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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1장 7-15절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의 질문과 관련해서 살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얼핏 보면 세례 요한의 의구심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처지가 어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 약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영되어 세례 요한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질문은 세례 요한 자신을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된 그의 제자들을 위한 질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9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 하는 문제로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혹은 이적과 기적을 베푸는 문제에 있어서도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로 있던 자 중에 예수께로 간 자들로 인하여 실족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께로 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런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보내어 질문하도록 함으로써 실족이 아닌 좀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의 제자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관련된 다른 본문들도 마찬가지지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이런 모습은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흥하게 하는 사역이라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그에게 주신 사명, 즉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몸은 감옥에 갇혀 제어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에게 주신 사명만큼은 충실히 행하는 자로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는 일이 있었지만 복음은 매일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딤후2:9) 세례 요한의 사역 또한 동일한 모습으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세례 요한에 대하여 칭찬하시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7절 이하 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의하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하였습니다(마3:2). 회개하라고만 전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도 권하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강한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마3:7-9). 그래서인지 당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사람들은 분명 선지자로 인식하는 면이 있었습니다(마21:26). 그리고 세례 요한이 사역할 당시 사람들은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로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간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쉽게 말하면 “줏대 없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을 보려고 나간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이 가벼워서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경박한 사람을 보기 위해 나간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눅7:25) 그러니까 부드러운 옷이란 화려한 옷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광야에 나갈 때 그런 화려한 옷, 사치스러운 옷을 차려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간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옷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광야라는 장소만 생각해 보더라도 부드러움, 화려함과는 멀다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마태복음 3장 4절에 의하면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단순하게 말하면 그가 살고 있는 그곳에 걸맞는 옷과 음식을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바로 이런 선지자를 보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가벼워서 이런 말, 저런 말하는 자도 아니요,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옷 입은 자를 보기 위해 간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선지자다운 선지자, 그를 보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더냐?” 이로 보건대 당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로 증거하고 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선지자이지만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할 때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얼핏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는 말만 들으면 마치 우열의 개념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비교할 때 구약의 선지자들은 좀 열등하고, 세례 요한의 경우는 그들보다는 좀 더 나은 선지자,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는 누가 더 낫다, 누가 덜 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분량에 있어서 이사야서의 경우 66장이기 때문에 큰 종, 오바댜서의 경우 1장이기 때문에 작은 종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큰 종, 작은 종 하면서 교회의 규모나 성도의 수, 교회 재정 등으로 마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작은 일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소위 인간적인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이미 기준부터가 잘못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에 대해서도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분류하다 보니 크고, 작다는 개념이 마치 우열의 개념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그렇게 나누었을 뿐 큰 종, 작은 종 개념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비록 오바댜서의 경우 1장이라는 적은 분량으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사용하셨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도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주신 직분을 감당한 자인 것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오실 메시야가 아니라 오신 메시야를 증거 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전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로서만 증거를 했다면, 세례 요한은 오신 그리스도를 보며 이 분이 그리스도라고 증거 한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는 말이 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더 나은 자’라는 표현은 그의 성품이나 그의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성경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알린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성화에 있어 많은 은총을 받은 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은 쇠하고 그리스도만이 흥하도록 한다고 할 때 그런 자세와 실제적인 삶을 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성품이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 나은 자’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는 표현이 돌려지고 있는 겁니다.
