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본관 12층 외환관리국장실.
국장 정민호는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12월 외환보유액 집계 결과가 눈앞에 떠 있었다. 4,280억 5,000만 달러. 전월 대비 26억 달러 감소.
"이상해..."
정민호는 중얼거렸다. 20년 넘게 외환시장을 지켜본 그의 직관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환율 변동폭, 외화자산 운용 수익률, 국제 금융시장 변동성. 어느 것 하나 26억 달러라는 감소폭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개인 휴대폰을 꺼내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 형사님? 나 정민호예요. 만나서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급한 일이에요."
강태오 형사는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수사대 소속이었다. 15년간 금융사기, 횡령, 배임 사건을 추적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는 정민호의 전화를 받고 명동의 한 조용한 찻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강태오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정민호는 주변을 살핀 후 조용히 말했다.
"외환보유액이 이상합니다. 공식 발표는 26억 달러 감소인데, 제가 직접 계산해본 결과와 맞지 않아요."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최소 15억 달러요. 즉, 11억 달러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태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11억 달러. 한화로 약 1조 5,000억 원. 사라진 돈이 아니라면, 숨겨진 돈이거나 빼돌려진 돈일 수 있었다.
"증거는?"
"지금은 추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형사님이라면 조사할 수 있을 거예요. 외환관리국 내부에서는 제가 움직이기 어려워요. 너무 민감한 사안이라..."
강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트를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용의자 범위를 좁혀야 해요. 외환보유액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핵심 인원은 다섯 명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강태오는 사흘 동안 은밀하게 다섯 명의 용의자를 조사했다.
**용의자 1: 정민호 외환관리국장**
- 20년 경력의 베테랑. 청렴하다는 평판. 하지만 최근 딸의 유학비 때문에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정보.
**용의자 2: 박수진 부국장**
- 정민호의 오른팔. 뛰어난 분석 능력. 그러나 3년 전 승진 탈락 이후 상사와의 관계가 껄끄럽다는 소문.
**용의자 3: 이강민 과장**
- 30대 중반의 젊은 실무자. 컴퓨터 시스템에 정통. 최근 고급 외제차를 구입했다는 제보.
**용의자 4: 최윤아 대리**
- 꼼꼼한 성격으로 실수가 없기로 유명. 하지만 6개월 전부터 야근이 잦아졌고, 얼굴에 피로가 역력하다.
**용의자 5: 한재성 외부 감사관**
- 매월 정기적으로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을 감사하는 금융감독원 소속. 유일하게 외부 인물이지만, 모든 데이터에 접근 가능.
강태오는 각자의 은행 계좌, 통화 기록,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한 가지 이상한 패턴을 발견했다.
"최윤아 대리..."
강태오는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통화 기록을 바라보았다. 최윤아는 지난 3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밤 11시경,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시간은 평균 2-3분. 짧고 규칙적인 통화.
강태오가 그 번호를 역추적한 결과, 그것은 케이맨 제도에 등록된 유령회사의 연락처였다.
다음 날 아침, 강태오는 정민호에게 연락했다.
"최윤아 대리에 대해 좀 더 알려주세요."
"윤아요? 그 친구는 정말 성실한 직원인데... 혹시 뭔가 발견하셨나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최 대리가 야근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민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최근에 특별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들었어요. 외환보유액 운용 시스템 개선 작업이라고."
"시스템 개선?"
강태오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강태오는 함정을 파기로 했다. 그는 정민호에게 부탁해 한국은행 내부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외환보유액 데이터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어 특별 감사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11시, 강태오는 한국은행 건물 맞은편 커피숍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12층 외환관리국 사무실 불빛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11시 15분, 한 인물이 건물에서 나왔다. 최윤아였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강태오는 자신의 차로 뛰어가 최윤아를 미행했다. 택시는 강남의 한 고급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최윤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강태오도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췄다. 강태오는 계단을 이용해 1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 1203호 앞에서 최윤아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태오는 그 안에서 나온 인물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강민 과장이었다.
강태오는 즉시 경찰을 불렀다. 30분 후, 이강민과 최윤아는 경찰서 조사실에 앉아 있었다.
"말해보세요. 11억 달러는 어디로 간 겁니까?"
강태오의 질문에 최윤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저는... 저는 몰랐어요. 이 과장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닥쳐!"
이강민이 소리쳤다. 하지만 강태오는 차분하게 최윤아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말해보세요. 어떻게 시작된 일입니까?"
최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6개월 전이었어요. 이 과장님이 저한테 특별 프로젝트를 맡겼어요. 외환보유액 운용 시스템에 알고리즘을 하나 추가하는 거였죠. 매월 소액의 외환거래 수수료를 최적화한다는 명목이었어요."
"실제로는?"
"그 알고리즘은... 거래 기록을 조작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매월 1-2억 달러씩 실제 외환보유액보다 많게 보이도록 만드는 거였죠. 그 차액은..."
"케이맨 제도의 유령회사 계좌로 빠져나갔군요."
강태오가 말을 이었다. 이강민이 책상을 쾅 쳤다.
"증거가 있어? 증거가!"
"있습니다."
강태오는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돌렸다. 거기에는 이강민의 해외 계좌 거래 내역이 떠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케이맨 제도의 계좌에서 이강민의 스위스 은행 계좌로 송금된 내역들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11억 달러는 아직 회수 가능합니다. 이 과장, 당신은 완벽한 범죄를 계획했지만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
"뭔데?"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는 거죠. 최 대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습니다. 그녀는 의심을 품고 모든 작업 과정을 몰래 녹화했거든요."
강태오가 또 다른 파일을 열자, 이강민이 최윤아에게 프로그램 코드를 설명하며 "이건 외환보유액 데이터를 조작하는 핵심 알고리즘"이라고 말하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강민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일주일 후, 한국은행은 조용히 정정 보도를 냈다. "외환보유액 집계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합니다. 12월 외환보유액은 4,291억 5,000만 달러로, 전월 대비 15억 달러 감소입니다."
언론은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단순한 시스템 오류로 처리되었고, 이강민의 범죄는 금융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 비공개로 수사되었다.
강태오는 정민호와 다시 그 찻집에서 만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사님. 덕분에 큰 사고를 막았어요."
"최윤아 대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무혐의 처리되었습니다. 오히려 내부 고발자로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어요. 그 친구가 용기를 낸 덕분에 11억 달러를 모두 회수할 수 있었으니까요."
강태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겨울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국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처음에 왜 저한테 연락하셨습니까? 내부에서 처리할 수도 있었잖아요."
정민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요. 외환보유액 26억 달러 감소. 그 숫자 뒤에 뭔가 숨어 있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내부에서는 진실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조직 논리가 작동하니까요. 그래서 외부의 눈이 필요했던 겁니다."
강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외환보유액은 정상적으로 관리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배웠어요. 아무리 견고한 시스템도 사람이 운영하는 한,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중요한 건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는 자세죠."
두 사람은 찻잔을 들어 조용히 건배했다.
외환보유액 4,291억 5,000만 달러. 그 거대한 숫자 뒤에 숨겨졌던 작은 범죄. 그리고 그것을 밝혀낸 두 사람의 집요함.
숫자는 때로 진실을 숨기지만, 동시에 진실을 드러내는 단서이기도 하다. 강태오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강태오는 알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숫자가 그를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그것이 숫자일 뿐이다."*
— 강태오 형사의 수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