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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華陽)계곡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이재익
속리산 국립공원 영역 안에 있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는 화양동계곡이 절경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치가 빼어난 아홉 군데를 일컬어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스스로 '화양동주'라고 부르며 이곳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였던 곳이다. 원래 황양목(黃楊木)이 많아 황양동으로 불린 이곳에 송시열이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養洞)으로 고쳐 불렀다. 화양동구곡을 명명(命名)한 이는 우암의 제자, 권상하(1641~1721)였다. 화양동계곡의 상류에는 화양동 못지않게 자연풍광이 빼어난 선유동계곡도 있다.
(1) 화양동 9곡의 절경
-제1곡 ; 경천벽(擎天壁) ; 우람한 바위벽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주차장 아래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제2곡 ; 운영담(雲影潭) ;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는 뜻으로 주자(朱子)의 "천광운영(天光雲影)" 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소(沼) 부근에 우암의 유적이 있다.
화양계곡 운영담에서(2010.07.11. 이재익)
운영담
-제3곡 ; 읍궁암(泣弓岩) ;
이 바위는 우암 선생이 효종대왕(1619~1659)께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昇遐)하신 것을 크게 슬퍼하여 효종의 제삿날에 우암이 엎드려 통곡했던 바위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암의 애국심을 두고라도, 잠저시(즉위 이전) 효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니 인간적으로도 얼마나 슬펐겠는가?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하여 읍궁대라고 부른다.
읍궁대 바위
-제4곡 ; 금사담(金沙潭) ; 물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는 4곡 금사담은 화양9곡 중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답다. 물가의 바위 위에는 작고 단아한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암서재는 우암의 독서재(讀書齋)였는데, 우암이 주자(朱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효종 6년(1655)에 처음 세워진 이래로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화양동계곡의 4곡에 해당하는 금사담과 우암의 공부방 암서재
-제5곡 ; 첨성대 ; 금사담을 지나서 나타나는 다리에서 우측 산중턱을 바라보면 층층으로 쌓인 돌무더기가 있는데, 별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첨성대의 암벽에는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 이 새겨져 있다.
제6곡 ; 능운대(凌雲臺) ;
바위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다는 의미. 지금은 길이 나있어서 제 모습을 잃었다.
제7곡 ; 와룡암(臥龍岩) ; 길가에 바위가 용이 누워있는 모습을 닮았다.
제8곡 ; 학소대(鶴巢臺) ; 학이 알을 품는 적벽 절경이다.
제9곡 ; 파천(巴川) 또는 파관 ; 길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흰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는 물결의 모습이 마치 용의 비늘을 엮어 놓은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2) 송시열 유적 ;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
◇ 화양동 서원,`만동묘 현장의 안내문
"1)이 유적은 2)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애국사상과 중국 3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곳이다.
4)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장소였으며,
5)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옛터가 잘 남아 있다. 또한 주변에는 6)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암서재 주변 암벽에 충효절의(忠孝節義), 비례부동(非禮不動)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애국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건립이후 조선조 말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 유적은 7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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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시열유적 ; 만동묘, 화양동 서원, 암서재 등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
2) 성리학 ;
중국의 유학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그 경향이 조금씩 차이가 났다. 고대에는 훈고학 중심이며, 송대에는 성리학, 명대에는 양명학이 발달하고, 청대에는 고증학이 유행했다.
성리학은 불교의 선종 영향을 받아 발달하였으며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즉 성리학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중시하는 유학의 학풍이다.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고 국가를 잘 다스려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 본뜻이었으며 "예(禮)"을 중시하여 우리나라가 예의바른 동방예의지국이 되었으며, 명분론과 의리를 강조하여 국가 유사시에는 전국에서 의병이 벌떼 같이 일어나 조국을 지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주리파와 주기파 등으로 나누어져 이론을 강조하고 예학에 빠져 정쟁을 유발하는 등 폐단도 생겼다. 이러한 성리학의 학풍을 개혁하기 위하여 뒤에 등장한 것이 개신유학적인 실학이다.
3) 반청 북벌정신 ;
송시열 시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겪은 지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던 터라, 명에 대한 정신적 사대가 계속되면서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4) 화양서원 ; 우암이 죽은 뒤 이곳 화양동에는 그를 배향한 화양서원이 세워졌다. 노론 (老論)의 영수인 송시열의 은거지에 세워진 사액서원인데다 인근에 명나라의 신종(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임금)과 의종(명나라의 마지막 임금)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가 있었기 때문에 서원을 중심으로 한 노론 양반들의 세도가 당당했다.
송시열을 제향하는 전국 44 서원중에서 가장 대표적이었고, 제수전 비용충당 징수를 빙자하여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화양묵패는 가난한 서민을 괴롭혔으나 수령도 거역을 못했다. 1871년(고종8)에 철폐되었다.
5) 만동묘 ;
묘명(廟名)은 화양동의 5곡인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 에서 따왔다. 이 말은 주로 충신의 절개 는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상징할 때 쓰는 말로, 곧 대명국(大明國)에 대한 조선의 '신하된 도리' 는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6) 송시열, 신도비 ;
◇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
-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菴)·화양동주(華陽洞主) 등. 충청도 옥천 출생
-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의 문인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요 문신이다.
- 인조 11년(1633), 1635년 봉림대군(뒤의 효종)의 사부가 되어 1년여 동안 가르침.
