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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찬 시집 『대화동 일기』 작품해설
동심과 소박함, 그 낮은 곳으로의 끊임없는 도전
김순진(시인 ․ 스토리문학 발행인)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거나 윈드서핑으로 거대한 파도와 맞서는 것만을 도전이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도전해야 할 것은 동심이나 소박함이다. 비워냄이나 무소유다. 겸손이나 드러내지 않음이다. 물질의 나눔보다 마음의 나눔이 우선한다. 지성찬 시인은 동심과 소박함과 무소유와 겸손에 도전하고 있는 분이다. 그의 정신적 근육은 매우 발달하여 있어서 불의를 보면 헐크의 근육처럼 솟아오르며, 아름다움을 보면 바다 속의 물미역줄기처럼 함께 흐르며 인생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제일이라든지 동양 최대라든지 대한민국 일등이라든지 일등주의에 휩싸여 정작 무엇이 일등인지를 모르고 있다. 일등이란 최고의 지향이 아니라 최선의 지향이다. 최선은 결코 억압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것은 모두 아름답다. 훼손된 자연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며 폐허라 부른다. 최선이란 욕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성찬 시인을 보면 자연이란 말과 동심이란 말이 떠오른다. 소박하다는 말, 겸손이라는 말이 먼저 생각난다. 왜 그럴까? 그분은 인간의 본성인 선善함을 훼손하지 않으려 애써온 분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잎을 주고 열매를 주며 몸뚱이까지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결코 바람이 잎사귀를 따내거나 새들이 열매를 따내거나 세월이 몸뚱이를 썩게 할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처럼 지성찬 시인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문학할 수 있는 환경에 만족하며,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음에 만족하고, 대화동에 살고 있음에 만족한다.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 동심과 소박함과 겸손의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지성찬 시인의 수십 년 동안 단련되어 매우 발달한 정신적 근육을 만져보자.
보랏빛 아침을 여는 도라지꽃이 피네
자유로 넓은 길이 강을 따라 내달리는
별리의 흰 손을 흔드는 도라지꽃이 피네
오염된 대화천에 큰 비가 내린 후에
하얀 황새 한 마리, 손님처럼 날아오니
파랗게 일어서는 풀잎, 살아있는 그림이네
벚꽃이 봄 하늘을 화사하게 색칠한 후
낙화, 그 자리에 두고 간 작은 열매
그 마저 버리고 나서 빈 하늘을 안고 가네
-「대화동 일기」전문
대화동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 있는 곳으로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전철은 대화역에서 마무리된다. 마무리했다는 것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지 시인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별리의 흰 손을 흔드는 도라지꽃이 피네” 라면서 손을 흔들어 과거로의 집착에 안녕을 고하고 미래의 꽃으로 스스로 피어나려 애쓴다. 처음에는 그냥 수고하고 무거운 괴나리봇짐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려 했다. 철새인 하얀 황새처럼, 지나가는 손님처럼 조금 앉아 쉬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앉아있으려니 주변에 파랗게 풀잎이 일어서고 벚꽃도 화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가 무릉도원이로구나! 시인은 그 자리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작은 열매처럼 눌러앉는다. 사람이 쉴 곳은 평수 넓은 집도, 시설이 좋은 집도 아니다. 초가삼간에 별을 보고 누워도 근심이 없어야 한다. 시인은 잠시 앉아 쉬면서 지천으로 꽃들이 반짝이고, 천지에 별들이 만발하니 흐르는 것은 구름이요, 마음 잠길 곳은 호수임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고향인 안성을 떠나 여러 곳에서 살아왔지만 지성찬 시인에게 가장 좋은 쉼터는 대화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시인은 “벚꽃이 봄 하늘을 화사하게 색칠한 후/ 낙화, 그 자리에 두고 간 작은 열매/그 마저 버리고 나서 빈 하늘을 안고 가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은 벚꽃이 화사하게 칠한 날들이었고, 꽃잎 떨어진 후 맺힌 열매는 자신이었으며, 이젠 그 열매조차도 버리고 무소유 정신으로 빈 하늘을 안고 날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가두었던 단절과 스스로 묶었던 사슬의 고리를 풀고 날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래 깊은 산골 송아지로 태어나서
평생 삶을 파며 한 주인을 모셨지만
끝내는 쇠잔한 내 뼈와 살, 해체되어 사라지고
통가죽 면상面相 껍질을 칼로 저며 잘라내어
망치로 두드리고 풀칠과 박음질로
새로이 다시 태어난 또 다른 나의 분신分身
호사한 명품으로 점방店房에도 올랐었지
불빛에 취하여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
도대체 나는 누구냐, 포장 속의 다른 진실
그럴듯한 겉모습에 비싸게 팔려갔지
진창길 빙판 길도 마다않고 모신 새 주인
주인은 또 나를 버렸네, 옆구리가 터진 구두.
