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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91)
어느새 백발이
김삿갓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수안댁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해졌다.
"여보게 주모!" "왜 그러세요?"
"나, 술 좀 더 갖다 주게."
"그렇게 많이 드셔도 괜챦으시겠어요?"
"술값 못 받을까 봐 걱정이 되나?"
"엉뚱한 오해는 마세요. 술값 못 받을까 봐 손님에게 술 안드리도록 쩨쩨한 여자는 아니에요."
주모가 술을 갖다 주자 김삿갓은 연달아 술을 마셔댔다.
깨끗이 잊으려고 마음을 굳힐수록 수안댁에 대한 슬픔이 새삼 가슴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손님은 웬 술을 그렇게도 잡수세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만 같네요."
주모는 김삿갓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뼈 있는 질책을 했다. 그러자 김삿갓은 취중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며칠 전에 마누라가 죽었다네.
그러니 어찌 시름이 없을 수 있겠나?"
그러자 주모는 술을 한 잔 따라주며
시큰퉁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다.
"지나간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술이나 드세요.
마누라가 죽었거든 새장가를 들면 될 게 아니오?
나는 몇 해 전에 외아들이 죽었다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해도 산 사람은 결국에 살게 마련입디다."
주모는 무심코 지껄인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 인생은 현재와 미래는 있어도,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깨끗이 잊어야 하는 것이다.)
주막 "야몽"의 주모는 마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처럼 지나간 일에 구애되지 않고,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김삿갓은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술을 마시다 말고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길상천녀吉祥天女(佛家에서 이르는 남에게 덕을 베풀어 주는 仙女)께서, 어리석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술이 취한 데서 오는 일종의 환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주모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한다.
"호호호, 손님은 이만저만 취하지 않으셨군요.
나를 돌아가신 마나님인 줄로 알고 계시는 게 아니오?"
"아, 아니올시다.
길상천녀 덕분에 죽은 마누라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쓸데없는 시름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몹시 취하신 모양이니 한 잠 주무시도록 하세요."
주모가 목침을 내밀어 주기가 무섭게
김삿갓은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이렇게 정신없이 자고 나서 깨어 보니
마루에는 아침 햇살이 환히 비치고 있는데
주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모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 바탕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인가?)
"야몽"이라는 주막 이름이
어쩐지 우연한 이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모가 보이지 않기에
김삿갓은 술값을 넉넉히 놔두고 길을 떠났다.
산길을 내려오노라니, 마침 길가에 옹달샘이 있었다.
목이 컬컬하던 김삿갓은 두 손으로 샘물을 움켜 받아 한바탕 마셨다.
그러고 나서 물 속을 들여다보니,
물에는 김삿갓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자기 얼굴을 새삼스럽게 들여다 보았다.
몇 해전만 해도 머리가 새까맣었는데
2, 3년 사이에 백발이 성성해진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허! 검은 머리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백발이 되었구나!)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물위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었다.
백발여비김진사 白髮汝非金進士
머리가 허연 너는 김진사가 아니냐?
아역청춘여옥인 我亦靑春如玉人
나도 한때는 꽃다운 청춘이었다.
주량점대황금진 酒量漸大黃金盡
술은 늘어만 가는데 돈은 떨어져
세사재지백발신 世事纔知白髮新
세상을 알 만하자 백발이 되었구나!
92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2)
친구와의 돈 거래도 남들처럼 해야 한다.
김삿갓이 산을 내려와 객점客店에서 해장술을 마시는데
안쪽 한 구석에서는 어떤 시골 사람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술을 몇 잔 거푸 마시며 한숨까지 몰아 쉬더니, 한탄어린 소리를 지껄였다.
"제길헐!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되려는지,
사또란 자는 눈앞에 도둑놈 하나를 잡아 주지도 않네!"하면서 사또가 들으면 목이 날아갈 소리를 마구 퍼붓고 있었다.
김삿갓이 건너다 보니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순박한 시골 사람 같은데,
이렇게 사또를 나무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니
무척이나 억울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남의 딱한 사정을 모른척 넘기는 법이 없는 김삿갓,
기어이 술상을 냉큼 들고 그 사람 앞으로 갔다.
"노형은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기에 혼자서 그렇게도 한탄하고 계시오? 초면이지만, 우리 술이나 한 잔씩 나누면서 화를 풀어 버리기로 합시다.
왜, 옛 말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 하지않소?"
그러자 혼자 화를 내며 푸념을 하고 있던 사람은
김삿갓이 내밀어 주는 술잔을 받으며 억울한 자기 형편을 일장 늘어 놓았다.
"이보시오, 노형!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세상에 어찌 이런 경우가 있단 말이오?"하며 거침없이 있는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얼마 전에 친구한테서 돈 천 냥을 빚으로 얻어 썼다가 8백 냥은 먼저 갚아 주고 2백 냥은 나중에 갚아 주었소.
그런데 소위 친구란 놈이 2백 냥만 받았고 그전에 갚은 8백 냥은 받은 일이 없노라고 잡아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말씀을 듣고 보니 노형은 친구끼리 돈 거래를 하다가 피차간에 어떤 오해가 생긴 모양이구려.
그러기에 옛날부터 "가까운 사이에는 돈 거래를 안 하는 법"이라고 말들 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양상문梁想文이라고 하는 그 시골 사람은
오해라는 말을 듣자 발끈해서 말하는데,
"에이, 여보시오. 오해가 무슨 놈에 오해란 말이오?
돈이 8백 냥이면 얼마나 큰 돈인데 그러시오?
나는 분명히 8백 냥을 먼저 갚아 주었는데 그 놈은 받은 일이 없다고 잡아떼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기가막힌 노릇이 또 있겠소이까?"
"빌린 돈을 갚을 때 영수증은 받아 두지 않으셨습니까?"
"빚을 얻어 쓸 때에는 천 냥짜리 차용 증서를 또라지게 써 주었지만
돈을 갚을 때는 천 냥중에 8백 냥만 갚고 2백 냥은 못 갚았기에 그 놈까지 갚고 나서 차용 증서를 돌려 받으려고 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됬다오."
양상문의 말에 따르면 , 그는 몇 달 전에 황주黃舟 고을에 사는 박용택朴鏞澤이라는 친구에게 돈 천냥을 빚으로 얻어 쓴 일이 있었다.
그때에 차용 증서는 천 냥짜리 한 장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빚을 갚으려고 하는데 돈이 2백 냥쯤 모자라기에 우선 8백 냥만 먼저 갖다 주면서
차용 증서는 나머지 2백 냥까지 갚고 난 뒤 돌려 받기로 하고 영수증도 받지 않은 채 그냥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잔금 2백 냥을 갖다 주면서 차용 증서를 돌려 달라고 했더니 박용택이란 놈이 "자네가 언제 나에게 8백 냥을 가져왔단 말인가?
오늘은 2백 냥만 가져 왔으니 나머지 8백 냥을 가져 오기 전에는 차용 증서를 돌려 줄 수 없네!"하면서,
양상문을 오히려 도둑놈으로 몰아 붙이더라는 것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양상문이 화를 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태평스럽게 말을 해 주었다.
"8백 냥을 먼저 갚을 때 차용 증서는 돌려 받지 못할 망정
영수증 만은 받아 둘 걸 그랬구려."
"에이, 여보시오.
친구지간에 그런 배신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이러나저러나 빚을 깨끗이 갚았으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든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게 아니오?"
양상문은 어이가 없었던지 김삿갓을 대뜸 나무란다.
