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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 위해 치우치지 않고 부지런히 뛰고 싶습니다.
이홍재 아산시민연대 사무국장
<가난한 집 늦둥이>
살아온 얘기를 한다는 자체가 많이 부끄럽습니다만 짧게 가보겠습니다. 저는 72년 10월 달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청중 웃음) 왜냐면 주민등록등본상의 출생신고를 78년도에 부모님이 하셨더라구요. 늦둥이였는데,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당시 아버님의 연세가 49살, 어머님이 40살이었습니다. 홍역으로 일찍 돌아가신 형님이 살아계셨으면 아마 65살 정도, 지금 살아 계신 형님이 띠동갑, 12살 차이가 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온양여상 앞인데요, 지금도 그 집이 비어있는 채로 남아있습니다.(청중 생가터가 있다며 놀란 호응) 현재 한올고 부근이고요. 제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몇 년 빼고는 아직도 온양에서 44년째 살고 있습니다.
집은 가난했던 거 같아요. 딱히 뭐, 막내니까 그냥 좀 배려가 있었을 뿐이지,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 게, 학교 갈 때 20원만, 20원만 하면 징징대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앞에서 10원에 4개짜리 사탕 같은 거 사먹으려고. 그러면 어머님이 돈이 없으니까 꾸어가지고 주시곤 했죠.
<빵 때문에 육상부에 남다>
초등학교는 온양온천 국민학교, 말 그대로 넓은 운동장에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3,600여 명이 한 학교를 다녔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육상부를 하게 되었죠.. 예전에 체력장인가, 600미터를 뛰고 재는 거 있잖아요. 저는 다 뛰었는데 육상선생님이 다른 아이 한 바퀴 남았으니까 더 뛰라고 해요. 그래서 다 뛰었다고 그랬더니, 어 그래 하면서, 육상부 들어오라고.
육상부가 좋았던 게 빵이랑 요구르트를 주었거든요. 당시에 온양온천초등학교 야구부가 우리 때 생겼는데, 걔들은 못 얻어먹었어요. 야구부를 할까도 생각하다가 먹을 거를 안주니까 안내키더라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야구부를 했으면 사회에 나와서도 잘하는 운동이 하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중학교 때도 평상시 아이들처럼 운동하고 놀러 다니고 그랬습니다. 온양중학교 주변이 과수원, 논밭이라서, 볏짚가리에서 놀고 그런 추억이 있습니다. 온양중에 장충단공원이라고 꼭대기에 묘지가 있습니다. 농업시간에 오리걸음으로 얼차려 받던 곳인데 그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추억으로 아련하네요.
<천안공고에서 자격증도 일찍 따고 3등으로 졸업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아산에 고교평준화 시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지금 보면 그때가 고교평준화였던가 봅니다. 연합고사 개념이었거든요. 천안으로 가려면 커트라인 몇 개 이런 식이었죠.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시니까, 저는 거의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 당시에 온양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런데, 교육도시라기보다는 먹고 놀고 하는 그런 도시의 경향이 많아가지고, 그래도 고등학교는 천안으로 가라 형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전에는 연합고사 성적이 되게 쌔서 반에서 10등까지만 원서를 써줬는데, 제가 중3때 반에서 11등을 했어요.
