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文宗)은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는 임금 중 하나다.
이런 평가가 나온 배경은 T.V의 사극(史劇)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극(史劇)에는 대부분 "문종"(文宗)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렸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의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은근히 합리화 시킨 점에 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기록의 출처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에 의해 편찬되어
그들에 의해 철저히 왜곡된 "단종실록"(端宗實錄)과 "세조실록"(世祖實錄)이라고 할수 있다.
"문종"(文宗)은 "실록"(實錄)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조선의 27명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록이 일부 소실된 임금이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열세 권 가운데 11권(음력 1451년 12월 ~ 1452년 1월)이 없는데
"전주사고"(全州史庫)의 "문종실록"(文宗實錄)11권이 표지는 11권이였지만 내용은 9권이였다고 한다.
(책을 필사하고 표지를 붙이던 와중에 9권과 11권의 표지가 바뀐 것으로 추정)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전주사고"(全州史庫)
그러던 중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實錄)을 제외한 나머지 "사고"와 "실록"들이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들을 다른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종실록"(文宗實錄) 11권이 모두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 실록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문종실록"이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본이 모두 불타서 복원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세자(世子)로 29년을 지냈고 왕으로는 3년이 채 안되었지만 능력있는 왕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종"(文宗)은 "세종"(世宗)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다.
"세종"(世宗 3년 : 1421)에 8세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막상 왕위에 오른 것은 1450년 37세 때였다.
"세종"(世宗)은 1442년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해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해 앉아서 조회를 받게 했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했다.
"문종"(文宗)은 1445년부터 본격적인 섭정(攝政)을 시작했다.
세자로 있었던 기간은 무려 30년이나 되지만 정작 재위 기간은 2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긴 준비 기간에 비해 아쉬운 집권이지만 "문종"(文宗)은 즉위하기 전부터 실질적인 정치 경험을 쌓았다.
물론 세자의 섭정(攝政)이 국정 전반에 걸친 것은 아니었고 인사, 형벌, 군사 등 중요한 사무는
그대로 "세종"(世宗)이 관장했기 때문에 "세종"(世宗)이 이룬 왕정의 틀과 운영 체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문종"(文宗)은 세자로 있을 때부터 군정에 관심이 많아 "신진법"(新陳法)을 편찬하는 등 군제 개혁을 단행했고,
로켓의 시조라고 불리는 "신기전"(神機箭)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고,
"신기전"(神機箭) 자료사진.
우량(雨量)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도 "문종"(文宗)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측우기"(測雨器) 자료사진.
또한 세자 시절 "세종"(世宗)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누구보다 많이 협력했고,
"운회언역"(韻會諺譯)을 편찬할 때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과 같이 이를 관장했다.
"문종"(文宗)이 일찍 사망한 이유는 원래 몸이 허약한 데다 과로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근래 "문종"(文宗)이 "세조"(世祖)와 연계된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에 의해
"반하" 를 즐겨 먹은 꿩고기로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상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世祖)가 "문종"(文宗)의 사망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보인다.
"문종"(文宗)과 "세조"(世祖)의 중간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의 "의관 전순의"(醫官 全循義)다.
그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 "성종"(成宗)등 5대 임금의 질환을 치료했던
당대의 명의(名醫)로 내의원 의원에서 벼슬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까지 올랐다.
"전순의"(全循義)는 "의관 노중례", "최윤", "김유지"와 함께 한의학의 3대 저술 중 하나인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공동 편찬했고,
세계 최초로 과학 영농 온실을 건설했다는 기록을 적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을 펴냈다.
그런 "전순의"(全循義)가 "세조"(世祖)"의 사주로 "문종"(文宗)살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는 까닭은
"문종"(文宗)의 종기를 치료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종기"는 원래 고량진미를 과식할 경우에 생기며 초기 치료를 잘하면 사망까지 이르는 병은 아니다.
그런데도 "문종"(文宗)이 종기로 사망한 것은 매우 특이한 예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전순의"(全循義)의 죄목은 크게 3가지다.
첫 번째는
종기가 번성하면 움직이는 것을 금기하는데, "전순의"(全循義)는 "문종"(文宗)에게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지 않았다.
사신들을 접대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벅찬 일인데 환자를 혹사해 병환이 깊게 만든 것이다.
두 번째는
종기가 이미 화농되었을 때는 침을 써서 배농(排膿)하지만,
초기 증상에 침을 쓰면 도리어 증상이 악화되고 염증이 심화된다는 점이다.
"전순의"(全循義)는 화농되지 않은 종기를 고의적으로 건드려 증상이 더 악화되게 만들었다.
당시의 침은 지금같이 정교하지 않아 종기에 강한 자극을 주면 증상이 악화될수 있었다.
"전순의"(全循義)가 이런 기초 지식을 무시하면서까지
"문종"(文宗)에게 비상식적인 처방을 한 것은 고의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원래 껍질에 기름기가 많은 꿩이나 닭, 오리는 종기가 났을 때는 먹지 말아야 되는데
"문종"(文宗)에게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는 점이다.
