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7. 우루무치에서 돈황으로
꿈에도 그리던 돈황 땅 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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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막고굴> |
사진설명: 맞은편에서 촬영한 막고굴 전경. 492개의 석굴이 동서 3리에 걸쳐 개착돼 있다. |
2002년 9월25일. ‘다시 또 오겠다’는 하염없는 약속을 허공에 던진 채 투르판을 떠났다. 폐허만 남은 고창고성, 진흙더미로 변한 교하고성, 심한 열에 주름만 잔뜩 진 화염산, 실크로드 약탈자들에 의해 찢기고 파헤쳐진 베제크릭석굴, 투르판 분지에 가득한 포도밭 등을 뒤로 하고 신강성 성도(省都) 우루무치로 향했다. 투르판과 우루무치 중간 지점에 도착하니 도로변에 커다란 바람개비가 여기 저기 널려있다. “저게 뭐죠” 물으니,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풍력발전소”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차 문을 열고 바람을 만져보았다. 풍력(風力)이 대단했다. 얼른 문을 닫고 풍력발전기들을 눈으로 보며 지나갔다. 투르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172km. 오전 10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우루무치. 인구 약 200만. 천산산맥 북쪽 기슭, 해발 915m 고지에 자리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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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투르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다 만난 풍력발전소. |
우루무치 강변에 위치한 데서 연유한 지명으로, 우루무치는 ‘투쟁’이란 의미다. ‘광대한 목초지’라는 뜻도 있는데, 일찌기 중가르부(17세기 초 일어나 18세기 중기까지 존속한 오이라트 부족과 국가)와 회족(回族. 중국 내에 거주하며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이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라 한다. 7세기 무렵 당나라 위세가 이곳에 미쳐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가 설치되고, 천산북로(天山北路)까지 당나라에 관할되면서 정주(庭州)로 불렸다. 그 후 오랫동안 몽골·투르크(돌궐) 등 여러 유목민족의 쟁탈지가 됐다. 그러다 18세기 중엽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중가르부를 평정하고 북쪽에 새로이 한성(漢城)을 축조, 적화(迪化)라 불렀다.
당나라때 동서문화교류 중심지로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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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신강성 성도 우루무치 시내 전경. |
1881년 러시아와 조약으로 개시장(開市場)이 되고, 한때 러시아 세력권에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1882년) 신강성이 설치되자 성도(省都)가 됐고, 중화민국시대엔 적화현(迪化縣)으로 불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적화’라는 지명이 계몽·교화 등의 어의(語義), 즉 ‘이민족을 통치한다’는 뜻이 내포됐다고 해, 원지명인 우루무치로 환원됐다.
내륙분지의 초원기후로 목초가 많아 목축이 이뤄지는 관계로, 양모·피혁·잡화 등의 거래가 예로부터 성했다. 댐이 축조되고 관개수로가 정비된 최근엔 농작물 수확이 급증하고 있다. “부근에서 석유·석탄·철광·구리광이 발굴됐고, 자원개발과 함께 전력·면방직·시멘트·화학·제분·피혁·주철·강철·자동차수리 공업 등이 발달했다”고 안내인이 덧붙였다. 자동차도로의 중심지며, 난신철도(蘭新線. 난주·우루무치)로 농해선(농서지역·상해)과 연결, 중국 동안에 있는 연운항(連雲港)까지 다다를 수 있다. 스웨덴 출신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의 중앙아시아 탐험대 본부가 설치됐던 우루무치. 현재 신강의과대학이 설립돼 명실상부한 신강지구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우루무치 이곳저곳을 관람하는 등 하루를 머문 뒤,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꿈에도 가고 싶었던 ‘돈황’으로 출발했다.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그곳 ‘돈황’! ‘돈황의 불빛’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가슴 졸였던가. 마침내 그곳으로 가게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것이 2002년 9월12일. 중국에 머문 지 14일 만에 ‘꿈같은 환상’의 도시 돈황으로 날아간다. 꿈에서도 보고 싶었던 곳, 항상 찾아 헤매던 고향 같은 곳, 우리나라에 전해진 불교가 꽃을 피운 곳이 바로 돈황 아니던가. ‘실크로드의 꽃’을 보기 위해 돈황으로 달려간다 생각하니 온몸이 절로 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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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우루무치 근교의 남산에서 본 파오. |
2002년 9월26일 오후 5시40분. 우루무치 발 돈황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점점 우루무치가 멀어졌다. 그러다 어느 새 구름만 비행기 주변에 가득한 허공에 날아올랐다. 고공비행을 계속한지 1시간 30분. 비행기 창으로 ‘돈황의 대지’가 보였다. 얼굴을 비행기 창에 한껏 대고 땅을 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안경을 벗었으나, 벗는 순간 땅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후 7시15분.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돈황의 대지에 비행기가 동체를 부딪쳤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건물을 바라보니 ‘돈황(敦煌)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마침내 돈황에 발을 디딘 것이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져가는 낙조(落照)가 공항 건물에 부딪혀 마지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낙조를 보며 ‘역사 속의 돈황’을 떠올렸다. 중국 서북지역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녹지대 돈황은 기련산(祁連山) 밑에 위치한 예술의 고장이자, 동·서 문화 교류로 찬란한 꽃을 피웠던 불연(佛緣) 깊은 곳이다. 감숙성(甘肅省) 서쪽 끝에 자리 잡은 돈황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당시엔 돈황으로 불려지지 않았으며, 다만 흉노와 같은 소수민족의 유목지구였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24) 무제(기원전 156~기원전 87.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 한나라 국력이 강성해지자, 변방의 안정과 국제적인 교통의 관통을 위해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나라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 봄.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흉노 혼사왕(渾邪王)은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부하 수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한나라는 흉노가 항복한 지역을 접수, 무위(武威)와 주천(酒泉) 2군을 설립하고, 하서회랑의 일부를 한 제국의 판도 안으로 끌어넣었다. 10년 뒤인 원정(元鼎) 6년(기원전 111년) 또 다시 장액(張掖)과 돈황 2군을 설치, 무위·주천과 함께 소위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완비하게 된다. 돈황이라는 이름은 이 때부터 역사 책 속에 기록되는데, 중국 국내로부터의 이민과 변방 병사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점차 발달하여 여섯 개 현을 거느린 큰 고을로 성장했다.
