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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 단편소설 패닉 앤 올개닉 (Panic &Organic)
패닉 앤 올개닉 (Panic &Organic)
마아가렛 집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췄다. 강아지 도니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도니가 마스크 쓴 일꾼을 보고 멍멍 짖었다. 오클랜드 아일리쉬 애비뉴 153번지 2층 집, 나무 우편함에 세월의 그림자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빛바랜 커피색 외더 보드에서 풍겨 나오는 집 기운이 고혹적이었다.
열흘 전쯤, 마아가렛이 오클랜드 병원에서 코로나 확진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95세였다. 기저질환 상태라 코로나에 삶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확진자로 운명한 터여서 병원 빈소에도 못 갔다. 온 국민은 록다운 격리 생활중이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초기 6개월간 마아가렛 집 아래층에 세 들어 살았던 인연이라 안타까웠다. 같은 골목에 오랜 세월 지낸 추억이 아스라했다. 아들, 딸, 아내 그리고 나 네 명의 영어 가정교사가 되어주었던 마아가렛이었다. 하늘로 가는 길에 배웅도 못하게 만든 코로나 시국이 야속했다.
이곳 섬나라 뉴질랜드는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으로 록다운 봉쇄 명령을 일찍 내렸다. 모든 국민이 4주간 집에서 머무는 집콕, 비상 봉쇄 생활을 해야 했다. 동네 산책 정도만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뉴질랜드에 오가는 항공편과 선박까지도 입 출국이 전면 금지된 상태였다.
어제 오클랜드 시티 카운슬로부터 온 메일을 보고서야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애완견을 가진 집에 당부하는 안내 메일이었다. 록다운 기간 중에 강아지와 가능하면 집 주변 산책을 해보길 권유했다. 집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우울증 같은 게 올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장난감 놀이를 하게 인형이나 놀이 물을 찾아 주라 고도 했다. 코로나 사태로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강아지 걱정까지 해주는 나라가 엉뚱하다 싶었다. 멋쩍게 씩 웃었다.
목 줄을 챙기자 도니가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얼마나 학수고대한 외출이었냐고. 3주간 집에만 있다가 바람 좀 쐴 겸해서 목줄을 매서 데리고 나왔다. 한산한 동네 길이 숨 죽인 듯 적막했다.
마아가렛 집 왼편 울타리에 하와이 무궁화로 불리는 하이비스커스 꽃이 만발해있었다. 매우 이국적이었다. 선홍빛 립스틱을 한 꽃송이들이 윤기 나는 초록 잎 속에서 돋보였다. 뉴질랜드에 살다 보니 이 꽃을 볼 때면 고국의 무궁화가 생각났다. 마아가렛이 애지중지해오던 하이비스커스는 제 계절을 만난듯했다. 바깥세상이 격변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적 대 유행병인 코로나 사태로 WHO가 팬데믹을 공표한 시국이라 세상은 암울했다. 2020년 4월은 티어스 엘리엇의 말만을 되새김질할 뿐이었다. 그 말이 유효했다. 참 잔인하고 혹독했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내려왔다. 노아의 홍수 심판도 아니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과도 달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스마트 폰에 실시간으로 뜨는 코로나 상황판을 보면 가슴이 철렁했다. 4월 말 기준으로 코로나 사망자가 천문학적이었다. 전 세계 215개국에 사망자가 24만 명이라니. 미국만도 6만 명, 한국은 220명, 뉴질랜드가 15명으로 오름 추세였다. 세상에 이런 전쟁도 없었다. 확진자는 부상 자이고, 사망자는 전사자가 아닌가.
마스크를 쓴 일꾼 둘이서 마아가렛의 물품을 꺼내 밖에 내놓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천이 낡은 소파도 나와 있었다. 이민 초기에 마아가렛으로부터 영어공부 배울 때 앉았던 소파였다. 한쪽 다리가 송곳니처럼 뻐드러진 침대도 보였다. 등나무 줄기로 엮어 만든 책상과 의자도 낡은 고물 취급을 받았다. 그 외 여러 물건들이 계속 나왔다. 매트리스, 신발, 모자, 가방, 옷, 이불, 지팡이, 보행기, 장신구, 인형, 소지품들이 민 낯을 드러냈다. 종합 쓰레기 담는 빨간색 철제 빈에 물품들을 쏟아부었다. 쓰레기 업체에서 가져다 놓은 거대한 철제 빈은 허기진 잡식동물처럼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냉엄한 각성의 칼날이 번쩍거렸다. 소독 방역상 수긍은 가면서도 가슴이 먹먹하게 시렸다. 눈시울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 결국 모든 게 떠나는구나.’
