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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개혁신학 / KCI등재 2016. 08
청중의 설교학: 효과적 설교 청취의 기술 - 청교도를 중심으로 1)
박태현 (총신대학교)
국문초록
탈권위적인 포스트모던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청중에 무게중심을 둔 신설교학 혹은 귀납적 설교학은 청중의 지위를 바르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설교에서의 청중의 책임을 강조한 아담스의 접근은 적절한 것이다. 아담스보다 수 백년 앞서 설교에서의 청중의 책임을 일깨운 영국 청교도들의 효과적 설교 청취의 기술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설교란 단순히 설교자만의 사역이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 모두의 협력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퍼킨스와 리차드 십스는 설교 청취에 있어서의 청중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또한 설교 청취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으며, 그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시대에 시의적절하다.
주제어: 설교 청취, 청중의 책임, 신설교학, 윌리엄 퍼킨스, 리차드 십스, 성령의 사역
I. 들어가는 글
최근 약 반세기 동안 설교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신설교학(New Homiletic)은 그 무게중심을 설교자에게서 청중으로 이동하였다. 2) 신설교학의 기수였던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1970년대 초반 미국교회의 환경에서 청중을 고려한 새로운 방법론으로 귀납적 설교를 자신의 책, 『권위없는 자처럼』( As One Without Authority)에서 제시하였다. 3) 귀납적 설 교는 20세기 말 설교 강단에 만연하던 전통적인 연역적 설교에 대하여 대안적(alternative)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4) 따라서 크래독의 귀납적 설교는 설교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설 교 전달 방식에 관한 것이다. 5) “...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설교하는 가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방법론이 메시지이다.” 6) 크래독은 마샬 맥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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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자는 본고와 같은 제목의 소논문을 오래 전에 네덜란드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의 주간지 “자명종”(De Wekker)에 2회에 걸쳐 연재(2004년 8월 13일, 20 일)하였다가, 한글로 번역하여 2010년 10월 17일 인터넷신문 코람데오닷컴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74)에 게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과 구성, 독자의 대상이 달라 금번에 내용적으로 대폭 수정하고 확대할 뿐만 아니라, 그 형식 도 학술적 논문으로 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2) 류응렬, “최근의 설교학(New Homiletics),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음과 실천신학」 제 11권, (2006년 5월), 299-319. 류응렬은 신설교학을 대표하는 세 명의 학자로서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 유진 로우리(Eugene L. Lowry),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을 언급한다.
3) 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Revised and with New Sermons, (St. Louis: Chalice Press, 2001). 크래독은 당시 이미 서구 사회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경험하였기에 -예를 들면 권위주의의 해체- 청중을 위한 귀납적 설교를 제안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 제목이 이것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4)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Revised and with New Sermons, 47. “Perhaps the
alternative sought is induction.”
5)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Revised and with New Sermons, 5. “The discussion
of such a method is the major burden of this book.”
6) 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Revised and with New Sermons, (St. Louis: Chalice Press, 2001), 김운용 역, 『권위없는 자처럼』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3), 60.
(Marshal McLuhan)의 미디어 이론(media theory)의 선구적 작품인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1964)의 큰 영향을 받아 전달의 방법론이 결국 메시지와 깊 이 연관됨을 지적한다. “말씀의 경험(experience)이 일어나도록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은 설 교의 방법(method)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방법이란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설 교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떻게’ 설교하느냐 하는 것의 대부분이 ‘무엇을’ 설교하느냐 이다.” 7) 크래독이 이런 대안을 제시한 배경과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현대 교회에서의 설교자 와 회중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가 종전과는 전적 으로 다르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제 더 이상 설교자들은 성직자로서의 권위와 직제 에 대한 권위, 혹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8) 따라서 크래독은 “전통적인 권위주의에 기초”한 종래의 연역적 설교는 현대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9) 크래독이 주장하는 귀납적 설교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인 청중에 대한 고려와 존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설교에 있어서 귀납적 움직임(movement)은 사람들이 일상을 경험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식이며, 자연적이고 무심코 일어나는 방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것은 청중을 괴롭히기보다 존중하는 방식이며, 말씀에 대해 응답할 자유와 의무를 청중에게 안겨 주는 방식임이 강조되어 왔다. 덧붙여 이런 형식으로 설교를 펼치는 것은 모든 이야기(narration)에 기대감을 갖게 하여 관심을 가지고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10)
크래독의 귀납적 설교 방식은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 있는 현대 교회에 일면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다. 크래독이 청중을 고려한 설교 전달 방식으로서 귀납적 설교를 제안한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설교에서 설교자가 청중을 고려하는 일은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청중을 고려해야 할 정당성을 갖는다. 11) 첫째, 의사소통으로서의 설교는 청중을 아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둘째, 설교는 청중의 반응과 변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는 궁극적으 로 청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0:14-17). 하지만 설교에서 청중을 고려한다는 것은 청중의 요구가 강단의 메시지를 결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인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는 설교자가 청중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청중이 결코 강단의 메시지를 좌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강단에 선 설교자가 청중을 파악하여 평가 한 후 청중에게 적합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2) 이런 추세를 따라 최근에 설교에 서의 청중 분석과 이해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한국에서도 설교와 청중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어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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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raddock, 『권위없는 자처럼』, 106. 8) Craddock, 『권위없는 자처럼』, 51. 9) Craddock, 『권위없는 자처럼』, 109. 10) Craddock, 『권위없는 자처럼』, 127.