하서 땅을 한나라 세력에 들어오게끔 만든 주역은 한 무제였다. 무제는 명장 위청(衛靑. ?~기원전 106)과 곽거병(기원전 140~기원전 117)을 앞세워 흉노를 토벌, 그들을 멀리 서북방으로 몰아내고 돈황 일대를 한의 세력권에 둔 것이다. 처음엔 순수한 군사기지였던 돈황은 한의 서역경영이 본격화되면서 성격이 변하게 된다. 서역에 도호부가 설치되자 돈황은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 교류의 전진기지로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됐다. 주둔하는 병단 외에 동으로, 혹은 서로 향하는 많은 여행자를 위한 여인숙이 마련되고 점포와 시장도 열리게 되었다. 천산남북로를 통해 들어온 불교 역시 돈황에서 크게 일어났다. 사실 돈황은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지점에 있다. 천산북로든 천산남로든 돈황을 지나야만 장안에 갈 수 있다. 돈황을 ‘교류의 인후(咽喉. 목구멍)’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구멍을 지나야만 위(胃)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절벽에 뚫은 492개 석굴 유명
그러나 한나라 이후 변천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돈황도 피하지는 못했다. 5세기 초 서량(西凉. 400~420)과 북량(北凉. 397~439)의 전쟁 당시 수공작전으로 돈황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다음 시기의 돈황이 파괴된 도시 위에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인접 지역에 건립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북위·서위·북주·수·당을 거치며 돈황은 새롭게 일어났다. 특히 당나라 때 돈황은 동서문화의 교류, 동서무역의 일대 중계지로 번성했다. 아침·낮·밤 하루 세 번씩 시장이 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물론 당나라 때 돈황은 크고 왕성한 불교 도시였다. 돈황 교외 사막 속에 막고굴(莫高窟)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의 일이지만, 당나라 시대 막고굴은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돈황 동남쪽 25km 지점, 명사산과 접한 평균 높이 17m인 절벽에 뚫려진 492개의 석굴이 바로 막고굴이다. 동서 3리에 걸쳐 뻗어있는 막고굴은, 당나라 무주성력 원년(698)에 이회양이 찬한 ‘중수막고굴불감비문’에 개착시기가 나온다. “진나라 건원 2년(366) 낙준스님이 임야를 걸어 명사산에 이르렀다. 홀연 찬란한 금빛이 나타났는데, 모습이 마치 천의 불상 같았다. 마침 내 하나의 굴을 만들었다. 그 뒤 법량선사가 동쪽으로부터 와 이곳에 이르러 낙준스님의 굴 옆에 또 하나의 감실을 만들었다.”
이렇게 개착되기 시작한 막고굴은 오호십육국·북위·서위·주·수·당을 거치며, 각 시대의 특색을 지닌 많은 굴들을 보탰고, 하서지구의 호족(豪族)이 판 굴이 있는가 하면, 서역 소수민족의 왕족이 만든 굴도 있다. 물론 당나라 시대 가장 왕성하게 개착되는데, 성지 막고굴을 찾는 순례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盛)의 극(極)을 경험함 돈황은 토번(티벳), 한족의 지방 호족, 서하(西夏. 1032~1227), 원, 명, 청을 거치며 무상(無常)을 경험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돈황의 역사를 생각하는데, 갑자기 “빵 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다 지친 운전수가 경적을 울린 것이다. 뒷머리를 긁으며 차를 탔다. 도착한 곳은 돈황태양대주점. 중국에서 호텔을 ‘대주점’(大酒店)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풀면 큰 술집이라는 뜻이 되지만, 술집은 아니고 호텔이다. 태양대주점 601호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올 리가 만무했다. 내일 만날 돈황석굴 생각에 눈만 말똥말똥해졌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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