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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만 항해 2편
5월 24일 (수요일) 오전 1시. 잠깐 콕핏에 누웠는데 엔진 소리가 이상한 것 같다. 엔진룸을 여니 엔진은 별 이상 없는 것 같다. 그럼 혹시 기어 쪽인가? 엔진을 중립으로 놓고 기어박스 오일을 체크 한다. 아무 이상 없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엔진 점검을 했다. 신경쇠약인가? 지난번 엔진 시동 불량이후, 트라우마가 남은 것 같다. 장거리 항해 시엔 반드시 충분한 양의 소모품, 교체 부품을 꼭 가지고 다녀야한다. 나는 지금 그러고도 불안하다.
오전 5시 40분. 배들이 좌우로 막 지난다. 일관 된 방향이 없다. 다만 항로를 가로지르는 배들은 없다. 뒷바람 3~4노트, 세일은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다. 선속 5.6 노트. 393 해리 남았다. 811해리 왔다. 총 구간 67.5%. 밤사이 바람이 약해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 중이다. 아무래도 벵골만의 일출을 한 번 더 보게 될 것 같다.
오전 7시 15분. 전방에는 두터운 구름이 끼어 있다. 새벽 내내 배들이 지나다녀 가드 존 알람을 껐다켰다를 반복했다. 쿠알라룸푸르 표준시로 맞추어서 시간이 2시간 30분 늦추어졌다. 일출은 7시 30분 이후에나 있을 거다. 바람은 3~4노트 풍향계 바늘이 빙빙 돈다. 선속은 5.0노트. 3일 5시간 남았다고 나비오닉스가 한 화면으로 두말 한다. 속도가 느려지니 도착 시간도 당연히 늦어진다. 세면을 하고 커피를 끓인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진다. 낮에 무척 더울 거다. 책을 편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네.
오전 8시. 발전기를 켜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다 그만둔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 시간대가 계속 바뀌니 몸속의 인체 시계가 엉망이 된 탓도 있을 거고, 어제 저녁을 많이 먹어서 일수도 있다. 어제 먹은 닭고기 완자 통조림도 우리 맛에는 없는 묘한 카레 맛이었다. 그리고 짰다. 외국에서 먹는 음식은 아무리 한국 음식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도, 직접 먹어보면 전혀 다른 음식이다. 대개는 짜다.
오래전. 한국 음식이 짜다며 식단을 개선해야 한다고, 어느 의학박사님이 매스컴에서 떠들었고 당시 우리는 ‘한국 음식은 짜구나, 식생활 개선을 통해 싱겁게 먹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 박사님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다. 이탈리아에서 스리랑카까지, 마트에서 산 조리된 음식 중에 짜지 않은 음식은 거의 없다. 특히나 햄 종류는 그냥 뱉어 버릴 정도로 짜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 그래도 소금을 가미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 개인적 취향엔 한국 음식이 가장 싱겁고 먹을 만 하다.
내가 이탈리아에서부터 통과해 온 지역 모두 중요한 무역로고, 역사적으로 해상전투가 자주 벌어졌던 지역들이다. 어쩌면 우리 빼고 다들 해상무역을 위해 장거리 항해에 익숙한 민족들이고, 항해를 위해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게 식품을 조리하다 보니, 음식들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짜진 것이 아닌가 싶다. 스파게티, 파스타, 햄. 모두 보관하기 좋고 조리하기 쉽다.
오전 8시 15분. 바람이 조금씩 남풍으로 자리 잡는다. 바람이 4~5노트가 되자, 선속이 5.5~5.8노트로 바뀐다. 세일 요트는 바람 냄새를 맡으며 달린다. 약간의 바람에도 속도 차이가 크다.
지금까지 내가 쓴 항해일지를 봐도 그렇지만, 나는 그다지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가지 걱정이 많고 늘 두려움에 쫒긴다. 찔찔 울기도 자주 운다. 배에 대한 것도 미리 점검하고 준비한다. 망망대해에서 고장으로 표류할까 너무 두렵다. 새로운 항구에 들어가는 것도, 그 전 항구에서 출항하기 전에 미리 다 준비하고, 연락하고, 입항 준비를 마치고 떠난다. 그래도 몇 번이나 입항거절을 당하고 입항 허가를 위해 바다 위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오만 샬랄라에서는 해양경찰에게, 빈 기름통을 발로 차며 ‘C8! 그럼 죽으란 말이야? 그럴 바엔 나를 체포하라!’ 고 화를 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도, 기름도, 식량도 없이 12해리 밖으로 쫒겨나면 그 다음은 막막했다.
진정한 세계일주 항해인인 윤태근 선장님은, “김선장님은 나랑 스타일이 다르다 아임니꺼, 그냥 가면 다 해결 됩니더. 너무 그래 철저하게 안 해도 됩니더.” 하고 웃으시지만, 그분은 진짜로 용감한 분 같다. 나는 아니다. 멀쩡히 잘 가는 배 엔진도 걱정되고, 식량과 물이 고갈 될까 걱정되고, 나 또는 에이전트의 실수로 입항 거부될까 걱정된다. 나더러 울보면서 천하의 겁쟁이라고 해도 달리 할 말 없다.