11) 박태현,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의 설교론 비교 연구: 설교를 위한 청중 평가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321권 (2014년 12월), 219-250. 특히 223-26.
12) D. Martyn Lloyd-Jones, Preaching & Preachers, (London/Sydney/Auckland: Hodder & Stoughton, 1971, 2 nd ed. 1985), 143, 159. “회중석이 결코 강단에게 지시하거나 강단을 지배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이 제가 제시하는 분명한 원리입니다.”
13)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 6권 (2003 년), 60-86. 류응렬,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에 대한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 17권 (2008년), 111-132. 황빈, “설교와 청중: Bill Hybels 목사의 주중설교와 주말설교 비 교연구”,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 31권 (2014년), 163-203. 박현신, “강해설 교의 청중주해에 관한 연구”,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 35권 (2015년), 101-137. 김천일, 『설교와 청중: 크래독의 설교신학 평가와 그 비판적 대안』(용인: 목양, 2013).
설교에서의 이와 같은 청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인 1991년에 제이 아담스(Jay Adams)는 새로운 관점에서 설교를 논의하였다. 그것은 바로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 청취에 대 한 책,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A Consumer’s Guide to Preaching)를 저술한 것이 다. 14) 아담스가 청중의 입장에서 본 설교 청취를 위한 책을 저술한 까닭은 최소한 세 가지 이 유가 있다. 첫째, 아담스 자신이 훌륭한 설교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오랫동안 설교학을 가르치고 설교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목회 현장에서의 기대하는 변화, 즉 훨씬 더 원활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서의 설교를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 둘째, 첫 번째 이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설교에서의 청중의 책임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잘못된 가정이 팽배해 있다. 이 가정과 이 위에 입각한 모든 가설들은 형편없는 설교 그 자체만큼이나 완전히 빗나간 오류이고, 현재 교회가 처한 쓴 곤경도 알고 보면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6) 다시 말하면, 아담 스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책임보다 청중이 “훨씬 막중한 책임, 즉 듣 고 깨달으며 그 메시지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진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다”고 지적한다. 17) 셋째, 이런 맥락에서 청중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논의된 적은 거의 없었 다. 지금까지 설교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설교자의 관점에서만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맥 락에서 아담스는 올바른 설교 청취에 관한 정보와 책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 “설교 듣기에 관한 서적, 강좌, 혹은 훈련 교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현실이다.” 18) 따라서 아담스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훈련만으로는 역부족이므로, 듣는 회중 역시 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구자 역시 아담스와 같은 맥락에서 청중은 설교를 바르게 듣는 자세를 배우고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연구자가 청중의 입장에서 본 ‘청중의 설교학’을 주장하고 개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포함한 교회에 주어졌다 는 변할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교회는 복음 을 세상 끝날까지 순수하게 보존하고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마28:19-20, 막16:15). 그 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설교자들을 위한 설교의 기술 또는 설교학 책들은 학문의 세계에서 계속 출판되어 쏟아져 나오지만, 아담스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설교를 바르게 듣기 위한 청중들을 위한 책은 거의 없다. 19) 설교자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 전하는 설교학이 아닌, 청중의 입장에서 본 듣는 설교학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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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Jay Adams, A Consumer’s Guide to Preaching, 김성웅 역,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서울: 생명의말씀사, 1993).
15) Adams,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16-17. 아담스가 설교자들을 위해 저술한 설교에 관한 책 들은 다음과 같다. Jay Adams, Pulpit Speech, (Nutl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1). Jay Adams, Studies in Preaching, 3 vols. (Nutl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6). Jay Adams, Preaching with Purpose, (Grand Rapids: Zondervan, 1982). Jay Adams, Essays on Biblical Preaching, (Grand Rapids: Zondervan, 1982). Jay Adams, Truth Applied, (Grand Rapids: Zondervan, 1990).
16) Adams,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16.
17) Adams,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서문.
18) Adams,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서문. “듣는 사람 입장에서 설교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불 러일으키는 책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집필을 결심하였다. 필자가 아는 한, 이런 책은 없는 것 같다.”
성경은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청중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설교 사역을 위한 설교자의 전유물이 아니 다.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설교자에게만 책임을 떠넘겨 버릴 일도 아니다. 청중 역시 자신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경청의 책임을 지고 있다. 청중이 설교를 바르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설교자는 더욱 좋은 설교를 위한 도전과 격려를 받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나 목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설교를 바르게 듣는다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는 청중의 입장에서 본 ‘청중의 설교학’을 개진함에 있어서 첫째, 설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아담스보다 수 백년 앞선 시대, 즉 설교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던 16-17세기 영국 청교도 설교자들이 가르 쳤던 ‘청중의 설교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와 20)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가 가르친 청중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설교 청취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는 청교도 설교자들이 설교 청취에 관한 훌륭한 조언들을 통한 교훈을 요 약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의 올바른 설교청취를 촉구하고, 설교의 능력이 회복되고 삶에서 열매가 맺기를 기대한다.