"뭐요? 그냥 내버려 둬도 별 일이 없을 것이라고요?
노형은 도둑놈의 심보를 그렇게도 간단하게 보시오?"
"빚도 모두 갚았겠다,
제 놈이 뭐가 떳떳하다고 책망할 것이오?"
김삿갓의 말을 듣고 난 양삼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김삿갓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노형은 정말 어리숙 하시오.
박용택이란 놈은 내가 써준 차용 증서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 주면서
"양상문이란 놈은 천 냥 빚을 2백 냥만 갚고, 8백 냥은 그냥 떼어 먹으려는 도둑놈"이라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니더니,
이제는 나에게 "해결사"라는 깡패를 보내
"잔금 8백 냥을 빨리 갚지 않으면 우리 집 가장집물家藏什物을 몽땅 자기 집으로 실어 가겠다"고 협박 공갈을 하고 있는 중이라오.
이러니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을 당한 것도 서럽지만
이제는 동네 망신은 물론이요, 패가 망신까지 하게 생겼다오.
하늘도 무심 하시지,
세상에 어찌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렇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김삿갓은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놈이 그렇게나 악독하게 나오면 관가에 고발을 해서 주릿대를 안겨 줄 일이지, 어째 고발은 안 하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누가 아니라오?
하도 억울해서 관가에 고발도 해보았지요.
그랬더니, 사또라는 작자가 뭐라고 한 줄 아시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
양상문은 또다시 기가 막히는지 하던 말을 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사또가 뭐라고 했기에 한숨만 쉬시오?"
그러자 양상문이 쓴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데,
"사또가 저간의 사정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수안 고을 사또인데 박용택은 나의 관할이 아닌 황주 고을 백성이므로 나에게는 그 자를 체포해 심문할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도둑놈을 놓고 관할 타령만 하고 있으니,
내 억울한 사정을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 한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은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올라,
"뭐요? 사또는 백성들로부터 고발을 받으면 연루자를 불러다가 진상을 조사해 봐야 할 일인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관할 운운 했단 말이오?
도대체 수안 고을 사또가 어떤 자이기에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더란 말이요?"
"흥! 노형이야말로 잠꼬대 같은 말씀만 하고 계시는구려.
사또라는 자는 죄없는 백성을 잡아다가 볼기를 쳐서 돈이나 뺏어 먹는 자라는 것도 모르시오?
세상이 썩었다 썩었다 해도
이렇게 까지 썩은 줄은 나는 정말 몰랐소이다."
"그렇다면 수안 고을 사또는 이름이 뭐라는 사람이오?
내가 한번 만나 보기로 하겠소."
김삿갓이 "사또를 만나 보겠다"고 말하자
양상문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아니, 선생은 우리 고을 사또 어른을 잘 아시옵니까?"
방금 전까지도 노형이라고 불러 오던 사람이
갑자기 김삿갓을 선생이라고 바꿔 불렀다.
"내가 사또와 지면知面이 있어 만나 보겠다는 것은 아니오. 듣자하니 노형의 사정이 하도 딱해 보이기에
내가 사또를 만나 직접 호소해 볼 생각이니 사또의 이름이나 알려 주시오."
양상문은 김삿갓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는지,
머리를 정중히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우리 고을 사또 어른의 이름은 백창수白昌殊라고 합지요.
어려서 부터 하옥 대감荷屋大監(영의정 金左根의 別號)이 사랑에서 심부름을 시키다가 50이 넘어 쓸모가 없게 되자 우리 고을 사또로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에이, 여보시오. 하옥 대감이 아무리 인사를 어지럽게 하기로
설마하니 사랑방에서 심부름을 하던 늙은이를
한 고을에 사또로 내려 보내기야 하겠소?
누군가가 하옥 대감과 사또를 욕하느라고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이겠지요."
김삿갓은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 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횡행 하던 때 이었으므로, 내심으로는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93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3)
박용택 체포조 출발시켰다.
김삿갓은 동헌으로 가서 사또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동헌 정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은
김삿갓의 행색을 훝어보더니 대뜸 코웃음을 친다.
"이 미친놈아!
한양에서 내려 왔다고 하면 누가 겁을 낼 줄 아느냐?
사또님이 누구라고 감히 뵙겠다는 것이냐?
경을 치기 전에 썩 물러가거라."
행색이 허술한 것을 보고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투였다. 김삿갓은 약간은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는 큰소리를 쳐볼밖에 없었다.
"자네들이 내가 누구란 것을 모르는 모양일쎄,
나는 하옥 대감의 특별 분부를 받들고 내려온 사람일쎄.
사또에게 그 말씀만 전해 주게나.
그러면 사또께서 반갑게 만나 주실 걸세."
아무리 문지기 사령이라도
하옥 대감이라는 말만 들으면 몸을 떨게 되리라 생각되어
하옥 대감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도깨비는 부작符作도 모른다"고 하던가, 문지기들은 하옥 대감을 알기조차 못했는지,
"이 미친놈아! 하옥 대감이 뭐 말라 죽은 귀신이냐?
미친 소리 한 번 더하게 되면 주릿대를 안길 것이다."하며
방망이를 들어 보였다.
김삿갓은 난처했다. 그렇다고 사내 대장부가 한번 뽑은 칼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네들이 하옥 대감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하옥 대감으로 말할것 같으면 자네 윗전인 사또 따위는 마음대로 내고 들이는 이 나라의 영의정 대감이시라네.
그런분의 명령을 받고 찾아온 나에게 사또를 못 만나게 한다는 것은 자네들이 경을 칠 일이 될 것이야."
이렇게 문지기와 승강이를 하고 있는데 마침, 누군가 문안에서 나오다가 문지기를 보고 소리를 지른다.
"여봐라! 무슨 일인데 소란을 피우느냐?"
"아전 어른! 이 자가 한양에서 내려왔다면서 다짜고짜 사또 어른을 뵙겠다고하여 쫒아내려 소란이 일었습니다."
아전은 "한양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심상치 않게 들었는지, 김삿갓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한양에서 내려오신 분이 무슨 일로 사또 어른을 뵙자고 하셨습니까?"하며 제법 정중히 물었다.
김삿갓은 흩어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나는 하옥 대감의 분부를 받들고 관서 지방을 살피는 중에 사또를 잠시 만나려고 찾아온 길이오."
아전은 하옥 대감이라는 말을 듣더니 기절초풍을 하듯이 놀란다. "옛? 하옥 대감의 분부를 받들고 관서 지방을 살피러 오신 어른이시라고요?
그러면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사또께 얼른 아뢰겠습니다." 아전이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잠시 뒤에 사또가 정복을 입고, 헐레벌떡 달려나와 김삿갓에게 허리를 정중히 굽혀 보이며 말한다.
"하옥 대감의 분부를 받자옵고 관서 지방을 살피러 가시는 길에 저희 고을을 찾아 주셨다니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없사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그러면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령 두 놈을 돌아 보며,
"너희는 이런 귀한 분을 어찌 소란스럽게 맞았느냐?
고연 것들 같으니...." 하며 노여움을 보이자,
사령 두 놈이 모가지를 어깨에 집어 넣으며 말한다.
"소인들이 미처 알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사또는 앞장을 서서 김삿갓을 정중히 내당으로 안내했다.
차린 행색이나 말투로 미루어 보아
사또는 김삿갓이 틀림없는 암행어사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내당으로 가는 길에 "소관은 하옥 대감으로 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는 몸이옵니다.