천안에 인문계 말고는 농고. 상고. 공고 3개가 있잖아요. 게 중 적성이 맞는 공고를 선택했죠. 고등학교 때는 충남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와서, 참 재밌게 생활했던 것 같아요. 원산도에서 온 친구는 실습복을 입고 집에 갈 정도로. 천안공고 다니는 게 동네 자랑이었다고 합니다. 학교 탑에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의 기수’라고 용접한 탑도 있었어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제가 글씨를 좀 잘 쓴다고 해서 선생님이 저보고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일을 시키셨어요. 그래서 아이들 생활기록부를 제가 썼어요.(청중 웃음) 선생님이 불러다놓고 이만큼 있는 것 중에서 골라서 쓰라는 식이었죠. ‘위 학생은 품행이 우수하고’, 뭐 그런 문구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선생님이 대충 해주면 그걸 적으라는 거예요. 그 때 재밌게 생각했던 게, 아이큐 두자리가 의외로 많구나, 결코 아이큐 두자리도 나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데모도 한번 있었어요. 천안공고 앞에 천안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우리도 보충수업을 해달라고 데모를 했어요. 실업계라 3시면 끝나잖아요. 국민학생과 같이 하교하는 게 쪽팔리다 해서, 우리도 보충수업을 시켜달라,(청중 웃음) 요구했죠. 두발을 길게 해 달라, 뾰족구두 신게 해달라, 그런 것도 있고. 3학년들이 운동장으로 다 나오라고 하고, 운동장 그늘에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놀고 그랬죠. 그래서 두발이 스포츠머리에서 나름 자유화되고, 뾰족구두는 안 되지만 단화는 가능하다, 그런 기억이 있어요.
자격증은 일찍 땄습니다. 저희 집안 중에 대학 나온 사람이 없어서, 대학은 가야된다 해가지고. 보통은 3학년에 많이들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2학년 때 건축배관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다지 저와 하는 일이 크게 연관성이 없어서 써먹을 데가 별로 없더라구요. 오히려 건축. 토목과가 커서 보니까 노후대비라든가 그런 면에서 맞겠더라구요. 기계과는 당시에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다녔는데, 공장에서는 기계나 돌리잖아요. 몇십 년 만에 친구들 만나보니까, 학교 다닐 때 벽돌만 쌓던 얘들이 측량사 대표도 하고 건축사도 많아요. 그 때는 취급 안하던 얘들이었는데.(청중 웃음)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 형님의 교통사고와 간병>
아버님 같은 작은 형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잊어먹지도 않는데, 1989년 6월 10일 학교로 전화가 와요, 비가 많이 오는 날 제도를 하고 있는데, 형님이 순천향대 응급실에 있으니 가보라고. 그 때 형님이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가 난 거죠. 가니까 몸에 호스를 있는 대로 다 꽂고 수술 들어가야 해서 수술동의서를 내가 썼죠. 그 때 뉴스에도 나오더라고요. 옛날 국제방직 앞 동양버스와 충돌해가지고 택시손님 2명이 죽고, 형님은 다섯 시간 수술해서, 척추신경 끊어져 하반신 마비로 장애인이 되신, 아주 큰 사고였어요.
52주 진단 1년 동안, 천안 순천향병원에서 먹고 자고 병간호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늦둥이 태어난 게 그런 역할인가, 이제 집안에서 부모님 모시고 형님 모셔야 되는 그런 운명인가, 그래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주어진 운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지금도 웬만한 어려운 일에는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나름의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척추가 부러지면 못 살줄 알았는데 형님 척추재활하면서 다 척추 장애인들만 있는데서 재활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에게 절망은 없구나라는 걸 느꼈죠. 1년을 병원생활 하면서 거의 레지던트역할을 했어요.(청중 웃음) 다 소변, 대변을 못 보시니까 호스를 연결해서 손으로 빼주거나 약을 투여하고 손가락을 항문에 넣어서 빼내기도 하고, 그래도 나름 재밌었던 거 같아요. 지금도,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기였던 거 같아요.
<대학 축제 가요제에서 대상 받다>
일반대 가기는 어려워서, 지금은 공주대 천안공대, 당시는 천안공전에 친구랑 같이 원서를 냈죠. 졸업당시 전교에서 3등으로 졸업하니까, 주변에서 천안공전은 수석입학 하겠다고 기대를 그렇게 애기했지만,(청중 일부 웃음) 사실 친구는 성적이 안 돼서, 같이 떨어지려고 했어요. 그 친구는 병천 사는 친구인데 장남이라 어머님 기대는 크지만, 그에 미치지 않았죠.