살아생전 애지중지하던 물건들마저 주인 없다고 천대를 받는 것 같아 망연히 바라만 봤다. 내가 안 돼 보였던지 일꾼 한 명이 검은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귀띔해주었다. 웰링턴 사는 아들이 와서 마아가렛 귀중품과 문서들은 미리 챙겨갔다고 했다. 나머지 물건들은 다 버리고 소독 청소까지 해줄 것을 당부했단다. 코로나 확진자로 세상을 뜨자 환자가 사용한 물건이 신속히 폐기 처분되었다. 방역당국의 지시에 쓰레기 수거 업체는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멍하니 일꾼들과 물품들을 지켜보다가 목울대로 치밀어오는 연민에 함몰되어갔다. 인간적 친분 감정은 사회적 봉쇄조치에 꽁꽁 얼어버렸다. 마아가렛의 인생 책 서두, 프롤로그가 PPT처럼 한 장씩 넘어갔다. 나의 뉴질랜드 이민사도 병행으로 펼쳐졌다.
마아가렛은 영국 아일랜드 시골에서 태어났다. 더블린에 올라와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남편을 만났다. 딸 아들 낳고 순조롭게 살다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오클랜드에 자리 잡고 허름한 집을 구했다. 앞 터가 넓었다. 남편은 목수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왔다. 남은 시간을 활용해 앞 터에 새집을 짓는데 몰두했다. 수입이 되는 만큼 자재를 사 오고 공사를 이어나갔다.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새 집이 완공 될 무렵 짐을 옮기고 낡은 집을 헐어냈다. 마아가렛 가족이 2층에서 살았고 1층은 남에게 세를 주었다. 뒤 자리에는 마아가렛이 좋아하는 시크릿가든을 만들어 주었다. 남편 그레이엄이 ‘한번, 단 한번, 단 한 사람’이라 말하며 아내에게 헌사한 선물이었다. 로맨티시스트였다. 마아가렛이 가꾸어놓은 정원을 보면 타샤 튜더의 정원이 클로즈업되었다.
그레이엄은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20년 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새집 지붕 작업을 하다가 그만 실족해 운명한 거였다. 마아가렛이 50세 때였다. 그녀는 남편 사고 소식을 듣고 바로 졸도해 버렸다. 앰뷸런스에 실려서 남편 시신이 있는 오클랜드 병원으로 갔다. 완전 패닉 상태였다. 독립한 아들 딸아이의 부축으로 간신히 남편 장례를 치르고 다시 쓰러졌다. 그때, 패닉이란 단어를 가장 뼈저리게 체감했다고 했다. 세월에 의지해 사고의 여진이 무뎌지며 다시 일어섰다. 1층에 사는 세입자들을 가족처럼 대하다 보니 여러 도움도 받았다. 남편이 지어준 집에서 남은 여생을 그가 말한 ‘한번, 단 한번, 단 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딸과 아들도 독립하면서 순탄한 생활이 이어졌다. 아들은 수도 웰링톤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딸은 오클랜드 시티 카운슬에 다녔다. 손주들이 찾아오면 시크릿가든에서 즐겁게 보냈다.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또 큰일이 터졌다.
