좋았으니까 내일은 좀 더 잘 살아.’ ‘야 내일모레는 이런 걸 좀 해보면 어때?’ 이런 생각으로 막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생각으로 해석하는 것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가 안다, 라는 착각을 믿지 않고 모른다, 라는 사실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모르니까, 모르니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어차피 안다, 라고 여겨서 막 집착하고 이럴 필요가 없어요, 모를 때는. 그냥 내맡기는 거예요. 뭐만 진실한가? 지금 이 순간만이 진실하니까.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오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지금 진실한 겁니다. 가장 진실한 것은 지금 나에게 오고 있는 겁니다. 가장 참된 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발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뭐만 확실할까요? 내가 지금 내딛는 그 발이 진실입니다. 일주일 있다가 어떤 결정을 해야 되는데 뭐 하러 지금부터 결정을 해요. 고민 안 해도 됩니다. 너무 애매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한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돼요. 그냥 일주일 되면 일주일 후에 지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그때 가서 그냥 하면 되지. 내가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답이 안 나와요.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답이 안 나옵니다. ‘내가 직장생활 하는 게 좋을까?’ ‘아니 그냥 애들 뒷바라지 하는 게 좋을까?’ 답이 없습니다. 거기 무슨 답이 있어요. 인연 따라 하는 것이지. ‘a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을까?’ ‘b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을까?’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곳은 a가 돼도 답이고 b가 돼도 답입니다. 내가 걷는 그 길이 답입니다. 그게 틀리면 어쩌겠어요? 틀리면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면 됩니다.
갔다가 되돌아오는 그 과정에서 나는 뭔가 배우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삶을 경험하는 그것만으로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지요. 공부가 되는 것이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는데 내 생각이 잘못된 길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재수하면 실패? 괜히 일 년 버렸다? 일 년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습니까? 온전히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지금 이 순간이라는 그 자리에 언제나 있었을 뿐인데.
내 생각만 나는 그 시간을 버렸다, 라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진리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다고 여기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히는 이런 망상만 없게 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일체 법이 불법이다. 일체 법이 한 법이다. 일체 모든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참된 진실이다. 일진법계 하나의 진실한 보배 모습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일불성이라고도 하고 하나의 부처다. 우리 눈에는 다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이걸 상이라고 부른다 했잖아요. 상으로 보이지만 진실에서는 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실상 무상. 실상은 무상. 상이 없다. 그것을 일상이라고도 합니다.
하나의 상이다. 우리는 다 다르게 보이지만 참된 진실에서는 전부다 하나. 하나임.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실이 드러나 있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우리 눈은 중생의 삶만을 살아왔다 보니까 생각으로 해석해서 보이는 분별 대상만이 보이지요. 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언제나 모르겠지요. 지금 이것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니 이것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부처고 들리는 소리가 전부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라고 하고. 일체 시 일체 처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일체 시 일체 처에 모든 것이 중생으로 보이고 사물로 보이고 대상으로 보이고 모양과 이미지로 보일 뿐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르는 겁니다. 이 법이 뭔지를 모르는 거지요. 그냥 오로지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
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를 뿐 모르겠구나. 이 법은 그냥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다. 요즘 말로 일도 모르겠다. 나는 불교 공부를 좀 많이 했으니까 남들은 불교 공부를 안 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도 나는 그래도 불교 벌써 공부한 부력이 20년 30년인데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더 알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거는 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웃음) 그러니까 이 지식은 있을 수 있지요.
불교적인 지식은 있을 수 있지만 지식은 뭐 서로 다를 수 있지요. 여기 계신 분들이 불교적 지식은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지만 이 참 성품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똑같다. 그럼 이 참 성품에 대해서는 일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이처럼 모르겠구나. 지금까지 중생으로 살아온 삶은 항상 안다, 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던 삶이라면 안다고 여기니까 맞다 틀리다를 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라는 걸 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를 안다고 여기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지요. 즉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전면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안다고 여기면서 살아오던 삶에서 이제 모를 뿐. 모를 뿐 하면 분별이 할 일이 없어져요. 안다고 생각하면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를 판단해야 되는데 이제 모르니까 어느 게 더 좋은지 어느 게 옳은 것인지
어느 게 큰 것인지. 이게 길다는 걸 나는 아는데 길다 라고 할 수도 없고 짧다 라고도 할 수 없다. 내 성격이 난 어떤 걸 아는데 내 성격이 좋다 나쁘다 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면 생각할 것이 없어지잖아요. 내가 잘났다 해도 잘못됐고 못났다 해도 잘못됐고.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의식들 모든 의식들을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크다 작다, 도움이 된다, 도움이 안 된다. 뭐 이런 분별들이 전부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걸 이제 콱 막힌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를 뿐. 모르게 되면 모른다, 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화두에서는 의식이 갈 길을 잃고 그냥 콱 막혀버린다. 그래서 여러 가지 뭐 이제 이야기를 하자면 콱 막히는 것을 뭐 은산철벽에 갇힌 것 같다. 온통 그냥 거대한 어떤 철벽이 나를 꽉 누르고 있어서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꼼짝달싹 못하는 의식이 가로막히는 상태.