II. 펴는 글
1.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에 대한 정의는 16세기 취리히(Zürich)의 종교개혁자 불링거 (H. Bullinger, 1504-1575)가 작성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에 선명하게 그리고 바르게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21) 이 정의가 가지는 중요성은 설교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 혹은 강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다’(est)는 사실에 있 다. 22) 이것은 20세기 독일 신학자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성경과 설교에 대한 이해 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기”(can be) 전 에 반드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must become) 한다는 것이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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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담스의 책 이후 설교청취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을 제시하는 글은 연구자가 아는 한 오직 하나다.
신민규, “설교 어떻게 들어야 하나”, 「교회와 신앙」 (1993년 11월), 74-77.
20) 퍼킨스의 간략한 생애와 설교론은 다음을 참조하라. 박태현, “William Perkins의 설교론”, 한국복음
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 32권 (2014년), 138-174.
21)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van 1562. in E. F. Karl Müller, Die Bekenntnisschriften der reformierten Kirche, (Leipzig, 1903; Zürich, 1987), 170-221, 특히 171.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with Translations, 6 th ed. rep. (Grand Rapids, 1998), 233-306, 영역은 829-909. 이 고백서는 1562년에 작성되었고 1566년에 처음으로 라틴어,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22) K. Runia, The Sermon Under Attack, (Exeter: The Paternoster Press, 1983), 33.
23) Runia, The Sermon Under Attack, 35. 바르트의 성경관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의 루니아 (K. Runia)의 비평적 연구서는 다음과 같다. K. Runia, Karl Barth’s Doctrine of Holy Scripture,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2).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 1509-1564)은 설교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이 매우 중요 함을 지적한다. 즉 그는 당시 소위 조명파들(illumines)에게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한다.
성령을 인간들의 목소리와 연결시킨 사도 바울의 예에서 배우자. 사람의 말은 성령의 기관과 도구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종교개혁의 대원리 Spiritus in Verbo operans(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가 Spiritus in Verbo praedicatio operans(성령은 설교된 말씀을 통해 활동하신다)의 원리로 굴절하는 것 이다(설교된 말씀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행동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된다.) 24)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은 궁극적으로 인간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5)
따라서 칼빈 전문가인 리샤르 스토페르(Richard Stauffer)는 이러한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한 오해이며,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란 “참말로 신적 행위” 이며, 따라서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명확하게 지적한다. 2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친히 말씀의 봉사자를 불러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고전 1:21, 롬 10:13-14, 17).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 므로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방편이다. 동시에 설교는 하나의 역동적 사건으로서 성령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그 가운데 역사하신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청중들의 육신의 귀에 들려줄 때, 성령께서는 선포된 그 복음의 말 씀을 청중의 영혼의 귀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설교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사용하시어 직접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라는 섬기는 자를 통해 그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적 의사소통의 수 평적 차원은 신적 의사소통의 수직적 차원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16, 17세기 영국 청교도들 의 공통된 설교관이었다. 27) 이 만남에서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말미 암아 말할 수 없는 기대와 놀람, 갱신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다.
2.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라는 초대를 받는데, 단지 관습적인 종교적 행위로서가 아니라 설교가 심각한 생사의 문제임을 깊이 인식하고 나아와야 한다. 28) 왜냐하면 설교란 청중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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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Richard Stauffer, “칼빈의 설교학”, in 박건택 편역, 『칼빈의 설교학』(나비, 1990), 76.
25) J. Calvin, 신명기 76번째 설교, CO XXVII, 107. 박건택 편역, 『 칼빈의 설교학 』 , 64에서 재인용. 26) Stauffer, “칼빈의 설교학”, 박건택 편역, 64-65.
27) Tae-Hyeun Park, The Sacred Rhetoric of the Holy Spirit: A Study of Puritan Preaching in a Pneumatological Perspective, (Apeldoorn: Apeldoorn Theologische Universiteit, 2005), 368.
1) 하나님의 말씀 청취의 필요성
퍼킨스는 많은 은혜의 방편들 가운데, 설교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들음으로써 그 말씀을 수용하는 것은 규정된 보편적인 수단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인류의 구원에 관한 자신의 뜻, 계획, 그리고 목적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것을 위해 지정된 그 어떤 다른 수단도 존재하지 않 는다.” 29)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필수적이다(행 2:42). 따라서 퍼킨스는 『종말의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A Warning Against the Idolatry of the Last Times)에서 하나님 말씀 청취의 필요성, 즉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할 일곱 가지 이유를 나열한다. 30) 첫째,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하나님의 규례(ordinance)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듣는 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나님의 방편으로서 믿음을 일으키고 확증하며,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한다 (롬 10:14). 셋째, 설교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생(the new birth)의 수단이며(고후 4:15, 갈 4:16), 따라서 말씀 청취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넷째,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복 종의 표시이다(요 8:47, 10:27). 다섯째, 설교의 부재와 설교 청취의 결핍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들 가운데 하나다(잠 29:18, 암 8:11, 호 9:7). 여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사단의 왕국을 쳐부수는 수단이며, 천국의 열쇠다(눅 10:18, 마 16:19). 일곱째, 교회에 출석하여 말씀을 듣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하나님 백성의 관습이다.