나는 대단한 모험가가 아니다. 요트 일을 시작한 이래, 세계일주는 언젠가 한 번 꼭 해보고 싶은 꿈이었다. 이번에 배를 좀 더 큰 것을 바꾸면서, ‘그래 운반비가 이리 비싸면, 그 돈으로 세계일주 한 번 하자.’ 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또 기왕이면 항해일지를 잘 기록해서 ‘내가 궁금하고 염려하던 상황들을, 내 뒤의 분들은 똑 같이 겪지 않도록 하자.’ 는 결심이었다. 그래서 겁쟁이인 내가 여러 가지 막막한 상황을 겪으며, 이렇게 항해를 계속하는 거다.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포기 할 수 없는 항해다. 나는 한 바구니에 모든 달걀과 내 목숨까지 담았다. 나로서는 막다른 골목이고, 배수진이다. 겁쟁이라고 포기를 쉽게 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지식과 부족한 준비로 시작된 이번 항해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돌아가면 지인들에게 해드릴 말이 많다. 세계일주 항해와 적합한 배, 내가 만난 훌륭한 선장들. 기회가 되면 세계일주 항해에 도전하시는 분들께, 조촐한 세미나라도 열어 그분들의 궁금증을 풀어 드리고 싶다.
요트 항해 선진국 선장들이 전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우리는 요트 장거리 항해 분야에서 여전히 ‘조선 후기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시야와, 우리의 비전과,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일을, 관계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가로 막고 있다. 한국이라면 바스코 다가마, 아메리고 베스푸치, 콜롬버스, 아문센, 피어리 같은 사람들은 모조리 범법자가 되었을 거다. 한국의 관계기관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거다. 소리가 고막까지 전달되는 덴 0.5초도 안 걸리지만, 고막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덴 아주 오래 걸리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 있다. 관계기관은, 한국의 해양문화 및 해양레저 부분을 그 설립목적에 맞게 선도해 달라는 당부다. 그러라고 혈세로 월급 주는 것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내겐 나와 너무 늦게 만난 21달 된 딸 마리스텔라(김리나)가 있다. 언젠가 그 애가 자라 아빠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될 때가 오면, ‘우리 아빠는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 세계일주 요트 항해를 하셨어.’ 라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또는, ‘우리 아빠는 말을 타고 전국을 14번 누비면서 기마국토대장정도 하셨어.’ 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세상 잘난 젊은 것들이, 공작새처럼 빛나는 날개를 펴고 우리 딸을 기죽이려 할 때, 나는 그저 늙은 아빠가 아니라 누구나 감탄할 뭔가를 해낸, 조금은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 우리 딸이 남다른 꿈을 꾼다는 걸 증명해주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울보고 겁쟁이인 나는 우리 딸에게 만큼은, 절대로 Nobody가 아닌 Somebody가 되고 싶은 거다. 어쩌면 이번 항해에 그 외 다른 이유 따윈 없어도 좋을 거다.
오전 9시 40분. 제네시스는 옅은 구름 사이로 수마트라의 열도에 접근 중이다.
오전 10시 40분.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스리랑카 Galle를 출항한지 꼭 6일이다. 이제 7일 째의 첫 한 시간이 시작된다. 367해리 남았다. 834해리 왔다. 하루 139 해리씩 온 거다. 평속 5.79 노트다. 꽤 빠르게 왔다. 현재 선속 6.2 노트. 말라카 해협으로 들어가는 7번 웨이포인트는 이제 4시간 20분 남았다. 계속 천둥소리가 울린다. 먼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 같다. 제네시스 좌우에 지나는 배들이 많다.
오전 11시 12분. 한국의 오징어 배처럼 주렁주렁 발광 등을 단 두 척의 어선이 좌현에 나타났다. 수마트라 인근의 섬에서 출항한 배 같다. 가까운 섬은 100 해리가 되지 않는다. 육지가 가까워 와진다는 의미다. 잔뜩 흐리고 찐득찐득한 바다 날씨다.
정오 12분. 바람이 북서풍4~5노트로 바뀌었다. 내키지 않지만 바람 한 점이 아쉽다. 집세일을 스타보드 쪽으로 바꾼다. 선속 6.5노트로 올라간다. 이대로 바람이 좀 더 강해지길 바란다. 무척 후덥지근한 날씨다. 비가 올 건가? 바다 전체가 연한 회색으로 무채색이다. 후방에 또 상선 두 대가 접근중이다. 신화속 타이탄의 행렬을 보는 것 같네.
오후 2시. 디젤유를 100리터 더 급유한다. 연료 탱크 게이지가 거의 끝까지 온 것 같아 100리터에서 멈추었다. 3일전 급유한 150리터 까지, 총 250리터를 급유했다. 이제 랑카위 가서 더 넣어보면 1,201 해리 항해에 디젤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데이터가 나올 거다. 급유 중에 바람이 남풍으로 바뀌었다. 물론 5~6노트 정도다. 그래도 집세일 방향을 또 바꾸었다. 선장은 부지런해야 한다. 선속이 5.5노트에서 6.0 노트까지 쑥 올라간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남풍이 어깨 죽지를 간지른다. 없는 것 보다는 좀 나은 바람이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도록 덥다. 냉장고에서 콜라 한 병을 꺼낸다. 제네시스에 비록 작지만 냉장고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내 혀와 감각을 5분간 속일 수 있다. 수마트라 북단 까지 51.3해리다. 혹시 핸드폰이 될까? 이제부터 신경을 곤두세운다. 부모님과 리나의 음성이 듣고 싶다. 헛! 선속이 6.2로 올라간다. 바람이 점차 강해지나 보다.
오후 3시.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이집트에서 산 라면과 김치 통조림을 덜어 먹고 나머지는 병에 넣어 보관했다. 라면만 먹으려고 했는데, 이집트 라면의 양이 워낙 적기도 하고, 어차피 남은 밥이 있어 말아 먹었다. 배가 든든하다. 먹는 동안에도 계속 배들이 지나다녀 가드존 알람이 울린다. 물 마시는 병아리처럼 한입 먹고 견시하고 를 반복한다. 귀찮지만 가드존 설정을 계속 켜고 끄고 반복한다, 실수해서 상선이나 유조선과 충돌하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성가신 게 문제 아니다. 7번 웨이포인트를 지나, 말라카 해협 가운데의 8번 웨이포인트를 향한다. 85해리, 13시간 30분 남았다. 남서풍. 풍속 브로드리치 4.5 노트, 선속 6.2노트.
