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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dAeOUAiSIs?si=smKnAZjak4FFZkpx
개봉동 성당 윤성호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님께서는 "최승정 신부님께서 준비하신 귀한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잘 전달받으시고 다 함께 진심의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환영의 인사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시작기도를 하셨습니다.
사순이라는 시간은 파스카를 준비하는 시간,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인데, 구약의 부활이 파스카와 겹칩니다.
따라서 부활과 파스카를 준비하는 사순입니다.
사순절의 사순의 기간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성야 미사 전 까지를 의미 합니다. (사순시기의 주일은 제외한 6일 x6= 36일에 수, 목, 금, 토를 합한 40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목요일, 성금요일 전례는 굉장히 중요한 전례입니다. 전례상의 미사의 등급으로 설명하면
제일 높이 있는 미사는 부활 성야미사
그다음엔 성탄 밤미사인데 부활 성야미사와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미사가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전례라고 합니다.
일 년의 다른 미사들과는 다르게 꼭 참석해야 하는 미사이고, 성삼일 미사는 중요합니다.(성목요일, 성금요일, 부활 밤미사)
세속적으로 사순의 의미가 중요했던 경험을 하게 한 코로나 시기에도 처음에는 격리를 14일로 지정했습니다.
서양식 표현으로 격리하다는 말이 quarantine 인데, quadraginta(40;라틴어)
페스트가 유행일시 배가 정박했을 때 배안에서 내리지 못하게 한 뒤 40일 동안 관찰을 했을 시 격리하다는 의미에서 동사가 나왔습니다.
한데 그 기간이 너무 길어서 반정도로 줄이고, 좀 더 줄인 후 14일로 줄였고, 4자는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약 2주일 동안)
사순시기에 본래 40일 동안은 금육을 했고, 사순절 시작하기 전에는 서양에 경우 카니발을 했습니다.
그 유래는 라틴말 '카르네 발레(carne vale)'에서 왔는데 '카르네(고기)' '발레(안녕, 떠나보낸다)'라는 의미로 사순절 전에 고기를 먹고 사순절은 동안은 금육하였습니다.
또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사순절을 보내면서 고기대신 오징어나 문어를 튀겨 먹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포르투갈어로 템포랄레는 말에서 유래한 일본의 '덴뿌라' 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40'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유혹받으신 이야기,
- 이스라엘 민족들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헤맨 이야기,
- 모세가 40일 동안 기도하고 하느님께 십계판을 받은 이야기,
- 노아의 홍수 때 40일 동안 비가 내린 이야기,
- 부활한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승천하신 이야기,
-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는 이상한 임금을 피해서 40일 동안 도망간 이야기,
-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40일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진다고 전한 이야기,
- 모세가 카데슈에서 각 지파마다 한 사람씩 선별한 정찰대가 약속에 땅에서 40일 동안 정찰한 이야기.
성경에서 40은 부여하는 의미가 큽니다.
모세의 경우 120세에 죽었는데 그의 인생은 이집트에서 산 40살까지 삶, 이집트인을 죽이고 나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 40년간의 삶, 이집트 땅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가에서 죽는 40년간의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한 세대는 30년을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한 세대의 개념을 40년으로 보았습니다.
