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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그리고,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승리
무장경찰이 반민특위를 기습 공격한 사건이 신문들에 보도되자 그 충격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반민특위의 구성에 환호하고 그 활동에갈채를 보내며 기대가 컸던 만큼 사람들이 받은 충격의 강도 또한 그만큼 컸던 것이다. 거리에서 파는 신문은 연일 동이 났고,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이면 어디서나 그 사건을 입에 올리며 분노하고 규탄했고, 그러나 끝내는 서로서로 절망을 확인하고 탄식을 주고받으며 흩어지고는 했다.
특히 습격을 직접 지휘한 중부서장 윤기병, 그 위에서 명령을 내린 시경찰국장 김태선이 일제의 특별고등경찰 출신이며, 그보다 더 위인치안국장 이호와 내무부차관 장경근은 친일 공무원이었고,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육십여 명의 경찰들 모두가 친일 경력자들이라는 사실이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장경근이 발표한 담화 내용이나, 김태선이 발표한 성명서 내용이 사람들을 더욱 자극시켰다. 국회에서의 결의가 내부무 차관 이하 책임자의 면책 사직을 요구하고 있다는데, 도대체 이번의 특경 무장해제에 있어서 무슨 책임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의문시 않을 수 없다. 원래가 특경대의 존재가 불법적이요 따라서 오래전부터 그 해산을 요망하여 왔는데 끝끝내 듣지 않으므로 이번 경찰에서 실력행사로 그 무장을 해제한 것이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일부 경관의 미숙으로 상사인 검찰총장의 권총을 압수도 하고 또 특경대의 주소록 등을 압수한다는 것이 다른 서류도 같이 압수한 일이 있어 이런 것은 추후 곧 돌려보내는 동시 깊이 사과한 바이다. 여하튼 어디까지나 무기의 불법소지인 특경대를 해체시킨 것이지 특재니 특검에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니 일반은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번 사건은 내무부의 지시로 어디까지나 질서정연하게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요, 결코 경찰반동이라든가 쿠데타는 아니다. 또 최 사찰과장의 보복수단이라고 일부에서는 곡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만 동씨의 검속이 있었기에 그를 계기로 착수한 것이지 그 계획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건국초기에 있어서 삼권분립이 엄연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부에서 사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부당하다. 좀더 헌법을 솔직이 지켜서 건국에 이바지하도록 하여야 할 줄 안다.
이것은 장경근의 담화였다. 유월 사일 특위에서 돌연 최 사찰과장과 조 종로서 사찰주임을 불법 구속한 사실은 현하 내외정세에 비추어 반민특위의 본질에 배치되는 불법행위로서 이는 국가 발전을 위함이 아니라 반정부적도배와 일맥상통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울시 관하 구천경찰관은 특위의 불법처사에 분격하는 한편 신분보장에 대한 대책 없이 현기구 하에 어찌 멸사봉공하느냐는 이유 하에 총 퇴진을 단행하게까지 되었다. 육일 서울시 경찰국이 특위 특경대의 무장해제와 구속을 한 것은 당연 이상의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이 사건의 너무나 중대함에 비추어 여러분 앞에 진상을 천명하는 바이다. 이것은 김태선의 성명서였다.
이 두 사람의 담화문과 성명서에 바로 잇대어 무슨 효과음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남로당원 대량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얼마전 북한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월남하여 오던 남로당원 이십여 명을 검거, 군부에 이송시킨 청량리 철도경찰에서는 이번 또다시 동 사건에서 발각된 남로당인 김임일, 이영생 등 일당 사십육 명을 지난 오월 이십 팔 일부터 팔일 사이에 검거하였다 한다. 이중 삼십 칠 명은 합동정보국에 이송되었다 하며 나머지 아홉 명은 엄중 취조중이라 한다. 일방동경찰에서는 남한 각지에 형사를 파견하고 이들 관계자를 속속 검거 중에있다 하는바 검거 범위는 더욱 확대 될 것이라 한다. 사람들의 분노와 규탄이 절망과 탄식으로 바뀌는 것은 무기를 지녔던 특경대원들이 경찰서로 끌려가서 당한 참상을 확인하고, 맨주먹일 뿐인 자신들의 속수무책을 발견하면서였다. 중부서로 끌려가 구타당한 사람은 서른다섯이고, 열 여섯 사람은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피해범위가 광범해서 외과면 외과 단독으로 진단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므로 각과의 종합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그런고로 아직 전체 진단의 결과는 작성되지않았으며 오늘(팔일) 오후까지 걸려야만 겨우 끝날 것이다. 현재까지 본 몇몇 부상자에게 있어서는 둔기로 구타당한 타박상이 가장 많으며 늑골이부러진 환자가 있는 듯하나 렌트겐사진을 찍어야만 알겠다. 대체로 본 타박상의 치료는 약 삼 주일의 치료를 요하는 정도이며 두부와 안면부상자 중 현재 세 명을 진단했는데 그 중 두 명이 양쪽 고막 파열상을 입었으며 한 명이 한쪽을 파열당했다. 이의 치료에는 약 일 개월 내외를 요한다. 상반신이 진자색으로 멍이 든 타박상에는 내상 유무를 검진해봐야만 알겠다."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살아서 다시 하늘을 볼줄은 몰랐다. 뭇사람이 수족을 결박해놓고 그저 내려 갈기는데 내 정신을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아득한 가운데, 남로당에 언제 가입했느냐, 뇌물을 얼마 먹었느냐, 등등의 소리를 들었다." 어느 특경대원의 말이었다.
"끌려가자마자 양 엄지손가락에다 마이너스 푸라스 전선을 하나씩 감아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등덜미 머리 할 것 없이 린치를 당했다. 까무러쳤다가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 무의식중에 똥을 싸고 있었다. 살줄은 정말 몰랐다." 다른 특경대원의 말이었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는 법률 삼호로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을 근거로 하여 설치되어 독자적으로 국법을 운영하는 국가기관이었다. 이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차관의 담화나 시경국장의 성명은 그런 식이었다. 반민법은 농지개혁법과 함께 국회에 상정될 때부터 친일파집단인 한민당을 중심세력으로 하여 각종 친일세력들의 방해와 저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문제는 민족적 삶을 위해 풀지않으면 안될 숙제였으므로 결국 반민법이 먼저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그 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친일집단은 기가 꺾이거나 수그러든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의 시행을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방해 저지하고 나섰다. 일제 특별고등경찰 출신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 지휘하다가 지난 일월에 사전노출된 특위위원암살음모가 그것이었다. 그 응모자금 뒤에는 친일매판재벌 박홍식이가 숨어 있다는 혐의가 드러났고, 또 그 뒤에는 한민당이 작용하고 있다는 풍문이 진하게 퍼졌다. 그런 조직적인 대규모 살인음모가 노출되기 전에 벌써 특위관계자들은 전화나 편지를 통해서 온갖 협박 공갈을 무수히 받아왔던 것이다. 특위는 그런 위험에 굴하지 않고 박흥식을 필두로 하여 반민족행위자들의 색출과 검거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마침내 특위는 유월사일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계주임 조응선을 검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음날 시경찰국 사찰과를 중심으로 하여 각 경찰서 사찰계원 사백사십 명은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정부를 신뢰하고 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경찰국장에게 집단사표를 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경찰은 특위를 기습 공격한 것이다. 따라서 구속되어 있던 최운하와 조응선은 오후 두시에 풀려나오고 말았다. 이학송은 이비인후과병원을 들러 민기흥·김범우와 약속한 장소로 발길을 서둘렀다.