하옥 대감께서는 기체후 일향만강하옵는지요?"하면서
자신이 하옥 대감의 후원을 받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어르신네께서는 대강 짐작하시겠지만
소관은 하옥 대감을 30여 년 동안이나 측근에서 모셔 오다가, 얼마 전에 이곳 수령으로 내려온 몸이옵니다."
암행어사는 본색을 숨기려고 의례 변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 상례인지라, 사또는 김삿갓의 행색이 남루한 것도 일부러 암행어사임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삿갓은 관명을 사칭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굳이 변명을 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다.
사또가 자신을 암행어사로 짐작하고 예우를 하는데
구태여 진실을 말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겸언쩍은 마음에 얼른 화제를 바꾸어 말을했다.
"내가 어제 오늘 이 고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민원을 살 만한 사기 사건이 있던데 사또는 그 사건을 알고 계신지요?"
사또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뛸 듯이 놀란다. "저희 고을처럼 태평스러운 고을이 없사온데 사기 사건이 있다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그러자 김삿갓은 양상문과 박용택 사이에 얽혀 있는 사건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말한다.
"그 일이라면 소관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박용택이라는 자는 저희 고을이 아닌 황주 고을 백성이라서 소관이 마음대로 체포해 올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양상문이란 자는 돈을 갚았다고는 하지만
영수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놈의 말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하며 궁색한 변명을 한다.
"돈만 돌려 주고 차용 증서를 돌려 받지 않은 것은, 양상문이 박용택이라는 친구를 그만큼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이까?
그런데 박용택이란 자는 돈을 받아 놓고도 돌려 주지 않은 차용 증서를 미끼로 돈을 또 받아 내려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다니 그런 악독한 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이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나 양상문이라는 자는 돈을 돌려 주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박용택이란 자는 돈을 돌려 받지 않은 증거로 차용 증서를 가지고 있으니, 소관이 판단하기로는 양상문의 증거가 부족하여 시비를 가리기가 난처한 지경 입니다."
"물론 시비를 가리는데 증거물이 반드시 필요 하겠지요.
그러나 지능이 발달한 범죄자 일수록 증거물을 잘 이용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한 사람은 친구를 믿었기에 빚을 갚아 주고도 차용 증서를 돌려 받지 않았는데 저쪽 놈은 돌려 주지 않은 차용 증서를 핑게로 돈을 또 받아 내려고 한다면 어느편이 나쁜 놈인가는 자명한 일이 아니오니까?"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나 박용택이란 놈은 저의 관내에 사는 놈이 아니기 때문에 ...."
사건이 워낙 까다로운 내용이라 사또는 시비를 가리기에 자신이 없는 태도였다.
김삿갓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흐지부지 사건이 되어 양상문이 다시 돈을 갚아야 되는 사태에 이를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사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사건만은 사또를 대신하여 내가 취조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만약 사또께서 허락을 해주시면, 공정한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소이다."
사또는 워낙 자신이 없던 일이었던지라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어르신께서 직접 다루어 주신다면 소관으로서는 그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고을의 명예를 위해 부디 명판결을 내려주시옵소서."
하면서 김삿갓을 암행어사로 알고 연방 굽신거린다.
김삿갓은 사건을 직접 다루게 되자 여러가지로 생각을 했다. 아무리 사또라도 자기 고을이 아닌 남의 고을 백성을 함부로 잡아다가 취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의 고을의 백성이라도 범죄 사실이 확실할 때는
해당 고을의 사또에게 범죄 사실을 알려 주어서 체포해 올 수는 있었다.
김삿갓은 그런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날 중으로 황주 고을에 두 명의 형사 포졸을 보내면서
백창수 사또의 이름으로 황주 고을 사또 앞으로 다음과 같은 수사 협조전을 보냈다.
94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4
가짜 암행어사 김삿갓의 명판결
저희 수안 고을에서는 수 일 전에 산적의 두목놈을 체포했사온데 그 자의 자백에 의하면, 귀 고을에 살고 있는 "박용택"이란 자가, 산적의 일당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적을 일망 타진 하기 위해서는 박용택이란 자를 응당 취조해 보아야 하겠사오니, 황주 수령께서는 그 점을 깊이 양해하시와, 백용택을 체포해 올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하여 주시옵소서.
수안고을 군수 백창수 올림.
박용택을 난데없는 "산적"으로 몰아 붙인 것은, 그 자가 워낙 지능범으로 판단 되기에 엉뚱한 올가미를 씌워 가지고 범죄 사실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하려는 김삿갓의 깊은 계교가 숨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사 협조문을 받은 황주 고을 사또는 산적을 잡아 가고 싶다는데, 허락을 아니 해줄 턱이 없었다.
그리하여 수안에서 파견된 형사 포졸은 박용택을 쉽게 체포하는 동시에, 김삿갓의 당부대로 가택 수색도 철저하게 하였다.
가택 수색을 해보니 박용택의 집에서는 현금 1천냥과 금가락지 두 개가 나왔다.
형사 포졸이 박용택을 끌고 올 때, 현금과 패물도 장물 (臟物)로 압수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삿갓은 조사관으로 변장하여, 압수해 온 장물을 검사해 보고 박용택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네 놈은 역시 산적의 일당임이 틀림없구나! 이 돈과 패물은 양민에게 강탈해 온 장물이 틀림없으렷다!"
박용택은 "산적"이라는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소인더러 산적이라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을 하시옵니까 ?"
"이놈아 ! 능청은 그만 떨고, 사실대로 말하거라. 우리는 지금 산적의 두목을 체포해 왔는데, 그 놈의 자백에 의하면, 네 놈은 산적놈들의 장물 아비 라는 것이다.
산적 두목놈이 분명히 그렇게 말을 하였는데, 너는 그래도 아니라고 우기겠느냐 !"
박용택은 산적의 누명을 쓰게 된 사실을 알고,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산적으로 몰리는 날에는 목숨이 남아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궁리를 하더니 문득 머리를 들며 말한다.
"산적의 두목이 소인을 자기의 부하라고 말했다면, 그 두목놈과 소인을 대질 시켜 주시옵소서. 그러면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 아니옵니까 ?"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인지라,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두목놈과 대질을 시켜 주겠다. 그러나 너희 집에서 이미 많은 장물이 나왔지 않느냐. 그것들은 네 놈이 산적으로, 남의 물건을 강탈한 증거품이다.
이와같이 많은 증거품이 나왔는데, 네 놈은 그래도 산적이 아니라고 발 뺌 하려느냐 ! "
하며, 박용택이 범죄 사실을 자기 입으로 털어놓게 하려고 자꾸만 산적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박용택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못한다.
"이놈아 ! 왜 대답을 못하느냐. 네 놈은 역시 산적이 틀림없으렷다? "
박용택이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소인의 집에서 패물과 돈이 나왔다고는 하오나, 그것을 가지고 소인을 산적으로 몰아 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
"네 놈이 산적이 아니라면 이런 패물과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
"소인이 가지고 있는 패물과 돈은 모두 출처가 분명한 것 이옵니다. 돈과 패물의 출처를 아신다면, 소인을 산적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게 될 것입니다. "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박용택이 자기 발로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말했다.
"허기는 출처가 분명하다면 남에게 빼앗아 온 물건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너는 너희 집에서 나온 패물과 돈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단 말이냐 ?"
박용택은 그제야 살아날 길을 발견한 듯,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말한다.

