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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장편소설 「인생」/ 원진호
텍스트―위화의 《인생》
번역자― 백원담
출판사― 푸른숲(2010년판)
-차 례-
1.들어가는 글
2.작가〈위화〉의 소개와 〈인생〉의 줄거리
①위화는 누구인가?
②〈인생〉의 줄거리
3.동양적 운명론은 굴레인가 달관인가
4.〈인생〉의 변증법적 의의
5.〈인생〉의 존재론적 관찰
6.비극의 해소\이비제비以悲制悲의 입장에서
①문학적 정화
②역사성의 확보 관점에서
7.위화의 인생론에 대한 비판
8.〈인생〉의 낙천주의와 국문학과의 연계성
1. 들어가는 말
10년 전쯤 친구의 호평에 장이에모가 감독하고 궁리가 주연으로 나오는 「인생」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영상미가 뛰어난데다가 사실주의적이라 그 감동은 잔잔함 물결이 되어 이따금씩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그 안쓰러움과 아련함을 못 잊어 원작소설을 한 번 읽어보아야지 했는데 다행히 이번에 숙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원작을 읽으면서 영화와 대비되는 것은 영상메시지는 감독과 배우들이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것에 한정되는 데 비해 활자로 읽는 것은 「행간도 읽는다.」는 말에서 추론할 수 있듯 다의적多義的으로 그리고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작가 위화가 〈인생〉의 서문에서 「누군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명의 작품이 되고. 만 명이 만 명이 읽으면 만 명의 작품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작가의 원래 의도를 넘어서 독자도 작품을 전개하고 재창작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인쇄매체는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을 읽으면서 문학이 지향하고 있고 또 지니고 있는 가치는 인간 경험의 공유共有와 상상력의 교감을 통한 「인간 조건의 개선과 확대」임을 발견하였으며, 빼어난 문학작품은 그것이 시의 형식이든 소설의 형식이든 그 밖 수필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문학이 원래 가지고 있는 미학적 정신에 역사성과 철학성도 겸비하면 더욱 좋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와 구성이라면 그 울림은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을 울림의 영역으로 인도할 수 있고 3대양 6대주에서 탄성과 탄식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다.
특히 외국작품의 경우에는 원어로 읽는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번역의 정통함과 유려함도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임도 이번에 알았다.
2. 작가 〈위화〉의 소개와 〈인생〉의 줄거리
①위화는 누구인가?
위화는 「지상의 천국」이라 불리고, 중국의 저명한 대문호 소동파蘇東坡가 소요한 항조우에서 태어났다. 만년 노벨 문학상 후보였던 바진(대표작 家)과 상흔문학傷痕文學의 대표라 일컫는 다이 호우잉(대표작 사람아. 사람아!)을 잇는 중국 제 3세대 작가로 위화는 이 〈인생〉을 1993년에 발표하였고, 1995년 〈허삼관매혈기〉로 일약 중국문학의 총아가 된다. 위화의 소설들은 여기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노인처럼 주로 기층 민중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 특질은 「웃음과 여유」라 하는데 이는 광대무변한 중국적 특성이 가능케 했다고 불 것이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다 「이야기꾼」이지만 위화는 이 〈인생〉이라는 소설에서 확인되듯 이야기 하고 싶고 이야기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인 호모 내런스homo narraance로 불러도 될 만큼 이야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②〈인생〉의 줄거리
이 소설의 원제는 〈활착活着〉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라 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연상 시킬 정도로 표의문자의 장점을 구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1인칭인 화자가-아마 작가 자신일 것이다-주인공 3인칭〈푸구이〉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서술방법이다.
