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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 10. 문은 닫힌지라 - 마 25: 12. 알지 못하노라.
마 25: 10. 문은 닫힌지라 -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
신약교회 교인 중에는 등과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결혼 잔치에 들어갈 자들이고, 등만 있고 기름이 없어 결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1]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웠다.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 가고 있다.
2]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준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마 25: 34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등의 준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다.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3] 문은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1) 이는
①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②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타인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 눅 13: 25 -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 열 처녀의 비유
우리는 모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는 신랑을 맞을 등불과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등불과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우리가 지혜로운 신부인가 미련한 신부인가가 결정된다. 본문은 그러한 것에 대한 말씀으로 지혜로운 처녀의 슬기와 그 결과, 그리고 어리석은 처녀의 실수와 그 결과를 가장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대비하여 보여 준다.
① 열 처녀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신부였다. 그들은 모두 처녀였고,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우리 역시 모두 같은 성도들이다. 똑같은 죄인이며, 모두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속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로 간에 나타나는 차이는 조그마한 것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고, 타인에 대해 잘못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모두는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며, 똑같은 결점을 가진 피조물이며 똑같이 불완전한 인생이다. 이러한 동일선상에서 우리는 서 있고 출발한다.
② 동일한 목적을 가졌다.
그들은 기다림의 대상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같은 것으로 기다림의 대상도 같다. 신랑이라는 그들의 목적은 모두의 동일한 간절한 바램이었다.
성도는 모두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이라는 소망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조금은 부족해 보이고 조금은 미약해 보이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 역시 성도이며, 같은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며 준비하고 있다.
③ 그들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공통된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다.
환란과 고통의 밤이 있는 곳, 피로와 피곤으로 가득한 그곳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 기반으로 삼고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신앙의 장소, 믿음의 장소, 생명의 장소, 이곳을 우리는 모두의 터전으로 알고 생활한다.
④ 같은 소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말씀이라는 공동의 소유물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이라는 공동의 축복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모두 기도와 찬송이라는 무기를 선물로 받았다.
주님은 이렇듯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이 보호하셨으며, 똑같이 인도하셨다.
⑤ 그러나 그 결과는 크게 달랐다.
그것은 그들의 추구하는 목적과 소유의 진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소유에 대한 사용에 있어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을 듣고 준비했다.
말씀으로 준비하는 삶,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대로의 순종이 뒤따를 때만 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말씀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천했다. 그 결과 그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을 얻었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씀에 순종하였으므로 자신들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 미련한 다섯 처녀는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오리라 한 신랑의 말을 경홀히 여겼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 때문에 오실 신랑에 대한 온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신랑이 임할 때 맞이 할 수 없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불신앙은 필경 불순종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소망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그들은 인도하게 되었다.
ⓒ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다.
나의 믿음은 내 부모나 형제, 그리고 친구의 몫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우리는 나의 믿음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
오직 내 것은 나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 주를 맞이하는 믿음과 신앙은 오직 자신에게만 달려 있다.
주의 재림 때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나의 믿음을 꾸어 줄 수 없으며, 나의 공력을 나눌 수 없고 오직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으로만 나뉠 뿐이다.
마 25: 11. 열어 주소서 -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고 요청하였으나, 주께서는 그들을 거절하셨다.
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그 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2]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절은 7: 21-22절에서도 나온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힌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 25: 12. 알지 못하노라. -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
그 두 부류의 분리는 분명하였다.
미련한 자들은 주께서 처음부터 알지 못하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택한 양들이 아니었고 믿는 모양만 갖춘 형식적 교인들이며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증명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1]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앞의 문장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다.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 창 18: 19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 요 10: 14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 21-23. 눅 13: 25에도 나오고 있다.
* 마 7: 21-23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눅 13: 25 -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 미련한 다섯 처녀
열 처녀 가운데 다섯 처녀가 미련했던 것은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등만 들고 갔을 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은 기름이 없으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섯 처녀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우리도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맞을 실제적인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어리석고 미련한 자일 수밖에 없다.
① 미련한 자가 받을 형벌
* 마 24: 48-51 –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② 미련한 라오디게아 교인들
* 계 3: 17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2) 슬기로운 다섯 처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와 달리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웠던 것은 그들이 만일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랑이 언제 올 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 신랑이 오더라도 등불을 밝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기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자들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① 홍수에 대비해 준비한 노아
* 창 7: 5 -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② 준비하는 자의 기쁨
* 시 126: 5-6 –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3) 열 처녀 비유의 교훈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음으로써 정작 신랑이 올 때에 기름이 없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함으로 신랑이 올 때에 불을 밝혀 혼인 잔치에 들어간 다섯 처녀의 비유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재림의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실제로 주님이 오신 뒤에는 때가 늦다. 아직 오시지 않은 바로 지금이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준비 기간이다.
① 아무도 모르는 그날
* 마 24: 36 -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② 예복 입지 않은 자의 버림받음
* 마 22: 11-13 –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