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깨달음도 고정적으로 실재하지 않아”
<61>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7
마음 갖고 깨닫기 기다리거나
쉬기를 기다리는 것 경계해
[본문]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하지 아니하며, 또한 고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가 법을 설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본체를 확실하게 정해서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도 또한 옳지 아니합니다.
[강설] 선불교에서 일심(一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심은 곧 진여며, 법성이며, 불성이다. 또한 모든 존재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일심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도 잘못이다. 최상의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역시 어디에 고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설한 법도 어디에 확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이해해도 잘못이다.
그래서 일심이나 깨달음이나 법이나 모두가 중도적 바른 견해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부정도 하고 긍정도 하여 부정과 긍정을 함께 수용하는 안목과 견해를 가져야 한다. 어디 일심과 깨달음과 법뿐이랴. 우리들 인생과 삼라만상과 천지만물이 모두가 실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것이다. 중생과 부처의 관계나 범부와 성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본문] 그 일이 부득이해서 미혹과 깨달음과 취함과 버림 때문에 도리(道理)를 조금 설명하지만, 실은 미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방편으로 말했을 뿐입니다. 진실로 본체는 또한 조금도 없습니다. 부탁하노니, 그대는 다만 이렇게 마음을 써서 하루 24시간 중에 생사와 불도(佛道)를 집착해서 있는 것으로 여기지도 말며, 생사와 불도를 부정하여 없는 것으로 여기지도 말고 다만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화상이 말하기를, “없다(無)”라고 한 것을 잘 살펴보십시오.
[강설] 불교의 교리나 선리(禪理)는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그것은 사람들의 근기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근기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려다 보니 그와 같은 복잡한 방편의 가르침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본체에는 실로 그와 같은 것은 없다. 참선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생사니 불도니 하는 것에 집착하여 반드시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없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화두 하나만을 붙잡고 참구하고 또 참구하여야 한다. 현재의 자신이 잠을 자는지 또는 깨어 있는지, 자신이 죽은 몸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몸인지 조차도 생각하지 말고 화두를 참구하고 또 참구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간화선 납자가 가는 길이다.
[본문] 주의할 점은 절대로 의식으로 헤아리지 말며, 언어로써 해결하여 살길을 찾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또한 선지식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 곳을 향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또한 법을 거량(擧揚)하는 즈음에 돌과 돌이 부딪쳐서 불이 튀는 듯 하는 곳이나 번갯불이 치는 듯 하는 곳을 향해서 알아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라고 한 것을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지언정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마음을 가지고 쉬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마음을 가지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더더욱 깨달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강설] 화두를 들 때 주의해야할 점을 몇 가지 열거하였다. 화두를 의식으로 이러저리 궁리하고 사량하고 계교하는 것을 주의할 것. 화두의 출처나 유래에 대해 따지지 말 것. 선사가 법문하는 자리에서 입을 여는 순간에 알아차리려고 하지 말 것. 법을 거량하는 순간에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말 것 등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마음을 가지고 쉬기를 기다리는 것을 경계했다는 점이다.
[출처 : 불교신문 2883호/ 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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