특위사건이 나고 김범우한테서 두 번이나 연락이 왔었다. 그가 만나기를 바라는 건 심 중위의 일을 끝낸 데 대한 술자리 마련이기보다는 그 사건에 관한 궁금증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걸 헤아리면서도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워낙 사건이 사건이어서 뒤따르는 기사를 줍느라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나흘이 지나가 버렸고, 닷새 만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과음은 금물입니다아." 의사의 말에, "소음만 하겠읍니다아. " 대꾸했던 것이다. 치과는 이틀 다니는 것으로 통증이 가라앉았는데, 귀는 앞으로도 열흘 정도 더 다니라고 했다. 모기우는 소리는 거의 가셨는데, 갑자기 찡 울리는가 하면, 예리한 쇠꼬챙이로 깊이 쑤시는 것 같은 순간적인 아픔이 진저리를 치게 했고, 어느 때는 바람이 가득 찬듯 부풀어오르는 느낌으로 왼쪽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는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증상은 고막이 파열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터져버리지 않고 금이 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얼마나 마구잡이로 무지막지하게 볼을 갈겨댔으면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에 고막 터진 사람이 열을 넘었을 것인가. 물론 그들은 고막만 터진 것이 아니라 다른 타박상도 입고 있었다. 약속한 다방에는 민기홍과 김범우가 먼저 와 있었다. "벌써들 나왔구만. 아니지, 내가 십 분 늦었군." 이학송은 건성으로 시계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자네 혼자 기자 같군. 시간 좀 지켜." 민기홍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꼬집었다. 김범우는 눈인사를 하며 웃었다. "이 사람아 너무 그러지 말게. 그놈의 알량한 기자질 덕에 병원 들러오느라고 그랬네." 이학송은 무의식중에 왼쪽 귀로 손을 올렸다. "왜, 자네 특위에 겸직했었나?" 그래서 구타라도 당했느냐고, 민기홍은 영리하게 생긴 모습에 어울리게 재치있게 물었다.
"그리 됐네. 그날 아침에 정문을 돌파하려다 개머리판 세례를 받았지." "저런, 아직도 병원엘 다니면, 심하게 다친 것 아닌가?" 민기홍은 트집을 잡으려던 장난기를 버리고 정색을 했다. "괜찮네. 고막에 금이 갔다는데, 과음은 안돼도 소음은 허락받으니까." 이학송의 얼굴에는 전과 다름없는웃음이 인상 좋게 감돌고 있다. "빌어먹을, 그놈들이 배워먹은 짓이란 사람 두들기는 것밖에 없으니 원." 민기홍이 쓴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왜 이러나 이 사람아 그 기술로 공산당 때려잡은 위대한 애국자들이셔. 이 나라 치안확보를 담보로 대통령한테까지도 큰소리 탕탕치는 분네들 아니신가." 이학송은 민기흥의 무릎을 가볍게 치며, "어쨌거나 앞길이 양양한 나라니까 우린 술이나 마시러 가세." 그는 김범우에게 일어서자는 눈길을 보냈다. 세 사람은 청진동을 향해 걸었다. 여름이 완연했다. 해가 길어졌고, 어스름이 내리는데도 무성한 가로수 잎새들은 그대로 더위를 물고 있었다. "김형, 미안하게 됐소. 워낙 정신없이 바빠서그만. 이학송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읍니다 저어, 심중위가, 다시 고맙다는 말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한번 찾아 뵙겠다구요." "아, 그분 다시 만났소? 어떻게 됐어요?" "심 중위 부친께서 굳이 자리를 만들어서, 만났읍니다. 아직 그는 쉬고 있는 상탭니다." "글쎄, 그 사람도 군대생활 해나가기는 어려울 게요. 군부에서도 벌써 광복군 출신이나 학병출신들은 한직이나 난직으로 밀리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그레이샴의 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잖소, 악화가 양화를구축하는." "예에…" 김범우는 아직 잔영이 남은 서쪽 하늘로 먼 눈길을보냈다. 저녁 요기를 겸해서 안주는 빈대떡과 비지감자탕을 시켰다.
김범우는 민기홍과 이학송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잔을 차오르는 막걸리의 그 틉틉한 질감이 문득 염상진과 손승호와 안창민을 떠오르게 했다.
"하아, 과연 많이 발전했군. 주저없이 술잔을 턱 받는 걸 보니 비로소 사람으로 뵈는군." 이학송이 민기홍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럼, 전에는 짐승으로 뵌 모양이군." 민기홍이 코웃음을 흘리며 받아넘겼다.
"아니지, 잘못 태어난 예수의 사생아로 보였지. 자아, 들세," "흥, 그 말 괜찮군." 민기홍이 술잔을 들며, 안경 너머로 꾸짖듯한 눈길을 이학송에보냈다. "자아, 우리들 친일파의 더욱 번성을 위하여." 이학송이 말했고,김범우는 쿡 웃었고, 민기홍은 쯧쯧 혀를 찼다. "앞으로 특위는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신문에는 활동을 재개한다고 났던데요" 김범우가 깍두기를 집어들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일 텐데, 김형도 예측하고 있겠지만, 내 생각으론 마지막 몸부림이 아닐까 싶소." 이학송의 신중해진 어조였다. "그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 아닌가?" 술을 찔끔 입에 댄 민기홍이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는사태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마찬가지니 어쩌나. 국회의 권위나 기능이 경찰력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 나라는 본래 개념과는 별개의 경찰국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네." "그건 또무슨 소린가?" "자아, 술 받으시오. " 이학송은 민기홍의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김범우에게 술 건네고, 술을 따랐다. 김범우도 이학송에게 잔을 건넨다. 이학송은 술을 반나마 비우고, 빈대떡에 김치를 얹어 한입 가득 몰아넣고는 느릿느릿 씹고 있었다. "귀 아프다더니 잘만 먹는군." 민기홍이 습관인 듯 코웃음을 흘렸고, "위가 아픈 게 아니니까요." 김범우의 말에 이학송은 푹 웃음을 터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가 안주를 느리게 씹고 있는 건 무슨 생각인가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김범우는 짐작했다. 그는 아무 서두름 없이 소가 되새김질하듯 안주를 씹고 있었다.