"소인이 가지고 있는 패물의 출처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어르신네께서 물으시는 대로, 하나하나 출처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묻는대로 하나하나 명백히 대답해 보거라. 만약 추호라도 거짓이 있으면 결단코 용서치 않으리로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소인이 거짓말을 했다가는 산적으로 몰려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어찌 거짓 말씀을 아뢸 수 있으오리까 ?"
"음 ... 단단히 다짐을 했으렷다! "
김삿갓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아 놓고, 금가락지 두 개를 박용택의 눈앞에 들이 밀며,
"여기 금가락지 두 개가 있는데, 이것의 출처를 소상히 아뢰어라!" 하며 물어 보았다.
박용택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거침없이 대답했다.
"두 개의 금가락지는 모두 어머니의 회갑 때, 선물로 받은 물건 이옵니다.
일곱 돈짜리 금가락지는 며느리의 친정 사돈 댁에서 보내준 것이옵고, 닷 돈짜리 금가락지는 시집간 딸년이 할머니에게 회갑 기념으로 갖다 준 선물이옵니다."
"음 ...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들을 이 자리에 불러다가 다시 물어 보아도 너는 그대로 말할 수 있겠느냐."
"네, 사돈 어른과 나의 딸년을 직접 불러 물어 보신다면 더욱 확실하게 될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데 부디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금가락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겠다.
그건 그렇다 치고, 천 냥이라는 거금이 나왔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나온 돈이냐 ?"
금가락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김삿갓이 알고 싶은 것은 돈 천 냥의 출처였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박용택은 일순간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얼른 대답을 하지 못 한다.
김삿갓은 이때다 싶어 날카롭게 추궁했다.
"금가락지의 출처는 분명 한데, 돈 천 냥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
이 돈은 산적질로 벌어들인 돈이 분명한게로구나 !"
"아, 아니옵니다. 그런게 아니옵니다."
"그런게 아니라면 이런 거금은 어디서 생겨난 돈이란 말이냐 !"
"그 돈은 .... 친구에게 빛을 주었다가 돌려 받은 돈이옵니다."
박용택은 산적으로 몰릴 것에 겁이나서 마침내 실토를 해버렸다.
그러나 김삿갓의 추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친구에게 빚을 주었다가 돌려 받은 것이라면, 그 친구의 이름은 뭐라고 하느냐 ?"
이미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박용택은 김삿갓의 추궁에 할 수 없이 대답했다.
"빚을 얻어 갔던 친구는 양상문이라 하옵니다." 하고 모기 소리로 대답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박용택에게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뭐야? 그러면 차용 증서를 미끼로 양상문이란 친구에게 돈을 두 번씩이나 받아 먹으려는 날강도 같은 놈은 바로 네 놈이었단 말이냐 ?"
박용택은 감추어 두었던 사실이 드러나자, 몸을 벌벌 떨며 대답을 못한다.
김삿갓은 박용택의 범죄 행각을 밝혀 놓고 나니, 매우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를 배반한 네 놈은 산적보다더 더 무서운 놈이구나. 너는 바른대로 이실직고를 하여,
죄 값을 달게 받아야 할것 이다!"
백일하에 지은 죄가 드러나자 박용택은 몸을 떨다가, 별안간 땅에 넙죽 엎드리며 눈물로 호소한다.
"나으리!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하겠사오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놈아! 용서를 빌려거든 차용 증서부터 내놓아야 할 게 아니냐 ! "
박용택은 호주머니에서 양상문이 써 준 차용 증서를 내놓으며 다시 한번 호소한다.
"나으리! 돈에 눈이 어두워 친구를 배반했던 소인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 주옵소서."
차용 증서를 받아 보니, 그것은 양상문이 써 준 천 냥짜리 차용 증서임이 분명 하였다.
김삿갓은 차용 증서를 형리에게 건네 주며 당부를 하였다.
"이 차용 증서를 양상문이라는 사람을 찾아 내어 돌려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사또 어른께도 취조한 전말을 소상하게 품고하여 박용택에게는 되도록 관대한 처분을 내리도록 말씀 드리시오."
"어르신께서 직접 품고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오. 이 사건은 이미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므로, 나는 갈 길이 바빠 사또께 인사도 여쭙지 못하고 이대로 떠나야 하겠소. 사또전에 그 말씀도 아울러 품고해 주시오."
김삿갓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아무 미련도 없이 관아를 총총히 나왔다.
그리고 다시 삿갓을 깊숙히 눌러 쓰고 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 속이로구나. 내가 불현듯 행방을 감추어 버렸으니, 수안 사또는 나를 끝까지 진짜 암행어사로 알고 있을 테지? 하하하..."
한바탕 껄껄 웃음을 웃으며 수안 읍내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온 김삿갓의 기분은, 명쾌, 상쾌, 통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95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5) ·
떠도는 구름, 흘러가는 물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푸른 산 뿐이지만, 산 위에는 하얀 구름이 한가롭게 떠돌고,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절경을 천천히 음미하던 김삿갓,
(물은 흘러도 앞을 다투지 않고, 구름은 떠 있어도 서로 뒤지려고 하건만, 어째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웬놈의 말썽이 그렇게도 많을까.)
수안 고을에서 만난, 양상문과 박용택 사이에 벌어진 계쟁(係爭)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일어났다.
욕심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다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김삿갓은 풀밭에 네 활개를 쭉펴고
누워, 욕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산과 구름, 골짜기를 지나는 물소리의 자연 그대로를 즐기고 있었다.
그대로 누운채로 자연의 빛과 소리를 즐기던 김삿갓,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석양에 노을이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으 흠 ! " ...
지지개를 잔뜩 킨 김삿갓, 자리에서 일어나 도포 자락을 툴툴 털어내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해가 더 저물기 전에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노라니, 문득 저 멀리 아득한 산 위에서 누군가 부리나케 이쪽으로
달려 내려오며, 연실 큰 소리로 외쳐댄다.
"여보시오, 삿갓 쓰신 어르신네! 나 좀 보십시다!" ...
"누가 나를 부를까 ?"
김삿갓은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 보았다.
이윽고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사람을 보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양상문이었다. 김삿갓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아니, 노형이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그러자 양상문은 죽은 아버지를 만난 듯, 김삿갓의 두 손을 힘차게 움켜 잡는다. "은인을 만나 뵙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달려왔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 말을 듣고 보니 알겠소이다. 노형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이 먼데까지 나를 쫒아오셨구려?"
"선생은 무슨 말씀을 ....패가망신하게 된 저를 살려 주신 선생님을 뵙는데, 멀고 가깝고가 어디 있사옵니까? "
"누구는 친구를 속여먹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노형은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셔서 여간 고맙지 않소이다 ...그래 , 문제의 차용 증서는 돌려 받으셨소이까 ? "
"아까 전에 동헌에 불려 들어가 사또 어른으로부터 차용 증서를 돌려 받고 나서, 곧장 선생의 뒤를 쫒아오는 길이옵니다. 만약 선생이 도와 주지 않으셨다면,
저희 집은 완전히 망해 버렸을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양상문은 허리춤에서 돈 꾸러미를 꺼내면서 다시 말한다.
"사람이 은혜를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선생 덕분에 천 냥이라는 돈을 번 셈이니,
이것은 몇 푼 안되지만, 노자에 보태 쓰시옵소서."
양상문의 성의는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까지 나를 따라와 주신 성의만으로도 보답은 충분합니다. 고마운 일이지만 이 돈은 못 받겠소이다. 노형은 천 냥이나 벌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생긴 돈은 한푼도 없지 않소이까? "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은혜를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
"이 돈을 받으면 나는 박용택이 보다도 더 나쁜 놈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워낙,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냥 넣어 두시구려."
