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300억원짜리 제자들이야.” 유도 사부 박용호 경위(인천남동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값어치를 알게 됐다.
인천남동경찰서 박용호(가운데) 경위가 강력계 형사를 꿈꾸는 ‘유도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 소년들은 학교폭력 등으로 말썽깨나 피웠으나 유도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잡고 있다.
할머니와 사는 형준(가명·16)이는 눈매 고운 소년입니다. 형준이를 안아준 적이 있습니다. 해맑은 표정의 아이여서 그렇게 큰 슬픔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가끔 아빠와 따뜻한 밥을 먹을 때면 화해하고 싶다는 형준이입니다. 그 고운 눈매 속에 슬픔이 가득한 형준이입니다.
“엄마, 엄마, 엄마…”
형준이는 엄마가 보고 싶으면 이웃 동네에 사는 엄마 집을 찾아가 먼발치에서 엄마를 부르며 눈물 흘리다 돌아오곤 합니다. 엄마는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했습니다.
남의 엄마가 되어버린 엄마는 아들의 발길이 부담스러웠던지 먼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하나님 이 소년을 어쩌면 좋습니까.
핏덩이 때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란 태민(가명·18)이는 자신이 버려진 생명이란 사실을 알게 된 중학생 때부터 삐뚤어졌습니다. 흡연과 학교폭력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 태민에겐 독종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태민이는 입이 무겁습니다. 이 세상에선 슬픔을 이야기해봤자 안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위로는커녕 부모 없는 놈이라고 낙인찍는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마음을 꽁꽁 닫은 것입니다.
태민의 슬픔이 폭발하는 날은 생일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것도 아닌데 엄마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생일인데 선물도 없냐고,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이 소년을 어쩌면 좋습니까.
“꼴통 아이들이 모범생·우등생으로”
지난 7일 오후 6시 인천지방경찰청 지하1층 상무관에선 백색과 청색 유도복을 입은 19명의 소년들이 유도 연습 중이었습니다. 형준과 태민이를 비롯한 소년들은 인천남동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 박용호(58) 경위의 제자들입니다. 소년들은 박 경위의 헌신적인 가르침 덕분에 여러 유도대회에 출전해 각종 메달을 땄습니다.
인천지역 중·고교생인 이 소년들은 박 경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골칫거리였습니다. 소년의 부모 중에는 알코올 중독 혹은 기초생활수급자도 있습니다. 어렸을 적 떠난 부모는 소식이 없습니다. 불우한 환경은 소년들을 학교폭력과 비행의 세계로 이끌었지만 박 경위는 유도를 통해 희망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소년들이 유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미 중학생 때 소년원을 갔다 온 동주(가명·18)는 재비행으로 소년원 수감 중입니다. 박 경위에게 4개월 정도 유도를 배우던 동주는 이혼한 엄마의 방임과 욕설에 절망하면서 범죄의 덫에 다시 걸린 것입니다. 박 경위는 “엄마가 따뜻하게 보살폈다면 동주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아파트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던 다문화 소녀 수아(가명·15)는 박 경위 곁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학교폭력, 갈취, 절도 등의 전과 7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2명의 소년 또한 강도와 절도 등의 무거운 죄를 짓고 소년원에 갔습니다. 반면에 유도에 심취한 소년들은 소위 ‘꼴통’에서 ‘기적의 주인공’으로 변했습니다. 박 경위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부님과의 만남이 저에겐 축복이었고 기회였습니다. 엄마께 효도해본 적이 없었는데 운동을 하면서 장학금도 타서 드리고 전국대회에서 은메달도 따서 엄마 목에 걸어 드렸습니다. 사부님께 감사한 게 너무 많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성빈(17·인천청학공고 1)이가 스승의 날에 박 경위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사는 성빈이는 박 경위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쑥스러워서 못 불렀는데 편지에서 처음 불러봤습니다. 성빈이는 유도 소년 중에 가장 멋지게 성장한 유망주입니다. 유도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지난 중간고사에선 반에서 6등 했습니다.