다섯 과목인가 시험 보는데, 친구랑 밤새 술 먹고 영어는 다 3번만 , 수학은 2에서 4번까지 다섯 개씩 찍었죠.(청중 웃음) 시험 본 날 또 밤새 술을 먹고, 천안역대합실에서 다음 날 일간스포츠에 나온 정답을 맞춰보니까, 수학이 4점이더라고요. 영어는 11개가 정답으로 나오구요. 근데 그 친구는 잘 봤다고, 그래서 거꾸로 그 친구는 붙고 나는 떨어지겠구나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까 나는 붙고 그 친구는 떨어졌어요.
대학생활을 보면 학교자체가 크게 운동권이나, 학생회가 없었고, 저도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무던히 다닌 편입니다. 그 때 당구라는 걸 배웠습니다. 또 교내 축제 때 가요제 나가서 대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컴퓨터를 배우다>
대학 졸업을 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6주 다 받고, 열차를 탔는데 서대전역에서 내리더라고요. 같이 간 3명 중 한 놈이 좋은 데 가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간 곳이, 밤에 들어가는데 평상시 생각했던 군대가 아니라 대학캠퍼스처럼 보이는, 육군통신학교더라고요. 빽으로 온 얘는 취사병인데 원스타 당번병으로 가고. 저는 보일러병이고 또 한명은 행정병인데, 인사과 선임하사가 인사과에 사람이 비었다면서, ‘컴퓨터 할 줄 아냐’고 물어요. 둘 다 ‘모릅니다’ 하니까, 네가 좀 잘생겼다며 네가 해라 해서, 저는 바로 보직이 900으로, 그 자리서 자기가 바꾸더라고요.
그래서 컴퓨터라는 것을 접하고 배우게 되었죠. 참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제 사수가 제대가 2달 남았는데, 제가 컴퓨터를 못하니까 자기가 말년에 다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때리면서 컴퓨터를 빨리 배우도록 강요하는 거예요. 당시 한메 타자교사라고 있는데, 언제까지 100타, 200타, 300타를 지정해주는 식이죠. 그래서 밤에도 연습해야 해서, 신병 때 내무반 생활이 줄어들어 갈굼을 안 받아봤어요. 그 분 제대하기 전까지 300타를 하게 됐어요.(청중 감탄) 하나워드프로세스 등 공문서 프로그램, 브리퍼나 메일, ISDN이라든가도 접하고 노트북도 처음 보았죠. 286, 386컴퓨터로 한글 1.2 1.5 쓸 때였잖아요.
제가 근무하던 곳은 사제안전과라는 부서였는데, 군 생활이 재미있었던 게 저희 부대에 헌병대가 없어도 헌병업무를 하는 거예요. 걸려서 오는 사람 문서작업해서 군기교육대 보내고 그러는 곳인데, 쫄따구는 빼주고 괴롭히는 고참은 문서처리해서 군기교육대 보내주고. 사업보고서 대외비등 다 내가 작업하고 과장은 6시 되면 가요. 내가 밤에 다 일하는데 잔업수당은 그 사람이 받어.(청중웃음)
동기들끼리 휴가나갈 때 보면 대전역 헌병이 하나도 안 무서웠다. 모자도 벗고 다니고, 어차피 저에게 오니까.(청중 웃음) 제가 군기교육대 가면 과장이 일을 해야 되잖아요. 자기가 힘드니까 빼는 식이죠 뭐. 그 때 기무사라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던 거 같아요. 원스타도 체력장 오는데, 준위들도 마찬가지고 뛰지도 못해요. 그래도 다 14초 적고 하더라요. 태권도 승단업무도 저희가 했는데, 너도 1단증 가져야지 그러면, 됐어요 그러고.(청중 웃음) 정말 소중한 것을 배워서 나왔던 거 같아요.