이 소설은 위화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나는 미국의 민요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는 늙은 흑인 노예가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원망의 말 한 마디 없이 언제나처럼 우호적인 자세로 세상을 대했다. 이 노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소설을 쓰기로 했고, 그것이 바로 이 책 〈인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영감靈感은 〈톰 아저씨〉였고, 서술 동기는 「낙천적인 삶이야말로 손색없는 삶」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며 누군가는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 젊은 시절 푸구이는 「쉬씨 집안 소유의 땅은 백 묘가 넘었는데 푸구이와 그의 아버지가 길을 갈 때면 신발소리가 마치 동전이 쩔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본문에서〉」부자였지만, 푸구이는 훈장선생이 「썩은 나무는 다듬을 수 없다,〈본문에서〉」하고. 장인어른은 「그 짐승은 어디 있는가?〈본문에서〉할 정도로 개망나니였다. 그 결과 백 묘나 되는 전답은 물론이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대궐 같은 집도 사기 노름에 다 날린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초가집으로 이사를 간다. 마음을 고쳐먹어서인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인가? 그 후 그는 거친 옷을 입고 손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새벽부터 밤늦도록 농사일을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파서 성안으로 의원을 데리러 갔다가 쟝제스군에 의해 강제징집을 당한다. 푸구이는 쟝제스군과 마오쩌둥군의 치열한 전쟁터에서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살아 돌아오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딸 〈평샤〉는 열병을 앓아서 벙어리가 되어있다. 뒤이어 아들 〈유칭〉은 현장縣長의 부인이요 학교 교장 선생님의 출산에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어처구니없게 죽고, 딸 펑샤는 또 출산 중에 죽고. 아내 〈자전〉은 구루병으로 죽고 사위 〈완얼시〉는 사고로 죽는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로 죽음은 이어지고 푸구이의 삶은 도처가 비극의 계기繼起지만 푸구이는 마지막 늙은 소 한 마리를 벗 삼고 그것에 〈푸구이 〈자전〉 〈펑샤〉 〈유칭〉 〈완얼시〉등 가족의 이름들을 붙여주고 호명呼名한다. 가족들이 마치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3「.동양적 운명관」은 굴레인가? 달관인가?
이 소설에서 주인공 〈푸구이〉는 밭을 가는 소에게「소는 밭은 갈아야 하고, 개는 집을 지켜야 하며, 중은 탁발을 해야 하고, 닭은 새벽을 알려야 하며 여자라면 베를 짜야하는 법. 그런데 너는 어째서 소인 주제에 밭을 안 갈겠다는 거냐. 이건 예부터 전하는 도리라고. 가자. 가자.〈본문에서〉」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형태이다. 바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로 연결되는 유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의 쉬운 풀이인 것이다. 그것은 또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있어서의 「배분적 정의 (상대적 정의)」의 동양적 모형이기도 하며 대홍수로 황하의 물길이 바뀌기 전까지는 지금의 물길이 「물길」이라는 현실주의의 사고이고, 「우장한 대륙 ·유장한· 역사 유장한 인간」을 상정한 대륙적인 것의 압축인 것이다. 드높고 드넓고 드깊은 곳에서의 가치배분에 대해서 작가는 푸구이의 입을 통해서 「조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확실히 그리스 로마신화와 더불어 서양사상의 한 기둥인 그리스도교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한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선과 악의 2분법」아래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는 메테르 링크(대표작, 파랑새)나 「운명과 끝까지 싸우련다.」의 베토벤적 방식은 아닌 것이다. 확실히 서양의 운명관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용사勇士「이아손」이나 「아킬레우스」처럼 운명(미지未知와 자연)과 대결하는 모양인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운명관은 푸구이 노인처럼 현실의 순응이었고. 운명의 용인이었다. 그것은 수치적 또는 계량적 운명의식이 아니라 「눈에서 눈으로 이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관념적 운명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푸구이의 아버지가 푸구이에게 말하는 것은 이의 집약일 것이다. 「옛날에 우리 쉬씨 집안 조상들은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그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었고 닭이 자라서 거위가 되었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었고. 양이 다시 소가 되었단다. 우리 쉬씨 집안은 그렇게 발전했지.〈본문에서〉」이것은 귀납적 방법(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천지의 근원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또 졍형定型이 아닌 비졍형의 생각과 고인 것(stock)이 아닌 흐르는 듯한(flow) 생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서양의 접근방식과 동양적 접근방식의 우열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위화가 내린 결론이 좀 더 자연친화적이라는 것만 알뿐이다.
