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설레임속에서 맞이했던 2003년 계미년 새해, 또 1월이 간다.
날과 달, 해를 구분한 것도 어찌 보면 쓰임새에 맞게끔 인간이 만들어 낸
이기(利己)라지만 오고간다는 것은 분명 허망하고도 속절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한 겨울 눈발이 날리는 언덕 위의 다복솔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모를 서러움이 빈약한 가슴에 둥지를 튼다. 이 우울한 정물 앞에서 가버린
것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지난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부대껴야 하는
우리네 삶이 위태롭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결코 삭정가지에서 윙윙거리는
찬바람 때문만은 아니리라.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이 황량한 계절에 나는 또 한 사람과 이별했다.
순서나 순리에 따른 헤어짐이라면 조금은 허전한 구석을 채워주고 달랠
그 무엇이라도 있었을 텐데, 객사도 그러려니와 술 몇 잔이 사인(死因)이라는
녀석의 영정 앞에서 연거푸 들이킨 알코올이 쓰디쓴 점액이 되어 위액을 타고
흐를 때는 손끝으로 미세한 전율이 일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고인이 되어버린 그를 영구(靈柩)차에 실어보냈다.
'잘 가라 임마,' 한 친구녀석의 가느다란 흐느낌을 뒤로하고 영구차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직은 짱짱한 연륜의 내자(內子)와, 흐느끼는 두 딸을 이 차디찬 도시의
뒷모퉁이에 남겨두고 대체 녀석 홀로 어디로 가는 걸까, 아니 뭐가 그리
급해서 결별의 손을 흔들며 아득한 겨울의 소실점으로 사라져가야 한단 말인가,
'자식놈이 삶아준
면발 몇 쪽 걸치고
이별하러 가는 길은 아득도 하다
노숙자가 쏟아내는
잔기침과 각혈(?血)에
지하도가 압사 당하고
새의 부리 끝에서 겨울이 객사(客死)했다는
시대의 열병 같은 씁쓰름한 소식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어라
다만 발목이 잘린
초저녁 무심한 달빛만
산동네 빈 번지에
주검처럼 내리고
특수에 신이 난 장의(葬儀)쟁이는
덩달아 내 상한 관절에 못질을 해댄다
또 한 구비 넘어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이리 쓸쓸한 걸까,
오열(嗚咽) 속에서 날은 밝고
영구차에 압사 당한 여명이
비시시 실눈 뜨는 도회지엔
검은 안개가
점령군이 되어
진군의 나팔을 분다
묻어둔 세상 인연 살겁게 눈 맞추며
너는 땅으로 돌아가는데
빈손인 난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진혼곡(鎭魂曲) 한 소절이 저리 섧게 우는데.'
['마지막 인사' 전문. 최광림]
비보 끝에 묻어온 소식이 설이란다. 세월의 윤회(輪回)치고는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고 죽음이 세상만사의 이치임을 또 어쩌랴, 설이
목전인데도 거리는, 또 사람들은 그저 차분하기만 하다. 기분 같아선 어깨를
들썩이며 한껏 흥을 내봄직도 한데 우린 그만한 여유조차 없는 것일까,
전운이 감도는 지구촌, 불확실한 경제, 고삐 풀린 물가, 장바구니에 시름만
가득 담긴 우리네 소시민의 삶이 어찌 살얼음판과 다를 바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기회와 희망은 있다. 어려울수록 똘똘 뭉치며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지혜와 국민적 자긍심이라면, 그런 은근과 끈기의
한민족이라면 못해낼 것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내일은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한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어도 좋다.
다행스럽게도 핵 문제로 어수선한 남북관계가 희미하게나마 물꼬를 트고
정치권의 자정과 거듭나기는 반가운 일이다. 이반된 민의의 결집과 지역, 계층,
세대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어우르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타협이다.
정치권이 이 상생의 기본공식을 바탕으로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며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매진할 때 패자도 승자가 되고 국민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 대통령이
대통령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설은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풍요로운 차례상도 좋지만 정성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떡국 한 그릇에 맑은 물 한 사발로도 넉넉하다.
명절 때마다 역귀성에 나들이로 부산했던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고 이번만큼은
귀향열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싶다. 빈집 마당의 눈도 쓸어보고,
때 낀 툇마루도 닦아내며 눈발 속에 핀 싱싱한 햇살도 들어 앉히고 삶의 고뇌가
닥지닥지 엉겨붙은 탈색된 벽지에 눈길도 주어볼 일이다. 그래서 온 가족이
세상 시름 모두 잊고 단 하루만이라도 웃음꽃이 만발하는 그런 날이 되었음 싶다.
모두가 축복 받는 설다운 설이 되십시오.
[choikwangl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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