오후 3시 30분. 가드존 경보가 날카롭게 울린다. 정면을 보니 말라카 해협에서 나온 배들이 남쪽으로 지난다. 항로를 조금 벗어나 편안하게 항해 하려는 것인가? 육지로 말하면 도로를 가로 지른다. 유조선이이다. 탱커는 1마일도 안 되는 거리를 지나간다. 유조선 뒷모습이 보일 때까지 견시 한다. 유조선이 멀어지자 다시 가드 존 스위치를 켜고 알람설정을 한다.
오후 5시 45분. 오늘 하루 종일 위성전화가 오지 않았다. ANDAMAN SEA 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위성전화의 Network Mode 를 확인하자, No Network service 라고 나온다. 위성신호가 잡히지 않나보다. 랑카위로 더 가까이 가면 뭔가 신호가 잡힐지도 모른다. 다음에 해외 장거리 항해를 하게 되면, 반드시 Gavin이 가지고 있던 신형의 대형 이리듐 고를 준비할 것이다. 물론 워터메이커나 태양광 판넬도. 이렇게 깜깜히 장거리 항해는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물론 고립되어 있으니 조용하긴 하지만. 너무 불편하다.
아, 수에즈에서 만난 영국인 선장 마크는, 이리듐 고와 날씨와 조류 등을 자동 계산하여 출항 일지를 지정해 주는 어떤 프로그램을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하고 안전하다는 거다. 그는 컴퓨터가 지정해 주는 출항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생각은, 그 만큼 항해에 모험과 재미의 요소가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컴퓨터가 정해주는 대로 항해를 해야 하다니.
오후 6시 40분. 무척 느리게 지나가는 하루였다. 아직도 2시간은 있어야 해가 질 거다. 선장 선실의 화장실 청소를 했다. 망망대해 바다 위를 항해하는데도 까만 먼지가 낀다. 대형선박들의 매연 때문일까? 뒷바람 4.5노트 인데, 선속은 6.4노트다. 이대로 바람이 조금 강해지면 좋겠다. 해가 뒤편으로 가면서 콕핏은 한증막이 됐다. 담요로 햇빛을 가려 놓았지만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다. 이제부터는 항해 환경에 대한 불평은 그만하련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치게 그리울 장면들이다. 15 해리 앞에 대륙붕이 있다. 30미터 미만 깊이라고 한다. 혹시 그물 같은 게 있을지 모르니 살짝 비켜 가기로 한다. 랑카위까지 320해리. 881해리 왔다. 총 구간 73%. 위성전화 신호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오후 8시. 여전히 바람은 없다. 선속 6.0노트. 혹시 몰라 임시 피항지로 정해 두었던 인도네시아 Sabong 마리나가 50해리 우측이다. 별 문제 없이 Sabong 마리나를 통과한다. 카레 파스타와 오이지로 저녁 식사를 하고 설거지, 샤워까지 마쳤다. 오늘이 7일 째 저녁이다. 5월 18일 (화) 오전 10시 40분에 출항해서 5월24일(화) 석양을 보았다. 내일(25일) 부터는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된다. 아마 금요일 저녁(26일)이나 토요일(27일) 오전 일찍 도착하게 될 거다. 목요일 일몰 전에 도착이 어렵다면, 천천히 다음날 일출 후에 들어가면 된다. 오후 7시 이후 야간에 도착하는 것은 자제하자. 내일과 모레, 바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지난번 인도양 항해 때도 그랬지만, 윈디는 태풍 같은 것 빼고 한 50% 선에서 맞는 것 같다. 바람이 강할 때 보다는 없는 때가 더 많다. 앞으로 항해에 참조하자. 다시 해리포터 씨리즈에 코를 박는다.
오후 8시 35분.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온갖 방향에서 대형 선박들이 몰려온다. 레이더는 계속해서 알람을 울려댄다. 3마일 가드존과 4.5마일 가드존을 계속 켰다 끈다. 오늘 밤은 계속 이럴 것 같다. 대형 선박들이 모두 이 항로로 말라카 해협을 드나들고 있다. 제네시스도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중이다.
아, 그리고 스리랑카 콜롬보에서는 아이스커피를 마셔보려, GAC 사무실에서 물어 보니 사환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다. 에이전트 Nuwan 에게 물어보니 사무실에 얼음이 없다고 한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얼음을 즐겨 먹지 않는다고 한다. 얼음물을 먹으면 배에 좋지 않다고 한다. 혹시 몰라 근처 케익 가게에서 물어보니 아이스커피가 있다고 한다. 반신반의 주문해 보니 그냥 차가운 커피를 주려 한다. 이들은 아이스커피가 뭔지 아예 모른다. 얼음을 먹지 않는다. 또 실론 블랙티가 좋다고 해서 티백에 들은 낱개 포장을 물어보니 뭔지 모른다. 그냥 한 팩씩 포장된 블랙티만 있다. 출항전날 스리랑카 아빠 ‘데릭’ 에게 열심히 설명했는데, 오늘 데릭이 준 블랙티 포장을 뜯어보니 그냥 봉투 티다. 티백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그래서 실론티는 포기하고 그냥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오후 9시 25분. 밤이 되자 말라카 해협의 밤하늘엔 별이 쏟아진다. 초승달 아래 금성, 쌍둥이 자리가 함께 있다. 좌현에는 북두칠성이 커다랗게 떠있고, 우현에는 남십자성이 가오리연처럼 떠있다. 바람은 밤이 되어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말라카 해협 한가운데 8번 웨이포인트까지는 23.1 해리, 4시간 남았다. 선속 5.6노트. 좌우가 온통 대형 상선들이다.