4.〈인생〉의 변증법적 의의
푸구이는 장인이 처갓집으로 강제로 데려간 아내 〈자전〉이 돌아오자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전이 돌아와 우리 집은 완전해졌다네. 내 일을 도울 조수도 생긴 셈이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여자를 아끼기 시작했지.〈본문에서〉」푸구이는 젊은 날 도박을 말리는 아내를 때리고 차고 했으며, 기생과 더불어 몇날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기도박에 전 재산을 잃은 것이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오래전부터 잊어왔던 아내의 가치를 비로소 알게 된다. 화가 바뀌어 복이 되는 현대판 새옹지마 버전인 것이다.
또 푸구이는 사기도박으로 자기의 전 재산을 갈취한 〈룽얼〉이 악질반동지주로 몰려 공산당에 총살을 당하고,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국공내전의 한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다음 이렇게 말한다. 「 난 전쟁터에서도 목숨을 건졌고, 집에 돌아와서는 룽얼이 나대신 죽었으니 말일세. 우리 집안 조상 묘를 잘 쓴 모양이야. 아, 옛날 아버지와 내가 재산을 말아먹지 않았으면 그 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였겠나.」라고. 이것은 얼핏 논리의 비약같이 보이나 단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적으로 한 가지가 아닌 이상 푸구이는 「그가 본 것」그리고 「그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아이러니는 의혹이지만 조물주에게는 그것이 복선伏線이자 반전反轉의 카드인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될 것」이고, 「햇빛이 강하면 응달은 짙어진다.」고.
세상에는 완벽한 행운도 없고 완벽한 불행도 없음을 〈푸구이〉노인은 보여주고 있다.
5.〈인생〉의 존재론적 관찰
실존주의의 표현을 빌면 「그냥 던져진 존재」인 우리 인간은 엄연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받고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공간적으로 시저와 부르투스가 활약하던 로마 공화정에 태어날 수 있고. 로베스 삐에르가 공포정치를 펼치던 프랑스 혁명기에 살 수도 있으며, 중국의 당태종 시대나 〈오다 노부나가〉가 활약하던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 수도 있고 또는 한말의 동학혁명을 몸소 체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이다. 위화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본문에서 「마을식당이 문을 연 뒤 식사시간의 풍경이 볼만했지. 집집마다 두 사람씩 가사 밥과 반찬을 타 왔는데 길게 늘어선 모습이 예전에 포로로 잡혔을 때 만터우(만두의 한 종류)을 타려고 줄을 섰을 때랑 다름이 없더구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위화는 인간만이 항수恒數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變數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인간만이 본질이고 그 외의 것은 현상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사람이 만물이 척도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사람에 의해서 만물이 이름을 얻는다.」는 것의 연장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위화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도 거품이자 잠시이고 「도탄지경塗炭地境」이나 「질곡상태桎梏狀態」도 풍선이거나 「이 또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한 때는 국민당군이고 다른 한 때는 공산당군이었던 것도 위화에게는 인간의 개념적 경계이지 인간의 본래의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위화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육안肉眼이라고 할 수 없고 심안적 우주적 창조자적 관점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은 「하루살이와 700년을 산 팽조의 삶이 같고, 황금 한 돈이나 황금 한 냥이나 똑같다.」는 장자莊子의 문화적 혈통과 가까운 사람만이 체득할 수 있는 다세계적 동등론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위화의 공로는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만물과 교감하는 사람을 그렸다는데 있다고 볼 것이다.
6.비극의 해소\이비제비以悲制悲
①문학적 정화
위화의 〈인생〉은 눈물과 슬픔 그리고 죽음의 서사敍事이다. 강풍에 견디는 버들가지처럼 완곡한 것으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핵심을 건들고 금기사항을 깨뜨리며 성역을 침범함으로써 잊혔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비뚤어진 우리의 균형감각을 되살린다. 노병老兵 〈리오취안〉은 「이 몸은 어디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구나.」하며 죽고. 사기노름의 두목 룽얼은 그 당시 지주였다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들 유칭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미필적 살인」일수도 있는 과다한 수혈 때문에 죽고, 펑샤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사위 완얼시는 현자의 사고로 또 죽는다. 도무지 안심할 수 없게 일상적인 것은 언제나 뒤집히고 곧 무시무시한 것이 닥쳐오는 것이 곳곳에서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평샤가 죽은 지 꽤 되었고 잊어버리라는 푸구이의 말에) 「저한테는 펑샤를 그리워하는 복만 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사위 완얼시를 통해 「그리워하는 상대가 있는 것도 복이고 그리워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는 제시를 통해 「인간의 눈뜸」이 인간을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비극이 고정된 것도 아니고 비극이 이렇다고 규정할 수도 없음을 위화는 완얼시나 푸구이의 좋은 기억들을 통해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겨자씨만한 생명이 있어도 인생을 비극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이끌 수 있는 작가 위화의 반어법反語法적인 표현인 것이다.
