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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다니엘의 위기
주 제 : 종말론
성 경 : 다니엘2 :1-30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날 짜 :
비 고 : 지구촌교회
논 지 다니엘은 목숨이 위협 받는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축복의 기회로 전환 시켰다.
“위기”(危機)라는 낱말은 한문으로 “위험”이라는 단어와 “기회”라는 단어의 합성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순간을 단순히 위험한 순간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뜻밖에도 놀라운 선물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역경이나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역경에 봉착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평소와는 다른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간섭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셔서 우리들의 삶 속에 중대한 전환과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십니다.
지나간 시대의 모든 영웅이나 위인들은 위기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범인(凡人)은 위기 속에서 절망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더라도 낙담하거나 실의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역사를 만드는 창조적 소수인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런 위대한 면모를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다니엘에게 다가온 위험과 기회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에게 다가온 위험
다니엘서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니엘이 풍성한 복을 누리지만 2장에 와서는 다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축복 다음에 찾아온 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내 삶 속에 축복이 찾아왔다고 방심하는 그 순간에 폭풍우가 찾아와 다시 허우적거렸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1장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포로로 끌려 온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람답
게 뜻을 정하여, 왕궁에서 제공하는 포도주나 고기로 말미암아 자기를 더지아니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믿음의 결단은 마침
내 위기 상황을 극복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1장에서 다니엘은 어떠한 복들을 누렸습니까?
먼저 1장15절을 보면 다니엘은 금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건강해지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역경에 의연하게 대처했을 때 건강이라는 복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를 하나님에게 받게 됩니다. 1장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異象)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모든 이상과 꿈을 해석하고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장20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 아니라.”
건강과 지혜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니엘은 사회적 특권까지도 부여받게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그들에게는 왕을 모시는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다니엘에게 또다시 새로운 위기가 찾아들게 됩니다. 그것이 2장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2장의 사건은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느부갓네살의 꿈과 함께 다니엘의 생애에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1절을 보십시오.“느부갓네살이 위(位)에 있은 지 이 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을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고통스러운 꿈이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결코 잊을 수 없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3절에도 “번민”이라는 단어가 한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더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불길하기만 하고 괴롭기만 하고 잊어버리지 못하는 이상스러운 번민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다니엘서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라는 사실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 하나
님이시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주 굉장한 역사적 사건, 이를테면 오늘날 동유럽의 급격한 변화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섭리는 심지어 한 나라의 왕이 꾸는 꿈 속에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역사적인 변혁의 사건에만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난밤 내가 꾼 꿈도 간섭하실 수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매번 꿈 꿀 때마다 “이것은 무슨 꿈일까”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자기의 모든 꿈을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시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의 경우 느부갓네살 왕이 꾼 고통스러운 꿈은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 없다면 왜 왕은 쉽게 꿈을 잊어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느부갓네살은 꿈 때문에 번민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나라의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부릅니다. 박수와 술객들이라고 하니까 고상하게 들리는데 쉽게 말하면 이들은 점쟁이들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꿈의 해석 뿐 아니라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까지였습니다. 이것이 묘합니다. 꿈의 내용을 왕이 이야기하면 대충 해석만 둘러치면 되는데 꿈 내용까지도 알아내 달라고 하니까 박수와 술객들은 당연히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장5절 이하를 보십시오.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5,6절).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는 일상적인 꿈 이상의 의미, 즉 마침내 이 꿈을 통해서 다니엘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 대답하는 바벨론의 박수나 술객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10절).“옛날 왕 가운데는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사람이 만고 역사에 하나도 없었나이다”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어떻게 신이 아니고서야 당신이 꾼 꿈의 내용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한마디로, 못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한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12절).
평범한 꿈이었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진노하고 통분하여 모든 박사를 다 죽이라고까지 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이 느부갓네살의 꿈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일 사람의 명단에 다니엘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꿈을 해석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그리고 술객들은 이방 신의 힘을 빌어서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누구의 힘을 빌어서 꿈을 알아맞추던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나 통일교를 매한가지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다니엘의 목숨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이제 죽음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이것이 다니엘에게 찾아 든 위험입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느부갓네살이 자기 마음의 번민을 자기만의 문제로 묻어 두지 아니하고 그 번민으로 인하여 전국의 박사와 술객들까지 다 죽이려고 들었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자기 마음 속에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절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마음 속에 평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내 안에 평안이 없으면 그런 상태의 여파는 제일 먼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에게로 전달됩니다. 화풀이할 사람이 없으면 강아지라도 걷어차게 됩니다. 자기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과 번민을 해소하지 못해 안달하던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의 꿈을 풀지 못한다는 구실로 그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그리고 그 사회의 소위 지식인들을 일시에 다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다스리지 못한 분노나 미움, 응어리진 한이 얼마나 사회적 악영향을 끼치는가를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다니엘의 생애 가운데 급박한 위험이 찾아 들게 된 것입니다.