<자존심으로 삼성전자 포기하고 중소기업에 들어가다>
군대 말년에는 취업도 고민하는데, 제 인생에서 초등 육상부처럼 그런 우연이 많은 거 같아요. 95년도 말년 휴가 나왔는데, 지금 삼성에 차장급으로 있는 친구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오고 삼성 들어갔는데, 나 보고 들어오라는 거예요. 근데 전문대 2년 경력을 포기하고 공고졸업으로 가야하거든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대학 2년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가지 않았는데, 별로 후회하고 그러지는 않아요.
제대하고 또 당진에 부도난 한보철강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당시 가서 실험실에서 뵌 분이 지금 현대제철지회 이경연 지회장님이었어요, 우연이 참 무섭더라고요. 거기를 못 간 이유는 어머님이 군대 있을 때 중풍이 왔고 형님은 장애인으로 혼자 생활하고 그래서,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당시에는 한보철강이 통근버스가 없어서 출퇴근이 불가능하기에 못 가게 되었죠.
95년 10월 16일 제대했는데 바로 11월에 둔포에 있는 화승인더스트리를 입사 해가지고, 생산직으로 근무를 했어요. 화승그룹이 르까프를 생산하잖아요. 그런데 르까프 운동화를 관리직에게만 주고, 현장에는 주지 않는 거예요. 노조가 생긴지 얼마 안 되었는데, 노조위원장이 사장이랑 똑같이 위원장 실을 크게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런 불평등에 대해 방관하더라고요. 노조에 대한 관점이 없을 때라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또 르카프를 누군 주고 안주고 차별을 하니까, 회사가 별로다, 해서 나왔죠. 제가 나름대로 가정의 생계를 담보해야 되는데, 무대포로 그냥 그만두었어요. 자신감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2~3달 쉬다가 목천에 있는 엘지산전에 이력서를 내고 오는 길에 교차로를 보다가 남남이라는 회사의 모집공고가 있더라고요. 상여금도 600%로 괜찮고, 공무직이고, 또 이력서도 차에 있고 해서 바로 이력서를 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바로 나오라고 해서 바로 출근했죠.
<비비안 남남에서 노동조합을 시작하다>
남남에도 노동조합이 있었어요. 옛날 비비안버스가 되게 많았고 제가 3교대라, 6시에 온양에서 통근버스를 타야하는데, 정시에 나와 있어도 그냥 지나가고, 어느 때는 안 오고 그래요. 통근버스를 놓치면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잖아요.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어서 불만을 노조에 가서 말하니까, 위원장이란 사람이 더 일찍 나와야지 하면서, 노동자편은 들지 않고 오히려 회사 편을 들어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여성 30여명이 스타킹 기계를 돌리면서 생산을 하고 남자 4명이 고장 나거나 불량이 나면 기계를 고치면서, 한팀으로 일했어요. 그중에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광대뼈가 나온 형님이 있었는데, 사람이 참 괜찮더라고요. 술도 잘 사주고. 이해심도 많고 그 사람이 이원식이라는 사람,(청중 일부 웃음) 선춘자씨 신랑되시는.
남남이라는 곳이 한국노총사업장이고 전체 직원이 800명 정도 되는데, 30명도 안 되는 대의원이 위원장을 선출하는 간선제였대요. 근데 그 전에 김선이라는 여성이 경선까지 가면서 투쟁을 통해서 직선제로 바꿔 논거래요. 당시 직선제로 첫 번째 위원장을 뽑았는데도 문제가 많고, 당시 IMF가 있어서 상여금도 반납하고,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다보니, 참 맞는 소리구나, 하면서 노조라는 걸 처음 알게 됐죠.
그래서 노조민주화추진위 비스므리하게 활동을 시작했죠. 그때 있었던 사람들이 선춘자, 김선이씨 등. 사람들을 만나면서 바꾸는 노력을 계속했죠. 그 즈음에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98년에 돌아가셨죠. 어렸을 때는 어머님이 없으면 못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슬프기는 한데 견뎌지더라구요.