65세 때 마아가렛이 두 번째 쓰러졌다. 옆에서 잘 챙겨주었던 딸이 42세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뇌출혈이었다. 밤에 자다가 그만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거의 실성한 사람이 되었다. 가장 소중한 남편과 딸아이를 잃고 나서 삶의 이유를 부정하기까지 했다. 하늘에 울부짖었다. 딸아이를 보내고서 집에만 칩거했다. 세상에 거리를 둔 자가격리의 봉쇄 생활이었다. 오직 뒤뜰에서 흙만 파고 일구었다. 종일 애민 잡풀만 뽑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며 자연이 주는 치유력에 의지해 현재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언젠가 우리 내외에게 이런저런 자신의 지난 일들을 털어놓은 게 생각났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위에서 부르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냥 가야 하지 않겠어? 그 날은 아무도 몰라. 알려고 조바심 낼 일도 없어. 언제라도 부르면 서슴없이 가야지. 걱정 말고 오늘 현재를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자고. 허둥대지 말고 안달복달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한참 마아가렛을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아지 도니가 목줄을 끌어당긴 탓이었다. 건너편에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내밀다 잽싸게 도망갔다. 컹컹 짖으며 무섭게 쫓아가는 도니 힘에 딸려 엉겁결에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한참을 뛰다 보니 고양이는 나무 담장을 뛰어올라 넘어가 버렸다. 그제야 도니 목줄 힘이 느슨해졌다. 담장 너머의 집은 마침 공사 중이었다. 2층을 넓히기 위해 스캡폴딩으로 견고한 지지 틀을 세워둔 상태였다. 방을 한 개 더 만드는 연장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사 중인 집 앞에 있는 시내버스 서는 곳 벤치에 앉아 헐떡이는 숨을 잠재웠다. 쉬어가는 김에 이것저것 생각했다. 마아가렛은 아일랜드에서 나는 한국에서 이민 와 살아온 세월과 일들이 서로 직조되어갔다. 내 인생 후반전은 칡 나무 덩굴처럼 물리고 엮여있었다. 고국 자동차 회사에서 13년간 일하다 뉴질랜드로 이민 왔던 시절이 반추되었다. 40세 나이에 돌연 이민을 선택한 결단은 호기로웠다. 입사동기였던 동료가 과로사로 유명을 달리했다. 충격이었다. 대혼란 패닉에 빠졌다. 25년 전 당시, 인생은 80이라고 하던 때였다. 나이 40이 된 순간, 문득 80 인생의 하프라인에 선 느낌이 강하게 나를 움직였다.
현실 점검을 우선 해봤다. 나 혼자 사는 인생도 아니고, 커 나는 두 딸이 눈에 밟혔다. 나와 아내의 후반전 인생도 고민되었다. 직장 생활해가며 아이들을 외국에 유학시키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생 후반전을 똑같이 뛰기엔 힘에 부쳤다.
남에게 보이는 나보다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살길 원했다. 여백이 필요했다. 단순해야 여백이 깃들 수 있었다. 공간도 그렇고 시간도 그랬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공간, 시간, 인간에 왜 사이간(間)이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걸 잊고 산 세월을 보완하기로 했다. 사이 간(間)을 찾아 후반전 인생을 살기로 마음 굳혔다.
여러 날 아내와 상의하고 준비했다. 결단은 단호했다. 나나 아내나 아이들도 호기심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 타입이라 다 함께 움직였다. 뉴질랜드 이민은 급 물살을 탔다.
자동차 회사 생활은 현장중심으로 기름 냄새 속에서 이어졌다. 말 그대로 너무 기름진 생활이었다. 신차 설계, 차량 실험, 대량생산, 품질 검사, 현장 교육, 차량 판매까지 13년을 한 직장에서 보냈다.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5월 가정의 달에 마감했다. 평소 마음속에 간직한 일이 있었다. 나무 냄새 맡으며 목조 주택을 짓는 일이었다. 뉴질랜드에서는 각광받는 일로 하우스 빌더라는 직업이 있었다. 이민을 준비하면서 수소문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 인연을 맺었다.
뉴질랜드에 첫 발을 디딘 6월은 한 겨울이었다. 계절이 반대인 나라 뉴질랜드는 또 다른 책이었다. 오클랜드 공항에 내려 시린 땅을 밟고 푸른 하늘을 한없이 올려다봤다. 우선 공기가 청량하고 맑았다. 울컥했다. 공간이 듬성듬성했다. 시간은 여유로웠다. 인간도 여백을 띠었다.
삶의 터를 옮기면서 기본 구색을 갖추는 일들이 걱정되었다. 영어가 잘 안돼 어려움이 따랐다. 조심조심 하나씩 풀어나갔다. 먼저 집 구하기에 전력을 쏟았다. 우선 애들 학교 가까운 근처 집을 알아보았다. 첫 보금자리가 바로 마아가렛의 집 1층이었다. 6개월을 그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적당한 집을 물색하기로 했다. 정착에 필요한 여러 일을 서둘러 처리했다. 은행에 가서 우선 내 계좌를 텄다. 5년 된 중고 승용차도 한 대 구입했다. 두 딸 학교도 찾아가 등록시켰다. 초 중고를 다 걸어서 다닐 거리였다. 부족한 영어는 아는 교민이나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늘려갔다.
