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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함과 믿음 원문보기 글쓴이: chukang
유효적 은혜(3) 에베소서 2:1-9
* 보편적 은혜란 무엇인가?
칼빈주의의 유효적 은혜에 대항한 이론이 보편적 은혜라는 알미니안주의의 이론입니다. 보편이라는 뜻은 ‘두루 널리 미침’, ‘많거나 적거나 일정수의 대상에 공통하여 예외가 없는 일’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는 ‘universality’, ‘pervasiveness’(널리 미치는) 이라고 하고 보편적 진리라는 말은 ‘universal truth'라고 합니다. 유효적이라는 말은 'Efficacious'라는 단어로 ’의도된 효과가 있는‘ ’효험이 있는‘ ’조처나 수단이 유효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효적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도한 사람에게만 은혜가 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말하고, 보편적 은혜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결정권은 사람에게 주어서 스스로가 구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이 기쁜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환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복음이 결코 복된 소식이거나,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구태여 내가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며, 내 힘과 내 생각으로 믿고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까?
보편적 은혜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보스톤 대학의 교수였던 ‘헨리 C. 쉘돈(Henry C. Sheldon)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우리의 논점은 영생을 위한 개개인을 배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선택한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구원의 기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심결에 들으면 인간이 참 위대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이며 구원의 결정권이라는 아주 커다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불신자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정말 반가운 말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 종교의 교리를 더욱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들리는 말을 듣고, 그 말에 애써 자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교리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합리화시키기에 익숙합니다.
우리들도 교회 안에서 간혹 볼 수 있듯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오직 말씀’이라는 깊은 의미를 잘 모르고 있으며, 성경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절대 진리를 완화시켜서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회만 그럴까요? 불교를 한 번 볼까요? 불교의 대표적 교리 중의 하나는 ‘윤회설’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나쁜 짓을 하면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유교의 대표적 교리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절에 죽은 사람을 모신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극락에 가게 해 달라고 염불도 하고 제사도 지냅니다. 참고로 불교의 그 어떤 경전에도 사람이 죽으면 ‘극락’에 간다는 말은 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겠습니까?
불교의 진리대로 하면 사람이 죽으면 이미 그 죽은 사람은 육신은 땅에 묻히거나 태워지고, 그 사람의 영혼은 부처가 되어 열반에 이르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짐승이나 벌레나 이런 것들로 태어나는데, 유교에서 말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미 귀신이 되었습니다. 이 귀신은 우리 주변에 항상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천당에 가는 귀신도 없고 지옥에 가는 귀신도 없습니다. 그런 귀신을 구천에서 떠돌지 말고 좋은 곳에 가라고 절에다 모시고 염불을 해주는 것이 어떻게 그들의 교리에 맞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것에 대하여 괘념치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 스스로도 불교의 교리나 유교의 교리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사실 교리 자체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 유교, 토속, 무속 신앙이 다 결합이 되어 있으며, 다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생각에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하는 허황된 희망에 맡기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교의 제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감리교에서도 작년부터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나 감리교는 이미 성경 말씀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신앙편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불신앙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었다고 믿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였나요? 귀신이 된다고 어디에 씌어 있나요?
누가복음 16:22,23을 보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 말씀을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것이며, 부자는 음부 즉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은 죽으면 천국이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한 곳에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2,43을 보면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죽음 뒤에 이 우편 강도는 귀신이 된 것이 아니라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자 그러면 다시 보편적 은혜론으로 돌아가면, 알미니안주의에서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대항을 목적으로 ‘복음 동맹’즉 ‘모라소니안 신조’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신조의 세 가지 보편성’을 요약하면 “첫째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차별이나 예외 규정 또는 편애 없이 모든 곳의 인간에게 예수의 희생을 선물로 주신 것이요, 둘째 성자 하나님의 사랑은 전 세계의 죄를 위하여 진정한 화해의 제물로 자신을 주신 일이요, 셋째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는 그의 인격적, 계속적 사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그 결론은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첫째 모든 인간이 똑 같이 구원을 얻든지, 둘째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 결국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가 자기를 구원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그 구원 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완전히 인간에게 일임하셨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것으로써 구원이 결국 인간의 수중에 달린 것이 되고 맙니다.
