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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와 함께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07
십자가의 여러 의미
https://youtu.be/IgxuX1Pw1Q8?feature=shared
주후 1세기에 십자가형은 어떤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보여주는 표시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형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갈릴리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고 자라신 곳 어디에서도 십자가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때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큰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단지 돈을 바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이사가 자기들의 땅을 다스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제국은 늘 하던 방식대로 대응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수백 명의 반역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도처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때 로마 공화정 후기였는데요, 노예 반란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노예들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서로 떨어진 두 도시 사이에 아마 수마일은 될 텐데요, 십자가가 약 18m 마다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길을 따라서 십자가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달린 사람들은 절반은 이미 죽었고 절반은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련하고 얻어 맞아 만신창이가 된 노예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며 그렇게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처럼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상징이었기에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특별히 로마 세계에도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야만스러운 로마제국이 일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누구라도 제국에 반대하면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로마제국이 식민지의 반역자들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인들이 그 노예들을 일상적으로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그렇게 자주 노예를 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생각해볼 때 가장 놀라운 점은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십 년이 못 되어 십자가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는 점입니다. 어떤 상징이 전에는 그토록 강력한 메시지를 내며 말하기를, ‘야만스러운 제국의 통치가 이처럼 무시무시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상징이 이제는 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큰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나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바울의 신학이 십자가에 대하여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내려오신 자리는 인간이 서로에게 최악의 일을 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대신에 새로운 생명 길이 열렸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까요? 십자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가 신약성경에 두루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복 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이야기에 절정에 해당합니다. 사복음서 모두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에 이르게 합니다. 진실로 복음서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들려주는 방식은 구약 성경이 예고한 여러 주제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주제들이 하나로 엮여지면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기나긴 이야기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별히 예언서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핵심적인 의미에 대해서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가 ‘승리’라는 주제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머리 쪽에 어떤 표시를 매달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이 표시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복음서는 어떤 방식으로 들려주는가 하면, 그 표시 십자가는 사실 메시아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의 메시아께서 이교 세계에 대하여 진정한 승리를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승리는 언제나 메시아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 승리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잘 아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 실패한 메시아들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성공한 메시아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모순이 전체 사건을 들려주는 드라마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와 있었는데,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좋다,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어떤 때를 보여주는 표시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마침내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택하신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변화의 때가 되었다는 표시다. 이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실 때이며 세계 만방으로부터 사람들을 모으실 때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일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저를 이 자리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제가 바로 이때를 위하여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이를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셨는가 하면,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좀 더 살펴보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십자가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자기 아들의 죽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다가왔다.’ 요한복음 12장 31절입니다. ‘이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일은 더 넓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이 가능하게 되는데 그들이 와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현재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우상숭배로서 이교세계에 만연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죄악으로서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임합니다. 그런 우상숭배와 죄, 그리고 죽음이 이제 쫓겨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승리를 거두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 일은 바로 새로운 유월절을 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택하신 때는 유월절입니다. 그것은 출애굽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택하신 것은 바로 이때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통치자들에게 맞서는 것이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맞서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바로 거기 죄인의 자리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악인의 자리였습니다.