오후 10시. 후방 4해리에서 상선이 오고 있다. 초록 등과 붉은 등이 동시에 보인다. 그럼 바로 뒤에 온다는 의미다. 그대로 두면 머지않아 충돌이다. 무전기도 켜고, 망원경으로 계속 견시 한다. 여차직하면 침로 변경을 요구해야한다. AIS가 없으니 그냥 VHF 16번으로 막 떠들어야 한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약 20분 후 드디어 붉은 등만 보인다. 상선이 우측으로 침로를 바꾼 거다. 후방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지나갈 거다. 잠시 마음을 놓는다. 빔리치 7~9노트, 선속 6.5노트. 남은 거리 295 해리다.
오후 10시 30분. 멀리 Sabong 섬의 등대가 보인다. 0.5 해리 전방에 상선이 우측으로 항로를 가로지른다. 정신 하나도 없는 야간항해다.
2023년 5월 25일 (목요일) 오전 2시 10분. 스타보드 400미터 거리에 상선이 스쳐지나간다. 풍속 브로드 리치 10~13노트, 선속 6.2~6.6노트. 말라카 해협 안쪽으로 들어왔다. 272 해리 남았다. 929해리 왔다. 총 구간 77%. 바람세기에 비해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조류 영향이 있나보다. 수마트라 쪽에서는 계속 번개가 치고 있다. 하느님이 누굴 때려잡으시려나?
오전 4시 5분. 상선들이 계속 몰려든다. 항로가 대단히 복잡하다. 5분에 한 번씩 레이더 스위치를 조작해야 한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상선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나 보다. 그들도 나를 레이더에서 감지하고 피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겠지. 한밤중 배들이 우글거리는 말라카 해협에서, 맘 편한 항해사나 선장은 아무도 없을 거다. 빗방울이 뿌린다. 해치를 닫는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것으로 보아, 여기저기 먹구름이 낀 곳에서 뿌리는 빗방울인가보다. 도착시간이 애매하다. 매번 항해 때마다 똑 같다. 오늘 일출 후 항해 속도에 따라, 내일 오후냐? 모래 오전이냐? 도착 일정이 달라진다. 풍속 브로드 리치 12~15노트, 선속 6.2~6.6노트. 바람에 비해 선속이 느리다. 259해리 남았다.
오전 7시. 밤새도록 주변의 상선들을 견시하다 깜빡 잠들었다. 깨어보니 레이더가 텅 비었다. 나는 계속 직진하여 랑카위로 가야하고, 아마 대부분의 상선들은 말라카 해협의 남쪽, 싱가포르 방면으로 왕래하고 있을 거다. 예상대로다. 랑카위 이후 싱가포르 쪽으로 갈 때는 아마 이보다 더 혼잡하지 않을까 싶다.
세면을 하고 세탁을 한다. 파도도 높고, 뒷바람 10노트라 롤링도 심하다. 메인 세일을 100% 펴고 포트로 열어 로프로 고정한다. 펄렁이는 집 세일은 50%로 줄여 흔들리지 않게 바짝 잡아 다녀 놓는다. 혹시 강풍이 불 때도 념두에 둔거다. 선속이 5.2~5.4 노트라 내일 저녁은 어려울 것 같다. 조류가 역방향인가보다. 아예 모레 오전으로 입항 일정을 편히 잡는다. 금요일 20노트 강풍이 문제다.
입맛이 까칠하다. 우유에 시리얼을 탄다. 한 입 먹으니 어쩐지 신맛이 나는 것 같다. 이번 우유는 포트 수단에서 산 우유다. 먹기를 포기하고 버린다. 새로 꺼낸 우유는 어디서 샀는지 정체불명이다. 지부티였나, 살랄라였나? 한입 마셔본다. 괜찮다. 시리얼을 다시 타서 아침 식사를 한다. 뒷바람, 뒷파도. 많이 흔들리기는 해도 좋은 항해 조건이다. 하루 하고 15시간만 더 가면 된다. 남은 거리 235 해리. 966해리 왔다. 총 구간 80%다. 어제 밤과 오늘 새벽 뜬눈 야간 항해로 어질어질하다. 오늘 주간 항해는 중간에 수면을 좀 충분히 취하자.
오전 10시 30분. 엔진 Rpm 1,150, 뒷바람 Run 9.0~11노트. 제네시스가 달리는 느낌은 7노트 이상 속도인데, 선속은 4.8~5.2 노트. 역조류다. 바람이 제법 있는데도 선속이 느리다. 어차피 토요일(27일) 오전 일찍 들어가게 된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더위가 누그러졌다. 금요일과 토요일 강풍이 걱정되긴 하지만, 랑카위 마리나 가까이 가면 풍속이 느려질 거다. 하루 19시간 이라고 나비오닉스에 표시된다. 느긋하게 하자. 빨리 가야 임대균 선장을 기다리는 날짜만 늘어난다. 오늘 밤 풍속이 빨라지면 메인세일도 축범 하자. 토요일 오전, 주간에 안전하게 입항하자.
정오. 점심 식사. 햄 계란 볶음, 오이, 양배추 + 중국된장, 흰밥 + 김. 상당히 뿌듯하게 먹었다. 뒷바람 13노트, 선속 5.4~6.0 노트. 남은 거리 216해리. 985해리 왔다. 총 구간 82%. 뒷바람이라 롤링과 요잉이 심하다. 이론대로라면 자이빙해야 하지만, 너무 번잡스럽다. 메인세일을 활짝 열고 로프로 고정한 뒤 그대로 진행한다. 펄렁거리는 집세일은 접어 버렸다. 저녁에 바람이 16노트 이상 넘어가면 메인세일도 축범 할거다.