현재 UN에서는 노인의 나이를 80으로 늦춰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모세처럼 성인의 삶을 지난 노년 기간인 80 ~ 120까지 삶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잘 늙어감도 중요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등산할 때의 경우 오르막길에서도 보다 내리막길에서 사고가 잦아 조심히 내려가야 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처럼, 사제로서 영적으로 잘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 때 왜 하느님께서는 40일 동안 비를 내리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보시니 참 좋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카인과 아벨이 죄를 짓고 그다음 세대들의 죄,
성서적 의미로서 죄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인데,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은 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죄, 타락)
카인이 아벨을 때려서 죽인 죄(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죄, 폭력)
하느님께 인간이 저지른 수직적인 죄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수평적인 죄인 인간의 타락과 폭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물로 40일 동안 하늘에서 창들이 열리고 물이 쏟아지고 땅에 있는 샘들이 터져 올라오게 하시어 완전한 혼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의 죄가 세상을 혼돈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평안하지 않는 마음, 혼돈의 상태와 같을 것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물이 갖고 있는 죽음, 혼돈의 의미와 함께 정화의 기능이 있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는 의미와 우리 죄를 물로서 정화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서 주는 세례를 통해서도,
물을 붓는다는 상징성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믿고 하느님께로 찾아가 정화를 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유명한 두 인물 베드로와 유다의 경우에도
둘 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예수님을 부인한 똑같은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어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고 유다는 예수님의 용서를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는,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는 죄
인간의 죄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고 더 넓은데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죄에 유혹에 빠지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넘어서는 인간의 죄는 없다."
우리가 통회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화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는 얼마만큼 용서하실 수 있다?!
인간이 뉘우치는 만큼!! “용서하신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통회한 만큼...
고해소의 일화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신부님, 저는 나이가 많아서 죄지을 힘도 없습니다."
"그래도 말씀해 보세요. 제가 용서해드려야니까...."
"제가 죄지을 힘도 없다니까요?.."
"아, 그러면... 가십시오."
통회가 없으면 용서도 없는 것이라고........
우리가 일본을 용서를 못하는 것도, 우리가 완고해서가 아닌 어쩌면 일본에서 잘못했음을 먼저 말하지 않아서라고.....
노아의 홍수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정화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 "저거 가능할까?"라고 무서워하지 말고 백번이든 천 번이든 "나는 저 그리스도인의 삶을 따라서 살아갈 거야.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갈 거야." 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기에....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 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세상을 완성할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시어 온 세상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느님의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실현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마태오복음사가는 그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단지 예수님에 생애에서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을 때 이미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사건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본 우리의 구원 역사는 시간으로 보면 아브라함부터 시작되고 이스라엘 역사를 거쳐 예수님까지 그러한 붙임 안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실행하신 그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한 바로 그 이유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50장까지의 성조사입니다. 그 성조들의 모습은 나약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의 임금이 물었을 때도, 아비멜렉 임금이 물었을 때도 아내 사라에 대해.....
아내가 아닌 "누이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분 이런 사람들에게 딸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면서 이사악도 역시 아내 레베카를 "누이입니다." 하고 대답하여 그들 가문의 전통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약한 모습의 성조들은 그들 땅도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막펠라의 땅을 조금 사고 야곱이 스켐이라는 곳에 땅을 사는 것 외에는 양 떼를 몰고 다니며 풀이 보이면 그 땅주인에게 사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도 야곱과 에사우도 함께 있지 못하고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 후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 그곳에 재상이 되고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는데 야곱과 다른 형제들이 모두 이집트로 이주해 기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창세기가 끝이 납니다.
탈출기가 시작됩니다.
탈출기는 다소 암울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새로 임금이 된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다.라는 이야기가 탈출기 1장에서 나오게 됩니다. 요셉을 몰랐으니 파라오는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까?
누군가 신부님께 하느님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알아가고 있는 중이고 알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실거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 알 것 같았던 하느님의 모습이 1~2년이 지나면 깨지는 경험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도 그때그때 마다 신학들이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개의 복음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이나 신학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가고 있고, 또 우리 자신을 알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빙산이 떠 있는 부분이고, 그 아래에 더 많은 모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가 인디언에게 선악의 문제를 물었을 때,
자신 안에 착한 개와 악한 개가 있을 때 자신이 먹이를 많이 준 개가 이겼다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장 아껴야 할 것들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잘 가꾸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몰랐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늘어나자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보게 된 모세가 이집트인 한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세월이 너무 흐른 탓인지 이스라엘인들은 성조들의 하느님을 기억하였지만, 하느님을 잘 섬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모세 역시 호렙에서 양을 치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오너라." "내가 너희 성조들에게 주겠다는 그 땅으로 백성을 데려가라."