"술을 권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민기홍이 김범우에게 불쑥 말했다. "아, 아닙니다. 천천히 드시죠." 그 갑작스러움에 김범우는 엉덩이를 들었다가놓았다. "예수꾼들 저리 뻔뻔스러운 것에 나 비위 상한다니까.못 마시면 말이나 말지." 안주를 다 넘긴 이학송이 민기홍에게 눈총을 쏘고는, "그게다른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경찰집단이 정치 개입을 감행할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는 뜻이네. 특위가 늦게나마 발족된 것은 소망스럽고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오늘의 운명에 처하게 된 건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길이었어. 이건 체념론이나 운명론의 입장에서 지껄이는 희떠운소리가 아니고, 실천론에 입각해서 분석을 할 때 그런 결론이 나온단말일세." 김범우는 술잔을 기울이며, 법대 출신다운 어법이라고 생각했다.
"말 계속하게." 민기흥이 술을 찔끔 마셨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덴 적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큰일일수록 더 그렇지. 반민특위는 그 적기를 찾지 못했네. 특위를 발족시킨 뜻이야 백번천번 좋았지만, 뜻만 가지고 일이 되나. 특위 활동이란 애초부터 흉기든 강도 맨손으로 잡겠다는 식이었고, 토끼가 호랑이한테 덤비는 격이었지 뭔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해서 정치권력이, 경찰을 중심으로 해서 무장세력이 확고하게 조직된 현실에서 글쎄, 무슨 수로 그들을 처단한단 말인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정의를 살리자, 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백번 당연한 명분만으로 일이 되는가. 특위 활동이란 무슨 계몽운동이나 순화운동이 아니라, 죽이고 죽는 목숨을 내건 싸움이었단 말이네. 특위 활동을 시작하면 친일반역자들이 꼼짝을 못할 줄 알았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도록 순진한 감상이지. 그들이 그정도 양심을 가졌다면 아예 친일도 반역도 하지 않았겠지. 그 목숨을 내건 싸움의 폭발이 이번 사태고, 특위는 당연한 패배를 한 셈이지. 물론 그전에도 도전이야 무수히 많았잖았는가. 노덕술이 지휘한 특위위원 암살음모, 전화나 편지질의 공갈 협박 , 친일파들에게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하필이면 파고다공원에서 매일 특위 해체를 외친 데모, 그런 것들이 효과가 없으니까 이번엔 경찰이 직접 나선 것 아닌가. 군정의 비호 아래 이승만·한민당·경찰이 상호협력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며 만들어낸 첫번째 작품이 단정수립이고, 그 두 번째 작품이 이번 사건인 특위 박멸이겠지.
그리고, 사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특위는 유명무실해지지 않았나. 박흥식이가 백삼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버리고, 재판 결과는무죄 아니었나. 특위가 죽을 고생 해가며 잡아들이면 뭘 해. 재판에서 다 그 지경 만들면 도로아미타불이지, 그런데도 특위는 역시 그들 세세력한테는 마땅찮은 존재였던 거지, 민중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여론이 조성되는 곳이었으니까. 편안한 권력유지를 위해서 그들은 마땅히 특위를 깨부숴야 했던 거야." 이학송은 목이 마른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기자로 썩기 아깝게 언변 한번 좋네마는, 그럼 자네 말은 뭐야 그러니까 특위는 애당초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건가?" 민기홍의 눈이 안경 속에서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야, 그 반대지." 이학송은 허리를 곧바로 세우며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는.
"아까 적기라는 말을 했는데, 우리에겐 그 기회가 딱 한번 있었네, 친일반역자들의 처단은 해방이 된 그날부터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감행됐어야 했던 거야. 그자들은 거의 몸을 숨겨 스스로의 죄를 입증했으니까 골라내고 말고 할것도 없었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 민중들에겐 이십 일이 넘는 절호의 시간이 주어져 있었어. 거기다가 건준이 신속하게 조직구성을 했지. 그런데 민중들도 그 아까운 시간을 허송했고, 건준도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민중조직을 결속시켜 그 일을 단행하는 데 소홀히하고 말았어. 그나마 나라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미군의 비호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버리는데 물론 미군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해 저지른 범죄야 엄연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들 스스로는 그 기막힌 이십 일 동안을 뭘했느냐고 냉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그거네. 난 그때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나 민중들의 의식과 역량을 새삼스럽게 회의하게 됐고, 여운형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됐지. 만약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그 이십 일을 우리처럼 허송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과연 우리 민족에게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민형 자넨 극단론이다 논리주의다 하고 공박하겠지만, 난 그때 이십 일을 잘못 살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네." 이학송은 술잔을 들었다. "아니, 그럼 ?" 민기홍이 다급하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묻지 말고 적당히 상상하게." 이학송은 눈을 사르르 내려 감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김범우는 그런 그에게 깊은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논리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것도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유한 생김 속에 그런 열정과 과단성이 들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다. "제길, 나만 지껄이고 있군 . 김형, 얘기 좀 하쇼. 김형 말솜씨가 좋던데." 이학송이 잔을 내밀며 김범우의 눈을 직시했다. 그 눈길이 맵고 차가움을 김범우는 느꼈다. 저 눈이… "하던 말씀을 다 끝내야 제 차례가 오죠. 저도 말 좀 하게 해주십시오." 김범우가 잔을 건네며 비식 웃었다. "이. 자리에 말 못하는 사람 없다니까. 자넨 여태 한잔짼가?" "아니네, 다 마셔가네. 어서 애기나 계속해, 감독까지 하지말고." 민기홍이 술잔을 기울여 보이며 말했다. "아아, 장하네. 바야흐로 예수의 적자가 돼가는군." 이학송은 김범우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뽑으며, "우리 저 친굴 앞으로 주정뱅이를 만들 때까지 노력을 바치도록 합시다." 가성을 만들어 말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김범우가 성냥을 켜주며 흔쾌하게 대꾸했다. "악동들이로군. 자아, 술 받게." 민기흥이 기세 좋게 이학송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한잔 술에 불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더 돋보였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이학송은 두 손을 모으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민기홍의 잔을 받았다. 그런 그를 김범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에서는 더우기 그의 내면은 철저하게 감춰지고 있었다. "물론, 예기치 못했던 해방이 너무 갑자기 와 민중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그 중요한 시간을 놓쳐 버렸고, 일본경찰은 계속 무장상태에 있었으며,건준에서는 미군점령에 대비한 국가 기구를 만드느라고 그 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 또 어떤 창백한 인도주의자는 법적처벌기준도 없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라는 거냐고 공박하고 들 수도 있겠지. 그럼, 일단 놈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착취할때 어떤 법적 기준을 가지고 했던가? 제멋대로 아니었는가 말야. 