오후 2시 40분. 간식으로 초코비스킷과 작은 콜라 한 병을 마셨다. 곧 이를 닦고 샤워했다. 잠깐이라도 잠을 자고 나면 온몸이 끈적끈적해진다. 아마 땀과 함께 피로물질이 배출되는 것 같다. 낮에는 이대로 팬티만 입고 버티고, 야간에는 바람과 배출 된 피로물질이 배어 나오도록 셔츠를 입는다. 그리고 아침에 팬티와 티셔츠 수건을 세탁한다. 오늘까지 물은 750리터의 1/4 가량 사용했다. 187.5 리터다. 하루 23리터 정도인데, 이번에 온수기 급수 파이프가 터지면서 약 40~50리터가 흘러나가 버렸다. 이것을 제외하면 하루 17리터 가량 사용했다.
거꾸로 계산해 본다. 랑카위부터는 4인 항해다. 일주일간 항해하면 476리터다. 굉장히 절약하면 일주일 정도 항해는 물 문제가 없을 거다. 물론 마실 물은 따로 실을 거다. 하루 1.5리터 페트병 1인 3병으로 일주일에 84병이다. 6개 팩으로 14개 실으면 된다.
바람이 5.7 노트로 사라지고 있다. 선속은 4.5노트. 저녁부터 바람이 강해질 거니까 일단 이대로 기다리기로 한다. 미리 가봐야 소용없다. 처음 가보는 항구는, 안전을 위해 반드시 주간에 도착해야 한다. 제네시스는 말라카 해협 안에서 느리고 여유로운 항해 중이다.
전체 항해에 자잘한 부상도 있었다.
제일먼저, 이집트 이스마일리아에서 톨스의 배에 있을 때 우박이 쏟아졌다. 혹시나 싶어 급히 제네시스로 건너가다가, 오른쪽 새끼발가락을 어딘가 세게 부딪쳤다. 거의 부러진 수준이었다. 시퍼렇게 멍 들었는데, 이 부상은 지부티 쯤 가서 완전히 통증을 잊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계속 절룩거리며 다녔다.
두 번째, 지부티에서 에이전트 아셈의 배에서 제네시스로 옮겨 타는데, 아셈의 배가 출렁이면서 발을 헛디뎠다. 순간적으로 오른손으로 제네시스에 매달렸다. 갑자기 체중이 실린 오른 손 팔꿈치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허리까지, 불에 타는 듯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한동안 팔과 허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텐더를 오르내리고, 선외기를 들어 탈부착 하느라 완전 힘들었다. 지금도 오른쪽 등 뒤에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은 통증이 있다.
세 번째, 인도양 항해 중에 붐을 고정 시킨 로프를 풀려고 당겼는데, 그 로프가 왼쪽 눈에 맞았다. 안경을 갑판에 떨궜는데 다행이 깨지지는 않았다. 다음날 눈이 뻐근해서 웬일인가 보니 안구가 충혈 되고 시선 돌릴 때마다 눈이 아팠다. 스리랑카 도착한 후로도 3~4일간 왼쪽 눈이 충혈 된 것을 사진에서 볼 수 있다. 스리랑카 도착 4~5일 정도 되었을 때, 충혈과 통증이 사라졌다. 애꾸눈 잭 선장이 될 뻔했다.
네 번째, 스리랑카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목에 편도선 증상이 있었다. 이게 낮에 더위 때문에 낮잠을 못자고, 밤엔 좋은 친구 ‘존’ 때문에 오후 11시 넘어 잠 들다 보니 조금씩 심해졌다. 그러다 이번 항해 이틀째부터 침 삼키기가 어려워지고, 양쪽 신장이 뻐근해서 엄청나게 걱정했다. 만약 편도선 염증이 심해지면 약 한 알, 주사 한방 못 맞고 편도선은 편도선대로, 신장은 급성 신장염 같은 것으로 번질 수 있었다. 상당한 위기였다. 그러다 항해 4일 째부터 조금씩 가라앉아 지금은 완전히 치유됐다. 견시 도중 틈틈이 낮잠을 충분히 자고, 배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한 탓이다. 물론 맥주 같은 것은 한 캔도 싣지 않았다. 금주는 계속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이가 있다, 마리나 정박 중에도 어떻게든 숙면해야 한다. 건강을 잃으면 항해고 뭐고 없다.
오후 4시 30분. 뒤바람 8~9노트, 엔진 Rpm 1,250. 선속 4.5~4.7노트. 남은 거리 193해리. 1,008해리 왔다. 총 구간 84%. 위성전화기는 수동으로 위성 신호를 찾아도, 계속 Weak signal 만 표시 된다.
오후 5시 30분. 뒷바람 8~11노트, 선속 4.5~5.0노트. 집세일 0%, 메인세일 50%, 엔진 Rpm 1,250. 바람은 조금씩 강해지지만, 도착을 모레인 토요일 오전 7~11시 사이로 조절하고 있다. 바람이 더 세지면, 메인 세일을 더 축범 할 생각이다. 어차피 야간에 랑카위 도착해봐야 입항할 수 없다. 금요일 강풍이 너무 세지 않기를 기도한다.