-「생성과 소멸의 진리」 전문
현대시조가 자꾸만 움츠려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새로운 시조형식의 발굴이나 새로움을 도모하려는 노력부족 때문인 반면에 지성찬 시인은 연만하신 연세에도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새로운 소재나, 새로운 표현, 새로운 전개구성을 도모한다. 이 시조는 소재가 드러나지 않게 오로지 보조관념들로만 시를 전개해나가다가 원관념을 드러낸 시이다. 구두처럼 시詩도 여러 번 환골탈태해야 산다. 소가 살아있을 때는 생명으로 가치가 있다. 생명이 다하면 고기와 가죽으로 가치가 있으며, 구두로 만들어져서 진열장에 올려져 있을 때는 상품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신발로 신겨질 때는 인간을 운반하는 운반수단으로의 가치, 가죽의 생명이 다할 때는 시적인 소재로 가치가 있다. 우리 시인들이 취하는 것은 고기도 가죽도 아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나 흥망성쇠의 비밀을 바로 이런 가죽의 생명을 다한 구두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현대시조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첫 번째가 음풍농월이나 영탄조의 구태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면 이 시조는 현대시조가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시조라 해도 좋겠다. 이 시집 전체를 살펴보더라도 율격을 깬 시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만큼 지 시인은 우리 시조의 격을 지키고 높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지 시인은 “시조에서 표현(내용)을 중시하다 보면, 시조의 가락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것은 시조가 정형시로서 형식(가락)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표현(내용)은 도외시한 채, 가락만이 별도로 존재할 수도 없다. 좋은 시조는 형식의 미와 표현(내용)의 미를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실 이론과 시를 겸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이 존경받는 이유는 사람이 좋고, 올곧은 면도 있으려와, 그보다 먼저 시와 이론을 겸비해서 공부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조가 내용이 좋아야 일반 독자를 흡수할 수 있으며, 형식을 벗어난 전통은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없음에, 시인은 내용과 형식 두 마리의 토끼 사냥에 성공하고 있다.
하늘을 내 집처럼
신나게 날아다녔다
꽃도 있고 물도 있는
집에도 가봤지만
황혼에 쉬어갈 자리
나뭇가지 하나였다.
-「새에 대하여」전문
세상에는 참 불쌍한 것들이 많다. 새는 쉼 없이 날개를 저어야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꽃은 화가 나도 입을 찡그릴 수가 없다. 물고기는 뭍에 오르면 죽을 수밖에 없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박고 떠나지 못한다. 바위는 태어난 이후에 단단하여야만 한다. 단순가치만 지향하는 이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사람은 모두 가졌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화냈다 웃었다 하며, 뭍에서 걷거나 물속을 헤엄치기도 한다. 마음대로 떠날 수도 있으며 주먹을 쥐면 단단하고 마음을 담아 손을 내밀면 보드라워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만이 많다. 가장 불쌍한 것은 정작 감사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세상 모든 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난다 ≠ 떨어진다”, “물 ≠ 불”, “가다 ≠ 서다”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소나무가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푸르름만 보면 된다. 바위의 물렁하지 않음을 물을 이유도 없다. 변함없음만 보면 된다. 꽃은 웃음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발산해낸다. 시인이 가난한 것에 대하여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얼마만큼 동심을 많이 가진 사람이냐’만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지성찬 시인이 「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나뭇가지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늘을 내 집처럼 /신나게 날아다녔”던 새라 할지라도, “꽃도 있고 물도 있고/ 집에도 가봤”던 새라 할지라도 “황혼에 쉬어갈 자리/나뭇가지 하나였다.”는 말은 결국 인간이 종교, 가정, 그리고 일 등에 있어서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이는 궁극적이고도 최선의 목표인 마음의 안식을 역설한 내용인 것이다.