99년에 노조위원장 선거가 치루어졌는데 당시 위원장하고 저희쪽 이원식동지하고 경선을 치루었는데 8:2 정도로 완사이드하게 이겨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게 되었죠
<신났던 민주노조 시절>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신나던 때가 남남노조에서 96년부터 2005년도까지였던 것 같아요. 집행부 취임이후 봉재도급 아줌마들을 모두 정규직화를 시켰습니다. 저희 회사 주간근무자들의 출근시간이 8시30분인데 아주머니들은 7시만 되면 출근하시고 기계 닦고 일하고, 저녁에도 남아서 일하고. 왜 그런가 했더니, 한 땀당 얼마, 10원 20원하는 방식이라서, 봉제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선물을 갖다 주고 뇌물 갖다 주는 거예요, 좋은 기계 받으려고. 그래야 한달 수입이 되니까요.
이분들 300여명 되는 사람이 정규직이 되니까 상여금 600%, 성과금 100%, 학자금도 고등학교까지 주니까 그분들이 노조의 엄청난 지원세력이 되는 거죠. 어디 가자면 무조건 가고, 조합비는 총액의 1.5%였는데 더 걷어야 되지 않냐고, 그럴 정도로. 눈치 안보고 뇌물 안 갖다 주어도 되니 노동조합에 엄청 고마워들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2000년 권영길 대표의 민주노동당 관련 강연을 천안문화원에서 듣고 무릎이 탁 치어지더라고요. 노동에 관한 공부는 좀 했지만 ‘이게 뭐다’ 라는 빛이 보이지 않았는데, 사회 바꾸려면 정치권력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확 다가왔죠. 바로 민주노동당 가입을 하고, 사업장내에 분회활동을 하면서 노조사업은 노조사업대로, 당 사업은 당 사업대로 활동을 했습니다.
또 하나가 2002년에 민주노총의 노동자통일선봉대로, 한국노총소속으로 가게 됩니다. 그 때는 눈 뜨면 미군부대 앞에서 싸우고. 전국을 돌면서 투쟁하는 것이 주된 일정이었습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장갑차에 의해 살해당했던 때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컸습니다. 3기 민주노총 노동자통일선봉대는 80여명이었는데 어디가도 깨지지 않았어요. 전경들이 막고 있는 웬만한 곳도 다 힘을 모아 뚫었습니다. 해방 이후 매향리 쿠니사격장에 전경 뚫고 민간인들이 들어간 건 처음이라고 해요. 비행기도 날라다니고 그랬는데, 7-8백 명 기동대 뚫고 이겼어요. 그 때 ‘옆 사람 서로 믿고 가면 되는구나, 노동조합이라는 게 옆에 있는 동지를 믿고 내가 싸우면 옆의 동지도 함께 싸운다, 서로의 신뢰가 있으면 그 무엇도 이길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34일간의 구조조정 저지투쟁>
남남노조에서는 매년 거의 투쟁을 했습니다. 저희는 스타킹만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안 신고 맨살로 다니고, 공장이 중국으로 넘어가니까 구조조정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에 개그맨 주병진이 제임스딘이니 보디가드니 그런 브랜드로, 공장 없이 OEM으로 매출 천억 원대 올리는 시절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주병진이 제조공장 두지 않고 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원식 위원장이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긴 시간인 34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노노갈등을 부추기고, 주임. 반장 등 관리자들을 추동해서 회사가 어려우니까 수용해야 되지 않냐고 압박했습니다. 그래도 2004년에는 원하는 사람만 나가는, 말 그대로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죠 7개월의 위로금을 지급한다니 젊은 사람들이 우루루 나가더라고요, 오히려 있어야 할 얘들이. 다른 직장을 갈수 있는 나이이니까.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반역의 선봉에 섰던 간선제 때 위원장은 중국으로 보내고 반조직행위자들에 대해서 징계 등의 조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 투쟁을 통하여 고용안정협약체결을 체결했습니다.