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다섯 번이나 거부하였습니다.(모세가 간이 부었습니다.)
화가 나신 하느님(히브리식 표현으로 '코가 빨개지셨다.') 말 못 하겠다는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 임금 파라오에게 보냈지만 파라오도 역시 거절합니다.
그 파라오에게 하느님께서 표징으로 열 가지 재앙을 보여줍니다. 그때마다 이집트는 열 가지 자연 재앙으로 망해갑니다. 파라오는 고집을 꺽지 않지만 그러한 "파라오의 딜레마"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면 파라오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봅니다.
파라오 알고 있던 이집트의 경제는 노예들이 일을 하는 노예 경제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나가겠다고 하니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잃고 나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냅니다. 그러고 나서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갈대 바다까지 쫓아왔다가 바다 안에서 군대를 잃고 맙니다.
바로 파라오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생태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구 인구가 75억을 넘어선 지금 우리는 생태계를 파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 변화, 생태종의 문제, 식량의 문제, 여러 질병의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문제 해결이 근본에는 "자본주의가 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를 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성장이 생산과 소비로 공처럼 커지면서 굴러가게 되는데(GDP), 그만큼 생산과 소비가 늘어나 에너지 소모도 크고 그만큼 쓰레기도 늘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의 딜레마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본주의라는 공이 이제는 멈춰야 하는데,
"우리의 GDP가 멈춰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역시 조금 편안하고 조금 더 잘 살고, 호강하고 싶은 마음에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어느 순간 절벽을 향해서 떨어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에너지를 덜 쓰고, 소비를 줄이고, 자본주의를 멈추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조금더 고생합시다.
이 이야기를 파라오가 못했고, 우리도 못하고 있습니다. 파라오가 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는 우리가 사순의 시기에 통회하고 회개해야 할 한 가지,
몇 년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태적 회개"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회개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차원 회개에 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라는 말은 전환이라는 표현이 가능한데, 그 의미는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뜻으로 '생태적 의미에서 삶의 전환'
작게는 나 한 사람이, 크게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 지역사회, 그들이 속한 나라가.
우리나라 역시 쓰레기 수거등은 잘하고 있고 앞서고 있습니다만, 대체 에너지 사용등에 대해서는 다소 게으른 면이 있습니다. 아파트에 태양광 판넬을 사용하면 한 달에 5000원 정도 절약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화석 에너지를 덜 사용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파라오의 딜레마, 하느님과 파라오의 대결에서 파라오가 무너집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에서 고정시켜서 생각을 하고, 이집트는 망하게 하였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탈출기에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의 첫 번째 목적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이지만,
그리하여 이집트가 하느님임을 알게 되도록, 그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사건은 이집트에 있어서도 해방의 사건입니다.
폭력의 구조 안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상처를 받습니다.
군대에서의 경우 상병즈음에 병장이 상병에게 이등병애들 군기 잡으라고 때리도록 합니다. 상병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병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장이 또 상병을 못살게 괴롭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폭력의 구조 안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가 더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런 폭력이 구조에 맞선다는 것은 그 가해자들에게도 축복입니다.
지나친 페미니즘도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죄의 구조와 맞선다는 것, 그렇게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해방 사건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자유를 구속하려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은 누군가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니까요. 우리가 종의 삶의 택할 때는 자발적인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교황님의 스스로를 부르실 때 "종들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 표현은 교황님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교황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자신을 낮추는, "나는 섬기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로 그 선택은 타인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헌신과 봉사와 누군가의 폭력에 의해서 내가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신부님께서 본당 사목을 하실 때 학생 인권문제 관해서 본당 신자들에게 질문을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선생님이나 부모가 훈육의 목적으로 때릴 수 있다는 생각하신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다음 질문으로 신자들이 잘못하면 본당 신부가 때릴 수도 있다.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을 때릴 수 있다는 생각은 폭력에 의해서 인간이 교정될 수 있다라는 의미고, 그런 경우 성인들도 맞아야 합니다.