2) 올바른 설교 청취의 방식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설교를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그 설교를 청취해야 하는가? 퍼 킨스는 『기독교의 기초』(The Foundation of Christian Religion)에서 우리의 구원에 효과적인 올바른 설교 청취 방식을 소개한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메마른 심령으로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주의 깊게 말씀을 주목하고, 믿음으로 수용하며, 심지어 우리의 잘못이 책망을 받을 때조차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반드시 그 말씀을 마음 구석에 간직하여 그 말씀에 의해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야 한다. 31)
퍼킨스는 또한 『종말의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에서 참된 예배를 위한 올바른 설교 청취 방법 두 가지를 제시한다: 말씀에 복종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그 말씀에 고정시키는 것. 32)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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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William Perkins,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 WP), 3b:141. 연구자는 William Perkins의 전집인 3권, 즉 1권(1626), 2권(1617), 그리고 3(1631)을 사용한다. WP의 제 3권은 페이지 매김이 다 른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므로, 첫 번째 부분은 3a, 두 번째 부분은 3b로 표기한다.
29) Perkins, WP, 3b:332, 계 3:3. WP, 1:247.
30) Perkins, WP, 1:707-11.
31) Perkins, WP, 1:7.
32) Perkins, WP, 1:710-11.
에 복종한다는 것은 믿음과 거룩한 두려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의미다. 그 리고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며 또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을 위한 기초석으로 삼는 것이다. 따 라서 퍼킨스는 말씀을 바르게 듣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인식하 고 있다.
퍼킨스는 『양심의 경우에 대한 전반적인 논제』(The Whole Treatise of the Case of Conscience)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익하게 듣기 위하여 세 가지를 조언한다. 33) 이처럼 설교를 유익한 방식으로 청취해야 할 까닭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설교 청취에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 첫 째, 설교 청취전 준비, 둘째, 설교 청취 중 마음 자세, 그리고 설교 청취 후 실천의 의무들. 첫째, 퍼킨스에 따르면, 설교 청취 전 준비에는 세 가지 규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1) 청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효과적 청취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벗어버림으로써 듣기에 신속해야 한다(약 1:19). 효과적 청취를 방해하는 것들은 자신의 지혜나 지식에 대한 주제넘은 태도, 설교자에 대한 성급한 분노, 마음의 강퍅함과 같은 수많은 악한 부패성(마 13:20), 세속적 염려(마 13:22), 그리고 가려운 귀(딤후 4:3)이다. (2) 청자는 반드시 듣는 귀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 듣는 귀는 설교자가 가르친바 교훈을 마음에 품고 순종하 는 마음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3) 청자는 반드시 자신을 하나님의 현존 앞에 두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이 설교되는 회중 가운데 언제나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퍼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청자는 반드시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 져야 하는데, 이는 두 가지 규칙을 포함한다. (1) 모든 청취자는 반드시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 야 한다. 그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되(살후 5:20), 그 가르친바 교훈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살후 5:21, 요일 4:1). 이러한 분별 가운데 개인이나 목사들에 대한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판단은 성령 안에 놓여 있다. 퍼킨스는 판단과 관련하여 특히 두 가지를 경고한다. (a) 각각의 청취자는 가르침 받은 교훈을 판단할 수 있으되, 설교자 혹은 그의 사역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목사들의 영은 각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언하는 자들에 의해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고전 14:32). (b) 개인은 그 어떤 교리도 발표할 수 없다. 퍼킨스는 각 사람에 의한 사적인 설교가 “교회 안의 많은 분열과 이단들의 원인”이라고 여긴다(말 2:7). (2) 청취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뿌리를 박도록 주의해야 하는데(약 1:21), 이는 네 가지를 포함한다. (a) 그는 전달된 교훈을 참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b) 그는 반드시 그 교훈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히 4:1). 즉, 그 교훈이 참되다는 것을 수용하는 일반적 믿음(살전 1:5)과 자신의 마음을 겸손케 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특별한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c) 청취자는 반드시 그 말씀에 의해 감동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대하 34:27, 느 8:12, 눅 24:32, 행 2:37). (d)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풍성하게 머물도록 해야 한다(골 3:16).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다섯 가지 의무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1) 가르침 받은 교훈은 반드시 마음속에 간직되어야 하며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시 119:11). (2) 청취자는 반드시 들은 말씀을 간절한 기도로 묵상해야 한다. (3) 그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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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Perkins, WP, 2:70-71. cf. WP, 1:373, 3b:213-15. 16세기 후반 ‘은반의 혀’(silver-tongued)라는 별명을 지닌 설교자 헨리 스미스(Henry Smith)는 “청취의 기술”(The Art of Hearing)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는데, 그는 여기서 다양한 방식의 청취를 언급한다. John Brown, Puritan Preaching in England, (London: Hodder & Stoughton, 1900), 85-7.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한다(시 34:8). (4) 그는 반드시 자신을 시험하고 점검해야 한다(시 119:59). (5) 청취자는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그 순종을 드러내야 한다(약 1:22). 따라서 퍼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 말씀이 설교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말씀은 다양한 직업을 지닌 사람들의 삶의 전체 영역으로 확장된다. 34) 결과적으로 퍼킨스는 순종하는 삶을 지닌 살아있는 믿음을 촉구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을 순종함으로 실천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단순히 말씀을 듣고 외적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35)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할뿐 아니라 또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36)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열매 없는 무익한 청취를 낳을 뿐이다. 37) 다른 한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그 뜻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확장시킨다(요 7:17). 다시 말하면, 만일 자신들이 들은 것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지식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다만 캄캄하고 무지하여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퇴보할 것이다(사 6:9). 38) 게다가 설교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순종하는 자들이나 불순종하는 자들은 결국 종말에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순종한 자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들이 기대했던 음성이 아닌 다른 정죄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39)
3) 두 종류의 청취자들
설교된 말씀 청취와 관련하여 퍼킨스는 두 종류의 청취자들을 언급한다: 귀머거리 청 취자들과 듣는 청취자들. 40) 귀머거리 청취자들은 단지 외적인 귀만 들고 말씀의 사역에 오는 자들로서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일들로 가득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침 받은 것을 배우거나 믿거나 순종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퍼킨스는 이런 듣지 못하는 귀를 “하나님의 두 려운 심판”으로 여긴다. 41) “우리가 반드시 영적인 귀를 얻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귀를 주의해야 한다.” 42)
다른 한편, 듣는 청취자들은 말씀을 외적으로 듣되 그 말씀을 통해 성령의 내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믿는 자들은 결국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주의 깊게 듣는 청취이며 구원하는 청취이다, 그러므로 퍼킨스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그리고 주목하여 듣기 위하여 말씀에 다가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고 우리의 상태는 악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청취는 더욱 심한 정죄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3)
4) 올바른 설교 청취를 방해하는 원수들
퍼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바르게 경청하는데 방해하는 원수는 외적인 원수와 내적인 원수로 구분된다. 첫째, 외적인 원수는 무엇보다 사단이다. 사단의 가장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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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Perkins, WP, 3b:284, 312.