<민주노조의 패배와 퇴사>
그 다음 해 또 회사가 구조조정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회사가 아예 노조 내에서 더 조직적으로 구사대를 구성했습니다. 저에 대한 악랄한 선동도 심했습니다. 다음에 위원장을 이홍재가 할거고, 이홍재가 하면 남남노동조합이 바로 민주노총으로 갈 거다, 그러니까 이번에 이홍재 내보내야 한다, 죽여야 한다고 비비안그룹사 위원장들까지 합심하여 남남노조에 대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총회하는데 한국노총 위원장들이 와서 이홍재는 나쁜 사람이고 현재의 집행부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일화중 하나는 한국노총 충남본부의 대표자란 놈들이 몇만 명이 모여서 진행하는 한국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래패로 문선을 하는데 노래 부르고 있는 와중에 무대 위로 난입해서 저를 끌어내리기도 했습니다. 네가 왜 한국노총이냐, 민주노총이 왜 여기서 노래 부르냐 이러면서, 참 투쟁할 때는 투쟁하지 않으면서 이런 때는 남의 시선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 웃음밖에 안 나오더군요.
저희 회사 비비안이 상장회산데 금융감독원에 공시를 띄웁니다. 회사가 노조 쟁의 때문에 스타킹 사업은 폐업한다, 이렇게 되니까 현장에서는 난리가 나는 거잖아요. 이거 뭐냐, 노조가 받아들여야 되는 거 아니냐, 현장에서 뛰쳐 올라오고, 그 때 적극적인 사람들도 거의 정확히 반으로 갈렸어요. 불안해하며 올라오신 분들에게, 왜 집행부를 믿지 못하냐, 하면서 그 때 조직부장은 자해도 하시고,
그래 가지고 회의를 하다 보니까. 도저히 투쟁할 상황도 아니고. 회사가 폐업이라는 강수를 두자 이에 대해 불안해하는 조합원들과 또 사측에 붙어 있던 자들 등 투쟁 속에 조합원들이 분열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해서, 이원식 위원장과 둘이서 서울 용산에 있는 비비안그룹 본사에 담판하러 갔습니다. 최고 경영진들을 만나서 폐업철회하라, 희망퇴직 받아들이겠다고 제시하고, 조건으로 전체직원이 희망퇴직원을 제출한 후에 노조에도 선별하는 결정권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거기에 저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회사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고요. 당시 내 생각에는 우리 조직이 민주노총이었으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었을 텐데, 한국노총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민주노조의 불씨를 남겨야 되니까, 전체 직원들의 인사기록카드를 놓고 그룹사 인사부장, 스타킹 공장장, 위원장하고 제가, O. X를 했어요. 저희의 핵심은 구사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놔두면 안 된다는 것이고, 공장장과 회사는 물론 자기네 사람을 남기려고 하였죠. 된다, 안된다 실랑이를 벌이다 잘 안 풀리면, 저도 못 그만둔다 하면, 인사부장이 왜 그러냐고 하고. 핵심적인 반조직행위자들은 저희의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어찌 보면 그 분들한테는 지금 돌이켜보면 죄송스러운 일이고 미안한 일이지만 민주노조의 불씨는 이어져야하기에 그렇게 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저와 당시 집행부였던 일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를 진행했는데, 역시나 회사측에서 자기 쪽 사람 하나를 내세워서 경선으로 치러졌습니다. 이원식 위원장이 당선이 되었지만 이미 인원과 공장이 많이 축소되어 제대로 된 노조 활동을 하기에는 거의 한계가 존재하는 상황이었죠
<고물상 일과 노조상근자를 넘다들며>
남남이란 회사를 나오고 나서 뭐 할까 하다가, 노동조합이 아닌 사람들 중에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남프레시앙 분양전환 투쟁 중에, 제가 처음으로 임대아파트연합회 사무국장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분입니다. 그분이 고물상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업장에 있던 고물을 다 도둑맞아서 어려운 시기이기에 도와줄 마음으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넘게 고물상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고물상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이지만 재밌더라고요. 힘들지만 노동의, 땀의 가치를 새롭게 느낀다고 할까.