먹고 살 일자리, 집 짓는 팀에 합류해서 보조 일부터 목수일을 배워갔다. 한 달쯤 일했을 때였다. 고국에서 목조 전원주택 한 채 주문이 들어왔다. 고국에 전원주택 붐이 일어날 때였다. 뉴질랜드 산 통나무 재료를 대형 컨테이너 두 개에 담아 선적해 고국에 보냈다. 뒤따라 팀원 4명이 건축 장비를 들고 고국에 입국했다. 경기도 여주 산기슭에 자리한 곳이었다.
3 개월 일정 계획으로 건축일에 박차를 가했다. 불도저로 땅을 고르고 팠다. 딱 됫박을 뒤집어엎어놓은 형태였다. 네 변에 나무로 지지대를 만들어 바닥 프레임을 만들었다. 콘크리트 믹서차가 와서 시멘트를 부었다. 며칠간 양생 시켜 바닥공사를 다졌다. 팀원 중 두 명은 뉴질랜드에서 목조 주택 전문대, 폴리텍을 나온 목수로 여러 채 집을 지어본 경험자였다. 한 명은 고국에서 한옥을 지어본 경력에 황토방까지 만들 줄 아는 목수였다. 난 희망사항이 하우스 빌더로 집 짓는 경험은 없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보조역으로 움직이는 동선이 가장 길었다.
고국 7월부터 9월까지는 한여름이었다.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는 한겨울로 밤 온도는 뼈 속까지 스미는 추위였다. 뉴질랜드에 남은 가족이 눈에 시도 때도 없이 어른거렸다. 정체성이 흔들렸다. 밤마다 안부 통화를 할 때면 가슴이 먹먹했다.
여권 비자 기간이 3개월이라 그 안에 집 공사를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하는 일정에 빈 틈을 보일 수가 없었다. 작열하는 고국의 여름 땡볕 아래서 구슬땀을 말로 흘렸다. 집 공사를 시작하며 한 달간 적응기간이 논산 훈련소 훈련병처럼 팍팍했다. 불과 두 달 전, 5월에는 고국의 자동차 회사에서 기술자였다. 사무실에 자리 잡고 현장을 둘러보는 일 만 했던 나는 180도 다른 체험으로 빠져들었다. 반바지에 반소매 작업복 그리고 야구모자를 쓴 채로 동분서주했다. 주로 내 일은 통나무 목재를 전동 톱으로 잘라 목수들한테 수급하는 일이었다.
써큘러 쏘 라 부르는 전동 톱의 굉음은 귀청을 울리고 때렸다. 작업 귀마개, 이어 머프를 쓰고 하다가도 목수들이 외치는 나무 사이즈 주문을 들으려면 벗어야 했다. 일에 속도를 내려다보니 이어 머프 쓰는 걸 등한시했다. 목수들은 나무토막에 목수 연필로 필요한 나무 사이즈를 적어 던졌다. 서둘러 자르다 보면 잘 못 잘라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잘라 올리려면 식은땀이 났다.
해뜨기 전부터 일을 시작해 노곤할 정도의 작업 후 새참을 먹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몰려올 때까지 엎드려 톱질에 망치질을 했다. 일을 마치고 연장을 챙길 때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간신히 일어서다 우연히 들어오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원주택의 형체를 갖춰가는 품세가 옹골찼다. 뿌듯한 보람 같은 게 차 올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예술가들 땀을 이해할 것 같았다.
임시 마련한 농가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고 밥 먹으면 바로 통나무처럼 쓰러져 곤한 잠에 떨어졌다. 주일에는 평소 다니던 성당에도 못 나갔다. 근처 산간 지대에 교회나 성당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공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집중적으로 공사 일에 매달리는 게 우선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내 얼굴과 팔다리는 뿌리의 킨타쿤테처럼 새까맣게 탔다. 작열하는 땡볕과 한증막 무더위 속에서 종일 일 하다 보니 몸이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고된 노동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내 체력의 한계를 체감했다. 화이트 칼라에서 블랙 칼라로의 전환은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이론과 실제, 꿈과 현실은 냉엄했다.