35) Perkins, WP, 3b:210.
36) Perkins, WP, 3b:251, 3a:255, 2:309.
37) Perkins, WP, 3b:263.
38) Perkins, WP, 3b:239.
39) Perkins, WP, 1:267.
40) Perkins, WP, 3b:279-80, 마 13:9, WP, 2:7, WP, 1:200.
41) Perkins, WP, 3b:280. 사6:9.
42) Perkins, WP, 3b:280.
43) Perkins, WP, 3b:242.
술책들 중의 하나는 청중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사단은 구원의 수단을 무위로 만들어 아무런 효과도 없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데,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수단들을 무시하고 경멸함으로 써 더욱 심하게 정죄를 받게 한다.” 44) 둘째, 퍼킨스는 이런 외적인 원수만 아니라 주의 깊은 경청을 방해하는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원수, 두 가지를 지적한다: 쾌락 혹은 세속적 일들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의 둔함과 힘겨움. 45)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방인으로, 그가 말씀하실 때 듣기에 느리고, 들을 때에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자세를 갖춘 이방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사역 가운데 우리에게 말 씀하실 때 우리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46)
3.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1) 설교 청취에의 준비(Preparation)
리차드 십스는 복음을 듣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안내하고 이끄는 “준비 사역”으로 여긴다. 47) 하지만 복음 청취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준비 사역을 무시하면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 기도와 같은 정당한 일들 과 사랑의 일들을 계속 추구하며 해야 한다. 48) 게다가 십스는 이런 준비를 회심을 위한 필수적인 일로 여긴다. “우리가 씨를 뿌리기 전에 개간하는 것처럼,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회심시키기 원하는 자들을 일반적으로 준비하신다.” 49) 이러한 준비들은 구원에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회심을 위해 영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십스는 ‘ 자기 준 비 ’(self-preparation)를 믿지 않는다. 준비는 회심의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이 아닌데, 왜냐하면 모든 준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준비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준비로 미래의 것들을 보상받을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준비들 자체는 하 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50) 십스에게 있어서 회심을 위한 효과적 준비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적이며 우리의 행위는 단지 그 뒤를 따를 뿐이다. 51) 따라서 십스는 그의 청중들이 신실함과 겸손함으로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기를 촉구한다.
2) 설교는 빈약한 수단인가?
하나님의 규례들(ordinances)은 죄인들의 회심과 영혼의 영적 유익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고 지정된 방편들이자 복된 방편들이다. 다른 방편들은 그와 같이 거룩하게 되거나 복된 것이 아니다. 어떤 수단이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멸시받는 수단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셨다. 52)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때로는 그 수단들 가운데, 때로는 그것들 없이, 그리고 때로는 그것들을 거슬러 일하신다. 53) 게다가 하나님의 사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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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Perkins, WP, 3a:148, 3b:200. 45) Perkins, WP, 3b:242. 46) Perkins, WP, 3b:244.
47) Richard Sibbes, The Complete Works of Richard Sibbes (= WRS), ed. A. B. Grosart, 7
vols. (1862-64. rep. Edinburgh/Carlisle, 1973), 5:6, 2:95, 166.
48) Sibbes, WRS, 5:7. 49) Sibbes, WRS, 6:522. 50) Sibbes, WRS, 6:522.
51) Sibbes, WRS, 1:265, 268. 52) Sibbes, WRS, 4:387, 7:466.
교회의 규례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선교 가운데 능력 있게 역사하신다. 54) 고린도후서 10장 6절과 스가랴 1장 5-6절을 가리키면서, 십스는 하나님의 규례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믿는다. “우리가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적으로 오시어 그것을 실행하신다.” 55)
십스는 자신의 시대를 “복음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 of the gospel)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활기가 없는 것을 눈치 채고서, 십스는 복음 사역을 단순히 하나의 평범한 호의로 생각함으로써 복음 사역에 대해 범죄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다. 56)
우리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를 가슴 아프게 한다.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가 무시당하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신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피가 평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신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직무는 이것들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와 나라의 흔한 죄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임박한 심판을 위협하고 있다. 57)
그러므로 설교는 구원을 위한 빈약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정된 거룩한 수단이다.