1년 넘게 고물상을 일을 하다가 당시에 지역노조 위원장이던 최만정 형님을 만나서 지역노조 상근을 하기 시작했지요. 안성환 위원장, 이원복 부위원장 있었죠. 그런데 단체 상근을 하다보니까 엄청난 감정노동이더라고요. 슬픈 것도 힘이 나는 것도 있고. 2년 반 다니다가 2009년도에 그만두고 다시 고물상에서 1년을 일하게 됩니다.
그 때는 노조 상근 하지 않고 한 1년 정도 하다가, 나중에 고물상을 차려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고물이라는 게 나름 유망한 부분이고 제가 또 전공하고 맞아가지고. 제가 열처리과 출신, 금속이잖아요. 연계성이 있어가지고(청중 일부 웃음)
그 때 노동조합과 동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전화가 많이 오다가 1년 동안 전화가 거의 안 오더라고요. 그러니 사람이 막 공허해지고. 다시 지역노조 상근 제의가 3번 정도 있었어요. 사실 되게 많은 고민을 했었고, 애기엄마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애엄마가 1년 동안 당신 보기가 참 안타깝더라, 저녁이면 사람들 만나고 하던 그런 사람인데, 어디서 전화도 안 오고 저녁 때 되면 집에 와서 티비 보고 고물상 형님하고만 다니고, 아파트에만 있으니까 안타까웠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해서 다시 지역노조에 상근을 다시 해서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게 2010년 3월 달이니까 지금 거의 6년이네요
<진보정당활동에 대한 아픈 기억들, 그래도 가야할 길>
저는 아직도 2006년에 임광웅 시의원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같이 했던 모습이, 고물상 일하면서도 시간을 빼서 선거운동을 다니면서, 저는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는 걸 확실하게 느꼈어요.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함께하고 그러면서 신명나게 선거운동하고 그런 과정에서,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당선되었으니 이제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2008년에 당이 빠개지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때도 보면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던 분들이나 나가신 분들 보면서, 특히나 민주노총 내에서는 그 여파가 너무 컸어요. 그래도 힘들게 이어나갔지만, 어쨌든 2012년에 또 한 번 깨지잖아요. 그 때도 그렇고, 사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자기 주장이 되게 세지만 고집이 세지는 않아요. 남들이 얘기하는 걸 결국에는 수긍하고 들어줘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막 이렇게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궁시렁대면서 들어주는 성격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아산시 당위원장도 할 것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네가 해야지, 그래서 나간 거예요. 또 통합진보당 당 사태와 관련해 가지고도 그렇습니다. 소위 말하는 패권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아요. 당 홈페이지에도 당신들 선거 끝나면 다 내려와야 된다는 글도 쓰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제가 당에 계속 남아있었던 것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한 갈래에서 없어지고 깨지면 나중에 다시 하기는 힘들겠다, 그리고 싸우려면 내부에서 해야지, 갈라져 나가는 순간 회복이 불가능할 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 지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당 내부에서 싸워야지, 탈당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거나 딴 데로 가려는 그런 마음은 안 들더라고요.