또 뭐라 그러더라. 은산철벽이라고도 하고 뭐∼ 소라의 쥐가 먹이를 먹으려고 들어갔는데 콱 몸이 막혀가지고 먹이는 저 앞에 보이니까 자꾸 먹고 싶으니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몸이 더 꽉 끼어서 나오지 못하는 뭐 이런 상태? 그러고 목에 뭔가 목에 밤송이가 탁 걸렸는데 이걸 그냥 꿀꺽 삼키려니 이게 들어가니까 더 큰 야단이 나잖아요. 뱉으려니 뱉지도 못하고 또 아파죽겠고.
그래서 이게 콱 막혀놓으니까 뭘 먹지도 못하고 안 먹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냥 콱 막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거밖에는 내 인생에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경치가 있다고 해서 밤송이가 딱 목에 들어가 있는데 그걸 찾겠어요. 내가 성공하기를 바라겠어요. 뭘 바라겠어요.(웃음) 당장 요걸 일단 뽑아야 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자기 성품을 모르는 이 하나의 과제 하나의 숙제가 콱 나를, 목구멍에 밤송이가 콱 걸린 것처럼 잡혀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제 발심을 한다, 라고도 하고 그걸 뭐 화두선에서는 뭐 화두가 잡혔다. 뭐 이런 식으로 표현도 하고. 그런데 이제 그것을 또 화두를 들어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면 이 화두를 막 들어야 될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은 보세요. 처음 우리 아카데미강의 시작할 때 비해 그래도 상당히 출석률이 끝날 때까지 우수해서 참 제가 신기할 지경인데요.(웃음) 그래도 아마 처음 강의할 때는 이 의자들 앞으로 쭉 빼고 앞에도 방석을 이만큼 놓고 저 옆에도 하여간 좌우 간격이 없을 정도로 가득 채웠었는데 이제 방석을 좀 뺀 겁니다. 중간 중간에 이제 떨어져 나갈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이렇게 계속 앉아계시는 것이 바로 뭐 어떤 사람은 예를 들어 뭐 그냥 나는 심심해서 간다, 이럴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무언가 내가 이 공부를 해야 되겠다. 뭔가 이 내 성품을 확인해야 되겠다. 이 깨달음을 한번,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확인해봐야 되겠다, 라는 발심 때문에 계속 나오고 계시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벌써 화두가 들린 겁니다. 화두를 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1시간 11분 녹취)
첫댓글 온갖 경계를 보고서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참된 정(定)이다. 바깥 경계를 보고 그것에 끌려가서 뭐 좋다 나쁘다, 취사 간택하는 마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정(定)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이건 뭔가 문제 있는 삶이고 뭔가 내 인생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라는 강력한 어떤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진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서있는 이 자리라는 진실. 이것만이 확실한 진실이에요. 해석하지 않은 채 지금 이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
(죽비를 친다) 이 소리를 듣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듣지 않고 싶어도 그냥 저절로 듣게 돼요. 완전하게 듣게 됩니다. 완벽합니다. 이 소리를 듣는데 애쓸 필요가 없어요. 저마다 이미 갖추고 있는 능력이에요. 눈으로 저를 보는데 막 엄청 노력을 해야지만 아주 엄청난 노력을 해야지만 저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눈만 뜨면 보고 있어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밥을 찾아 먹게 돼있습니다. 저절로 삶은 살아지게 되어 있어요.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고 배부르면 싸게 되고 자연스럽게 삶은 완전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진실한 것은 지금 나에게 오고 있는 겁니다.
@무멍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같은 얘기입니다.
같은 얘기를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얘기할 수 있지요.
우리 중생들 입장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발심을 하고 법문을 듣고 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속적으로 마음속에서 이 ‘모를 뿐’ 하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도대체 ‘법이 무엇인가?’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풀어야 할 어떤 것을 마음속에 이렇게 화두 같은 것을 품고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것을 굳이 또 표현한다면 뭐 점수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요.
어느 순간 몰록 깨닫는 돈오의 체험. 깨달음이라는 것은 몰록 오는 것이지 점차적으로 닦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직 모를 뿐!
감사합니다~
일도 모르는 겁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