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가이치"(曾田 嘉伊智)는 1867년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서 영어를 배웠고,
대만에서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조선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조선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YMCA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 상재 선생을 만나 1906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백만명 구령운동"(百萬名 救靈運動)에 참가하였고 경성 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賣書人)을 겸한 복음 전도에 투신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개신교 신자이자 이화학당과 숙명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우에노 다키"(上野タキ1878-1950)를 만나 41세에 결혼하고 금주회 회장까지 지내면서 음주벽을 청산했다.
3.1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으며,
1921년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 지부장에 취임하여 두 내외가 전심으로 고아들을 보육하게 되었다.
"105人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등으로도 불리며,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은 제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헌병경찰제도에 기초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행하는 한편,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平壌), 선천(宣川), 신의주(新義州) 등을 시찰했는데,
이때 조선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총독부는 안중근(安重根)의 사촌인 안명근(安明根)이 1910년 12월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북서부의 안악(安岳) 지방을 중심으로 160여명의 민족운동가들을 검거하여
그 가운데 김구(金九)ㆍ김홍량(金鴻亮)ㆍ한순직(韓淳稷)ㆍ배경진(裵敬鎭) 등
18명을 내란미수와 모살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이른바 "안악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독립군기지 창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주진수(朱鎭洙)등 신민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16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몰아서 관서(關西) 지방 전체로 탄압을 확대해
그해 9월에는 유동열(柳東說),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昇薰),
이동휘(李東輝)등 6백여 명의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민족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려 애썼다.
1심 재판에서 105명에 대해서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하였다.
그리고 보육인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郎)를 통해 보육의 길을 걸으면서
1896년 경성부 용산구 후암동에 "사다케"가 설립한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지부장으로
부임하여 1921년부터 1000명 이상의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아내 "우에노 다키"도 1926년에 교사를 그만두고 보육 활동에 합류하였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고아들에게 항일 교육을 시켰다며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는 8.15광복 때까지 1천여명의 고아를 돌보아주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때로는 이런 그를 자선가로 위장한 일본의 앞잡이라고 비방을 받기도 했고,
1943년에는 77세에 원산(일본인)교회 무보수 전도사로 취임하여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까지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 시모노세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그는 한 손에는 세계평화란 표어를 들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일본의 회개를 부르짖었다.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가마꾸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 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 단체 연합장"으로 국민 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 운동 본부장 "유달영"(柳達永), 보사부 장관 "정희섭"(鄭熙燮), 서울시장 "윤태일"(尹泰日)의 조사(弔詞)가 있었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의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 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양화진 묘지에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그의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先生之墓" 라고 했고,
비 뒷면에는
"소다(曾田)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치었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시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하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 보육원"(鎌倉保育院)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러라.
1919년 독립 운동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역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鎌倉)의 자리에 있는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享年)이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碑를 세우노라.”
"1950년 1월 부인 "다끼꼬 여사도 서울에서 서거하다." 라고 쓰여 있다.
우에노 다끼꼬(上野,Takiko, 1878-1950.1.14)
소다의 아내 우에노 다끼꼬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 여학교와 이화 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 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라고 전택부(全澤鳧)는 기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
이라는 아름다운 시가 쓰여 있는데 옆면이라 사진찍기가 어려워 찍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