그런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그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법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는 외적으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적으론 민족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네. 민족혁명이란, 민족반역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는 인간혁명과 사회제도 전반을 뒤엎어 새로 창출하는 정치혁명과 두 가지가 평행적으로 완성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을 극형 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삼십육 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만가를 따져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백오십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삼백만으로 줄여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 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의 꼴이 되고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 써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나 . 더구나 특위까지 저리 되고 말았으니 이제끝장난 나라 아닌가." 이 말을 하는 동안 이학송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고 짙은 눈썹은 심하게 꿈틀거렸다. 긴 한숨을 쉬고 난 그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범우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말을 되새기고있었다. 미국의 남쪽 점령 목적이 제국주의 세력확장이었고, 그 목적달성에 필요한 정권을 세운 결과로 보아 그의 파악은 정확하고도 명료했다. "난 자넬 만나면 말야, 설득 당한 것 같애서 기분 나빠. 김형, 안 그렇소?" 민기홍은 기분 나쁜 척한 얼굴로 김범우에게 눈을 돌렸다. "저처럼 동의해버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 내가 동지를 구하려다가 적을 만났네." 민기홍은 반듯하게 잘생긴 이마를 가볍게 치고는,"어쨌든 양키들이 틀려먹었어" 하며 상을 찡그렸다. "이 사람아, 그런 소리 쉽게하지 말라니까. 그런 생각이야말로 무책임한 책임 전가야. 뭘 좀 안다는사람들이 힘 하나 안 들이고 그런 소리하며 편안해하는 걸 보면 난 울화통이 터져 못 견디겠어. 똑같은 발상으로, 분단도 강대국 책임이다, 하고 앉았는데 다 넋 나간 작자들이야. 미국놈들이나 쏘련놈들이나 다 우리 땅 집어삼키려고 들어온 도둑놈들인데, 도둑놈들이 무슨 책임을 지느냐 그 말이야. 책임이야 주인한테 있는 거지.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해방되자마자 친일 반역자들을 모조리 말살했어봐, 미국이고 쏘련이고 자기네들 뜻대로 못했어. 민족이 이미 한덩어리가 된 데다가, 속으로 붙어먹고 싶은 자들이라도 잘못 붙어 먹었다간 친일반역자처럼 또 죽어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누가 감히 붙어먹겠나 말야. 추종세력이 없는데 그놈들이라고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목적을 포기하고 물러가야하고, 우린 떳떳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는 거지." "에이, 그건 너무 환상적 당위론이네." 민기흥이 습관적인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학송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며 얼굴이 경직된 듯하더니 이내 풀어지며,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자네답지가 않지, 자넨 이 땅의 모범석 지식인이니까. 자네가 어떻게 말하든 난 그것이 환상적 당위론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필요로 한 실제적 방법론이었다고 믿고 있고, 우리가 저지른 역사에 대한 직무유기는 앞으로 두고두고 우릴 괴롭힐 것이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려 한다면 필연코 그 방법론을 통과하지 않으먼 안된다는 것도 믿고 있네. 다시 말해 고건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 지운 짐이고, 풀기를 요구하는 숙제지. 자넨 역사허무주의나 역사초월주의입장에 있는지 모르지만, 난 역사발전주의와 역사창조주의를 믿네," 그의 울림 좋은 목소리는 낮게 흐르듯 하고 있었다. "자네, 귀에 과음한 건아닌가?" 민기흥이 전혀 눈치보는 기색 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지도 모르겠군. 내가 괜히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것 아닌지 모르겠소?" 이학송이 김범우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김 범우는 손까지 저었다. "슬슬 일어 나봅시다." 이학송의 말에 따라 술자리를 끝냈다. 술집 앞에서 민기홍과 먼저 헤어졌다 "어디 가서 한잔 더 하시겠읍니까?" "우리 폭음 말고, 자주 마시도록 합시다, 김 형." "그러시죠, 그럼." 큰길에 이르러 두 사람은 헤어졌다. 김범우는 술기운에 몸을 맡긴 채 약간씩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종로사가 쪽을 향해 걷고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분열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이학송이가 한 말들의 의미가 그의 의식의 단층들에 부딪치며 의미 확산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끝장난 나라지…그래, 그건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답일 것이다. 아니, 아니, 정답이다, 정답. 한 번 배신한 자 두 번 배신하고, 한번 거짓말한 자 두 번 거짓말하는 법이다. 그건 습관성이 아니라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를 위한 필수행위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옳소!"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다 살려놨다. 그러므로 직무유기한 바보들은 그 자들에게 되잡혀 먹히게 된다. "옳소!"다. 불란서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보나마나 가차없이 비질을 해버렸겠지. 그들은 이미 해 보였어, 이차대전이 끝나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아니었었나. 나치 협조자, 레지스탕스 밀고자부터 처단하지 않았나. 그들은 우리와 달라, 인종에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가 달라, 그들은 인간의 삶이 바로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고 창조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 고런 체험을 했으니까,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시켰거든. 우린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어, 그러니 역사에 대한 존엄도, 신뢰도,책임도,냉엄도,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역사적 행위를 한 이학송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악인이 된거지. 해방과 동시에 친일반역자들을 민중의 힘으로 말살하지 못한건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 지운 짐이고, 풀기를 요구하는 숙제라고? 옳은 말이고,무서운 말이야. 이 선배, 그런 사고정리를 할 수 있는 당신은 상당한 사람야, 아냐, 정직한 사람야, 당신은 역시 민기홍하곤 달라, 당신은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으려 하고, 민기홍은 한사코 역사를 피하려 하고 있어.
그러나 당신 조심해, 국회의원도 빨갱이로 잡혀 들어가고, 특위도 빨갱이소굴로 몰아치는 세상이야, 기자라는 게 방패가 못돼, 구타도 당했잖아. 왜 당신을 보고 염상진 선배 생각이 날까. 염상진… 염상진… "인석씨,인석씨, 저 사람 봐요, 저 사람!" 남자와 나란히 걷고 있던 여자가 빠르게 속삭였다. "어? 어디, 어디?" "바로 앞. 슬쩍 봐요, 슬쩍." 여자가 얼굴을 피하듯 하며 더 빠르게 속삭였다. 그들과 김범우가 엇갈려 지나쳤다. "저사람, 김범우 아냐?" 인석이라 불린 젊은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김범우가 뭐예요, 김 선생님이지." 젊은 여자가 입술을 삐쭉하며 눈을 흘겼다. 그녀는 송성일의 누나 송경희였다. "날 지금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몇 살 차이 난다고 선생님이야?" "어머,예의 없고 상스러. 근데… 분이 서울엔 어쩐 일일까?" 송경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겠지 뭐. 가자구, 빨리. 경희 바래다주고 돌아갈려면 나 시간 없어," 젊은이가 송경희의 옷깃을 끌었다.