맑아서 서러운 가을, 종로鐘路 탑골 공원에 가면
종소리는 끊긴지 이미 오래 되었고
남루의 허름한 옷을 버리는 고목古木들도 만난다.
철 지난 합죽선이 노점에서 잠을 잔다
삼류三流 화백이 그린, 강가의 일엽편주一葉片舟는
아직도 그 매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자동차가 고단한 삶을 실어 나르는데
이제 노인들은 실어 나를 삶이 없는지
돌담장 넘어 세상과는 끈이 떨어진 듯하다.
세월의 때가 절어 조금은 맛이 간 사람
바닥난 남은 인생을 잡기雜技에 모두 건 사람
볼 것도 없는 거리의 사람들, 흑싸리 껍데기 같았다.
시퍼런 풀기가 빠진 낙엽 같은 사람
평생토록 찾지 못한 그 무엇이 있는 걸까
바람도 노인들의 주머니를 흘끔 둘러보고 가는데
어둠은 오늘 풍경을 하나씩 지워버린다.
폐차 직전 자동차 타이어의 바람이 빠지듯이 그렇게 노인들은 하나 둘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공허空虛하고 쓸쓸한 그 빈자리에 풍성하게 남은 것은 오로지 태워버린 담배꽁초와 잠시나마 목을 축였던 일회용 종이컵 쓰레기 뿐
건널목 파란 불빛이 적색등赤色燈으로 바뀌었다.
-「가을, 종로鐘路에 가면」전문
시는 이미지화 작업의 일환이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그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가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작가의 추측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펼치는 상황에 몰입하게 한다. 바람은 여기서 방관자 같지만 촉매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권한은 바람에게 있으며, 자연에게 있어서도 바람은 모든 분야와 시간과 공간에 관계하면서 꽃이 피고 시들고 땅이 얼고 새로 피어나는 걸 주관한다. 그런데 지 시인은 이 시에서 이러한 바람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일반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바람으로 관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연의 초장 “종소리는 끊긴지 이미 오래 되었고”는 청각적 이미지이다. 작가는 하나의 청각적 이미지를 화두로 시작하여 시 전체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개하고 있다. 모든 행마다 이미지를 중시한다. 1연의 종장 “남루의 허름한 옷을 버리는 고목古木들도 만난다.”는 노인의 쓸쓸함을 고목에 비유하고 있다. 2연 초장은 “철 지난 합죽선이 노점에서 잠을 잔다.” 인생의 덧없음을 합죽선에 비유하고 있다. 3연 초장 “자동차가 고단한 삶을 실어 나르는데”은 인생살이가 고단함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4연 초장 “세월의 때가 절어 조금은 맛이 간 사람”은 사노라면 맛 간 사람도 여럿 생김을 짐작케 한다. 5연 종장 “바람도 노인들의 주머니를 흘끔 둘러보고 가는데”에선 노인들의 주머니가 비워있거나 가벼움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6연 종장 “건널목 파란 불빛이 적색등赤色燈으로 바뀌었다.” 에서는 인생이 적색등으로 바뀌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살펴보면 시인은 끊임없이 이미지작업을 해내고 있다. 작가는 주관적 시각에서 유입된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감각적 이미지작업으로 순환하면서 이를 독자로 하여금 긍정할 수 있도록 객관화하고 있는 것이다.
1.
도끼에 무너진 나이테 수백 년 세월
벗겨진 하얀 알몸, 하늘 아래 부끄러워라
수 없이 받은 칼날의 상처에 신세계新世界가 열렸으니
2.
빼어난 태산준령의 하늘을 뚫는 기세
안개 속 만리장강萬里長江 비단처럼 흘러가고
불 뿜는 검푸른 용龍 구름 타고 승천昇天하나니
3.