꿩은 독성이 강한 "반하"(半夏)를 잘 먹는데,
"문종"(文宗)에게는 "반하"를 먹은 꿩고기를 먹으면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전순의"(全循義)가 "문종"(文宗)에게
꿩고기를 먹게 했다는 것이야말로 "문종"(文宗)이 독살되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한다.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이야기도 사연이 깊다.
"문종"(文宗)은 14세 때 김오문의 딸과 첫 번째 혼인을 하였으나
자질이 부족하다 하여 폐출(廢黜)되었고,
봉여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하였으나 역시 폐출(廢黜)되었다.
이후 "후궁"(後宮)으로 있던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세종(世宗)23년(1441)에 "단종"(端宗)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병"(産後病)으로 24세에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매장되었다.
"세자빈"의 신분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증되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아들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문종"(文宗)과 합장되지만 이건 훨씬 뒤의 이야기이다.
능호를 현릉(顯陵)으로 바꾸었고 "문종"(文宗)의 신주(神主)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단종"(端宗)이 폐위된 후 친정이 "단종"(端宗)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현덕왕후"(顯德王后) 역시 서인(庶人)이 되어 신주(神主)가 종묘에서 철거되었다.
그러자 "현덕왕후"의 혼이 "세조"(世祖)의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에게 사약을 내리려 할 때,
"세조"(世祖)의 꿈에 나타나 "세조"(世祖)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네 자식들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세조"(世祖)가 깜짝 놀라 잠을 깨니 내시가 달려와 "동궁"(東宮)의 변고를 알린다.
그날 밤 20세의 "동궁"(東宮 : 의경세자 : 懿敬世子)을 잃었고
"세조"(世祖)에 이어 즉위한 "예종"(睿宗) 또한 즉위 1년 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또한 "세조"(世祖)도 피부병을 앓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세조는 피부병을 고치려 오대산 상원사까지 갔다고 한다.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상원사의 문수보살상.
자식을 잃은 "세조"(世祖)는 죽은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파헤치고, 관(棺)은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날 새벽 관(棺)을 발견한 한 어부가 "현덕왕후"(顯德王后)인지 모른 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었다.
그날 밤 농부의 꿈에 왕비가 나타나 고마움을 표하며 앞날을 알려줘 그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정에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1513년 종묘(宗廟)에 벼락 친 것이 계기가 되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조광조"의 상소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관을 찾아 능을 복구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어부는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 것을 우려해 왕비의 묘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어부의 꿈에 나타나 부탁하여
비로소 그가 관아에 신고해 "문종"(文宗)의 옆인 현재의 "동구릉"으로 이장되었다.
처음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묘가 옮겨질 당시에는 "문종"(文宗)의 능과 왕비의 능 사이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점차 나무들이 말라버려 능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문종"(文宗)은 부왕(世宗)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생전에 "영릉"(英陵)우측 언덕
(본래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은 지금 "헌인릉" 우측에 있었다)을 장지로 정했으나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오고 바위가 있어 "건원릉" 동쪽에 안장했다.
"현릉"(顯陵)은 제5대 "문종"(文宗 : 14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 1418~1441)의 능이다.
"영릉"(英陵)이 조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의 "현릉"(顯陵)으로 옮겨졌으므로
"현릉"(顯陵)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른 가장 오래된 능이다.
"현릉"(顯陵)은 다른 곳과 달리 참도(參道)와 배위(拜位)가 홍살문 앞에 있다.
정자각, 비각 등 부속 시설은 하나만 만들고 정자각 뒤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따로 조성했으므로 "동원이강"(同原異岡)형식이라 부른다.
"현릉"(顯陵)의 참도(參道)는 굴절되어 궁(弓)자 형태다.
자료사진.
정자각 뒤의 참도(參道)는 왕후의 능침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이런 형식은 조선 시대의 왕릉에서 유일하다.
"문종"(文宗)의 陵
"문종"(文宗)의 陵.
정자각 뒤로 나란히 언덕 두 개가 있는데 그 위에 왕과 왕비가 각각 단릉(單陵)처럼 모셔져 있다.
자료사진.
능의 석물은 "국조오례의"의 표본인 구 영릉(舊 英陵) 제도를 따라
병풍석의 방울·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자료사진.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은 머리 부분이 크고 큰 눈과 코가 조각되어 있다.
자료사진.
문인석은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
왕비의 난간석은 중종 때의 양식을 따랐다.
"현릉"(顯陵)의 능표(陵表)는 영조 때 조선 시대 전체 능역을 정비하면서
능역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문종"(文宗) 이전 왕들의 능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으나 "문종" 때부터는 건립되지 않았다.
왕의 치적은 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에 따른 것이다.
왕릉마다 있는 비각은 숙종 때부터 세웠다.
비석은 각 왕릉의 문패라 볼 수 있으므로 노천에 설치했는데,
*능표(陵表)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 훼손되자 이를 막기 위해 건설했다.
능표(陵表)는 능주의 생몰년 등을 간단히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