일하다가 인근 동네 사람이 아들 딸 데리고 걷는 것만 봐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저렇게 사는 것이 가족 행복이지 싶었다. 성공과 행복을 찾자고 생고생하는 내 모습이 한없이 작게도 느껴졌다. 초라해진 자존 감이 웅성거렸다. 가끔 통화하면 아내는 걱정 말라고 나를 위안시켰지만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집 공사를 해가면서 조그만 수첩에 작업공정과 방법, 작업 용어를 메모하고 스케치했다. 집에 오면 잠자기 전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대학 노트에 다시 정리했다. 한 권에 이어 두 권까지 채워졌다. 부족한 것은 목수들에게 물어가며 보완했다. 건축 공정 핸드북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주어 껴안고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귀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료 목수가 소리쳐 깨우는 목소리조차 거슬리게 울렸다. 깜짝 놀란 목수들이 봉고트럭에 태워 나를 읍내 병원에 옮겼다. 의사가 오른쪽 귀를 검사 경으로 체크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정밀 특수 검사에 들어갔다. 오른쪽 귀청에 심한 손상이 갔다고 나무랐다. 귀청이 나갈 정도로 웬 혹사를 했냐고. 가슴이 녹아버릴 것 같은 패닉에 빠져버렸다. 황소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이게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주일날 성당도 못 가면서.’
몸은 통나무처럼 쓰러져가고, 마음도 검불처럼 흐트러졌다.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니면서 며칠 안정을 취했다. 남은 목수 셋이서 한 달 내로 집 공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산간 동네에서 인부를 구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젊은 이들은 도회로 나가고 나이 든 어른들만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어 머프를 다시 쓰고 일을 거들어야 했다. 뉴질랜드에 있는 가족에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 달만 잘 버티며 일하면 가족 품으로 갈 수 있다고 다짐했다. 말수가 줄어들었다. 작업노트 두 권에 이어 세 권째를 마무리했다. 석 달을 채우며 가까스로 집 한 채가 완공되었다. 나무로 짓는 외부 공사를 마쳤다. 지붕에 아스팔트 싱글까지 다 깔았다. 넓은 데크도 집 앞뒤로 꾸몄다. 내부 마감 작업도 마무리 지었다. 떠나는 날 집주인과 부등 켜 안고 뜨거운 이별을 했다. 주인이 여주 특산품, 찻잔 도자기 세트를 하나씩 들려줬다.
인천공항 출국장을 들어서며 공사 중 받은 패닉과 고통을 떨쳐냈다.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12시간을 오는 동안 많은 걸 생각했다. 혹독한 논산 훈련소를 나와 자대 배치를 받아 떠나는 느낌이었다. 두 손에는 작업노트 세 권이 들려있었다. 몸과 마음은 초보 목수 티를 벗어내고 희망찬 설렘 에너지로 가득했다. 몸을 너무 혹사 말고 제대로 챙겨가면서 여백 있는 사이간(間)을 갖자고 다짐했다.
뉴질랜드에 돌아오고서 고국 목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보완하기로 했다. 오클랜드에 있는 기술 전문대학, 유니텍에 등록했다. 목수를 양성하는 카펜트리 코스 2년 과정이었다. 뉴질랜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 애들과 동급생이 되었다. 영어가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다. 젊은 이들 도움을 받으며 주머니를 넉넉히 열었다. 반은 이론 수업을 했다. 나머지 반은 집 짓는 실습이었다. 3 베드 룸 세 채를 짓는 경험을 가졌다. 수업을 마치고 남은 시간은 파트타임 목수일을 했다.
유니텍에서 목수 과정 카펜트리 코스를 졸업하고 목수일을 풀타임으로 할 무렵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집에 오다 날벼락같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형 트럭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와 내 차를 정면으로 치받았다. 보닛쪽에서 운전석으로 밀려들어와 내 몸은 차체에 꼭 끼어버렸다. 이마에는 선혈이 낭자해서 아무것도 안보였다. 왼쪽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부러진 채 차체에 끼어있었다.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소방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가 출동했다. 구조대원들이 찌그러져 열리지 않는 차 문을 부수고 떼어내 날 끄집어냈다. 내 몸은 다 죽은 사람처럼 너덜너덜했다. 구급차에 나를 싣고 오클랜드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날카롭게 울리는 비상 경적이 심장에 꽂혔다. 난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출혈이 심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패닉도 그런 패닉이 없었다.
‘내 인생 끝나는 건가.’
아내와 두 딸 얼굴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힘들고 두려웠다. 수술하고 치료받으며 한 달을 병상에 누워있었다. 이민생활에 한창 뛰어야 할 가장이 일을 놓고 쉬고만 있자니 처연했다.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까.’