그러한 공포를 통해서 인간이 바로 잡아질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그렇게 하면 지옥 가서 벌 받아! 거기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신부님 어릴 때 본당 수녀님께서 "그렇게 음식 남기면 연옥 가서 다 먹어야 해." 그 말씀을 듣고 맛있는 음식만 남길까?라는 생각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좀 더 이상적인 것을 꿈꿔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탈출기를 통해서 신부님께서 전하고 싶은 말씀은 파라오의 딜레마, 노예제도를 포기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본주의에 딜레마와 비슷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해방 사건이 이집트에게도 해방이었고 구원의 사건이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나와 갈대바다를 건너서 시나이 산으로 와서 계약을 맺습니다. 그 이집트에서 나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는 시일은 50일이 걸립니다. 비슷한 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파스카니까,
그리고 시나이 산의 상황은 성령강림 사건입니다.(50일)
50일이 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사도들은 성령을 받습니다.(사도행전 2장)
시나이 계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사도들은 기도하면서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시나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신약에서 성령강림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교회 = 새 이스라엘)
그들이 이집트에서 마지막에 나올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이 맏아들과 맏배가 모든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이 잔인함이 아닌 이것은 구약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정의로움은 "눈에 눈, 이에는 이" 동태복수입니다. 요즘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만 지켜져도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요즘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세상"입니다. 누가 한 대 때리면 열 대를 때리는....
동태 복수가 갖고 있는 의미는 내가 받은 피해 이상으로 상대에게 돌려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탈출기 시작에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에 걸맞은 동태복수적인 표현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게 보이신 마지막 표징,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입니다.
그 표징을 통해서 성경의 논리는 "우리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다"라고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히브리적 방식입니다.
질투에 의미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질투를 안 느낍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복수하는 하느님,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라는 히브리적 방식이고,
질투하는 하느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다.라는 히브리적인 방식입니다.
한데 그 마지막 재앙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는 축제를 명령하십니다. '파스카 축제'
파스카 축제 때는 양을 잡고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고 그 양을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
파스카 제의 세 가지 중,
하나는 파스카 식사
두 번째는 무교절
세 번째는 맏아들과 맏배를 바치는 제의입니다.
그 형태를 보면 고대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 다소 미신적으로 보이는 경우처럼,
유목민들은 텐트를 가지고 이동하면서 쳤는데, 그 이동하는 지역마다 그 지역을 지키는 영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파묘"라는 영화나 "검은 사제들"과 같은 영화에서 영적인 이야기들...
우리도 비슷합니다. 이사 간 경우에 신부님들께 축복을 청하는 것처럼 ,
요즈음 신부님들은 축복하실 때 집안의 고상에 성수를 뿌려주십니다. 옛날 신부님들은 성수를 문에 뿌리셨습니다. 문만 잘 지켜 나쁜 영들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문에 십자가를 붙였습니다.
신부님은 건물에 축복보다는 사람들, 가정의 축복과 평화를 빕니다.라는 축복을 해주신다고 합니다.
결국 파스카 축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노예로 살았던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의미로 하느님을 알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우리들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 미사를 통해서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영성체 제의 안에서 우리들의 고백으로 삼게 됩니다.
파스카 전례를 하고 그들은 시나이 산으로 갔는데 그들은 불행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걸,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파라오의 노예로 살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 것이냐?' 라는 선택앞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인으로 살것이냐? 세속의 그 누구로 살 것이냐? 에서 다른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주님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욕망은, 우리들의 나약함은 자주 부딪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나이 계약을 맺고 카데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각 지파별로 약속의 땅으로 가는 12명의 정찰대를 뽑고 그들이 그곳에서 40일 동안을 지내고 옵니다.