가시 박힌 역사 속에 먹빛은 더 새롭고
핏빛으로 살아오는 먹물의 뜨거운 서광瑞光
가슴에 흥건히 내리는 꽃비 같은 상형문자象形文字
-「추사의 전각塡刻을 보고」 전문
전각 하나를 보고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해낸 시인의 눈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도끼에 무너진 나이테’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도 ‘하늘 아래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없이 받은 칼날의 상처에 신세계가 열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가시 박힌 역사 속에 먹빛은 더 새롭고 /핏빛으로 살아오는 먹물의 뜨거운 서광 /가슴에 흥건히 내리는 꽃비 같은 상형문자”라면서 골골이 파고든 우리의 전통을 먹물에 비유하면서 조상들이 후세들에게 전해주려 했던, ‘나라가 있어야 산다’는 애틋하고도 절절한 상형문자의 메시지가 가슴으로 흥건히 흘러내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며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고색창연한 산사의 빛이 되기 위하여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했으며 낙숫물이 주춧돌을 뚫기 위해 산산이 부서져야 하듯 이름 없이 조국을 지킨 무명용사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상처 많은 풀이 향기롭다’고 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실로 파란 많은 역사였다.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안시성 싸움, 고구려와 수나라의 살수대첩, 고려와 원나라와의 삼별초의 난. 그리고 임진왜란과 수많았던 왜구의 침입에서 지켜낸 나라다. 시인의 눈에는 풀꽃과 조약돌에도 세상의 이치가 들어있다고 말하는데, 올곧은 심성의 시인이 어찌 의미심장하게 파고든 추사의 칼날에서 민족의 아픔을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만리타국 딸에게 주려
아끼던 메론 한 통
냉장고만 한껏 믿다가
통째로 썩혀버렸다
모르리
에미 마음도
그리 썩어 아픈 것을
-「에미의마음」 전문
귀국하는 딸을 위해
비 오는 날 밭에 갔다
도라지 몇 뿌리에
취나물을 뜯는 마음
장대비 내가 맞아도
너는 비를 피하거라
-「비 오는 날」
위 두 편의 시조는 부모의 마음을 잘 나타낸 시다. 지난 봄 지성찬 시인 부부는 미국에서 대학교수가 된 따님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다녀왔다. 그때 어머니는 미국에 사는 딸이 좋아하는 메론 한 통을 가져다주려고 먹지 않고 아끼다가 냉장고에서 썩어버렸나 보다. 자식을 위한 애틋한 어머니의 사랑이 깊이 묻어난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자식을 주는 부모의 마음이 딸을 미국의 대학교수까지 길러냈나 보다. 「비 오는 날」이란 시조는 귀국하는 딸을 위해 비오는 날 무공해로 기른 푸성귀를 뜯어서 먹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식을 기르다보면 속이 썩어 뭉그러져도 장대비는 부모가 맞을 테니까 자식더러는 피하라 한다. 지 시인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훌륭하게 길러내셔서 아들과 딸이 대학교수고, 다른 딸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처럼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비 맞으며 자나 깨나 자식걱정으로 사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세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낸 두 부부께 박수를 보낸다.
잔뜩 싣고 가는 것이
무어냐고 묻는 노인
콩깍지라 대답하고
뒤돌아 생각해 보니
나에게 물어보시는
하나님의 말씀 같다.
-「껍데기」 전문
지성찬 시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얼마 전 충청북도 음성으로 문학행사를 하기 위해 간 일이 있다. 간밤에 행사를 하고 아침이 되자 빨리 가자고 서두르신다. 이유인 즉 주일 아침예배를 보기 위해서란다. 그때 필자는 많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을 한다는 것이니 그 말은 세상에 대한 의심이 많다는 말로도 풀이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필자 역시 무신론자이지만 때론 믿음을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믿음을 가진 한 시인이 젊은 나이에 암이란 크나큰 시련이 왔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죽음과 삶을 맡겨서 평안해지는 것을 보면서 결국 믿는다는 것은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신의 권능을 인정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스스로 구원받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일 것 같다. 무엇이든 믿고 물어보고 행하는 것 말이다. 이 시는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 무엇을 자전거나 수레에 잔뜩 싣고 가는 모양이다. 한 노인이 무어냐 묻고 지 시인은 콩깍지라 대답했다. 그리곤 뒤돌아 생각해보니 “나에게 물어보시는 /하나님 말씀 같다”고 끝을 맺는다. 왜 콩깍지를 싣고 갔는지, 무엇에다 싣고 갔는지, 진짜 콩깍지였는지, 진짜 싣고 간 경험을 쓴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요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묻는 말씀 같다’는 말인데, 이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짊어지려 애써온 것들은 한낱 콩깍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살아보니 추구했던 명예와 부는 모두 껍데기였다는 인생의 크나큰 발견이요, 반성이다. 그의 문학과 인생에서 기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결국 의심치 않고 믿는다는 것은 행복과 영원으로 가는 지름길임이 확실하다.