사실 통합진보당에 있으면서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마음고생을 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특히나 선거과정에서 제가 출마를 할 때도, 제가 정치인의 소질이나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마과정에서 여러 가지 아픔들, 주변의 소리를 들을 때, 내가 처해진 조건에서 뭐 이런 거다, 내 인생에서 막내로 있으면서 형님을 모시고 그랬던 것처럼, 내 운명이라면 돌파해야지, 회피하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어쨌든 선거운동 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 부분들이 있었고, 좋은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많이 후퇴했지만 계속 가야될 과제이지 않나 싶어요. 소위 말하는 위탁정치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사실 정치인 스타일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 옳지 않은 것과 싸우는 대응에 가깝고, 어쨌든 정당해산을 접했을 때, 착잡하면서도 누가 뭐래도 진보정당의 본류라고 하는 큰 줄기가 소멸한 거잖아요. 이를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안타까운 거 같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10년 20년 후퇴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과정들을 밟아서 나가야 할 것 같고, 민주노총중심 새로운 진보정당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노조활동의 한계를 넘는 대중활동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20년 가까이 되고, 지역노조만 상근자로 8-9년 일하면서, 요즘은 노동조합활동의 한계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어느 때는 내가 지금 저 분들의 힘든 것을 같이 하는데 대한 보람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 사람들 기득권을 지켜주는 건가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가 막 질문을 하는 건데, 노동조합에서 다시 르네상스, 부흥기가 과연 가능할까 그런 고민도 들고.
또 하나는 이제 노동조합활동만 해가지고는 안 된다, 정말 말 그대로 대중들과 함께하는, 호흡하는 대중활동을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그런 활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부터, 노동조합을 처음 알게 되면서, 가졌던 생각이 뭐냐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이렇게 인생을 한번 살아보자, 그런 생각입니다. 아이들은 다 컸고 애엄마는 ‘당신하고 싶을 대로 하세요’라는 생각으로 포기한 듯이 지지해주니까, 앞으로 쭉 이렇게 살다가 갈 것 같습니다. 노조상근을 오래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들고, 이것만 주구장창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좀 듭니다.
그리고 저는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서 분단된 나라에 대한 고민도 노조에서 해야 하고, 해야 된다는 신념입니다만 편식하지 않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뭐가 있으면 안 다니는 것 보다,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워낙 세상에 하도 부조리한 게 많고 바꿔야 하는 게 많기 때문에.
저도 개인적으로 죽기 전에 세상 바뀌는 걸 보고 가기는 해야 하는데, 점점 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힘내서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두서없이 길었습니다. (청중박수)
< 청중질문, 와이프는 어떻게 만났어요?>
1996년 12월 22일 날 천안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났습니다. 저도 친구들끼리 송년회하고 술 한잔 더 먹으려고 갔고, 애기엄마는 같이 김장김치하고 고생했다고 처형이 놀러가라고 했는데, 같이 온 사람 중에 거기 두 분이 우리 회사 다녔던 사람이었죠. 그래가지고 술김에 ‘우리 사귀어볼까요’ 한 것이, 그게 그렇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나서 내가 이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참 괜찮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저도 그렇지만 애기엄마도 오히려 저 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얘기 하지 말랬는데, 장인장모님을 일찍 여의였어요, 중학교 때. 그러면서 되게 착하고 괜찮고.
애기엄마가 제일 고생이 많았죠.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까진 결혼을 제가 못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아버님을 제가 다 모셔야 됐으니까. 그리고 얘들도 키우고, 또 지역노조 상근할 때는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섯 식구 살게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얘기 안하고, 잘 이해해주고,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물이라고 봐요.
아버님은 2008년도에 85세에 돌아가셔서, 애기엄마가 늦게까지 모셨죠. 연애할 때 미용사였는데 아이들 낳고 아버님 모시느라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아이들도 이제 어느 정도 커서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청중질문, 형은 어떤 회사 다녔는가요?>
형님이 89년에 사고가 나신 거고, 천안에서 가게하다가 경도운수, 지금은 삼도운수에서 택시를 4-5년 했어요. 저는 택시를 지금도 노조활동 하면서 같이 하는데, 그 때도 결국은 산재로 했거든요, 회사에서는 산재이외의 보상은 하나도 안해주었습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저는 택시사업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말 택시노동자가 진짜 열악하다, 그 때 느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