돌아와서 그들은
"가나안 땅은 비옥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거인족들이 삽니다. 우리가 갔다가는 그냥 혼 만나고 올 거예요." 대답을 하였지만, 칼렙과 여호수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따라 그곳에 가야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실망하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 믿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그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40일 동안 정찰한 그들은 하루를 일 년씩으로 잡아 광야에서 40년 동안 보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말씀하신 40년은 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죽고 요르단 강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파스카에 관해서는 탈출기 12장에서부터 13장 열 번째 재앙이 끝나고 나서 파스카에 대한 규정이 나오고,
레위기 23장에서도 파스카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민수기 9장에서는 두 번째 파스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고 시나이 산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있었던 두 번째 파스카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돌판을 받아 내려오다가 금송아지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돌판을 깨고 다시 올라가 하느님의 율법을 받아 내려오고 나서 몇 달? 한 일 년이 지난 후에 한 두 번째 파스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서 일 년이 지난 것입니다.
두 번째 파스카를 하고 나서 시나이를 떠나고, 민수기 28장에서 다시 파스카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민수기 33장에서 파스카를 기억하는 내용이 나오고
신명기 16장에서 다시 파스카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렇게도 이스라엘은 파스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기 5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데리고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하고, 그 예리코의 벌판(요르단 강 서쪽을 지난 곳)에서 파스카를 합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까지 기나긴 여정이 파스카로 시작해서 파스카로 끝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나이 산에서 파스카를 한 세대와 마지막 여호수아기 5장에서 파스카를 한 세대는 다른 세대, 그다음 세대입니다.
약속의 땅에는 첫 번째 세대는 들어가지 못하고 두 번째 세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할례도 받고 파스카를 했습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러고 나서 거기서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 약속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자,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여호수아기 5장의 내용)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고 제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당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이 그곳에서 마무리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을 비판하시고 유다의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시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붙잡히시고 수난하고 십자가 형을 당하십니다.
그 수난이 시작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을 드십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인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잔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너희는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이 공관 복음서입니다.
빵을 들고 잔을 들고 기도하신 마지막 만찬이 파스카 저녁식사였습니다.(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증언이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유다인들은 파스카 저녁 식사에 각 가정에서 가장이 그 기도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족례가 나오고, 예수님께서 그 저녁 식사를 하시고 그다음 날에 돌아가시는 데, 돌아가신 그날 오후 3시, 유다인들이 파스카 양을 잡는 시간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마치 파스카의 양처럼....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만찬인지, 그 전날 만찬인지 의견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은 파스카 저녁식사하고 나서 일까요? 요한 복음서의 말처럼 파스카 전날인 세족례 하시면서 식사하시고 파스카 양을 잡을 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요?
자신 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몰라요."
이것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께 물어야 할 내용입니다.
하지만 미사 때 사제가 빵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공관 복음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삼일 전례 때의 모습은 요한 복음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따르는 교회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각각의 내용 안에서 우리들이 간직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40일 동안 사순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부활을 준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는 것을 바라시고,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왜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갈까요? 이것이 바로 질문입니다.
사순의 기간 동안, 파스카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기억들을 붙잡으면서 본래의 신앙의 체험들, 교회의 체험들로 다시 한번 우리들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형제님을 부르셨습니다.
1분 정도 들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삼십 분 들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들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컵 하나의 무게, 그 짐들의 시간을 내려놓자는 이야기입니다. 파스카 때 양들을 먹고, 쓴 나물을 먹는 이유는 우리가 길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불안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움이라는 단어 안에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파스카는 우리에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부활과 만나는 준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누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로움을 풍요롭게 느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사순이 성찰과 묵상의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고 하셨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최신부님의 동영상 강의도 함께 하셔서 남은 사순 시기 주님 사랑과 은총 충만히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네, 신부님 강의 말씀과 함께 주님 사랑과 은총 충만히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