지성찬 시인의 시조를 읽어보니 잘 몰랐던 시조의 의문점이 하나 둘 풀리면서 시조의 고통을 알 것 같다. 현대시조는 현재 딜레마에 빠져있다. 전통율격을 지켜야 하고 구태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신선해야 하는데, 전통을 지키자니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고, 파격하자니 전통이 위태롭다. 미국 영화의 딜레마를 보면서 한국 시조를 생각하게 된다. 미국영화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개척기 시대의 서부영화에서 시작하여 갱영화, 로맨스 영화를 거쳐 지금의 판타지영화시대로 온 지가 벌써 10여년이 흘러가고 있건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한국영화나 전통 깊은 나라들의 영화에 추월당하는 추세다. 아무리 만화영화든 로맨스 영화든 전쟁영화든 전통을 기초로 해야 하는데, 200년 밖에 안 되는 짧은 미국의 역사로는 수천 년씩 된 동양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은 어떻게 방향을 설정하고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나온다. 시조처럼 전통율격과 전통 정신을 기반으로 새로움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찍이 박지원은 “법고창신”하라고 했다. 이 말은 연암 박지원이 쓴 『초정집楚亭集』서문에 나오는 말로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니 지성찬 시인의 시조처럼 전통을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면 배가 큰 돛을 달고 가는 격이요, 반석 위에 누각을 짓는 이치이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 느끼고 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내기란 힘든 일이다. 이를테면 바글바글 끓고 있는 청국장맛을 글로 표현해봤자 겨우 ‘구수하다, 칼칼하다, 입에 짝짝 붙는다’ 정도이다. 라일락의 향기를 맡고 표현해봤자 ‘향기롭다, 그윽하다, 몽롱하다’ 정도이다. 그런데 지성찬의 형용사들은 이미 개념 정리가 완료된 형태의 형용사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이미지 변신을 꿈꾼다. 그냥 작은 시내일지라도 정지용의 시처럼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간다.”에서처럼 말이다. 그의 계절은 사람처럼 마음을 갖는다. “수 없이 꽃을 주어도 계절은 항시 섭섭했다”(「청평 가는 길」중에서). 그의 태양은 동물이 된다. “소 대신 외양간에 햇볕이 누워있다”(「가는 세월에」중에서). 그의 무쇠솥은 절대자가 된다. “언제쯤 새 주모酒母를 만나 한 세상을 끓여보나”(「삼강나루, 그 주막」중에서). 그의 산은 사람이 된다. “누운 산은 /마지막 혈서血書를 쓰고 있었다”(「가을 산에서」중에서). 지성찬의 시는 사람이거나, 무생물이거나, 생물이거나, 사건이거나, 환경이거나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은 오로지 인간의 본성과 자연 질서에 순응하면서 전개된다. 그가 왜 시조를 택하였는지 이제 의문점이 풀린다. 남들은 앞 다투어 번역문학을 하고, 영화 시나리오를 하며, 콩트나, 코미디 대본을 써서 두각을 나타내는 세상에 시조를 써서 밥이나 먹을까? 글로벌시대에 가당키나 할까? 생각해보지만, 시조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사전 같은 존재다. 대들보 같은 존재다. 영토 같은 존재다. 그의 시조는 우리가 만나본 지 시인의 성품과 동일하다. 그는 불의를 보지 못하고, 아무리 오래된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릇된 길로 간다면 인연을 단절하고 말지만 꽃을 보거나 어린이를 보면, 거동이 불편하거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허리를 굽혀 마음을 내어준다. 인간 본성과 자연 질서를 해치는 것에는 얼음처럼 외면하며 가치 있는 것에는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벌레도 무얼 먹으며, 거미도 집을 지으며, 새도 새끼를 낳고 키우는데, 밥 먹고 집 짓고 새끼 키우는 일이 우리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만큼 중요할까?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다든지, 태평양을 건넌다든지 식의 높은 곳으로의 도전은 끝이 있다. 그러나 봉사와 나눔과 절제 등 낮은 곳으로의 도전은 끝이 없으며 지 시인은 지금도 동심과 소박함과 무소유와 겸손, 그 낮은 곳으로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성찬 시인의 시조집 『대화동 일기』를 다 읽고 나니 경전을 읽고 난 듯 바른 마음을 가지게 된다. 경전이 따로 있을까? 올바르게 살면 몸이 경전이요, 올바른 마음이 배어난 책이 경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