"그러시다면 저의 성의를 생각하셔서 절반만이라도 ..... "
"절반이 아니라, 한푼도 받을 수가 없어요."
"너무 그러시면 제가 성의를 무시당하는 것 같아 오히려 섭섭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남의 성의를 너무 완강하게 거절 하는 것도 오히려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노형의 성의를 생각해, 정표로 엽전 한 닢만 받기로 합시다." 그러면서 양상문이 내민 엽전 꾸러미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 한 닢을 받아 들고 나머지는 도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양상문은 아쉬워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밤은 우리 집에 가셔서 주무시면 어떻겠습니까? "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은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 떠나온 길을 되돌아 갈 생각은 없소이다. 내 걱정은 말고, 노형이나 너무 늦기 전에 댁으로 돌아가시구려."
"저는 조금 늦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선생은 오늘밤을 어디서 보내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 근방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가가 없으면 어디쯤에나 있는 토굴이라도 하나 찾아 보지요."
"옛? 토굴에서 주무시겠다고요? "
양상문은 놀라더니 이내 무슨 생각이 나는지, 손뼉을 마주치며 말을 한다.
"아 참! 좋은 곳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오리쯤 산속으로 들어가면 움막 같은 친구 집이 있습니다.
제가 모시고 갈테니, 선생은 오늘밤 저와 함께 그 집에서 주무시도록 하십시다."
어떤 방법이라도 김삿갓으로 부터 받은 은혜를 갚지 못해 애타는 태도가 간절한 양상문 이었다.
"그러시다면, 노형의 성의를 고맙게 받고, 그 집에 가서 신세를 지기로 하겠습니다."
기뻐하는 양상문과 함께 산속으로 얼마간 들어가니,과연 움막 같은 집이 하나 있었다.
40 가깝게 보이는 그 곳 주인의 이름은 오지환(吳志煥)이라 하는데, 산속에서 숯을 구워 팔며, 혼자 살아 간다는 것이었다.
지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마음이 어찌나 착한지, 김삿갓과 양상문을 백년지기처럼 맞아 주었다.
"여보게 지환이! 밤중에 찾아와서 미안하네, 저녁을 지을 쌀은 있는가? "
양상문이 그렇게 물어 보자, 그는 웃으며 대답한다.
"쌀은 없지만, 감자는 넉넉하게 있습니다그려."
"나에게 돈이 있으니, 어디서 쌀을 좀 구해 올 수 없을까? "
"아따 , 형님도! 감자면 됐지, 꼭 쌀을 먹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소."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와서 그러네."
"이러나저러나 쌀을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상문 형님 말씀대로 귀한 손님이라면 오늘밤은 감자로 때우고, 내일 아침에는 토끼 불고기를 대접해 드립시다그려."
"토끼는 쉽게 잡을 수 있는가 ? "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토끼 굴에 가면 토끼는 얼마든지 잡아 올 수 있어요."
이윽고 세 사람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를 방 한복판에 놓고 저녁 대신으로 먹기 시작하였다. 반찬이라곤 김치 한가지 뿐이었지만, 김치와 감자의 맛의 조화가 기가막혀서, 혀까지 목구멍으로 넘어 갈 지경이었다. 워낙 시장했던 탓도 있었지만, 어떤 산해진미 보다도 맛이 좋았다.
"감자 맛과 김치 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요 ?"
김삿갓이 이렇게 말하자, 지환은 싱그레 웃음을 지으며,
"시장이 반찬이라더니,손님은 어지간히시장하셨던 게로군요. 그렇지 않아도 감자와 김치는 얼마든지
있으니, 양껏 잡수세요."
그러면서 눈 깜빡할 사이에 감자 한 알을 먹어치우며,
""진수성찬이란 것이 별게 아닙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세상에 진수성찬이 아닌 것이 없더라고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본인은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김삿갓은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느낌이 들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매 끼니를 진수성찬으로 먹으면서도,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음식투정을 하기가 일쑤다. 입이 사치스럽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들은 일은 없고, 입만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음 ..음식 맛이 좋고 나쁜 것은 요리의 재료와 솜씨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로구나!)
96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6)
남하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
남자가 사노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
김삿갓은 감자를 먹어 가며, 주인에게 이런 말도 물어 보았다. "이 깊은 산중에서 날마다 숯만 구으며 살아가려면, 때로는 외로움도 느끼시겠구려."
지환은 당치 않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한다. "산에는 산짐승 친구들도 많은데다, 숯을 굽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워내는 숯이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비록 힘이 드는 일이기는 해도 여간 기쁘지 않은걸요."
김삿갓은 숯을 굽는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즐겁게 해 나가는 지환의 생활상을 듣자,
자기 일에 아무런 사명감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의무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지환은 스스로 만든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자리 움막은 천정이 너무 낮아 김삿갓은 무심코 일어서다가 천정에 이마를 쪼아 붙였다.
"아얏 ! ..."
(하늘은 한없이 높은데, 이 집 천정은 왜 이다지도 얕은고 ! ) 김삿갓은 이마를 쓸며 자신도 모르게 익살을 부렸다.
불편한 것은 천정만이 아니었다. 콧구멍만한 좁은 방에서 세 사람이 함께 자려니까, 아무리 가로 세로 누워도 다리를 펴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방이 워낙 비좁아 불편하시겠지만 하룻밤 참고 지냅시다.
지내 놓고 나면 이런 일도 좋은 추억이 되실 것이오."
주인은 워낙 낙천가인지라, 모든 일을 좋게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은 김삿갓에게 미안스러운지,
"선생을 편히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고 말을 한다.
"아무리 불편하기로 토굴보다야 낫지 않겠소이까?"
김삿갓은 짐짓 익살을 부려 보였다.
주인과 양상문은 눕기가 무섭게 코를 요란스럽게 곤다.
그러나 김삿갓은 오금을 못편 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잠이 살짝 들었다가 깨었는데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아, 잠 들기를 단념하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뒷산에 올라오니 조그만 정자가 하나 있었다.
정자에 올라 앉아 산아래 어둠속의 수풀과 이를 환히 비추는 달구경을 하는데 뱃 속 창자가 주린 소리를 낸다.
김삿갓,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천고만리 불거두天高萬里 不擧頭
하늘은 높아 만리 이건만 머리를 들 수 없고
지택천리 불선족 地澤千里 不宣足
땅은 천 리로 넓건만 다리를 펼 수 없네.
오경등루 비완월五更登樓 非翫月
오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구경 때문은 아니오
삼조피곡 불구선三朝避穀 不求仙
사흘을 굶은 것은 신선이 되려 함도 아니다.
다음날 아침, 오지환은 마당에 숯불을 피워 놓고 토끼 불고기를 구워준다. 김삿갓이 토끼 고기를 먹어 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토끼 고기는 노린내가 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불에 구워 먹어 그런지 쇠고기와 다름이 없구려."
양상문은 고기를 맛있게 먹어가며,
"저 역시 토끼 고기는 처음 먹어 보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여보게, 지환이! 이런 때에는 술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디서 술 좀 구해 올 수 없을까?"
"원, 형님두! 이런 심심산중에서 술을 어디서 구해 옵니까?" 오지환은 양상문에게 넌즈시 구박을 주다가,
별안간 무엇이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친다.
"아 참! 술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납니다.