3) 설교 청취를 방해하는 것들
십스는 설교의 규례가 빈약한 수단으로 경멸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육체적인 사람들과 사단에 의해 크게 방해를 받는다는 것도 인식하였다. 십스가 주목하는 두 가지는 사람 들의 부패와 사단의 활동이다. 첫째, 신적 진리에 대한 주된 방해물은 인간의 부패다. 십스는 인간의 부패란 무지의 덮개가 아니라 자의적 고집과 교만으로 뭉친 영적 덮개라고 지적한 다. 58) 그러므로 잘못은 복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부패에 놓여 있다. 59) 그들이 멸망하는 것 은 은혜의 방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반역 때문이다. 60) 그들은 그리스도의 유익들 을 제공 받고도 성령의 사역을 저항하고 성령을 소멸한다. 61) 그들이 저주를 받는 까닭은 그들 이 저지른 반역 때문이다. 62) 십스에 따르면,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세 가지 장애물이 있다. 63) (1) ‘육신적인 생각’(Reasonings of flesh), (2) ‘마음의 높아짐’(exaltations of the heart), 그리고 (3) ‘신적 진리를 거스르는 육신적 행동들’(actions of the flesh against divine truths). 십스는 자신의 영혼보다 자신의 부패를 사랑하는 인간의 잘못된 욕망을 예리 하게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효과를 얻기 위해 사람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어리석은 기만과 뻔뻔스러운 반대를 버려야 한다. 64) 왜냐하면 성령을 동반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반대들과 방해물들을 마음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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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Sibbes, WRS, 4:390-91.
54) Sibbes, WRS, 4:389.
55) Sibbes, WRS, 4:390.
56) Sibbes, WRS, 5:420.
57) Sibbes, WRS, 5:421.
58) Sibbes, WRS, 4:372-73. cf. 행 7:51, 요 5:40, 마 23:37.
59) Sibbes, WRS, 4:373.
60) Sibbes, WRS, 2:69.
61) Sibbes, WRS, 5:389.
62) Sibbes, WRS, 5:390. 호 13:9. 63) Sibbes, WRS, 4:376.
둘째, 십스는 또한 사단의 교묘한 사역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다. 하나의 실례가 그의 예리한 분별력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이 많은 죄를 떠나 산다 할지라도 만일 그가 그 어떤 단 하나의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하나의 죄 가운데 가두어 두고 하나의 죄로 그들을 잡아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새 한 마리를 가지고 날아가게 할 때, 줄에 매인 새를 다시 잡아당기는 것처럼, 사단은 사람들이 그 어떤 하나의 죄 가운데 산다면 그들을 줄에 매어 놓은 것이다. 66)
때로는 사단이 우리 눈에 티끌을 던져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다. 67) 십스에 따르면, 사단의 전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교묘하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알도록 허용하되, 그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특별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68)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신앙의 확신을 견딜 수 없기에 그들의 확신을 매우 반대한다. 69)
4) 하나님의 규례인 설교를 바르게 듣는 태도
설교 사역에 대한 이러한 방해물들에 대해 십스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해독제를 제공한다: 복음 사역에 참석하는 올바른 자세와 복음 사역자에 대한 올바른 태도. 십스에 의하 면, 준비를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삶을 위해 제정된” 복음과 주의 만찬이 죽음과 심판으로 드러난다. 70) 십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조언해 준다. 그것은 네 가지 방식으로 설교의 규례를 존중하는 것이다. 71) (1) 설교에 나아오기 전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분별하라. (2) 모든 영적인 복종의 자세로 설교를 들으라. (3) ‘접붙여진 말 씀’처럼 설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기를 힘쓰라. 그리고 (4) 당신이 들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묵상하라.
게다가 십스는 설교를 듣는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여섯 가지 일반적인 요점들을 언급한다. (1) 십스는 교만하고 뻔뻔스런 마음이 아니라 겸손히 그리고 온순하게 설교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72) 하나님의 규례를 멸시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마치 나아만의 교만과 같은 것이다. “다른 강들이 요단강처럼 좋지 않은가?” 73) 십스는 사람이 믿음, 겸손, 그리고 온유의 정신으로 복음을 공부할 것을 조언한다. 74) 만일 누군가가 회집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연회에 온 사람처럼 쫓겨날 것이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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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Sibbes, WRS, 4:373.
65) Sibbes, WRS, 4:377. 고후 10:4, 5.
66) Sibbes, WRS, 4:231, 5:7, 92, 1:323, 7:258.
67) Sibbes, WRS, 6:332. 고후 4:4.
68) Sibbes, WRS, 5:404.
69) Sibbes, WRS, 5:405.
70) Sibbes, WRS, 4:64, 210. cf. 고후 2:16. WP, 6:314.
71) Sibbes, WRS, 6:527-28.
72) Sibbes, WRS, 4:372, 298, 7:476.
73) Sibbes, WRS, 4:372, 359.