이 체계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사역의 대부분을 하신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최후의 결정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이 구원을 받을 자는 어느 정도 자기의 개인적 공로를 갖게 되고,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 자랑할 조건을 갖게 됩니다. 즉 “너는 나와 같은 기회를 갖고 있었지만, 그런데 너는 거절하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31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 유효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
유효적 은혜는 인간이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결국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킨 교리라고 반대론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을 제대로 모르면 그렇구나 하고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견해를 배제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회심을 일으키는 유효적 은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기록한 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을 갖게 되어 임의적으로 회심에 이르는 것”이라고 덧 붙였습니다. 중생케 하는 능력은 외부의 강제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목석이나 노예처럼 취급되어 그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 자신 그리고 죄에 관한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이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찬미하도록 그들을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자기가 새로운 동기와 욕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전에는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혼 안에 창조된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처럼 영적인 법도 “선한 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는”것입니다.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시민과 범법자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법을 준수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의 법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않고 매일 자기 일을 자유롭게 해 나갑니다. 경찰이나 군인을 보아도 친구나 보호자로 여기게 됩니다. 법은 그의 생명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재산을 지켜주는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범법자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달라집니다. 어쩌면 법을 준수하는 사람보다 법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며 법망을 피하기 위해 법에 대해 자세히 연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언제 경찰이 찾아올지 모르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원리는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강제적으로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만일 너희가 복종하지 않으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만일 너희가 악을 행하면...” 이와 같은 구절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능력도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에 인간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에는 자녀들이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 무능력을 깨닫고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게 할 목적으로 자녀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명령을 들을 때 그것에 복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마치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만했던 율법사처럼 성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명령을 들을 때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 “아버지 이 일을 친히 맡아 행해 주십시오.”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따라서 이런 명령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일반 은총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주시는 성령의 일반적 감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며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십니다. 전 인류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수확의 계절이나 기타 여러 모양의 선한 물건들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건강, 물질적 번영, 일반적 지능, 예술적 재능, 상업 및 발명의 재능 등이 가장 일반적인 복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들보다 이러한 방면의 복을 훨씬 더 풍부하게 받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일반 은총은 모든 질서나 문화 및 일반적인 덕의 원천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마음과 양심에 진리에 대한 도덕적 능력이 증가되고, 악에 대한 생각이 억제됩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게 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나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죄가 그 악한 독을 다 뿜어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은총은 죄의 원천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회심은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빛인 양심을 통해 특히 복음의 외부적 제시를 통해 인간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는 해 주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또한 이 일반 은총은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성령의 특별한 조명이 따라야만 비로소 효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조명이 없으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고 성령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전혀 의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능히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유효적 은혜와 일반 은총을 구분하지 않고 유효적 은혜를 기껏해야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도움 정도로 생각하지만, 칼빈주의에서는 유효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확실히 성취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품행이 별로 좋지 못하던 사람들이 착하게 변해가는 일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품행도 바르고 절제할 줄도 알고 순결한 생활을 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은 상을 줄만한 일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유익을 주는 일입니다. 이런 변화는 여러 원인에게 의해, 혹은 양심에 의해, 혹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거나 그의 징계를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감화를 받아서, 혹은 자기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있던 그것은 성화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성화와 도덕적으로 바르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겉으로는 개선되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그의 내부적인 성질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 은총의 한계성에 대하여 사무엘 G. 크레이그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않는 비기독교적인 교육이나 문화는 인간을 영리하게는 만들지만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능력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대접의 밖은 깨끗케 할 수 있으나 대접의 안은 깨끗케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교육과 문화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로 만들려면 전지해주거나 소독약을 뿌리고 재배해 주는 등 외부적인 개조보다도 우선 참감람나무 가지에 돌감람나무를 접목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교육과 문화의 가치는 경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방의 경치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강물이 깨긋하게 될 수 없듯이 교육이나 문화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을 개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쓴 열매를 맺는 나무를 캐다가 에덴 동산에 옮겨 심고 에덴 동산의 물을 주고천사 가브리엘로 하여금 지키게 해 보라. 그래도 그 나무는 여전히 쓴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사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도가 되었으나 여전히 외견적으로는 나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 속사람은 이미 변화되어졌으며,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으나 겉모습을 볼 때에 정말 착하게 변화되어 갈지라도 그 속에는 성령이 없기 때문에 결코 ‘성화’가 되지 못하며 천국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더욱 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만큼, 겉모습도 더욱 착하고 훌륭하게 변화되어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