그는 최익달의 큰아들이었다. 아아, 멋져… 고개를 숙이고 약간씩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김범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경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김범우를 생각했다. 다니러 왔을까, 이사를 왔을까. 최인석만 없었으면 아는 체를 했을 텐데. 그냥 아는 체할걸 그랬나. 최인석이 어째서. 아냐. 최인석이 아니라 그 어떤 남자였더라도 남자와 함께 가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분은 여전히 근사해, 결혼을 해버려 파이지만. 계집애들이 다 그걸 아까와 했었지.
어쨌거나 근사한 건 근사해. 서울에서 밤에 보니 더 멋있어. "아직도김범우 생각해?" 최인석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요, 무슨 일로 오셨을까 하구요." "제길, 그럼 인살 하지 그랬어." "인석씬 내가 김선생님 생각하는 게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쁘긴, 답답해서 그러지," "답답할 거 없어요, 잠시 궁금했을 뿐이니까." 송경희는 자기 감정을 눈치채이거나 의심받기가 싫어서 자르듯 말했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온다음에도 정하섭에 대한 감정의 갈등으로 한동안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를 죽인 한패거리로서의 증오감과 마음을 맡기고자 했던 이성으로서의 사모감 사이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고문했다. 전처럼 그를만날 수 있다면 차라리 해결이 빠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자취도 없었다. 증오를 한다고 복수를 할 것도 아니었고,마음을 그대로 간직한다고 합해질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 두 가지를 다버려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 실천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전부터 관심을 표해왔던 최인석의 접근을 허용하게 되었다. 최인석은 정하섭에 비해 인물도 모자랐고, 정서감도 부족했다.
정하섭 앞에서는 자신이 잘났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었는데, 최인석 앞에서는 으레 자신이 잘났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차이를 마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채로, 그의 아버지가 부자니까, 그의 큰아버지가 국회의원이니까, 하며 그 부족감을 상쇄하려고 했다. 김범우는 전매청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불을 환하게 켠 전차가 돈암동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불빛으로 전차 안이 환히 드러나 보였다. 얼핏 투명한 내장을 들여다보는기분이었다. 미쳤군, 그럼 저 속에 있는 사람들은 회충이나 촌충이란말이냐. 김범우는 자신에게 말하며 비식 웃었다. 어설프게 마신 술이 갈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술을 입에 대면 곤죽이 되도록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병이 도지려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싶은 만큼 술을 함께 마실 누군가도 간절했다. 역시 술을 잘 마시고, 술에 지지 않는 사람은 염상진 선배였다. 손승호도 곧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끝장에 허물어지기 일쑤였고, 안창민은 술을 잘 마셔보려고 애는 쌨지만 향상이 없는낙제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법인 노래 솜씨로 그 모자람을 채우는 능력이 있었다. 좀체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염 선배의 노래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불렀다 하면 아리랑타령이었는데, 특히, 끄응끄응끄으응 아라리가아아 나으읏네에에, 하는 대목이 절창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그뜻 모를 말에 실리는 속 깊은 회한과 한스러움과 구성짐과 서러움과 눈물겨움과 아슴함과 그러면서도 휘드러져 감기고 다시 풀려 흐르는 그 유연함은 무엇인 것일까. 염 선배, 그는 남이 듣지 않게 가슴 깊이로만 그 가락을 읊조리며 오늘도 그 가락처럼 흐르는 어느 산줄기를 타고 있을것인가. 지금쯤은 조직의 선에 의해서 그도 특위사건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당연한 결과라고 비웃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당위성을 더욱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 역사는 허무한 것이아니다. 치열하지 않은 삶이 없듯 역사 또한 치열하다. 그 치열함의 응집으로 역사는 창조의 힘을 얻는다. 서민영 선생의 말로는 새로 온 사령관이 극우적 망나니라던데, 염 선배는 상대적으로 어떻게 될까. 막상 더 싸울 맛이 날지도 모르지. 그런 위인의 통제 아래서는 산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남겨진 가족들이 더 문제지. 가만 있자, 지난 오일엔가 만들어진 또 하나 반공조직이 뭐더라? 응, 그렇지, 국민보도연맹. 공산당에겐 그게 또 복병이 되겠지. 어쨌거나 갈수록 분단은 굳어져, 가자 집으로, 아니, 하숙방으로. 혼자 마시는 술이 어디 술이냐, 독이지 나도 술좀 참을 줄 알아보자. 김범우는 부족한 술기운마저 가셔가는 걸 느끼며 길을 걸었다. 국민보도연맹 결성이 전국화 되면서 벌교에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멸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 입버릇처럼 하며 읍민들의 불평과 비난은 아랑곳없이 전체적인 사상검토를 위해 읍내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열성적인 백남식에게 국민보도연맹 벌교지부 결성은 신바람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민보도연맹은 새로운 관제반공조직으로, 그 목적은 폭력적 방법과 병행한 비폭력의 방법으로 공산당 활동을 저지 또는 무력화시키는데 있었고, 그 방법은 이미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하여 과거경력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음을 입증함으로써 새로운 전향자들을 유도해내는 것이었다. 그 "관대한" 처사는 이미 전향의 뜻을 품고는 있지만 불안감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사상적으로 회의를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는 파급효과를 나타낼 만도 한 방법이었다.
그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지부 결성으로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게 된 사람은 손승호였다. 백남식은 손승호에게 지부위원장을 맡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저는 그런 일을 맡을 만한 능력이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골라보시지요." 손승호의 태도는 공손했고 목소리는 간곡했다. 코가 말끔해진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굳어져 있었다. "능력이 따로 필요 없소. 일이야 우리가 다 알아서 하는 거니까 당신은 감투만 쓰고 앉았으면 되는거요." 백남식이 내질렀다. "말이 그렇지 일단 일을 맡고 나면 어디 그렇게 되겠읍니까. 이런 저런 모임도 있을 것이고, 잡다한 일이 생기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이들 가르치는 것만도 힘에 벅찬 입장입니다." "아하! 하라면 했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소." 백남식이 책상을 쳤고, 손승호의 감정은 꿈틀 요동쳤다 "무슨 말을 그리 막 합니까! 본인의 의살 무시한 이런 강압적인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손승호의 어조가 바뀌면서 태도가 도전적으로 변했다. "당신 정말 이따위로 나올 거야, 이거. 멸공전선에 스는 데 본인 의사가 뭐 말라빠진 본인 의사야. 당신 하는 꼴보니까 사상이 의심스러. 전향 이거 위장전향 아냐!" "맘대로 생각하시오, 난 못하니까." 손승호가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새끼 거기 서! 쏴죽이기 전에 거기 서!" 백남식이 소리질러댔고, 손승호는 아무런 주저없이 사무실 중앙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때 권 서장이 자기 방에서 황급히 나와, 막 문밖으로 튕겨나오고 있는 백남식을 막아섰다.
