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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하바국 3:3-15절
제목: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아 답답하십니까?
서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죽음에 직면해 있는 병자를 위해 기도하지만, 지인과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이가 가출해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지만, 미움과 분노만 품게 되고, 평온한 일상을 위해 기도하지만 혼란스럽고 불안한 나날을 사는 자신을 보며 기도의 줄을 놓아버립니다.
선지자 하박국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박국은 세상의 악한 방식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는 것을 위해 기도하지만, 세상 안에는 여전히 의인이 짓밟히고 악인이 강포를 행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지만, 전쟁만을 경험하게 되고, 관료들이 청렴하기를 기대하지만 부정부패하고, 진실한 목소리가 인정받기를 기대하지만, 진실한 소리는 묻히고 거짓된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봅니다.
정의로운 재판을 기대하지만, 더는 재판에서 정의로운 법 집행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힘 있는 자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세상이 강포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회에 나타나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맞게 왜곡해서 듣는 이들을 보며 선지자는 기도하다가 지쳐가고 있습니다.
범법하고 사기를 치고 속이며 살아가면서도 사회 내에서는 좋은 평판을 받는 이들을 본다면, 우리도 기도하다가 마음이 지치고 기할 마음마저 금이 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마주한 선지자 하박국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방관자처럼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처럼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예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처럼 인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마치 출애굽 하기 전 하나님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바로의 폭정으로 학대당하고 있을 때처럼,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이제 나타내시고 행하러 오신다는 것을,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그가 본 환상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본 환상이 무엇입니까? 유다의 죄악에 대해, 다 보시고, 다 듣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본 하박국이 탄식하며 기도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기도하다가 지쳐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공의를 세우려고 오십니다(3-7)
선지자 하박국이 활동하던 당시 유다 사회는 혼돈한 사회였습니다. 혼돈이란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태초에 천지 곧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간은 텅 비어있었고 혼돈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즉 질서가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목도하고 있는 사회도 혼돈 사회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혼돈은 하나님의 미쉬파트 곧 공의를 포기한 결과를 혼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공의를 세우는 데 토라가 올바로 선포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 데만은 유대 남쪽과 에돔 근처의 땅에서 왔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란은 온 유다 남쪽에서 시내 산 까지 이어지는 광야 지역입니다. 세일과 시내 산과 바란은 서로 인접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과 관련돼 있습니다.
하바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부흥시키도록 시내 산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곧 신현에 호소합니다. 바로 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수여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처럼 유다 사회가 공의를 포기한 결과 사회가 겁탈과 강포가 있고 소송 거리가 북적거리고 변론과 분쟁이 있게 된 것이라 말씀합니다(1:4.)
유다 사회가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것은 본문 1장 4절 말씀에 보시듯,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한 것은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의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 이스라엘 사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질서입니다. 불과 12년 전인 요시야 왕 시절에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맺고 종교개혁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가 실종된 것은 그들이 토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또는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토라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세우시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헌신짝처럼 버린 토라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세우시는 데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옛 질서 안에서 시내 산에서 세우신 토라는 지금도 변함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데만에서부터 그리고 바란 산에서부터 나오시는 것은 그가 강한 용사로 싸우러 나오시는 것을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은 세계에 가득하도다. 라는 노래는 본문 6절 하반절의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신현,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시내 산 강림하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아멘.
옛 출애굽 후에 시내 산 강림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해 십계명과 토라를 수여하시기 위해 강림하셨지만, 하박국이 본 것은 강한 용사가 출정할 때 모습입니다. 그가 사람과 다른 것은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한 것은 그분이 옛적 출애굽 후 시내 산 강림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임을 증거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그의 광선 곧 그 번개(시 18:8)는 그분의 권능이 그분의 영광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백성에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임하지만, 그러나 그분의 적들에게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타는 역병이 하나님을 수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6절의 말씀은 그가 진군하실 때 갑자기 멈춰서 모든 것을 보시는 눈길로 땅을 측량하시니 온 지구가 떨고, 영원한 산조차도 무너지고, 무궁할 것 같은 작은 산조차도 그분의 영광 앞에 엎드리는 것은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떨며 복종하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산의 장막과 미디안 땅의 휘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들에 대해 여호와께서 개입하여 싸우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마치 사사 기드온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대적들과 싸우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방관자처럼 아무것도 안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백성들의 신음, 탄식 소리,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보시고, 아신 것입니다. 마치 아군의 장수가 척후병을 보내 적의 동태를 살핀 후 적진을 향해 진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여러분의 처지를 보시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다가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마시고 기도 줄을 다시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출애굽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8-11).
우리는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신 하나님을 성경에서 만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역사상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에게만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출애굽 때에 자기 백성에게 일으켜 주신 기적은,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는 단 한 번의 일어난 단회적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은 그러한 기적은 영적인 것으로 적용하는 데 그칩니다.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한 사건 또한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 땅에 일어난 단회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회적이지만 그로 인해 죄에서 용서받은 것은 단회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가고 오는 세대에 적용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옛적에 일으키신 출애굽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영적 사건만 아니라 실제로 억압되고 속박된 채 살아가는 그래서 구원함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새 출애굽을 일으켜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약속한 복을 누리는 땅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축복으로 인도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8-11절 말씀은 옛적 출애굽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가르신 것은, 요단강을 가르신 것은 물들로 말미암아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8절 말씀에서 보시는 것처럼, 주께서 타신 병거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병거는 출애굽의 바로의 병거와 대조를 이룹니다. 애굽 왕 바로는 자기 군대를 동원해서 병거를 타고 극난하게 달려서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화살을 쏘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기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시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가진 병거와 그가 쏘는 화살은 이처럼 하나님께는 무용지물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타신 구원의 병거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극난하게 달려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보복할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쏜 화살은 크게 빗나갔지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쏘시는 화실은 백발백중임을 말씀합니다.