- 병자호란의 패배와 봉림대군이 청(淸)에 볼모로 잡혀가자 실망 속에 낙향,
- 효종의 부름에 응하여 이조 판서로 발탁되어 임금과 북벌계획을 논의하며 산당계(山黨系) 사림세력은 물론 남인까지 포함한 재야의 인재를 등용하여 향후 사림 위주 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가 효종이 급서하고, 뒤이어 남인 윤휴·허목(許穆)과의 사이에 복제논쟁이 일어나며,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 현종 9년(1668)에 우의정, 1673년의 좌의정 임명 때 잠시 조정에 벼슬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산림재상(山林宰相)이니 산림정치(山林政治)니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 현종 15년(1674)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일어난 제2차 예송은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임금이 그의 복제설을 버리고 윤휴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명분상의 우위상실은 물론이고 그를 지지한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축출되고 그 자신마저 덕원·거제 등지로 유배
- 현종 : 서인과 남인 사이 예송논쟁(상복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
- 처음 1차에는 서인이 승리, 주도, 다음 2차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정권교체
- 숙종때 경신환국이전까지는 공존적 붕당정치(상대 당파도 인정)
* 1차=기해예송(1659): 효종상 때 자의대비(효종 모후) 복제문제
(어머니보다 아들이인 왕이 먼저 승하해서 모후가 상복입는 기간 문제, 효종이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난 혼란이었다.)
서인 1년설, 남인 3년설→ 서인승리
* 2차=갑인예송(1674): 효종비상 때 자의대비 복제문제,
(시어머니가 되는 자의대비가 며느리상을 당해 상복을 얼마나 입어냐 하느냐 문제)
서인 9개월설, 남인 1년설→ 남인승리
- 숙종 6년(1680)의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으로써 귀양에서 풀려나 괴산 화양동에 은거, 문인들과 의리를 강구하고 학문을 논하였다.
-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의 왕자에 대한 세자책봉에 시기상조라고 상소하였다가 전부터 그의 권위에 불만과 우려를 품어 온 임금의 노여움을 사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심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신도비 ; 왕이나 정2품 이상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분의 사후에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
7)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의 수난
만동묘역의 안내 해설문 ;
"이 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23년(1747)에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으며, 순조 14년(1814)에 다시 세웠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29년(1703)에 세운 사당이다. 초기에는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이곳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자 고종2년(1865)에 나라에서 대보단에 모시고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그 후 유생들의 끈질긴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향사케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1917년에 제사를 금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위패와 제사용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버리더니, 1942년에는 묘당 등 일체의 건물을 철거하여 괴산경찰서 등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버렸다.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복원된 만동묘 전경
(3) 화양서원`만동묘의 전횡과 서원철폐
↑만동묘로 들어가는 돌계단,
만동묘 이 계단에서 흥선대원군이 야인 시절에 남루한 모습 때문에 서원문지기에게 발길에 차여서 넘어지는 수모를 겪었던 그 역사의 현장이다. 대원군이 권좌에 오르자 서원철폐의 철퇴를 내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 철폐1호.
만동묘
↑ 만동묘정비 비각과 일제가 쪼아버려서 글자한자 알아볼 수 없는 만동묘정비
병자호란(1636)을 겪은 지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던 터라,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처사는 무조건 옳다며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나날이 방자해진 화양서원의 유생들은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해 관리와 백성을 불문하고 갖은 수탈과 횡포를 일삼았다. 서원의 요구를 거역할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결국 이러한 횡포는 훗날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파락호(破落戶) 시절 이곳을 지나다가 크게 봉변을 당한 대원군은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도둑놈 소굴" 이라면서 철폐해 버렸고, 뒤이어 다른 서원들까지도 문을 닫게 했다.
화양동 서원
고 은
물님 좋구나 골짜기님 바위님 좋구나
화양동 서원
송시열 섬기는 서원이
서른여섯 개나 된다는데
그 가운데서 화양동 서원이
세도 으뜸이었다
심지어는
서원 하인배가 포졸 눈깔 다 빼어
한 놈만 한 쪽 눈알 남겨서
눈깔 빠진 장님 포졸 데리고 가게 했다
나는 새도 잡고
뛰는 짐승도 잡았다
순조 12년
평안도 90만
황해도 50만
강원도 17만
함경도 40만
경기도 7만
그 다음해
전라도 69만
충청도 18만
경상도 92만
이 지경으로 굶주린 백성 널리는데
이 백성의 도탄에 눈 딱 감고
묵패로 백성 잡아다가
족치고
볼기 쳐
온갖 것 다 빼앗아들이니
이 무슨 선비러냐 막된 짐승 아니냐
이런지라
대원군 세도 잡아
서원 7백 개 다 태워 버리고
마흔 일곱 개 남겼으니
대원군 가로되
충청도 사대부만치 나쁜 사대부 없고
평양 기생만치 나쁜 기생 없고
전주 아전만치 나쁜 아전 없다 했는데
이따위 서원 선비들
걸핏하면 헐고 뜯는 상소
복합상소
이거이 무슨 수작인고
이거이 무슨 지랄인고
이거이 무슨 언로이고 심로인고.
◇ 당색의 차이
송시열의 암서재(巖棲齋) 바로 옆에 환장사(煥章寺)라고 부르는 절이 있었다.
화양동서원이 한창 주가가 높았던 때 이 절의 한 스님은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맞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는 뜻이 안 보이며 활달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南人)이었다. 또한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몸을 굽히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老論)이었고, 산수 유람하듯이 만동묘 구경도 대충 끝내고 스님들을 곧잘 나무랐던 사람들은 진보적인 노론(老論)이었다는 것이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머리 모양새까지도 달리했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도록 둥글게 접었고 치마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었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지었다.
이와 달리 소론(少論)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2005.03.14/ <정치인과 헤어스타일>
↓ 송시열 유적지의 화양동사적비는 4면에 빼곡히 새겨져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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