나는 워낙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러나 한 5년 전 쯤인가?
산머루 한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게 있어요.
지금쯤은 술이 되었을 것 같으니 갖다 먹기로 합시다."
"이 사람아!
그런게 있으면 진작 가져 올 일이지 왜 잠자코 있었는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지요."
김삿갓은 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어 두었다는 머루술 이라는 말을 듣자, 대뜸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아닌게 아니라 오지환이 가져 온 머루주의 맛은 기가막히게 향기로웠다. 양상문도 술을 마셔 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김삿갓에게 물어 본다.
"선생! 나는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보기는 50 평생 오늘이 처음입니다. 선생 입에는 어떻습니까?"
"내 입이라고 노형의 입과 다를 것이 있겠소?
이 술을 마시니,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오는 것만 같구려."
오지환은 그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한다.
"5년 전에 장난삼아 땅속에 묻어 두었던 머루가 오늘날 두 분을 그렇게도 즐겁게 해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본디 좋은 술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오.
그러기에 옛날 부터,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데는 술이 제일이요. (寬心應是酒 : 관심응시주 :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게 없다) (遺興莫過詩 : 유흥막과시) 라고 했다오."
"그것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흘이든 나흘이든 이 술이 바닥이 날 때까지 우리 집에 그냥 머물러 계십시오.
술 안주는 노루 고기든 꿩 고기든 입맛대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흥이 절로 돋는 소리다.
"선생! 이 좋은 술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상문 조차 보채는 바람에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좋도록 합시다그려. 나는 워낙 오라는 데가 없는 몸이니 뭐가 급해서 떠나겠소이까?"
김삿갓과 양상문은 오지환네 움막에서 사흘 밤을 더 묵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술이 아직도 더 남아 있으니까. 아예 바닥을 내고 떠나도록 하시죠." 오지환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호소하듯 만류한다.
그러자 양상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람아! 밑술을 조금 남겨 두어야 우리가 또 오게 될 게 아닌가."
김삿갓도 웃으며 말했다.
"술이 아무리 좋기로 형공兄公의 우정만이야 하겠소이까,
하룻 밤 자고 떠나려던 노릇이 나흘이나 묵은 것은
형공의 정성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소."
그것은 사실이었다.
술이 좋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고,
사흘 동안이나 묵은 것은 지환이라는 산사람山人의 우정을 고맙게 받아 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지환도 무언가 느껴지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굳이 떠나신다면 억지로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오는 가을부터는 해마다 머루주를 잔뜩 담아 놓고, 두 분이 다시 찾아와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우정이었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다.
세 사람이 삼거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자,
양상문은 김삿갓의 옷소매를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헤어지면, 선생을 어느 세월에나 또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김삿갓은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이 밀려 왔지만,
말만은 예사롭지 않게 답했다.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이라는 옛말이 있지 않소?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설사 못 만나는 한이 있어도, 노형이 베풀어 주신 엽전 한 닢만은 죽는 날까지 신주처럼 품에 지니고 살아가겠소이다."
"......."
양상문은 대답을 못하고,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리 사라지는 김삿갓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지환과 함께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97회로~~
97회 결
방랑시인 김삿갓 (98)
주막, 무하향에서 만난, 낯선 사내 백종원
김삿갓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문득 문이 벌컥 열리며 4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 오더니, 대청 마루에 털썩 걸터앉으며 푸념조의 말을 한다.
"아주머니! 나 술 한잔 주소. 제~길헐!
계집년들 등쌀에 사람이 살 수 있어야 말이지."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주모가 얼른 술을 따라 주며 묻는다.
"계집년들이 뭐가 어쨌다고 혼자 화를 내시오?"
김삿갓은 그 기회에 사나이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나이는 사십이 되었을까 넘었을까,
몸이 우람하고 상투가 큼지막한데다가
이마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아울러 사내의 눈꼬리가 찢어져 올라 간 것 으로 보아,
결코 순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나이는 술 한잔을 쭈욱 들이키고 술잔을 술상위에 탁 내려 놓으며, "계집년 얘기는 말도 마시오.
그 년들 때문에 이제는 내가 신물이 날 지경이라오."
그리고 나서 김삿갓의 얼굴을 잠시나마 멀거니 바라보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 보이며,
"아니 이거, 자네는 천마산에 사는 이 서방 아닌가?
여보게, 이거 얼마 만인가?"하고 외치며,
김삿갓에게 다가와서 대뜸 손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형이 사람을 잘못 보셨소이다.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김 서방이오." 그러나 상대방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끼 이 친구야! 옛날 친분을 생각해서도 자네가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백종원白鐘元일쎄, 자네가 성까지 바꿔 가면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면 부지의 사나이가 얼토당토 않은 고집을 부리자 김삿갓은 매우 난처한 심정이었다.
김삿갓은 백종원이라는 사내에게 빙그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마 이 서방이라는 친구가 나하고 어지간히 닮은 모양이구료. 그러나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틀림 없는 김서방입니다.
얼굴이 비슷해서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다른 데가 있을 것이오.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은 얼굴을 일부러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백종원이라는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을 면구스러울 정도로 요모조모 살펴 보더니, 문득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내가 노형에게 큰 실수를 했소이다.
내 친구는 왼쪽 뺨에 커다란 점이 있는데, 노형의 뺨에는 검은 점이 없군요. 내가 실수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그러나 저러나 노형은 어쩌면 내 친구와 얼굴이 그렇게도 닮으셨소. 그래서 그런지, 노형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가 않구려. 그런 뜻에서 한 잔 합시다."
어쩐지 행실이 수상하다 싶었지만, 김삿갓은 백종원이 내민 술잔을 물리 칠 생각은 없었다.
"좋소이다. 나는 비록 이 서방은 아니지만 친구가 별게 있겠소. 함께 어울리면 친구지..."
"옳으신 말씀이오. 김서방이나 이서방이나
모두가 사람이기는 매일반일 것이오. 하하하."
백종원은 호탕하게 웃고는 문득 주모를 쳐다보며 수작을 부린다. "주모는 성을 뭐라고 하오? 설마 성이 주가는 아니겠지?"
주모는 백종원에게 가볍게 나무라는 어조로 ,
"여보세요, 성을 갈면 개자식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누구를 개자식으로 만들려고 그런 농담을 하시우."
"주가가 아니란 말이구려. 그러면 진짜 성은 뭐라고 하오?" "내 성은 천씨千氏라오. 본관은 영양潁陽이구요."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한다.
"천씨..라면,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올린 사암思庵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인가 보구려?"
주모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어머나 ! 손님은 우리 가문의 내력을 잘도 아시네요."
그러나 백종원은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씰룩 거리면서 대뜸 시비조로 나온다. "주모는 왜 그렇게도 건방지지?"
"성이 뭐냐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뭐가 건방지다는 거예요?"
"왜 건방지다는 것인지 몰라서 묻나? 내 성이 백가인데, 주모의 성은 내 성보다 더 열 갑절이나 높은 천가라고 하니, 그런 건방진 성이 어디 있어?
오늘 부터는 "千"자의 대가리를 툭 쳐버리고 "十哥" 라고 해요. 그래야만 격에 어울릴 거야. 내 말 알아듣겠지!"
이렇게 백종원이라는 사내가 주모의 성을 가지고 생트집을 잡는 바람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백종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이라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피동적으로 타고나는 것인데, 남의 성을 가지고 나무라면 어떡하오?
천가면 어떻고 백가면 어떻소?
사람은 다 마찬가지인 걸 ....
