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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1. 실존의 고독 : 우주적 미아로 던져진 인간의 비애
현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피투성, 抛投性)"라고 정의했습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거대한 우주의 무의미한 공간 속에 덩그러니 던져졌다는 이 서늘한 선언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영혼을 깊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물질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인간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고독과 뼈아픈 허무주의(Nihilism)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습하는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 앞에서, 세상은 그저 '너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내라'고 차갑게 몰아세울 뿐입니다.
인간은 이 텅 빈 내면의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좇고, 쾌락에 탐닉하며, 타인의 인정에 목을 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이 그의 『고백록』에서 탄식했듯, "오 주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영원토록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무한을 담아내도록 설계된 인간의 심연을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밑빠진 독과 같아서,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거나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는 절대적 결핍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 깊고 어두운 절망의 심연, 바로 그곳에서 성경은 인간 존재의 참된 기원을 장엄하게 선포하며 첫 장을 엽니다.
2. 임마고 데이(Imago Dei) : 사랑받기 위해 의도된 존재
창세기 1장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깊은 흑암(창 1:2) 위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우주적 스케일의 창조 사역의 절정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깊은 협의를 거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맹목적인 진화의 부산물도, 우주적 폭발의 파편도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주의 가장 치밀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 속에서 '의도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지성이나 도덕성을 가졌다는 뜻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하고도 충만한 사랑의 관계 속에 계셨던 것처럼, 인간 역시 그 위대한 '관계' 안으로 초청받기 위해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존재론적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에로스(Eros)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기원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세상의 방식처럼 제한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공급과 충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심지어 우리가 타락하여 반역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의 존재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보다 먼저 있었고, 우리의 타락보다 깊습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시작되어 영원 후까지 이어지는 끊어지지 않는 금사슬입니다."
3. 잠잠히, 그러나 격렬하게 : 아하바(Ahabah)의 경이로움
스바냐 3장 17절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 사랑의 기원이 타락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함과 멸망의 경고가 쏟아지는 스바냐서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선지자는 돌연 찬란한 복음의 빛을 비춥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여기서 쓰인 사랑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하바(Ahabah)'입니다. 이 단어는 감정적인 끌림을 넘어, 대상을 향한 전인격적인 헌신과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한낱 먼지와 같고 반역으로 얼룩진 피조물을 바라보시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환호성을 지르시고(즐거이 부르며), 때로는 그 깊은 사랑의 무게로 인해 묵묵히 바라보십니다(잠잠히 사랑하시며). 이것은 철학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처럼 감정 없이 세계를 관망하는 차가운 신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존재로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시는 뜨거운 심장의 하나님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그 지독한 허무함,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증은 오직 이 '아하바'의 사랑이 우리 영혼에 부딪혀 올 때 비로소 해갈됩니다.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지으신 이가 나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이 경이로운 선언 앞에 엎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렸던 참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4. 결론 : 존재의 요람으로의 귀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동역자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결핍을 조롱하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 거짓된 속삭임에 속아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영적 고아처럼 이 세상을 방황해 왔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첫 페이지, 그리고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단호하고도 따뜻하게 선포합니다. 당신은 결코 우주에 내던져진 고독한 먼지가 아닙니다. 당신은 창세 전부터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로 지명되었고,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거룩한 형상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압도적인 사랑의 공급과 충만 안으로 들어갈 때에만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허무의 심연 위에 불어오는 창조주의 사랑의 숨결,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시작이자, 인류 역사를 이끌어가는 가장 위대한 힘의 기원입니다. 이 영원하고 흔들림 없는 사랑의 기초 위에 우리의 존재를 굳게 세우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