②역사성의 확보 입장에서
소설에서 역사성이라 함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 소설의 내용이 시대적 정신을 반영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자체가 한 시대의 산물이냐는 것이다. 소설 〈인생〉자체가 개혁 개방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여기에서는 소설에서 어떻게 역사가 묘파되었는가를 살펴본다. 푸구이는 국공내전의 와중에 국민당군에 끌려가지만 그들의 대장은 도망가는 사람을 총질하고 전세불리하자 돈다발을 온몸에 칭칭 감고서 도망치나 공산당군의 중대장은 배고픈 포로들에게 만터우를 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비와 통행증을 주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푸구이의 독백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 쪽이 더 인도적人道的인가를 알 수 있고 어느 쪽이 시대의 진운을 타고 있는 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가호호에서 솥을 거둬 대만을 쏠 수 있는 포탄을 만들고, 공동식당에서 다시 손수취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대약진운동의 무모함과 실패도 알 수 있고, 홍위병들의 난동을 통해서 문화대혁명의 참혹함도 알 수 있다. 위화는 그것들을 통해서 민초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이 소설은 극명克明이라는 최상위적 방법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7 위화의 〈인생〉론에 대한 비판
위화는 푸구이 노인의 입을 빌려(쌀을 사기 위해 유칭이 기르던 양을 팔러가며) 「죽이는 것보다 팔아버리는 것이 훨씬 낫잖아. 양은 말이다. 짐승이잖아. 날 때부터 그것이 그 놈의 운명인 것이야.〈본문에서〉」라고 말한다. 인간사에서 정신이나 사상은 그 전염이 빠르고 영향권도 무척 넓다. 푸구이의 말에서 양을 인간으로 치환했을 경우 그 위험성은 너무나 큰 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패배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고, 현실을 착시하게 만들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 압제와 탄압을 부를 수도 있고,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떨어지는 물이 바윗돌을 뚫으며, 하늘은 단지 오래 기다릴 뿐」이라는 여과와 완화의 방법으로 보는 것이 보다 옳을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살아있기만 하면 희망은 있다.」는 것과 결합하여 「세계의 선순환, 인간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펑샤와 완얼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쿠건苦根 인 것은 언뜻 「인생은 고해」라거나 「네가 범죄 하였은즉 평생토록 땀 흘리리라.」는 의미와 같게 들리지만 실은 고난을 기억하여 방종하지 않게 하고. 아무리 큰 고통도 생명의 곁가지나 부스러기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라고 생각하면 작가 위화의 가치창출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볼 것이다.
8.〈인생〉의 낙천주의와 국문학과의 연계성
위화의 〈인생〉은 「무엇 때문에」가 아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는 미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노래이고, 성경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구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이 구해주시나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도 개의치 않겠다는 신탁의 읊조림인 것이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낙관주의와 낙천적이 삶만이 생명력을 보존하고 가치를 함유한다는 〈푸구이〉 노인을 대리한 위화 자신의 결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니 바로 송익필宋翼弼(1534-1599)이다. 송익필은 〈가례주설〉을 지을 만큼 예학에 밝아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의 스승이었지만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의 집안사람을 무고한 죄로 연좌되어 추노推奴를 당하는 신세로까지 전락한다. 파란과 굴곡이 많은 삶을 살은 송익필은 이에〈낙천樂天〉이라는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무慰撫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병들어서 아픈 것과 복이며 벼슬이며 하늘이 이치 아닌 것이 없도다.
근심하면 소인小人이고 즐거워하면 군자君子이다.」
이 책의 끝에 나오는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와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느껴질 것이다.
어떤가? 사람의 울림은 비록 공간과 시간을 달리한다고 해도 똑같다는 것을-
그것은 한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한 교정에서 익히지 않았어도 울림현상이라는 것은 세계 공통의 몸짓인 것이다.
-끝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