여기 여호와의 병거는 시편 68편 17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그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했습니다. 천천 만만의 수천수만의 천사를 뜻합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0절 말씀에,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 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향해 출전하시면, 그 어떤 대적들도 여호와의 병거의 바퀴를 벗기지 못할 것이며, 그가 쏜 화살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싸워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개입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계속해서 베풀어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 10, 11절 말씀을 보시면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출전하는 것을 보고,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의 반응을 시적으로 비유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공격에 따른 주변국들의 두려운 물리적 현상 일부가 강조돼 있습니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기 위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육지같이 갈라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아말렉을 쳐서 무찌르신 것을 듣고 그들 주변국이 간담이 녹고 두려워 떤 것처럼,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해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억압에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애타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도 옛적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여 주신 것처럼, 그래서 홍해가 마른 땅처럼 드러나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적 아말렉처럼 하나님께서 응징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억압하고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새 출애굽을 여러분에게 일으켜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훼방하는 것이 사람이든지 마귀이든지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주시면, 여러분을 대적하는 그 어떤 적도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해와 달조차도 여호수아의 기도로 멈추었듯이(수 10:12)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와 나라와 민족과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통해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12-15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직접 일하실 때도 있지만,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러 하나님께서는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 여호수아, 다윗을 들어 쓰셨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져 하나님께 성별 되었음을 뜻합니다.
성경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고 여호와께 성별된 백성에게도 적용합니다. 시 105: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라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따라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성별되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 성별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하나님은 의인을 사용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보자이신 메시아가 함께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과 이 사회의 회복을 위해 또한 다른 이들의 구원과 그들을 위한 기도에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살던 유다 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온 땅이 악인들의 강포로 죄악이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실종되었고, 그러한 공의는 강자들에 의해 이기적으로 사용돼 정의마저 굽어졌습니다. 소송이 난무하고 변론에서는 가난한 자와 약자들은 부자와 강자들에게 재판에서 져서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일부 의인들이 남아있었지만 사회를 위한 개혁은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얼마나 유다 땅이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하박국 1장 14절-1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며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누구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악인이 사람을 고기 같게 하다는 것은 그 고기가 가리키는 것은 의인들을 가리킵니다.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한 것은 통치자가 있지만, 이를 바로 잡을 지도자를 세워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도 타락하고 한 가지로 치우쳐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해 의인이 벌레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세 치 혀를 사용하여 정치적으로 의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의인을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의인들을 집어삼키려 이제는 그물로 잡고 투망으로 모아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광장에서 수십만 수백만 명 모아서 그들의 왜곡된 말씀과 굽어진 정의를 세뇌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그렇게 해서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끕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고, 실제로 현금이 들어와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의인을 잡으러 던진 그물에 제사하고, 그 투망 앞에 분향한다는 말은, 그렇게 사회를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타락하는데 사용한 도구가, 자기들에게 이득을 주고 부자가 되게 해 주기 때문에 그것에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처럼 떠받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더 많은 의인을 낚으려, 더 많은 사회를 정의를 굽게 하려고, 공의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이 나라 저 나라에 들어가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은 열매는 나라를 파멸하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셈이 된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1장 13절에서,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시나이까?”라고 탄식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악을 본 후 좌절하기보다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는 힘이 없고 무력하며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않으시고 방관만 하신 것처럼 생각했지만, 하박국의 기도로, 또한 의인들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중보 기도는 주님의 진노를 발하게 되고, 그 진노하심은 유다 땅을 두르시며 그의 대적들인 여러 나라를 밟으신 것을 선지자 하박국은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마침내 하박국의 기도가 응답하여 그의 중보 기도가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싸워서 승리하실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생각으로 의인을 좌절시키게 하고 정의를 굽게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포기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정치적으로 사용해 돈벌이하는 이들을 결코 보고만 있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함이 머리에서, 악인의 꾀가 머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본문 14절 말씀에 보시면, 악인들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다고 한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이 기도한 대로 응답하실 것을 본문 15절에서 말씀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더디 응답하신 것처럼 생각되어서, 아니 내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돼서 기도 줄을 놓아버리셨습니까? 믿음마저 잃어버리셨습니까? 사회를 보며 교계를 보며 도무지 달라지지 않을 것 같고, 기도해서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중보 기도를 중단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아예 중보 기도를 할 마음을 접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자기 이득을 삼는 자를 보면서, 그러한 것을 바로 잡고 개혁하려 하지만 역부족임을 사회와 교계에서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악인들이 사회적으로 잘나가고 교계에서 대접받는 것을 보고 이 사회와 교계를 향해 한국교회를 향해 기도하는 것을 쉬고 있습니까? 기도가 응답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걱정되십니까?
이제는 이 하박국 선지자가 본 대로 하나님은 공의가 포기된 절망스러운 사회를, 이 나라를 정의가 굽어지고 거짓된 세 치 혀로 의인을 숨이 막히게 하고 질식시켜 절망케 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 것입니다. 여러분을 억압하고 속박한 굴레가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막을 사람도 마귀도 어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중보 기도로 이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중보 기도로 바뀌지 않을 사회가 달라지고, 변화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도 달라질 것입니다. 나라와 정치가 달라지고 사회지도자와 교회 지도자와 교계 지도자가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가십시오. 잃어버렸던 기도의 열심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습니다(약 5:16). 하나님께서 이제 여러분을 새 출애굽 하여 주시고 악인의 머리를 찌를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삼킬 것만 같은 성난 바다의 파도와 급류를 밟으심으로 잔잔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답답하십니까?(하박국 3:3-15)해운대숨쉬는교회 5월 12일 주일강단|작성자 삶에서 쪄낸 아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