특히 ‘기록된 바’로 시작하는 10절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 비록 선지자라 할지라도 선지자를 통해 증거 되고 있는 선지자, 그러나 모세가 말한 선지자가 아닌(신18:15) 모세가 말한 선지자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 여자에게서 난 모든 사람들,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이때도 그의 사역,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의 성품이나 그의 어떤 능력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세례 요한을 상당히 높여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표현함으로서 높여주고 계시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높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라면 반전이 있는데, 11절 후반부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앞서는 분명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칼빈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복음을 전하게 될 자들 중에서 ‘극히 작은 자’도 그 가르침에 있어서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매튜 풀).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와 지금 세례 요한을 비교했다면,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사역으로서 그런 비교를 했다면, 이후 말씀도 동일하게 사역에 대한 비교를 하고 계시다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경우 분명 선지자보다 나은 자로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실체를 보기는 봤으나 그의 모든 사역에 대하여 다 보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이후에 세워질 복음 사역자들은 세례 요한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자들로서 복음을 증거 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 있는 내용으로 말씀드리자면, 세례 요한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만을 선포할 수 있었지만, ‘극히 작은 자’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을 위하여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가 그들을 의롭다고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고 선포할 것이기 때문에(롬4:25)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 앞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세례 요한보다 못한 자로, 세례 요한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보다 못한 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천국하면 상급을 생각하여 구약의 선지자보다는 세례 요한이, 세례 요한보다는 사도들이 더 큰 상급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사역의 성격에 대한 것이지, 그들의 열심, 그들의 노력, 그들의 공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의 성격을 말한다고 할 때 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오늘 본문에 대입해서 보자면 구약의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나, 세례 요한 이후, 예를 들어 사도들이 있을 때 그들은 다 주께서 주신 대로 몸 된 교회로 하여금 믿게 하도록 하는 사역자일 뿐입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가 있는 것이고, 그들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는 자로 있게 하셨다면, 어떤 이들은 물을 주는 자로 있게 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심는 이가 중요한가? 아니면 물 주는 이가 중요한가? 성경은 그들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없을 무(無)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더 나은 자,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대상이 부각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자,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되 오실 그리스도를 전했는가? 아니면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는가? 좀 더 구분하자면 세례 요한처럼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보지 못한 자로 그리스도를 전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본 자로 그리스도를 전하는가? 바로 이 차이인 것입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구약의 경우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던 만큼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히 계시되어서 그분 안에 있는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가 있지만 구약은 그림자처럼 계시되어 전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계시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약도 은혜의 역사이지만, 신약은 계시의 판명성에 있어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는 이런 점에서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는 나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본 자로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역한 자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을 때 세례 요한은 어디에 속한 인물인가? 그리스도 이후의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앞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누구까지 하느냐 하면 요한까지입니다. 때문에 요한은 어떤 면에서 선지자와 율법의 시대에 속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보다는 나은 자이지만, 그도 역시 선지자와 율법 시대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극히 작은 자’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그런 선지자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에 속한 자들이며, 그들에 대하여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것은 그만큼 복음이 주는 성격이 어떠한지를 알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12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 보면 복음이 주는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침노를 당한다’(수동태)고 되어 있지만, 번역에 따라서는 ‘침노한다’(중간태)는 의미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약 오늘 본문에 대하여 한글 번역 그대로를 받는다면, 다시 말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라고 번역한다면 이후에 나오는 ‘침노하는 자’에 의해서 천국이 빼앗겨지는 듯 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 즉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과 노력을 다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소위 이 본문을 통해 천국은, 그리고 구원은 사람의 열심과 노력, 그리고 그들의 공로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말씀인가? 그런 의미는 될 수 없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런 언어적인 구분을 해 놓고 있지는 않지만, 본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히 많은 사람들이 불붙는 열심으로 복음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 복음의 위엄성을 찬양하고 계심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한을 자기 아들의 나라를 위한 선구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이 성령의 유효성을 더하여, 이 교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실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침노를 당한다고 하기 때문에 침노하는 자의 열심과 노력이 주목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효성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으로 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심이 나타난다고 할 때 열심보다는 복음의 위엄이 어떠한가가 더 주목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침노를 당한다’가 아니라 ‘침노한다’는 것으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교단 김성수 목사님의 글을 통해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천국은 침노한다고 할 때 그 뜻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힘 있게 나아간다, 강력하게 전진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천국의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역동적으로, 힘 있고 강력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어온 역사에 커다란 변화가, 극히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힘과 능력으로 천국이 힘 있게 움직이고 나아가기 시작한 것, 그런 면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역사가 달라진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12절에 대하여 몇몇 책을 참고해 보면 그렇게 쉬운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번역 상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고 할 때, 개인적으로는 ‘침노를 당한다’는 것보다는 ‘침노한다’는 번역이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는 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침노한다고 할 때는 천국이 먼저 침노한다는 것이고, 그런 침노 때문에 침노하는 자는 그 천국을 빼앗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복음 시대는 복음의 역사가 강력하고 힘이 있다는 것이요, 그런 역사의 결과로 침노하는 자는 천국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로서 다시 13절을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왜 지극히 작은 작은 자라도 천국에서는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느냐? 