"사령관님, 잠깐만 참으십시오. 일이 되도록 해얄 게 아닙니까. 저 사람이 원래 좀 저렇습니다. 사령관님 체면에 저런 사람 상대로 이러시면 됩니까." 권 서장은 급한 김에 손승호를 몰면서 백남식의 비위를 얼러맞추었다.
백남식을 제지하는 데 "사령관님 체면"이 썩 잘 통한다는 것을 권 서장은 간파해놓고 있었다. 권 서장은 그 말을 곧잘 써먹었고, 그 말이 효과를 나타내는 걸 보며 속으로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빨갱이질이나 해처먹은 놈을 사람대접 해주겠다니까 이 새끼가 되레 배짱으로 나오는데, 권 서장, 저새끼 저거 사상이 불온한 거 아뇨? 위장전향 아니냔 말요." "글세요,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만…" 권 서장은 얼버무렸다. 모양도, 색깔도,냄새도 없고 그래서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고 꼭 바람 같기만 한 그놈의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큰소리치거나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놈이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기어코 그 자리에 앉히고 말 테니까,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백남식은 작은 입을 더 작게 오므려 붙이며 돌아섰다.
권 서장은, 저놈의 오기가 사람 잡겠구나, 생각하며 도대체 백남식이가 어떻게 손승호를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권 서장은그걸 확인해 볼 마음이 없는 채로 어렴풋이 염상구를 떠올렸다. 권 서장의 추측은 정확했다. 손승호를 그 자리에 앉혀 염상진과 싸움을 붙이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 염상구는 권 서장도 거치지 않고 백남식에게 직접 귀띔을 했던 것이다. 손승호는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이번처럼 험악해지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기분이 언짢게 헤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손승호는 앞이 확 막혀버린 것 같은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두 패로 갈라진 거대한 편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으깨져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유일의 길이었다. 목숨을 지탱하려면 그것에 굴복해야 했고, 목숨을 포기하려면 그것에 대항해도 좋았다.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실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의 구차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저녁에 권 서장이 찾아왔다.
"손 선생님, 제가 어쩔 수가 없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지 않을려고 저대로 무진 애를 썼읍니다만 사령관이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령관으로 앉었는 한 손 선생님을 그자리에 앉혀야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어쩌겠읍니까. 현실 아닙니까. 선생님 괴롭히지 않도록 제가 보장할 테니 이름만 올려두도록 하시는 게 어떻겠읍니까. 저를 믿어주시고, 그렇게 해주시지요." "절 위해 애쓰신 것, 고맙습니다. 제가 밤새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손승호의 담담한 대꾸였다. " 어머님 보옵소서 자세한 말씀 못 드리고 떠나는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제 걱정은 절대 하지 마시고, 저를 찾으려고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제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창숙아, 어머님께 이 편지 잘 읽어드리고,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님 잘 모시거라. 그리고 여기 사표는 학교에 전해라. 어머님 부디부디 건강하십시오. 불효자 승호 올림" 손승호는 편지를 다시 읽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이 뒤죽박죽 되며 코허리가 찡하니 울려왔다. 굳이 편지를 남긴 것은 어머니 때문만이 아니라 식구들이 백남식에게 당할 고초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손승호는 소리 없이 집을 빠져나왔다. 아침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었다. 손승호는그 안개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손승호와 백남식 사이에 그런 말썽이 오가고 있던 동안에도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홍보가 날마다 각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반민족적행위를 저지르며 불안에 떨지 말고 하루빨리 자수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 충성하며 떳떳하게 살아가자, 하는 것이었고, 이웃이나 친척 친지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자수를 권해 다 함께 웃으며 살아가도록 협력하자, 는 두 가지 내용이었다. 그리고 보도연맹원이 될 사람들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거기에는 병원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던 전명환 원장·간호원·이지숙이 들어 있었고, 정하섭 사건에 관계되었던 정현동사장·소화 ·들몰댁도 끼여 있었다. 경찰에서는 사건별로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그들은 백남식 앞에 서서야 자신들이 왜 불려왔는지를 알게되었다. "이게 무슨 당찮은 말씀이오. 난 의사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지 공산당 활동을 한 게 아니오." 전 원장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꾸짖듯이 엄하게 말한다. "딴 소리 마시오. 증거가 엄연히 있소." 백남식이 옆눈으로 쏘아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뭐요, 도대체." "당신네들은 무죄가 아니라 집행유예란 말요, 집행유예! 무죄 판결이 죄가 없는 거지 집행유옌 엄연히 죄에 대한 처벌이다 이말이오." "아니 그건…""시끄럽소!" 전 원장이 헉 숨을 토했고, 간호원은 물론 이지숙도 입을 꼭다물고 서 있었다. 이지숙은 이 사실을 염상진에게 전했다. "수용하시오"하는 지령이 돌아왔다. 이지숙은 그 동안 확장해왔던 조직보호를 위해 초긴장상태로 들어갔다. "내 아덜눔이 빨갱이지 난 빨갱이질헌 적이 꿈에도 옳소. 난 빨갱이라먼 치가 떨리는 사람이오. 그 눔은 내 새끼가 아니라 철천지 웬수요, 웬수. 당장 날 빼씨요, 빼." 그때까지도 이사를 못가고 발이 묶여 있던 정 사장은 펄펄 뛰었다. "활동자금을 댄 건 당신이 아니라 귀신이었나?" 백남식은 차갑게 비웃었다. "그거야…" "잔소리말앗!" 정 사장은 "사령관 각하!" 하며 책상을 붙들었고, 소화와 들몰댁은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이삼 일이 지나도 손승호의 행방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경찰서의 분위기는 살벌하기만 했다. 열에 받친 백남식은 수시로 자기 방을 들락거리며 결과를 확인했고, 그때마다 책상이고 의자고 닥치는대로 걷어차며 빨리 잡아들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런데 그 소동을 멈추게 할 만한 의외의 일이 생겼다. 책방주인 문기수가 제 발로 백남식을 찾아와 자수를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자수로 까무라칠 만큼 놀란 것은 토박이 경찰들이었다. 본정통에 책방을 차리고 앉아 있던 그가 작년시월에도 노출되지 않은 그리도 오래 된 세포라는 사실의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경찰들의 놀라움은 즉각 백남식에게 영향을 미쳤다. 백남식은 전향자 제일호인 문기수를 위원장에 앉히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그리고 문기수가 작성하는 전향을 위한 자술서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읍내의 세포조직을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설레이던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시시콜콜이 적어 내려간 자술서 내용은 그가 말단 독립세포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우같은 빨갱이새끼들! 기대가 허물어지는 허탈감을 씹으며 백남식이 함께 씹은욕이었다. 담배를 권해가며 최고의 호의로 포장된 대화 아닌 심문을 통해서도 그가 독립세포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좋소, 문기수씨의 전향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 환영의 뜻으로 문기수씨를 보도연맹 벌교지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자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 예 저에게 그런 자리까지… 감사히 맡겠읍니다." 문기수는 머리를 조아렸다.