요한복음 18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거기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라바입니다. 요한이 그 부분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바라바가 죄를 지었는데 그는 풀려나고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도 같은 이야기를 실제로 여러 번 기록했는데 이는 십자가에 대한 설명에 나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강도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옆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양 옆에는 두 강도가 함께 달렸는데요, 그 강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죄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복음서가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는 주제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즉 예수께서는 잔치 자리에 죄인들과 함께 가셨으며 그것은 공생애 동안에 이루어진 일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정한 사람들이 자신을 만질 수 있게 하셨으며 예수님도 그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더럽혀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든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맞이할 운명에 대하여 예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계속 그렇게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너희와 너의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앞서 가셔서 그 운명을 자기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한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자주 모으려고 했더냐? 마치 암탉이 그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한 것처럼 말이다.’ 농장 마당에 불이 나거나 혹은 여우가 농장 안으로 들어오면 농장 마당에서 암탉은 병아리를 모아서 보호하려고 합니다. 암탉은 죽겠지만 병아리들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백성보다 앞에 나아가셔서 자신의 어깨에 운명의 무게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운명은 죄인들이 당할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예수께서는 악의 권세와 그 결과를 깨뜨리셨습니다. 승리는 바로 대속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구원의 공식이며 구원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각 요점과 복음서가 공통으로 반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 한 구절, 대속을 통한 구원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하셨는데요,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신 채 두 제자를 만나셨는데 그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낙심해 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마인들이 그분을 처형했으므로 그 분은 더 이상 그 일을 하실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제 그가 실패한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두 제자에게 ‘너희는 정말 어리석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그토록 둔하여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지 않는구나! 이런 일들이 꼭 필요하지 않겠느냐? 즉,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의 글을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경에 기록된 것 곧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성경 해석학으로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각주를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다 보면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제가 보기에 누가는 계속하여 어떤 본문을 들려주는데 그것은 성경의 어떤 주제에 대하여 예수께서 강조하시고 상기시켜 주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두 제자에게 말할 바로 그 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모든 본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본문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이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본문은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것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자기 형제들에게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 온 것은 곡식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그가 요셉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가 요셉이 말할 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여기서 한 가지 꾀를 냅니다. 요셉의 꾀는 형제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원한다면 베냐민을 노예가 되게 할 수 있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과거의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그때 유다가 나섰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사실 유다는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보십시오. 제 아버지는 고령이십니다. 만약 이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약속했습니다. 제가 보증하겠다고. 우리 중 한 사람을 당신의 노예로 붙드셔야 한다면 저를 붙잡아 두시고 베냐민은 풀어주십시오.’ 이처럼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는 바로 그 생각은 제가 볼 때 사도 바울의 경우에 자신도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신 분임을 생각하면서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메시아는 유다 지파 출신이므로 그 분이 나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구나! 마치 유다처럼 앞으로 나서서 내가 비난을 받겠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그러니 너 다소 사람 사울은 네가 비록 교회를 받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이제 너는 자유를 얻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다!’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고 친밀하며 인간적인 장면이 요셉과 유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나타낸 때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장면은 구약성경 전반에 올려 퍼집니다.
이외에도 많은 주제들이 있습니다. 유월절도 그런 주제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집트 땅을 심판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 아래에 있었고 홍해를 지나서 이집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선별되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이야기에서 언급됩니다. 특별히 홍해 이후 광야에서 재앙과 질병이 그 백성에게 닥쳤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놋을 취하여 뱀의 모양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불 뱀이 백성들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 놋뱀을 장대에 달아 모든 사람이 그 장대를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뱀에 물린 데서 고침을 받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그와 같이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많은 표지와 상징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자면 다윗 왕이 겪은 고난이 있습니다. 다윗은 축출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윗은 급히 달아났습니다. 그 후에 다윗은 궁궐로 복귀했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시편이 들려줍니다. 시편 22 편과 같은 다른 많은 본문이 그것입니다. 그 시들에서 시인은 어두움 가운데 탄식하다가 구원을 받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난당하는 인물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다가 결국 빛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시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배와 회복에 이야기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곳에서 특별히 이사야서의 가장 중심 부분인 이사야 40장에서 55장까지의 이야기인데요, 그 이야기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야기는 낯선 인물인 하나님의 종에 대한 것입니다. 그 분은 한편으로 보면 메시아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 자신의 팔처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국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고문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몸이 상하십니다.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런 고난이 기록된 곳이 이사야 53장이라면, 이사야 54장은 언약이 갱신된다는 이야기이며, 그리고 이사야 55장은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초청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상상해봅니다. 예수께서 엠마오 마을로 가실 때 두 제자에게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더 많은 것을 설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길에서 주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실 때말이야!’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진 것은, 이렇게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끔찍한 실수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그 역설은 궁극적으로 같은 모순입니다. 십자가라는 이미지는 제국의 잔혹한 힘과 폭력과 오만함을 상징하는 이미지에서 변하여 사랑의 이미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상징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바로 20년 동안에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그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면 십자가에서 거두신 승리는 바로 그 십자가에 의해서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말했고 베드로전서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도 이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백성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며 용서하는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은 다른 뺨을 돌려대 주며 짐을 지고 추가로 더 가줍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동시에 역사의 한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역사가 중대한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십자가가 보여주는 상징은 우리들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하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동일한 치유와 용서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유월절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알려지시고 온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https://youtu.be/WWpdJegR7bs?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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