74) Sibbes, WRS, 4:160.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 없이 방편을 신뢰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76) 그 방편들은 성령 없이는 우리 영혼에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 (3) 십스는 또한 커다란 경외심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복종으로 그 진리를 수용하도록 조언한다. 77) 이것은 지식이나 분별 이상의 인정이다. 이것은 마치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과 같다. 78)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규례들에 대해 악평을 초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육체에 속한 사람들 눈앞에서 그 규례들을 불신할 때 그들은 그것들을 멸시할 것이다. 79) (4) 십스는 거룩한 의무들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나눈 뒤, 내적인 것을 더 어렵고 힘든 것으로 평가하고, 외적인 실천에 의지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80)
(5)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가장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적인 진리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데 성령의 사역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영혼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있다. 81) 그 진리를 확립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령 없이 그 진리는 죽은 문자요 마음을 일깨울 수 없다. 모든 구원의 방편들이 필요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것들은 죽은 방편들이다. 82) 그러므로 청취자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효과를 위해 성령으로 그것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들은 죽은 사람에게 음식이나 죽은 자의 입에 부어진 감로주처럼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의 규례로 우리를 소생시키시도록 간구하라.” 83) 마음을 여는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란 영혼에게 전적으로 감추어진 신비다.
(6) 마지막으로 십스는 주일에 들은 설교를 묵상하는 습관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소화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영양도 섭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84)
5) 말씀의 봉사자에 대한 태도
복음 사역자에 관하여 십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세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여겨야 한다. 85) 따라서 한편 으로 십스는 사역의 능력이나 사역자의 탁월한 재능에 의존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86) 결국 십스는 우리의 시선을 사역자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린다. “우리는 전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의 탁 월함이나 그들의 미천함을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의 규례를 바라보아야 한다.” 87) 하나님의 규례를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수단을 의지 한다면 그 수단을 높이는 영적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다. 88)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 수단들 안에 있지 않고 그 수단들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쉽게 이해되는 교훈이지만 그렇게 쉽게 실천되지는 않는다. 90) 그러므로 우리는 사역자를 의존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는 성령을 의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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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Sibbes, WRS, 4:72.
76) Sibbes, WRS, 4:215, 5:17-18, 7:476.
77) Sibbes, WRS, 4:363, 3:367. cf. 행 10:33.
78) Sibbes, WRS, 3:303, 316.
79) Sibbes, WRS, 4:374-75.
80) Sibbes, WRS, 4:100.
81) Sibbes, WRS, 4:123, 139-40, 161, 172, 211, 298, 365, 5:117, 469, 6:335.
82) Sibbes, WRS, 4:295.
83) Sibbes, WRS, 4:374.
84) Sibbes, WRS, 1:348.
85) Sibbes, WRS, 4:139.
86) Sibbes, WRS, 4:355, 387, 5:19.
87) Sibbes, WRS, 4:387, cf. 4:395.
88) Sibbes, WRS, 4:393.
다른 한편, 우리는 사역자의 연약함 때문에 그를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91) 비록 사역자는 그 방식에 있어 “토기(土器)”이지만, 은혜와 영광에 관하여 그는 황금 그릇이다. 92) 이것 은 약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신적 진리의 탁월함과 진흙으로 빚어진 토기 사이의 엄청난 불균형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회심의 최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93)
둘째, 십스는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취급하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복음의 저자이시다. 복음은 그의 가슴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권위로 인친 것이다. 따라서 복된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대면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것을 거부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을 수용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수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를 대할 때 당신은 하나님 그분을 대하는 것이다. 94)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를 경멸하고 그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권위를 지닌 그들 가운데 오시기 때문이다. 95)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사역자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의 대리인이라는 것이다.
셋째, 십스는 그의 청취자들로 하여금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설교자들은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기 때문이다. 96) 게다가 목회자들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다른 사람들의 사역보다 목사의 사역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97) 사람들은 다섯 가지 영역에서 그들의 목회자를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다: (1) 능력, (2) 그 능력을 기꺼이 수행하려는 의지, (3) 그들의 의무에 대한 성공적 수행, (4) 영적 능력, 그리고 (5) 사단과 터무니없는 사람들로부터의 보호와 구원. 98)
4. 설교 청취에 대한 청교도의 교훈들
지금까지 우리는 청교도 설교자인 퍼킨스와 십스의 설교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설교 청취에 관한 조언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들이 말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설교자는 청중에게 설교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 설교란 인간 설교자가 하 나님의 말씀을 외적으로 청중의 귀에 선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 선포된 말씀을 청중의 영혼의 귀에 내적으로 들려주시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여기서 설교란 인간의 수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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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Sibbes, WRS, 3:134.
90) Sibbes, WRS, 4:393.
91) Sibbes, WRS, 4:359.
92) Sibbes, WRS, 4:360, 366.
93) Sibbes, WRS, 4:355, cf. 고후 4:7, 딤후 2:20.
94) Sibbes, WRS, 1:387, cf. 행 10:33. cf. WRS, 3:326, 372.
95) Sibbes, WRS, 5:22, 429, cf. 삼상 8:7. WRS, 3:336.
96) Sibbes, WRS, 5:39.
97) Sibbes, WRS, 3:182.
98) Sibbes, WRS, 3:189-90.