일단 허물어진 기대를 깨끗이 지워버린 백남식은 제이의 기대를 설정했던것이다. 문기수를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다른 세포를 유인할 수 있는 파급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문기수의 전향과 지부위원장이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쓴 것에 대해 이지숙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자는 이미 변질돼있소. 언제 등을 돌리느냐만 남아 있는 자요. 회생시킬 가망도 없고, 우리가 볼 피해도 없으니 방치하시오." 염상진이 읍내 조직을 맡기며 이미 오래 전에 한 말이었다. 모내기가 걸판진 한바탕 잔치처럼 지나가 온들녘을 초록빛으로 물들여놓을 즈음, 유월 이십일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그 소식은 신문에 앞서 방송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읍내 중심가가 아닌 각 마을에는 라디오가 한두 개 있을까 말까 했는데도 그소식은 바람 탄 불길이 되어 삽시간에 벌교 전체를 뒤덮었다. 그도 그럴것이 조심조심 하는 귀엣말도 바람 빠르기로 소문이 되는 법인데, 사람들은 그 소식을 "워메에, 인자 살판났네에, 농지개혁이 된다네에." "동네사람 다 듣소오, 농지개혁법이 맹글어졌다네에." 이렇듯 목청을 돋우어 외치며 고샅고샅을 돌았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찌든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며 밝고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고, 어떤 여인네들은 "워메, 인자 우리 살게 되얀네!" 하며 서로 얼싸안았고, 어느 남자는 논두렁 좁은 줄도 모르고 "어허 조옿타, 조옴도 조옿타, 이 내 시상이 인자왔고나"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논바닥으로 곤두박히기도 했다. 누가 제안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당산나무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네전체가 맞이하는 좋은 일이나, 마을 전체가 겪어야 될 궂은 일이 있을때마다 사람들은 으레 당산나무 아래로 모였던 것이다. 그건 할아버지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랜 풍습이었다. 그런데 으례껏 보여야 할 몇몇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장이나 구장 등 논마지나 가진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소작인들은 자기들에게 길조일 수밖에 없는 농지개혁법이 그들에게는 흉조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그 사람덜이 빠지고 우리만 뫼이고 본께 자리가 영 썰렁헌 것 겉고 요상시럽네잉." "글먼 그 사람덜이 나올 성불르등가? 시방 그 사람덜 속에서넌 천불이 올를 것이네." "지주덜이야 우리가 요리 좋아라 허는 꼴이 웬수로 뵈겄제" "그런 말 허덜 말어. 본전얼 뽑아묵어도 열 곱. 백 곱 뽑아묵고도 그런 심뽀 가진 눔덜이 워째 우리럴 웬수 삼어. 웬수 삼자먼 우리가 삼어야제." "말 한 분 쌈빡허니 잘허네. 우리가 모다 그리 똑바라지게 맘얼 묵어야써." "하먼, 우리가 쫄쫄이 굶을 적에 즈그눔덜이 알은 칙이나 혔간디. 서리서리 맺힌 한이여."
사람들은 이렇듯 서로서로를 부추기며 자기네들만이 모인 어색스러움을 금방 물리쳐버렸다. "인자 우리가 살판난 시상이 와서 요리 뫼였는디, 워찌 요러고들 있능가! 꽹매기도 치고, 술추렴도 한바탕 혀얄 것 아니겄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고, "하먼, 돼지추렴은 못혀도 술추렴이야 혀야제." "하먼, 하먼, 이날이 오기럴 우리가 을매나 눈빠지게 고대혔등가. 술추렴허세." "워야, 삼봉아, 꽹매기 안 치고머 허냐." "여그 가질로 가는 참이시," 자리가 하나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근디 말이시, 농지개혁 되는 것이야 죽은 엄니 되살아오는 것맨치나 존일인디 산에 들어간 사람덜언 워찌 되는고?" "나도 그 생각얼 쪼간혀봤는디, 워찌 될란지 알겄다고?" "인자 손 들고 나오먼 안될랑가?" "글씨, 그리되먼 을매나 좋겄능가. 요분에 나라가 그 법도 항군에 맹글었으먼 좋겄네," "그리만 됨사 그보담 더 존 일이 워디 있겄능가. 요런날 올지 알았음사 그 사람덜도 멋났다고 산에 들어가 그 고상 사서 혔을것이여." "하먼, 그 사람덜이 무신 죄가 있어. 해방되고 바로 농지개혁했음사 다 순허게 잘 살 사람덜이었제." "그나저나 그리 안되먼 그집안덜이 큰일이시." "금메, 각다분허겄제." 남자들이 흐드러진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뒷전에서 서너 여자가 가만가만 주고받는 말이었다.