위험을 기회로 삼은 다니엘
자기가 곧 죽게 된 상황에서 만일 다니엘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장 “이
젠 끝이로구나”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위험을 기회로 승화시켰습니다. 다니엘이 위험을 기회로 선용한 단계를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때를 기다렸습니다.그는 “죽었구나” 하고 날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게 자기가 나설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다니엘의 모습이 제일 먼저 인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둘째로, 다니엘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느꼈을 때 아주 지혜롭게 그 기회에로 접근했습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14,15절).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다니엘을 죽이러 온 아주 절박한 상황입니다.그런데 그는 당황하지 않고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아리옥에게 접근합니다.
“왕의 명령이 어찌 이리 급하지요? 왜 이렇게 왕이 서두르십니까?”
만일 이때 “왜 날 죽이냐, 무슨 죄가 있어서 날 죽이느냐”라고 최후의 발악을 했다면 아리옥은 “닥쳐, 빨리 죽여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성을 잃지 않는 냉철함을 보였습니다. 결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흥분은 절대로 역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흥분하는 사람은 이미 진 것입니다.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마구 흥분하여 열을 내는 국회의원들은 그들이 비리를 폭로한다 해도 하나도 대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이리 급하뇨.”
이런 태도에 끌리어 아리옥은 “그러면 너에게 무슨 수가 있느냐?”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 발휘된 침착함은 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연단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왕의 포도주와 진미를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못 먹겠어요”라고 펄펄 뛰면서 무조건 반항하지 않고 대단히 공손하고도 겸허한 언어로 말했습니다.“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다 먹은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단 1:12,13).
다니엘은 옳은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옳은 말을 지혜롭게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옳은 말을 하면서도 그 의견이 관철되지도 못할 뿐더러 인간 관계마저 파괴되고 마는 데에는 지혜롭지 못한 태도에 문제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니엘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았을 뿐 아니라 다가온 기회에 지혜롭게 접근했습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상황과 직면했습니다. 본문 2장16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기한만 주시면 왕이 꾼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만약 틀렸다가는 당장 죽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이왕 죽을 목숨이니까 이판 사판 한번 해 본 소리일까요? 저는 다니엘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께대한 그의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신뢰가 가능했겠습니까? 추측컨대 믿음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의 사건을 그가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풀어 해석하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다.”
아니,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우리는 다니엘이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아직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에게는 처음으로 자기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가 주어진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했지요? 이제 때가 왔군요. 저에게 주신 그 지혜를 통해서 왕이 꾼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나님의 약속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다니엘로 하여금 배짱을 부리게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니엘이 왕에게 꿈과 그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16절에서 자신 있게 말은 했어도 사실 그는 아직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9절에 가서야 비로소 은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16절의 시점에서는 아직 아무 것도 계시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히
11:1).
보여지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믿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어도 나타나게 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믿으라. 그리하면 보여 주리라.”
하나님의 공식과 사람의 공식은 이렇게 너무도 다릅니다.
넷째로, 다니엘은 위기 상황을 기도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기도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17절 이하를 보십시오.“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17,18절).
다니엘은 집에 돌아와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기도하지 않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기도의 팀을 만들어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기도에도 응답하시지만,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특별한 의미에서의 응답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고 주께서 역설하셨습니다.
제 아들 황이와 범이가 개별적으로 저에게 와서 요청을 해도 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하물며 둘이 같이 와서 단체로 데모를 하게 되면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아바마마, 어마마마” 하면서 무엇인가를 요청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을 약속받습니다.
다섯째로, 다니엘은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저는 다니엘의 그 다음 행동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왕의 꿈은 여차여차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차여차하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답을 딱 주셨다면 우리는 아마 왕에게 당장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응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도 안달하지만 막상 응답을 받고 나서는 은혜를 베푸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인격적인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데 무척 인색한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모습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19-23절).우리의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했다면 반드시 찬양과 감사가 뒤따라야 합니다.
여섯째로, 다니엘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사랑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그저 자기 목숨 건진 데 대해서만 만족하지 않고 다른 박사들의 살 길까지 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기도가 결코 이기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의 기도는 이웃들을 포함할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여기에서 개인의 이기심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곱째로, 다니엘은 마침내 왕 앞에 섰습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의 입술에서 나온 첫 몇 마디의 말에서 우리는 다니엘의 중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다니엘은 자기의 지혜로움이나 우수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다만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높여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박사와 술객들보다 내 IQ가 높아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초점을 맞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높이는 것이 다니엘의 삶의 목표였던 것을 왕 앞에 선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당신의 삶 속에서 찾아오는 위험은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게 위험이 찾아왔다 혹은 안 왔다 하는 사실이 아니라 내게 찾아온 위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반응 여하에 따라서 위험은 당신을 절망으로 인도할 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서
의 삶을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자신에게 찾아온 위험을 통해 오히려 당신을 신뢰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을 때 그를 쓰셔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제 삶 속에 다가올 수 있는 그리고 지금 내가 씨름하고 있는 위기를 단순한 위기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이것을 주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로 선용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