오후 7시. 냉동 야채로 카레를 해 먹었다. 랑카위 가기 전에 살을 찌울 수 있을까? 항구에 도착해 부모님께 연락하면 너무 말랐다며 속상해 하시니, 이번 항해에서는 무조건 막 먹는다. 뱃살이 좀 올라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후 7시 40분에 일몰이다. Rpm 1,200 뒷바람 11~14노트, 선속 4.5~5.2노트. 179 해리 남았다. 파도가 높다. 그래도 뒷파도다.
오후 9시 40분. 선속 4.9 노트. 170 해리 남았다. 파도가 심하다. 놀이공원 다람쥐 통 탄 것처럼 배가 흔들린다. 주변에 지나는 배가 많지 않아 좋다. 위성전화기는 아예 네트웍을 잡지 못한다. 랑카위 가면 뭔 문제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이러다 랑카위에서 이것저것 해결 안되면 어쩌지? 이런, 이런, 또 사서 걱정이다.
오후 10시 10분. 와아 깜짝 놀랐다. 레이더를 잘 조절해 두고 잠깐 책을 보는 사이, 뭔가 낯선 매연 냄새다. 뭐지? 하고 일어나 보니 바로 40~50 미터 뒤에 어선이 지나가고 있다. 헉! 어선은 레이더에 안 나타나는 건가? 어선의 매연 냄새로 배가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스치듯이 가까이 지나는 이유는 뭔가. 지각없는 사람들이다. 서로 충분한 공간을 두고 지나가야지. 정말 깜짝 놀랐다. 배의 롤링이 상당하다.
2023년 5월 26일 (금) 오전 3시. 1마일 앞, 상선이 좌현으로 가로 질러 간다. 알람경보를 끄고 상선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견시한다. 수마트라는 계속 번개다. 천둥은 들리지 않는다. 풍속 12~13노트, 선속 5.3노트. 남은 거리 143해리.
오전 6시 30분. 풍속 12노트, 선속 6.0노트. 남은 거리 124해리. 풍속이 같은데 선속이 빨라졌다. 조류가 바뀐 모양이다. 느리게 가서 내일(5월 27일 토)오전 중 도착하고 싶은데, 자꾸 한밤중에 도착하게 만든다. 이를 어쩐다. 이제 와서 속도를 높인다고 일몰 전에 도착은 안 된다. 결국 적당한 지점에서 속도를 더 낮추어야 한다. 파도가 커서 그냥 표류하기도 어렵다. 일출도 7시 30분이나 되야 한다. 이래저래 쉽지 않다. 엔진 Rpm을 1,000으로 낮춘다. 메인 세일만 50%.
오전 7시 20분. 항해 9일째 일출이 시작되었지만, 구름에 가렸다. 잠시 일출을 촬영한다. 붐 고정 볼트 대신, 임시로 끼워 놓은 렌치 로드가 보인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무사히 잘 가고 있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덕분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목이 멘다. 맞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기도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사건들이 생길 때, 매달릴 곳은 오직 하느님뿐 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기도를 들어주셨다. 카메라를 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 드린다.
오전 8시 25분. 파도가 커서 끓이는 음식을 준비하기가 귀찮다. 우유와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선속이 4.9~5.7노트를 오르내린다. 오늘 오후부터는 선속을 5노트 미만으로 유지해야 한다. 세시봉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삼봉 정도전의 사상과 죽음을 공부중이다. 얼씨구? 느리게 가야 한다니 선속이 6.5노트를 넘어버리네.
오전 10시 40분. 아무래도 한밤중에 랑카위에 도착할 것 같다. 주변의 앵커리지를 찾아보고 있다. 파도와 바람만 가려 줄 수 있다면 앵커리지에서 날 밝기를 기다렸다, 입항 하는 것이 안전하다. Pulau Rebak besar 마리나 입구에도 앵커리지가 있다. 그러나 말라카 해협으로 완전히 열려 있어 파도와 바람을 잘 막아줄 지는 의문이다. 만약 바람과 파도가 약하다면 이 앵커리지에서, 5월 23일 현지 도착 하신다는 김석중 선장님과 연락하여 입항 후 요트 수리에 대한 자문을 얻는 것이 제일 낫다. 그리고 Pulau Rebak besar 마리나가 야간에도 입항 가능 하다면 김석중 선장님의 도움을 받아 야간 입항을 하는 것도 고려해 본다. 그러나 정보에 좀 더 들어가 보니, NE (북동풍) 시즌에만 가능하단다. 지금은 서남풍 시즌이니 여긴 불가.
또는 2해리 아래 인근의 P. Tepor 섬에도 앵커리지가 있다. 여기는 사방이 막혀 있어 앵커링에 적당해 보인다. 여기서 아침 되기를 기다려 Pulau Rebak besar 마리나로 입항하면 된다. 만약 김석중 선장님과의 연락이 여의치 않다면, 로열 랑카위 요트 클럽 입구의 앵커리지에 앵커링 해도 된다. 여기도 사방이 막힌 지역이므로 파도와 바람에 안전해 보이기는 한다.
오전 11시. 어차피 야간에 앵커링 할 거면 좀 더 빨리 가도 된다. 메인 세일을 70%로 늘여, 선속 5.7~6.0 노트로 만든다. 조금 일찍 도착해 앵커링 하고 편히 쉬자. 몇 가지 대안을 만들어 놓고, 다시 ‘조선사 인물 열전’에 코를 박는다. 백번을 보아도 신나는 이순신 장군 편이다.
오전 11시 40분. 신기하게 파도가 약해졌다. 그 틈을 타, 해물라면과 찬밥, 김치와 오이, 된장으로 푸짐한 점심식사를 한다. 어쨌거나 앵커리지로 가는 것이니 여유 있다. 밤에 앵커리지를 찾아 앵커링 하려면 견시를 계속해야 한다. 낮에 잘 먹고 충분히 휴식하자.