회복은 더뎠다. 퇴원 후, 재활 통원치료를 한 달 더 받고서야 간신히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었다. 힘쓰는 일을 할 때, 왼쪽 다리가 제대로 버팀 역할을 못했다. 온 종일 풀타임으로 목수일을 하기엔 한계가 따랐다. 노동 강도가 낮은 일 정도만 가능했다. 쉬는 날 쉬엄쉬엄 내 집 보수 작업하는 선에서 그쳐야 했다. 결국 직업을 바꿔야 했다. 그 뒤로 준비해 구한 직업이 택시운전이었다. 왼쪽 다리를 덜 쓰고 주로 오른쪽 다리를 쓰는 일이라 가능했다. 고국에서 자동차의 기름진 생활 내려놓고 왔다 싶었다. 웬걸, 다시 네 바퀴 차량 기름 냄새 맡는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계획은 내가 세워도 과정과 결과는 달리 연결되었다.
겉은 유순해 보여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아가렛이나 나 또한 고난의 시간을 건너뛰어야 했다. 동병상련의 짠한 심정이 통했다.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도니가 가로수 나무 아래서 왼쪽 뒷발을 들고 시원하게 쉬아를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코를 벌름거리며 일 보는 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까톡하며 스마 폰이 울렸다. 고국에 있는 대학 동창생 친구 민준이었다. 일찍 미국으로 이민 가서 고생을 많이 했던 친구였다. 스마트폰 화면에 싱싱한 장뇌 삼 사진이 올라왔다. 보이스톡을 했다. 인준이는 미국 뉴욕 인근 뉴저지에 20여 년 살다가 작년, 고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카톡으로 연결해 자주 연락을 취하면서 근황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고향 봉평으로 들어가 특용작물, 장뇌산삼을 재배하고 살았다. 미국에서 세탁소 일에 전념하느라 위암에 걸린 것도 몰랐다. 건강악화로 들어간 터였다. 과로와 전자파를 피해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 돈보다는 건강도 챙기고 소일거리로 일했다. 산속에 전원주택 한 채 지어놓고 쉬엄쉬엄 산다고 했다. 요즘 생각하니 잘한 결정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민준이한테 뉴저지에 살고 있는 다른 지인들에게서 많은 문의가 온다고 했다. 뉴저지 요양원에서 코로나 사망자가 무더기로 나오는데 대응도 못해 패닉 상태가 됐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단다. 이번 코로나 정국을 거치면서 미국의 전염병 방역대책이나 의료보험체계에 실망을 느꼈단다. 개인이 안전과 어려움에 처할 때 국가가 적극 도와주고 지원해주는 게 선진복지 시스템인데 너무 실망 수준이라고 했다. 너무 뒤처진 것을 알면서 더욱 역 이민을 고민한다고 했다. 거기에 비해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체계적인 방역 대응 시스템을 운영하는 선진국 모델 국가라고 믿게 되었단다.
큰 바위 얼굴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걸 찾으러 미국으로 가서 애썼는데 못 찾았단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비로소 깨달았단다. 고국에 이미 큰 바위 얼굴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에 공감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모범적으로 대처한 한국이 전 세계에 잘 알려졌다. 자랑스러웠다. 친정이 잘되면 시집와 사는 딸들도 기가 서는 법이었다.
민준이와 카톡을 끊고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부러워 보였던 과거 미국이 실망적이고, 떠오르는 현재 한국이 희망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생활의 경험을 살려 고국에서 새롭게 정착하며 나름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든든했다.
발걸음을 유턴해서 다시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침 아일랜드 커뮤니티 센터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발길을 다시 멈췄다. 마아가렛의 구순 잔치가 열린 곳이었다. 마아가렛은 이 커뮤니티 센터를 빌려 저녁에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커뮤니티 실내 유리 창가 두 벽에 그의 평생 사진이 전시되었다. 영국에서 이민 올 당시, 60년 전 시대 상황이 엿보였다. 생동감 넘치는 개척자의 기상이 엿보였다. 학교에서 30년을 교직으로 수고한 사진도 보였다. 남편이 집 짓다 실족 사로 세상을 떠날 당시 사진도 보였다. 처연했다. 큰 딸이 갑작스레 뇌졸중으로 세상을 뜨자 운구 옆에서 슬퍼하는 사진에 울컥했다. 장례식장에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은 소리 없는 속 울음 절규였다.