그들은 농지개헉법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아직 그것을 알 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멀잖아 농지개혁이 실시되어 금년 농사부터 내 차지가 될거라는 사실이 그들을 기쁨으로 들뜨게 하고, 벙긋벙긋 웃게 하고, 꽹과리치고 술 마시게하고, 덩실덩실 춤추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간절한 목마름으로 자기 농지 갖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통행금지도 잊고 당산나무아래서 꽹과리치며 춤추고 노래 불렀다. 해방을 맞이해서 터져 오른 신명은 서로가 아무런 거리낌도 막힘도 없이 팔 뻗어 수십 리에 이르고, 다리 굴러 하늘에 닿도록 신바람을 일으켰던 뒤로 사람들은 실로 처음 맛보는 기쁨이고 흥겨움이었다. 그런 소작인들의 부풀어오른 기대 뒤에서 지주들의 논밭 빼돌리기는 제각기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져 나가고있었다. "쩌것이 그 물건이냐?" 화문석 위에 올라앉은 최익달이가 거만스럽게 물었다. "야아, 그렁마요." 앞으로 손을 모아 잡고 선 마름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틀림이 웂겄어." 최익달은 왼쪽 마당가 석류나무아래 후줄근하게 서 있는 사내에게 매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야아,수십 분 다졌구만이라." 마름은 방아깨비처럼 입만 열었다 하면 따라서 허리를 꺼덕거렸다. "어허, 수십 분 아니라 골백 분 다지먼 멀혀. 인종이 되야묵어야제, 인종이. 맘뽀가 의리 지키게 되야묵었냐 그것이여." "야아,저 인종이 살짝허니 모지래기도 허고, 그럼시로 입도 무겁고 혀서 쓸만허구만요 .무신 잔꾀 부릴 줄도 모르고, 시키먼 시키는 대로 허는 것이, 그간에 젂어봉께 틀림이 웂었구만요." "만일에 무신 탈이 생기먼 다 자네 책임이란 것 알제?" 최익달은 옆눈길로 마름을 쏘아보았다 "야아, 알구만이라." 마름이 마른침을 삼켰다. "되얐어, 요리 델고 오소." 최익달은 책상다리를 고치고는 수염도 없는 턱을 쓸어대며 큼큼 헛기침을했다. 마름은 종종걸음을 치며 마당을 가로질러가 사내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연상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나 그리고나서 마름의 뒤를 웅크린 채 따라 걸었다. "어여 어르신네헌테 절올리소." 마름이 옆으로 비켜서며 사내한테 눈짓했다. "야아. "잔뜩 주눅이 든 사내는 주춤주춤 최익달의 정면으로 맞춰서더니, "어르신네, 절받으시게라" 하며 댓돌 아래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 자네가 칠복이여?" 최익달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야아, 들몰 오칠복이구만이라." 몸을 일으킨 사내는 허리를 굽힌 채 고개도 들지못하고 대답했다. "자네. 이 서방한데 이약 다 들었겄제?" "야아, 모다 허라는 대로 영축웂이 허 겄구만이라." 사내는 마름에게 다짐받은 말을 성급하게 쏟아놓고 있었다. 마름 이 서방은 그런 사내를 눈흘김하며 속으로 마구 혀를 차대고 있었다. "머시럴 영축웂이 허겄다는 것이제?" 최익달이 무시하는 쓴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야아, 긍께로… 머시냐…어르신께서…" 사내는 결국 말을 못하고 겁질리고 당황한 얼굴로 마름을 쳐다보았다. "되얐어, 되얐어. 그만허먼 되얐어," 최익달은 만족스럽게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내의 그 변변찮음이 딱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마름의 빠른 눈짓에 따라 사내는 들고 있는 고개를 수그렸다. "나가 자네앞으로 논얼 열한마지기 이전시키는 대신에 자네 몫아 치로 한 마지기럴 그냥 주겄다 그것이여. 그 비밀얼 철통겉이 지키겄다 그것이제?" "야아." "마누래헌테도 지키겄어?" "하먼이라." "술 묵고도 입 안 놀리겄어? " "하먼이라." "만일에 입 잘못 놀려 그 소문나먼 한 마지기 도로 뺏긴다는것 알제?" "야아, 알구만이라." "되얐어, 여그 와서 도장 눌러." 최익달의 말에 따라 사내는 쭈뼛쭈뼛 마루로 다가갔다. 그리고 최익달이 넘기며 손가락 끝으로 짚는 여러 장의 서류에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도장을 눌러갔다. 그건 열 마지기에 대한 소유권 포기각서였다.
최익달은 친가와 처가 쪽으로 두루 손을 뻗쳐 믿거라 하는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이전을 시킨 것은 오래 되었고, 그래도 논은 남아돌아 소작인 몇몇을 골라 강매를 했으며, 이제 마지막 남은 방법으로 그 짓을 하는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다른 무슨 방법이 없을까를 골몰하고있었다. 안재문 형제는 심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학교재단이라는 데도 무한정 전답을 재단재산으로 등록헐 수가 웂다드란말시. 그라고 우리만 그런 부탁을 허는 것도 아니고. 허니 다른 방도럴 찾어야 쓸 것이네." 안재문이 동생을 쳐다보았다. "이거 참, 재산이 있는것도 죄가 되는 요상시런 시상이 되얐구만요. 근디 다른 무신 똑별난 방법이 있어야 말이제라. 우리 문중으로 보자먼 거지반 밥술 챙기고 사는 헹펜이니 친척덕 보기도 틀렸고라. 강매럴 허자니 살 만헌 것덜도 웂는디다가, 법이 통과되고 난께 작인 눔덜 기세 등등해져 날치는 꼬라지가 예전 겉지도 않고요." 동생 안재용이 고개를 저었다. "으쩌까, 우리가 그냥 학교를 하나 맹글어뿌까?" "학교를요? " 안재용이 놀란 눈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그리 놀랠 것 머 있는가? 넘찾아댕김서 사정만 헐일이 아니고 우리가 학교를 하나 맹글어뿔먼 간딴허게 일 해결나는 것아니겄능가? 운영이야 월사금 착착 받어서 허고, 그럼스로 전답 안 뺏게서 좋고, 교육자로 행세해서 좋고, 고것이 하나또 밑지는 장시가 아니시." "그리만 생각허먼 그런디, 학교가 그냥 맹글어지는 것이 아니라 큰 밑천이 쏟아져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해야제라." "그려, 고것얼 안 생각헌 것이 아닌디, 땅이야 있는 땅이고, 돈 드는 것은 건물 세우는 것인디, 한분짓기만 험사 멫 십년 가는 것잉께, 전답 영영 날리는 것보담이야 한분 큰돈 쓰고라도 전답 평상 지키는 것이 이문 아니겄어? 그 밑천이라는 것도 넘 주는 것 아닌디." "금메요, 그럴란지도 몰르겄는디요." "되얐네, 요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도청에 올라가서 학교 세우는 법얼 세세허니 알아보고, 몫돈이 을매나 드는지도 따져보고 그러세. 요리 앉어서 생각허는것보담 실지로 알아보먼 그리 큰돈이 안 들란지도 몰를 일 아니겄능가?" "그렇제라. 다 알아보먼 속이야 씨언허겄제라." "그려 , 그냥 지주다 유지다 허는 것 보담이야 교육자다 허는 것이 훨썩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지 안컸다고? 전답은 전답대로 다 지니고 있음서 말이시." "그야 그렇제라." "되얐어, 내일 당장에 도청으로 올라가보드라고. 별 치장도웂이 벽돌 착착 쌓올리는 학교건물이 지까징 것이 돈이 들먼 을매나 들겄어. 번듯허게 짓는 기와집 열 채 값이먼 되겄제." "그 정도로만 됨사당장 혀볼 만허제라. 그만헌 돈 딜이고 평상 교육자로 존대받음서 큰소리치고 산다면야 너무 싸제라." "그려, 그려. 농지개혁 덕에 우리 성제간에 팔자에 웂는 교육자가 될란지도 몰를 일이시." "성님 생각이 용허시요." "아니시, 그 말이야 학교럴 떡허니 맹글아놓고 들어야제." 두 형제는 맞바라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