나와 위성전화 연락이 끊어져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위성전화는 계속 신호가 약하다는 메시지만 표시한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육지 근방에서 전화 연결이 되면, 안부 연락부터 해야겠다. 다시 한 번 이리듐 고! 를 외쳐 본다. 젠장!
오후 12시 30분. 바람이 17노트로 세졌다. 선속 6.2~6.5노트. 남은 거리 91.6 해리. 이대로 새벽에 도착하면 된다. 혹시 모르니 메인 세일을 축범 준비해 둔다. 대신 집세일은 80% 펴서 속도를 좀 더 높인다. 늘 그렇지만 내가 집세일을 펴니 바람이 다시 12~14노트로 약해진다. 육지 근방으로 가서 바람이 이대로면 좋지만, 혹시라도 바람이 강해질 때는 재빨리 세일을 접어야 한다. 강풍에서 세일을 전개 할 땐, 축범과 해장을 먼저 념두에 두어야 한다. 먹구름 때문에 레이더 알람경보가 울린다. 좀 쉬려니 구름이 안도와주네.
오후 1시 40분. 바람이 갑자기 빨라진다.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 전방을 보니 하늘과 바다가 안개 같은 것으로 붙어 있다. 소나기구나! 재빨리 선실의 해치들을 닫고, 콕핏 테이블의 전자 기기류를 대피시킨다. 레이더 플로터 커버를 닫고 계기판위엔 임시로 수건을 덮는다. 그리고 메인세일을 축범 하려는 순간, 소나기와 함께 광풍이 덮친다. 선속 9.2 노트. 바람이 20노트 이상인 것 같다. 일단 메인세일을 거의 다 접듯이 축범 한다. 그후 집세일을 접는다. 이미 온 몸은 물에 젖은 생쥐다. 정리를 마치고 비 구경을 한다. ‘스코올’ 인가? 비 한 번 시원하게 온다. 계속 올 것 같으면 우비를 입을 텐데, 여기저기 푸른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바람이 갑자기 6~9노트로 줄어든다. 비는 20분 가량 오다가 그쳤다. 선속이 느려져서 다시 메인세일을 70% 편다. 엔진 Rpm을 1,300으로 올린다. 남은 거리 81.3 해리. 레이더로 보니 4해리 전방에 비구름이 있다. 선속 5.6 노트. 콕핏이 다 젖어 앉을 곳이 없다. 에이! 어차피 팬티 바람이니 그냥 앉는다. 비에 젖었다 바람에 말랐다, 그런 게 뱃사람의 일상이지 뭐.
오후 2시 46분. 갑자기 폭우가 다시 내린다. 바람은 20~26노트, 선속 6.5~7.2노트. 미리 비 단속을 해 놓았지만, 비가 언제까지 올지 모르겠다. 전방을 보니 계속 비구름이다. 엔진 Rpm을 1,100 줄인다. 선속 6.5 ~ 7.2 노트. 스프레이 후드 바로 밑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남은 거리 78 해리. 밤에 이러면 비구름 때문에 레이더를 사용 못하니 큰일이다. 뭔가 또 대책을 마련해야지 싶네. 바람에 마스트 우는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아무래도 우비를 찾아 입을까? 일단 우비는 찾아 두고, 입는 건 좀 더 고민하자. 너무 덥고 축축할 것 같다.
오후 3시 30분. 바람이 좀 약해졌다. 엔진 Rpm을 1,200 으로 올린다. 선속 6.0 노트.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한다. 스리랑카에서 해치에 실리콘 작업을 한 것이 효과가 있다. 선실에 비가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메인세일 붐에 임시 설치한 렌치 로드도 잘 고정되어 있다. 뭔가 일했는데 그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것. 그럴 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보람이 크다. ‘존’과 함께 엔진 연료 펌프 청소를 한 것으로, 이번 항해 9일 동안 엔진이 무리 없이 잘 작동되고 있다. 도착하면 ‘존’ 에게 알려줘야겠다. 먼데서 천둥소리가 위협하듯 으르렁 거린다.
오후 4시 30분. 어차피 콕핏도 다 젖었고, 언제 또 소나기가 내릴지 모르니 낮에는 그냥 항해에 집중하기로 한다. 메인 세일을 다시 80%로 편다. 오늘 밤 어느 곳이든 앵커링만 하면 아예 편하게 쉴 수 있다. 설혹 안 그렇다 해도 하루 저녁, 4~5시간만 버티면 된다. 바람이 또 슬슬 빨라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전방에 비구름이 짙게 껴있다. 다시 소나기 대비를 해야 하나?
오후 5시 10분. 드디어 좌현 50 해리 지점에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9일 만에 보는 말레이시아의 섬들이다. 바람이 더 거세지기 전에 얼른 저녁을 먹기로 한다. 빨리 만들고 간편한 카레 파스타다.
오후 5시 35분. 바람이 20노트 이상 불고 선속이 7.1노트다. 다시 비가 올 모양이다. 저녁식사를 얼른 해치우기 잘했다. 이젠 세일 요트 선장으로 감도 좀 셍긴 모양이다. 서둘러 해치를 닫고 소나기에 대비한다. 좌현에 보이는 섬들이 더 뚜렷해지고 어선 한척이 조업 중이다. Ko rawi, Ko butang, Ko lipe 등의 섬들이다. 해치들을 닫고 전자 기기들을 다시 이동했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고생을 좀 할 예상이다. 랑카위 내만으로 들어갔을 때, 앵커링 하기 수월하게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기를 기대한다. 7~8시간 후에야 내만으로 들어가니, 그때까지는 정신없이 앞을 견시 해야 한다. 레이더에도 잘 잡히지 않는 어선들도 문제다.