구순 잔치 말미에 마아가렛이 차분하게 자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분홍색 롱 드레스 위에 우유빛깔 숄더를 걸친 모습이었다. 축하객 중에 한국 제자들도 많아서인지 마지막 수업을 하듯 천천히 들려줬다. 먼저 마아가렛이 책 한 권을 들어 보여주며 시작했다.
“2010년도에 제가 ‘오클랜드 올해의 가든 왕’으로 선정된 인터뷰 잡지예요. 제 나이 85세 때였지요. 오클랜드 가든지의 커버스토리에 제가 한 말이 헤드라인에 이렇게 나와있어요. Don’t Panic. It’s Organic.”
선홍빛 하이비스커스 꽃송이 옆에 선 우아한 모습이 책 표지에서 빛났다. 뉴질랜드의 타샤 튜더였다. 하늘나라에서 남편 그레이엄이 봐도 흐뭇해할 ‘한번, 단 한번, 단 한 사람’이었다.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90세 살면서 남는 건, 두 글자였어요. 하나는 패닉. 또 하나는 올개닉. 이 두 글자가 내 삶을 엮어 나갔어요. 먼저 글자는 패닉이에요. 살면서 왜 그리 걱정과 염려를 못 떨궜는지 몰라요. 마음속 번뇌에 사로잡혀 살았어요. 그게 패닉이었어요. 어느 날 문득 패닉을 붙잡아 족쇄를 채우기로 했어요. 패닉 앞에 부정 명령어를 씌워버렸어요. Don’t Panic! 허둥대지 말자고요. 패닉은 그냥 놔두면 바이러스처럼 번져 나 가거든요.”
마아가렛이 흐뭇한 얼굴로 축하객들을 휘 둘러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글자는 올개닉이고요. 자연친화적인 상태지요. 퇴비 같은 유기비료를 써도 작물은 잘 자라요. 우리 삶도 마찬가지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족하는 거예요. 올개닉 앞에 인정하는 주어 동사를 붙였어요. It’s Organic! 있는 그대로. 여기에 다 있어요. 진심이면 모두 통해요.”
마아가렛 추억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걸었다. 마아가렛 집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강아지 도니가 킁킁거리며 목줄을 당겼다. 옆집 우편함 아래로 달려갔다. 앙증맞은 갈색곰 돌이 인형을 물고 나왔다. 테디베어였다. 팬데믹으로 아이들이 집에만 갇혀있는 걸 풀어주기 위해 만든 곰 인형 놀이 소품이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동네 길을 산책하다 집 밖에 놓은 곰을 찾는 놀이가 정겨워 보였다.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수상도 자기 집 창가에 두 마리 곰 인형을 내놓았다는 TV 뉴스가 떠올랐다.
그 외로움을 다독여 주는 테디베어 놀이가 작은 위안을 주었다. 아이들 놀이로 내놓은 곰 인형을 강아지가 갖고 놀았다. 강아지도 그동안 몹시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도니 입에 물린 곰 인형을 뺏어 다시 우편함 위에 올려놓았다. 섭섭해하는 도니를 다시 보며 그 마음을 헤아려봤다. 보기에는 그저 귀여운 애완 강아지로 볼 수도 있지만, 7년을 정들고 한 집에 살다 보니 가족 같은 반려 강아지로 여겨졌다. 도니 에게도 아픈 사연이 있었다.
늘그막에 친구 부부가 식구라고 분양한 비숑 강아지였다. 양털처럼 복스러운 몸에 온순하기 그지없는 강아지를 1년도 못 키우고 떠나갔다. 고국에 급한 일과 노부모 위중으로 서둘러 귀국하게 되었다. 아내가 꽃 가꾸는 일을 잘하니 강아지도 잘 기를 거라며 떠 안기고 떠났다. 어느 날 졸지에 다른 집으로 떠 맡겨졌으니 강아지도 처음엔 두려워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엄청 몸을 사렸다. 첫 패닉 상태였다. 밥도 안 먹고 짓기만 했다. 잘 어르고 달래 가며 정을 붙였다. 친구 부부가 불러준 토비라는 이름을 도니로 바꿨다. 도니 이름으로 시티 카운슬에 입양 등록을 마치며 우리 집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우리 집에 도니가 맡겨지고서 한 해가 흘렀을 즈음이었다. 친구 부부가 방문 왔다. 도니가 손님에게 살갑게 꼬리를 흔들며 나댔다. 방문한 친구 부인이 강아지를 좋아하다 보니 도니를 찌 대고 장난을 쳤다. 얼마 후, 난데없는 사달이 벌어졌다. 그저 좋아서 마냥 풀어지다가 일이 터졌다. 쉬아를 할 시간이 지나서인지 도니 아랫도리가 탱탱해지며 고추 섰다.