나는 그보다도 노형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백종원은 술을 한잔 들이키고 나서 반문한다.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오 ? "
"노형은 아까 이 집에 들어설 때에 계집년들 등쌀에 신물이 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소? 어떤 연유로 그런 말로 화를 냈는지, 그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그러자 백종원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 얘기 말인가요? 그 애기라면 창피스러워서 말도 하고 싶지 않소이다."
"말을 할 수 없다니까 더욱 듣고 싶구려. 오가다 만난 우리 사이에 창피스러울 것이 뭐 있겠소. 이왕이면 기탄 없이 들려 주시구려."
그러자 백종원은 문득 생각이 달라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기는 사내들이란 너 나 없이 모두가 똑같은 동물이니까, 노형도 내 이야기를 들어 두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니 잘 들어 보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백종원은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를 한집에 데리고 살기 때문에,
두 여인들 간에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기 일쑤였다.
오늘도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가 서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년 저년 하며 대판 싸우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두 마누라가 서로 싸우는 꼴을 본 백종원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편을 나무라고 다른편을 두둔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백종원은 생각다 못해 작은 마누라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건넌 방으로 끌고 가며 이렇게 호통쳤다.
"이년아! 너 같은 계집년은 숫제 죽여 버려야겠다."
작은마누라를 야단치며 끌고 가야만 대의 명문이 설 것 같아서 였다.
그러나 정작 작은마누라를 건넌방으로 끌고 건너왔을 때,
젊은 계집이 탐스러운 젓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을 보자 백종원은 별안간 욕정이 솟구쳐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작은마누라를 모두 벗겨 놓고 낫거리를 정신없이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방문이 홱 열리더니 큰마누라가 비호같이 덤벼들어 백종원의 등덜미를 움켜잡고 끌어 당기며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다.
"이 잡놈아! 저년을 이런 식으로 죽여 주려거든,
왜, 나를 먼저 죽여 주지 않고, 저년 부터 죽여 주느냐!"
(이, 오라를 칠 놈아 ...)
99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9)
부처님 같은 김삿갓, 보살 같은 주모
김삿갓과 주모는 그 말을 듣자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하하하, 두 마누라를 한 집에서 거느린다는 것은 보통 예삿일이 아닌가 보구려."
주모도 웃어가며 덩달아 말한다. "호호호, 이왕이면 공평 무사하게 큰마누라도 죽여 주지 그랬어요?"
"에이 여보시오, 내가 물개인 줄 아시오?"
그 소리에 방안에는 또다시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이 백종원에게 물었다. "그래, 작은 마누라 배 위에 엎어져 있던 노형의 뒷 덜미를 낚아 채, 자기 먼저 죽여 달라는 큰마누라는 어찌 하셨소?"
그러자 백종원은 손을 휘휘 내 저으며 대답한다.
"다 늙어빠진 마누라를 무슨 재미로 죽여 주오?
큰마누라한테 도대체 흥미가 없어, 부득이 작은마누라를 얻어 오게 된걸요."
그러자 주모가 정색을 하며 백종원을 나무란다.
"그건 너무 하시우. 작은마누라만 죽여 주고 큰마누라는 돌아보지도 않게 되면 큰마누라가 얼마나 원통 하겠어요?"
"워낙 많이 써먹어서 온통 닳고 닳아 더는 못 쓰게 되어 버린 걸 어떡하냐는 말이오."
주모가 화를 내며 말한다. "모르는 소리 그만 하시오. 여자는 화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화로는 평소에는 냉랭하지만 숯불을 활짝 피워 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뜨겁게 달아 오르는 법이에요."
김삿갓은 주모의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하, 주모! ..남자가 화로와 같다는 소리는 들어 보았으나, 여자가 화로 같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말이오."
그러자 주모와 백종원이 거의 동시에 김삿갓에게 물었다.
"남자를 어떻게 화로에 비교한다는 말이오?"
김삿갓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남자의 성정性情을 연령年齡별로
불에 비유해 볼 테니 잘 들어 보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대 남자는, "장작불"
경험이 많지 않아, 빨리 타고 쉽게 꺼진다.
30대 남자는, "연탄불"
경험도 적당히 쌓여서 제법 오래 탄다.
40대 남자는, "담뱃불"
불은 불인데, "쪽쪽" 빨아 줘야 겨우 불 같이 보인다.
50대 남자는, "화롯불"
속을 헤쳐서 찾아 보아야 겨우, 불을 발견 할 수 있다.
60대 남자는, "번갯불"
불은 불 인데, 쓸 수 없는 불이다.
70대 남자는, "반딧불"
불도 아닌 것이 불인 척 한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김삿갓의 말이 끝나자 백종원은 대굴대룰 구르며 배를 움켜 잡았다. 주모 또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혀 배꼽을 잡았다.
"노형도 대단하시오!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백종원은 기분 좋게 웃으며 김삿갓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잡담을 한없이 주고 받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잠자리가 걱정된 김삿갓이 주모에게 부탁을 했다. "주모! 나 오늘밤 이 집에서 좀 자고 갈 수 없겠소?"
그러자 주모가 대답한다. "방은 하나밖에 없어서 안 되겠고, 술청이라도 괜찮다면 자고 가시구료."
김삿갓은 좋은 방 나쁜 방을 가릴 형편이 못된다.
"술청이라도 좋으니 재워 주기만 하시오. 그런데 술값은 얼마죠? 우선 술값부터 치루고 봅시다."
김삿갓은 주모의 말대로 전대 속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백종원은 김삿갓의 전대 속에 돈이 두둑이 들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눈 빛이 이상하게 희번덕 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백종원에게 말을 건넨다. "노형도 집에 돌아가 보았자 어느 마누라도 환영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오늘밤은 차라리 여기서 나하고 같이 자는 것이 어떻겠소?"
백종원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뒤로 훌렁 자빠져 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마누라 등쌀에 나도 갈 데가 없는 몸이오."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으면서 갈 데가 없다니,
그야말로 졸지에 처량한 신세가 되었구료."
"그러니까 나도 여기서 자고 가야 되겠소."
"잘 생각하셨소. 서방 귀한 줄을 알게 하려면 가끔 외박도 필요한 것이라오."
김삿갓은 그런 농담까지 해가며 등잔을 끄고 누워 버렸다.
새벽 어스름한 시각에 김삿갓은 웬지 몸이 서늘해 오는 기분이 들어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백종원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이상한 예감이 들어 허리를 만져 보니,
간밤에 분명히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가 없어졌다.
(앗! 이 사람이 돈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단 말인가?)
그러나 김삿갓은 백종원이라는 친구가 전대를 훔쳐 갔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술까지 나눠 먹은 그 친구가 설마 돈을 훔쳐 가기야 했을라구!)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들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전대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전대는 보이지 않았다.
더우기 의심스러운 것은 백종원이 새벽에 감쪽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아주 몹쓸 사람이구나.)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주모가 방문을 열고 내다 보며 묻는다.
"손님은 아까부터 무엇을 찾고 있어요?
무언가 없어진 게 있어요?"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가 간밤에 감쪽같이 없어졌군요."
그 소리에 주모는 깜짝 놀라며, "에구머니 ! 전대가 없어지다뇨 ? "
그리고 사방을 두루 둘러보다
"같이 자던 백씨라는 사람은 어디 갔어요?"하고 묻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군요."
"옛? 그렇다면 전대는 그 사람이 훔쳐 간 것이 분명해요.