레이더를 보니 이 비구름은 전방 약 6마일에 걸쳐있다. 이후로는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비는 한 시간 내에 그칠 것 같다. 7~8시간 후 내만에 들어가면, 바로 세일을 접고 엔진 항해(기주)를 해야 한다. 어둠속에서 세일을 안전하게 잘 접도록 주의하자. 남은 거리 59마일. 하지만 40마일만 더 가면 핸드폰 신호가 잡힐 거다. 안전하게 앵커링 후에 걱정하시는 분들께 도착 소식을 전하자.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은 9시간 30분 남았다.
오후 6시 30분. 랑카위 섬에서 45.8 해리 거리다. 주변에 통나무 쓰레기, 그물 부이 등이 막 지나간다. 통나무도 꽤 큰 거다. 정면충돌하면 데미지가 있겠다. 하아, 이 쓰레기들을 어쩌지? 야간에 사고가 없기를 기도한다.
오후 7시 30분. 배가 우현으로 확 쏠린다. 바람이 계속 빨라진다. 풍속이 33노트를 몇 번 넘어간다. 이러면 오토파일럿이 못 견딜 텐데, 수동으로 조정해야 하나? 잠깐 보고 있는데 눈앞에서 풍속계가 고장 난다. 헉! 나도 모르는 사이 사이클론이 온건 아닌가? 랑카위 해안에 가서는 풍속이 줄어야 할 텐데. 현 상태에서 시험 삼아 메인세일을 좀 더 축범 하려고 하니 윈치가 헛 돈다. 메인세일 축범이 불가능하다. 해안 10마일까지 갔을 때, 메인시트를 감아서 메인세일을 가지런히 정렬해 두고, 다시 축범해 봐야겠다. 소나기는 쏟아지고 상황이 나쁘다. 감으로 느끼는 풍속이 30노트 이상이 될 때마다, 선속이 8.5 노트를 오르내린다. 그래도 이런 강풍에 오토파일럿이 버텨준다.
제네시스 주변 여기저기 벼락이 떨어진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진짜 사이클론인가? 파도가 山(산) 만하구나.
오후 8시 25분.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서 미리 메인세일 축범을 다시 해본다. 좌우 롤링으로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한 선체를 엉금엉금 기어 갑판으로 나갔다. 붐을 고정해 놓은 로프를 풀고 정리한다. 다시 엉금엉금 기어 돌아온다. 한발 잘 못 딛거나 균형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크루가 더 있어도 끝이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2초 내에 실종이다. 메인세일 시트를 조여 붐을 일자로 닫는다. 그리고 다시 메인세일을 축범 한다. 오! 된다. 50%까지 축범 하고 다시 조금 열어 둔다. 이제 랑카위 앞에서 메인세일을 다시 완전히 감으면 된다. 예상치 못한 강풍이었다. 지금은 다시 바람이 15노트 정도로 잦아 들었다. 이것도 감이다. 풍향계는 고장이다.
식겁했다. 풍향계는 순식간에 고장 나지, 메인세일 터질까 걱정인데 축범은 안되지, 콕핏보다 몇 미터는 더 높은 파도가 뒤에서 달려들지. 와아, 아덴만 탈출만큼이나 심장 조리는 야간항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랑카위 내만에서 앵커링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곧 통화가 될 거다. 비는 하염없이 오고, 시계는 제로다. 앵커링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점점 걱정이 커진다.
오후 8시 50분. 랑카위 30마일 전방. 카카오톡 메시지가 들어온다. 보내기는 아직 안 된다. 데이터 신호가 연결됐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다들 걱정하고 있을텐데, 속만 탄다. 에이, 육지가 조금 더 가까워 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자.
오후 9시 3분. 김석중 선장님과 간신히 통화가 됐다. 나로서는 세상 반가운 음성이다. 이미 랑카위에 와 계신다. 새벽에 도착 한다고 하니까, 아무 상관없으니 미리 전화하고 입항하라고 하신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같은 마리나인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에 계신단다.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은 야간에도 입항 계류가 가능한가 보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일이다. 오늘 밤 앵커링 하지 않아도 된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오후 9시 39분. 해양수산부에서 전화가 온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신단다. 위성전화 신호가 약해서 통화가 안 된 거라고 알려드린다. 랑카위 25마일 전방 해안이고, 5월 27일 새벽 2~3시 사이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 도착 예정이라고 말씀드린다.
오후 10시 10분. 해안에 어선이 많다. 비는 그쳤지만 여기저기 벼락은 계속 떨어진다.
2023년 5월 27일(토) 오전 0시 30분. 아니 랑카위에서 35마일 떨어졌을 때는, 전화도 되고 카카오톡 수신도 됐는데, 지금 랑카위에서 12.7마일 인데, 계속 전화와 데이터 연결이 안 된다. 이건 무슨 경우인지? 김석중 선장님께서 전화 달라고 하시는데, 전화가 안 된다. 통화가능 지역이 아니란다. 참나 안타깝다.
오전 1시. 김석중 선장님과 간신히 통화가 됐다. 랑카위 섬을 통과하지 말고, 남쪽으로 섬을 돌아 마리아 계류장 D23번으로 오라신다. 한시간전에 통화하고 채널 69번. 그런데 내 핸드 무전기는 69번이 없다. 다른 번호를 알려 드려야겠다. 남쪽으로 통과하면 5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럼 오전 6시 이후가 되니 일출 후 주간에 입항 할 수 있겠다. 오늘 밤은 무척 긴 야간항해가 되겠다.
오전 2시 30분. 섬 주변에 그물이 없는지 확인을 못했다. 이래저래 뱃장 항해다. 아직도 4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