“어머머! 이 녀석이 남사스럽게.”
친구 부인이 놀라는 통에 친구가 도니한테 호통쳤다.
“아니? 이런 버릇없는 녀석 봤나! 대낮에 무슨 짓이야?”
나와 아내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을 보고서 당황했다. 친구 아내가 권유했다.
“강아지 어렸을 때, 디섹스시키세요. 중성 수술이 필요해요.”
그 사달 후에 친구 부부 권유대로 도니 에게 중성 수술을 시켰다. 아무리 미물이라는 개로 태어났어도 수컷의 역할 한번 못하고 꺾어지게 하니 마음은 아팠다. 오클랜드 시티 카운슬에 등록된 도니 이름 앞에는 De Sexed Dog란 특수어가 붙었다. 수술 후, 도니는 여러 날 식음을 전폐했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휑한 눈으로 나를 원망하듯 쳐다봤다.
‘무슨 낙으로 사냐고요? 이제 전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도니는 엄청 큰 패닉에 빠진 거였다. 저러다 말라죽는 것 아닌가, 아내와 염려를 했다. 일주일, 열흘, 보름이 지나면서야 가까스로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십 년을 감수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르며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단순히 귀여워만 하는 애완견이 아니라 가족의 한 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이제는 늘그막에 우리 내외의 반려 견으로 자리를 굳혔다.
마아가렛 집 앞으로 달려오는 트럭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거대한 초록색 쓰레기 수거 트럭이 집 앞에 와 정차했다. 트럭이 유압 펌프를 작동시켜 밖에 내놓은 빨간색 철제 빈을 트럭 위로 들어올렸다. 쿵! 쿵! 우당탕~ 철제 빈 균형을 맞추려고 트럭 바닥에 몇 번 들었다 놨다 했다. 얼추 안정되게 자리를 잡자 부릉부릉 엔진 발진 소리를 냈다. 쓰레기 트럭이 앞뒤로 두어 번 움직이다가 서서히 집 앞을 떠나갔다.
마아가렛이나 나나 도니나 예외는 없었다. 패닉은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쳤다. 엄연한 현실로 일상의 장벽이자 걸림돌이었다. 성경 구약에만 출애굽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혜롭게 건너뛰어야 했다. 이쪽 패닉에서 저쪽 올개닉으로.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패닉에서 올개닉으로의 생활 출애굽 여정이었다. 이민 올 때 생각했던 여백 있는 사이간(間)을 갖고 사는 게 올개닉이 아닌가 싶었다.
많은 집기 류 들을 내다 보낸 마아가렛의 집은 휑해 보였다. 웰링턴에 살고 있다는 변호사 아들이 이사와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코로나 정국이 끝나면 이 집도 매물로 나올 듯싶었다. 살던 주인은 조용히 세상을 떠나갔다. 이제 주인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내 보내졌다. 이어서 철저한 소독과 청소가 이루어지고 집 안 팍 단장이 이뤄질 태세다. 세월과 환경 변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매물로 나올 이 집 앞에 경매를 알리는 부동산 간판이 세워질 테고, 더 지나면 매도가 완료됐다는 태그가 간판에 붙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기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마아가렛의 역사는 선홍빛 하이비스커스 꽃으로 피었다 사그라지며 떨어졌다. 아름다움의 신을 닮았다는 하이비스커스 나라로 승천했다. 마아가렛의 책 말미, 에필로그가 바람에 나부꼈다.
‘나 이렇게 떠난다고 패닉에 빠지지 마. 올개닉으로 받아들여. 나 조용히 갈게. 여기 와서 북적댈 것도 없어. 있는 곳에서 저마다의 신에게 기도 해주면 좋고. 나 올개닉으로 떠나네. 안녕~. 훗날 저 세상에서 만나.’
남편 그레이엄이 기다리는 하늘로 가면서 남긴 메시지가 내 마음을 다독여 줬다.
Don’t Panic. It’s Organ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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