어쩐지 인상이 좋지 않은데다, 큰마누라가 어쩌니 작은마누라가 어쩌니 하면서 씨가 먹히지 않는 허풍을 떠는 것이 수상하다 싶더니 역시 그 놈이 도둑놈이었군요. 그런 놈을 내 집에서 재웠으니 아이 무서워라."하면서 주모는 몸서리 조차 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러나 저러나 돈을 몽땅 도둑맞았으니 어떡하죠?"하고 걱정의 말을 한다.
"돈 좀 없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본디 사람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일진데, 그 친구가 그런 것을 모르고 인정머리 없이 도둑질을 했으니 나는 잃어 버린 돈이 아쉽다기보다도 인정을 배반한 그 친구의 소행이 슬프기만 할 뿐이오."
"손님은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나서도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계시네요 .. 빨리 관가에 가서 고발을 하세요.
그런 놈은 당장에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해요."
"고발을 한다고 그 친구가 쉽게 잡히리오?
또, 잡아서 물고를 내게 한들 뭐 하겠소?"
그러자 주모가 한마디 더하는데 "관가에 고발도 안 하겠다. 돈은 한 푼도 없겠다.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이에요?"
"어떡하긴 무얼 어떡하오. 그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니겠어요?"
"이 양반 듣자 하니, 계속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있네!"
주모가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한다.
김삿갓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부처님 이고 보살님이고 간에, 주모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무슨 부탁인데요?" "내가 돈은 없어도 길을 떠나기 전에 아침을 먹어야 하겠소. 도와주는 셈치고 아침이나 한 그릇 공짜로 먹여 주시오."
"손님은 참말로 딱한 양반이시네. 내 집에서 자고 난 손님을 설마 굶겨서 보낼까 봐 걱정이세요? 곧 아침을 지어 올 테니 편히 앉아 기다리세요."
이렇게 아침을 얻어먹은 김삿갓이 다시 길을 떠나게 되자,
주모가 얼마간의 돈을 내밀며 말한다.
"이거 몇 푼 되지 않지만 가지고 떠나세요.
길을 떠나려면 돈이 전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에요."
김삿갓은 주모의 인정에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남의 돈을 훔쳐간 친구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인정인가.
김삿갓은 감격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돈은 못 받겠고, 보살같은 아주머니의 인정만은 고맙게 받아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100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00)
율곡, 동기童妓 유지柳枝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술집 무하향을 나온 김삿갓은 구월산을 향해 가면서 웬일인지 마음이 지극히 허전하였다.
그런 탓인지 주위의 산천 경계를 아무리 살펴 보아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호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마음이 이토록 심란해 진 것일까?)
돌아보건데 어제 보던 산천 초목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을 리가 만무하다. 산도 어제 보던 그 산이요, 물도 어제 흐르던 그 물이다.
어제만 해도 그처럼 아름다워 보이던 산천 초목이었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직 호주머니가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김삿갓은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을 느낀 자신의 인격이 치사스럽게 여겨져 견딜 수 없었다.
(아, 김삿갓이라는 자가 이렇게 치사스러운 인간이던가? 그런 주제에 어떻게 방랑 걸인으로 주유 천하를 하겠다고 장담하고 나섰더란 말인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앉아 한참을 궁리하던 김삿갓은 마침내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래! 무하향을 떠나올 때 주모에게 말을 한 것처럼,
전대에 들었던 돈은 내 돈이 아니었어! 돈 이란 본디, 돌고 도는 것 아니던가? 영원한 내 것도 없고, 영원한 남의 것도 아니지... )
김삿갓의 생각이 이에 이르자 마침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김삿갓이 황주黃州. 봉산鳳山. 신천信川. 안악安岳 등을 거쳐, 구월산九月山이 있는 은률殷栗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계절은 어느새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었다.
황해도는 워낙 가는 곳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이를 두루 살펴보다 보니 걸음이 더뎠던 것이다.
구월산은 황해도의 주봉을 이루는 명산이다. 그 주변에는 신천, 안악, 은률, 문화文化, 풍천豊川, 송화松禾, 장연長淵,장련長連 등 등.. 많은 고을이 산재하여 있는 것만 보더라도 구월산이 황해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산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사서史書에는 우리 배달의 민족의 시조인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은 구월산에서 태어나셨다는 설도 전해 온다.
[보탬 : 이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지역에 이런 전설이나, 유물 유적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황하중류 중심의 아시아 대륙의 정세가 내부적으로 통일되어 안정이 될 때마다, 특히 한나라 무정기에 들면서 북방민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이 시작되었고,
그 정벌전쟁에서 쫓긴 무장세력인 북방민족들이 한민족(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 발생지인 요하지역으로 넘어 들어오면서 단군조선의 주력들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4천리)해 오게 되는데
이때 만주를 거쳐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황해도 일대에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조상들의 주력이 정착하면서 그곳에 우리 민족의 독특한 문화유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고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탄생설화나 단군릉 등 유적들도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 만당]
이처럼 우리 민족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오는 구월산에는 많은 거석巨石문화 유적들이 널려 있다.
김삿갓은 구월 산성에 올라가 보았다. 성의 형태와 구조가 여간 절묘하지 않다. 거석으로 쌓아 올린 성의 모양은 커다란 배와 같은데, 둘레가 1만 5천 척에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산성이었다.
성안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여러 갈래의 물이 성밖으로 흘러 나갈 때에는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서 거창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단풍이 무성한 산길을 걸어 성안으로 들어와 보니,
구월산 상상봉이 아득한 하늘가에 높이 솟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는 단군 시대의 천제단天祭檀도 있었다.
김삿갓은 다행하게도 구월산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철에 찾아왔기 때문에 실감나는 구월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황해도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해주海州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어, 이번에는 발길을 해주 쪽으로 돌렸다.
해주 고을에 발을 들여놓자, 무엇보다도 김삿갓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거유巨儒 이율곡李栗谷과 동기童妓 유지柳枝와의 연정戀情 설화였다.
이율곡이 말년에 황해 감사로 와 있을 때, 유지柳枝라는 동기童妓를 사랑한 일이 있었다.
유지는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동기였지만, 그녀 역시 율곡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몸이 몹시 쇠약한데다가, 유지의 나이가 너무 어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몸은 범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범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율곡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율곡이 유지를 두고 읊은 시를 보면 그간의 심정을 족히 가름할 수 있다.
弱質羞低首약질수저수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수그려
秋波不肯回추파불긍회
추파를 보내도 받아들이지 못하네
空聞波濤曲 공문파도곡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건만
未夢雲雨臺미몽운우대
운우의 정은 풀지 못했네.
爾長名應檀이장명응단
너는 자라서 이름을 떨칠 것이나
吾衰闔己閉오쇠합기폐
나는 너무도 늙어 사내가 아니로다
國香無定主국향무정주
미인에게는 정한 임자가 없는 법
零落可憐哉영락가련재
장래에 영락할 것이 가련하구나
노쇠한 선비와 앳된 동기와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애간장이 타는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은 동기 유지를 두고 이렇게도 한탄하기도 하였다.
天姿綽約一仙兒천자작약 일선아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十載相知意能多십재상지 의능다
사귄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는데
不是吾兒腸木石불시오아 장목석
너도 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只緣衰弱謝芬華지연쇠약 사분화
다만 몸이 쇠해 사양했을 뿐이로다.
이렇게 율곡이 유지를 지극히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의 몸이 약해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은
사내로써는 너무나도 지독한 비극이었던 것이었다.
101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