성빈이의 꿈은 강력계 형사입니다. 사부처럼 강력범 검거 1위의 형사가 되기 위해 운동도 공부도 열심입니다. 성빈이는 치킨 배달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교통비와 학교준비물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성빈이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경찰 첫 월급 타면 엄마에게…”
박 경위는 원빈(18·인천청학공고 1)이를 ‘300억짜리 제자’라고 부릅니다. 영화배우 원빈처럼 멋지게 생긴 원빈이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인천 만수동복개파 일짱 출신인 원빈이는 이번 중간고사에선 반에서 4등 했습니다. 공부와 담을 쌓았던 원빈이가 새벽까지 시험공부를 한 것은 기적과 다름없습니다. 내년엔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계획입니다.
“제가 어떤 그릇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부님께서 300억으로 정해 주셨으니 모두 참고 극복해 보겠습니다. 사부님께 바라는 건 저희 할머니가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시는 겁니다. 사부님 같은 분이 기도 해주시면 하나님도 들어주실 것 같습니다. ”
원빈이가 박 경위에게 쓴 편지입니다. 원빈이는 학교 끝나면 거리가 아닌 상무관으로 직행해 유도복이 흠뻑 젖도록 연습하거나 7월 중순에 실시되는 위험물기능사 시험공부에 몰두합니다. 자신을 믿어준 스승을 위해서라도 300억짜리 인생이 되겠다고 다짐한 소년,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효도하겠다고 다짐한 소년, 절망과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땀 흠뻑 적시는 소년의 손을 잡아주소서. 주여, 희망의 한판승을 거두게 하소서.
“하나님, 할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도록…”
“제가 운동하면서 달라진 것은 ‘나도 하면 할 수 있구나’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저는 모든지 포기했는데 상무관에서 운동하면서 꿈이 없던 저에게 꿈이라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그 꿈은 바로 경찰입니다. 경찰이 되면 저와 같이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내는 학생들에게 이야기 들어주면서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싶어졌습니다. 꼭 경찰이 되어 사부님 뒤를 따르겠습니다.”
성웅(19·인천청학공고 3)이가 사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중학교 때 부모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방황하던 성웅이는 사부를 만나면서 확 달라졌습니다. 올해 인천시 삼일절 유도대회 100㎏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 것은 물론 멋진 경찰이 되는 꿈을 품었습니다. 지난 4월 10일 성웅이 엄마는 아들로 인해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며 경찰청 홈페이지에 감사의 글을 올렸습니다.
“사업실패로 먹고 살기에 급급해 방치하다 보니 어느 순간 불량 아이들과 어울리며 사고를 치고 심지어는 경찰서까지 가야했던 아들이 한 경찰관의 헌신적인 도움과 관심으로 새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경찰관이 되겠다고 도서관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은 예전의 불량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들로 인해 삶과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19명의 희망 소년에게 필요한 무도관
“주여, 유도를 통해 희망을 품은 19명의 소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엄마 그리워 우는 소년, 빈곤과 결핍과 싸우는 소년들의 눈물을 닦아주셔야 합니다. 눈물이 피눈물로 변하면 소년들은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밟히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소년들은 이대로 포기하면 끝장난다는 절박함 때문에 유도 시합에서 이가 깨지고 뼈가 부러져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소년들의 근성이 희망이 되게 하소서. 소년들은 세상의 낙인과 좌절에 의해 분노와 증오의 길로 빠집니다. 예수님, 정년을 앞둔 하위직 경찰 사부의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그의 병든 아내를 돌보아주소서.”
제가 소년들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새 1년가량 됐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소년과 사부에게 멋진 저녁을 대접하고 브랜드 운동화를 선물했습니다. 어떤 소년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선물이라며 몹시 좋아했습니다. 주여, 기쁘다 구주오신 날에 기쁨의 선물을 나줘 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올해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소년들의 소원은 순댓국을 맘껏 먹는 것입니다. 운동 끝난 후 허기진 배를 움켜주고 돌아가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박봉의 사부는 가슴만 아플 뿐입니다. 취재 후에 삼겹살집에 데려가 고기를 사주었더니 그렇게 행복해했습니다. 저는 300억짜리 소년들에게 ‘무도관’을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사마리아인 무도 경찰’에게 마냥 의지할 형편이 안 됩니다. 유도 배우는 소년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운동할 유도 연습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무도관은 영적 사귐의 터일 것입니다.
국민일보 가스펠 라이터 조호진(시인)·사진 김진석(작가) jonggy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