세례 요한은 복음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율법 시대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데, 요한의 경우 구약의 모든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복음의 사역자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선지자들과 복음의 사역자들 중간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다시 말해 예수님 시대까지, 나아가 복음이 계속해서 증거 되는 모든 시대까지 천국은 구약 시대와는 달리 힘 있고 강력하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역동적인 힘을 받게 된 자들은 어떻게 되느냐? 마치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는 자처럼 그렇게 천국을 향하여 힘 있게 나아가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말라기서를 통해 말씀하신 엘리야가 바로 ‘그’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런데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라는 말과 함께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하여 보셔야 합니다. 왜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을 보시겠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기에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내실 것을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보내셔서 무엇을 하는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키게 한다고 해서 다 돌이키느냐? 돌이키지 않는 일도 있고,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오리라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서기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바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러니까 서기관들조차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경우 세례 요한을 즐겨 받는 자로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으로 가시면 오늘 본문에는 없는 부분이 있는데, 29절과 30절이 그것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전하였고, 회개한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마3:6 참조). 그러나 율법에 능하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눅18:9).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 교사라 하는 자들이 세례 요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을 구약에서 예언한 엘리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는 말씀은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란 사실을 모르는 자로 있었으며, 그를 받지 않는 자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세례 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는 받을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세례 요한의 경우 예수가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하였는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받을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 교사들은 즐겨 받는 자가 아니라 즐겨 받지 못하는 자, 누가복음 7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리신다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말씀으로 하자면 돌이키지 않는 자, 그래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16절 이하는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20절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시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저들은 어떤 경우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증거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와는 달리 세례 요한 이후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고, 복음의 역사란 더더욱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침노하고 있고, 천국이 침노한다면 침노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어야 하는가? 천국이 우리를 침노한다면, 복음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역사한다면 그런 역사에 걸맞게 침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역사하는데 거기에 걸맞게 침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 앞에서의 바른 자세는 아니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열심, 애씀이 결과 되어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으로 말하자면 천국이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침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우리 마음 가운데 떨어져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유효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보다 앞섭니다. 구약의 말씀으로 하자면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겔36:26).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게 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겔36:27). 당연히 그런 역사가 있다면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무엇인가? 마치 천국을 침노하듯 침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구약의 선지자보다 나은 자로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로 있었습니다(눅7:29). 그럼 세례 요한이 아닌 사도들의 가르침 아래 있는 우리는,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계시가 다 완성 된 이후 그것을 받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더더욱 그 가르침을 받는 자, 그 가르침대로 천국을 침노하듯이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할 자들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 12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신앙의 참된 본질과 방법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불타는 열정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열심 있는 노력으로 이른바 모든 난관을 돌파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15절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시는데, 복음은 분명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만이 천국을 향하여 침노할 수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당연히 귀 있는 자란 단순히 육신의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요, 마태복음 11장 5절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할 때 가난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그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는 자, 오히려 죄인임을 인식하는 자, 그렇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 그리고 그런 자로서 복음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에 힘입어 천국을 향하여 침노하는 자, 그가 바로 귀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 대하여 성경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즉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는 자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