차원의 의사소통과 성령 하나님의 수직적 차원의 의사소통이 만나는 역동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교란 결코 빈약한 방편이 아니며, 오히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방편이다. 즉 죄인이 거듭나고 새롭게 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멸시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를 단순히 하나의 평범한 호의로 여기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범죄다. 따라서 하나님은 은혜의 방편인 설교를 거두어 가심으로써 이 땅을 심판하시기도 한다. 설교란 사단과의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사단의 왕국을 쳐부수는 강력한 수단이다. 둘째, 설교자는 청중에게 설교를 바르게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고, 청중은 설교를 바르게 경청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청중은 설교에 대 해 세 가지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1) 설교 청취 전 준비로서, 효과적 청취를 방해하 는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 이 선포되는 회집에 참여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현존 앞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는 인간 편에서의 회심을 위한 필수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자기 준비가 회심이나 구원의 공로적 원인 은 결코 될 수 없다. (2) 설교를 들을 때의 마음의 자세로서, 청중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하며, 믿음으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자신의 마음에 뿌 리박게 해야 한다. (3) 설교 후 실천해야 할 청중의 의무로서, 가르침을 받은 교훈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하고, 기도로 묵상해야 하며, 자신의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을 경험하며, 자신을 시험하고 점검하며, 순종을 드러내야 한다.
셋째, 청중은 설교자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1) 설교자의 탁월한 재능을 의존하지 말며, 그의 연약함 때문에 그를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진 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 설교자의 설교를 들 을 때 우리는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설 교자를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 그분을 멸시하는 큰 죄악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인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단은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사역을 방해하기 때문 이다.
넷째, 청중은 설교의 올바른 청취를 방해하는 원수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외적인 원수이자 영적 대적자인 사단의 존재와 그 방해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설교청취는 일종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 내적인 원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일들로 가득하고 가르침 받은 교훈을 순종하지 않는 귀머거리 청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간적 부패가 올바른 설교 청취를 방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성령 안에서 믿음과 기도, 순종으로 인간의 부패를 극복해야 한다.
다섯째, 설교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설교라는 은혜의 방편 자체가 구원의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방편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방편 없이도 혹은 방 편을 거슬러 그 기쁘신 뜻대로 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여섯째, 올바른 설교 경청은 단지 설교를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에서 순종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설교는 듣는 자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설교의 본래적 의미의 마침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설교가 성도들의 삶 가운데 실천되기까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단지 예배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신자가 삶의 현장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III. 나가는 글
1970년대에 태동한 신설교학은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청중을 존중하는 방식으로서의 귀납적 설교를 주창하였다. 신설교학자 크래독은 청중을 무시하는 소위 권위주의적 태도에 기초한 연역적 설교에 대한 대안으로서 귀납적 설교를 제시하였다. 신설교학은 설교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논구라기보다는 주로 설교의 전달 방식에 대한 논구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 1990년대 초 설교학자 아담스는 설교에는 설교자만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책임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담스는 자신의 책, 『설교는 이렇게 들어야 합니다』에서 청중이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 경청을 위한 올바른 지침들은 이미 16,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제시되었다. 다만 후세대들이 그 값진 교훈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이다. 청교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인 설교를 귀중하게 여겼으며, 따라서 청중에게 설교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설교를 들으러 나아오기 전 마음의 준비에서부터 설교를 들을 때 믿음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들으며, 설교를 들은 후에는 반드시 설교의 교훈들을 실천할 것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설교 가운데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 설교자를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실제적으로 베푸신다. 이것이 설교의 신비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러한 설교의 신비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자기 경험과 이야기만을 늘어놓거나 청중은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기의 사욕을 좇아 허탄한 이야기만을 추구한다면(딤후 4:3-4),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의 갱신과 부흥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청교도 설교자 퍼킨스와 십스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실제적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한국교회를 꿈꾸어 본다.
연구자는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이야기함으로써 청중의 입장에서 본 ‘청중의 설교학’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연구자는 약 30년 전에 한 중국 선교사가 찍은 잊지 못할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중국 기독교인들의 예배의 한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교회당 내부는 거의 황무하고 눈에 띄는 장식도 없었다. 심지어 의자조차 없었다. 사진 속에는 약 30여명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남루하고 누추한 옷을 입고 마룻바닥에 앉아 설교를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구자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청중들이 모두 한결같이 설교단을 향해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구부린 채 열중하여 듣는 것이었다. 연구자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그렇게 듣기를 기도해 마지않는다!
Abstract
A Homiletics for Audience: skills for an effective listening to preaching - with a reference to Puritans
Tae Hyeun, Park (Chongshin University)
Although we live in a post-modern age characterized by neglecting authority, God's word has still authority as 'God's word' for both the preacher and the listeners. New homiletic or inductive homiletics heavily focused on audience does not properly deal with the position of the audience in preaching. Adams' approach to the responsibility of audience in preaching is right and good. We need to listen the advice of English puritans, at least three centuries earlier than Adams, who teach the duty of audience in preaching and an effective skills for listening sermons. Preaching is not a ministry of preachers alone, but also a collaborative ministry of both preachers and listeners. William Perkins and Richard Sibbes stressed the duty of audience in preaching. They also underlined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listening sermons. Their teaching is very necessary for us today.
Key Words: Listening Sermons, Duty of the Audience, New Homiletic,
William Perkins, Richard Sibbe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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