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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기념관 (출처- 블로그명 : 밝은 미래)
정면에 걸린 태극기는 개천절 기념으로 추가로 걸린 것이다. 광복 6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서울시청에 걸렸던 1호 태극기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서울시청 본관 외벽에 설치 됐던 3천600장의 태극기 가운데 고유번호 ‘1번 태극기’가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이준 열사 기념관’에 증정된다. ‘시청 태극기’ 3천600장에는 각각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1번 태극기를 ‘이 준 열사 기념관’에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 서울시 설명이다.
이준 열사 기념관 (출처- 카페명 : 100일간의 유럽이야기)
1995년, 데 용 호텔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전 주인으로부터 매매될 위기였던 데 더해 주변지역이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됐던 것. 이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한 교민부부의 헌신 덕이었다. 1991년부터 이준 열사 기념사업을 해오던 네덜란드 교민 이기항(68), 송창주(65) 부부는 사재 20만 달러를 털어 매입위기에 놓인 이 건물을 구입했다.1995년, 이 건물이 공개 입찰을 통해 매입될 위기에 처하자 이씨 부부가 헤이그 시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 "당시 이 건물이 언론에 공개돼 매매될 처지에 놓였는데, 우리가 헤이그 시청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정식 청원서를 냈다. 헤이그 시청측은 그 뜻이 매우 좋다고 인정해서 신문에 공고하지 않고 직접 우리가 구입하도록 배려했다. 건물을 포함하는 지역이 재개발 대상에서도 제외됐고, '호레카법'(네덜란드의 호텔 레스토랑 카페 관리법) 적용 건물에서 박물관 시설로 변경해 주었다." 수리와 개보수를 거쳐 1995년 8월 5일 개관하게 된 이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은 이씨 부부가 네덜란드, 일본, 러시아 등지의 문서보관소, 도서관 등에서 마이크로필름을 뒤져가며 직접 수집한 것들이다. 엄청난 전시물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 근대사의 한 궤적을 뚫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당시 네덜란드 신문 자료는 을사조약에 대해서 "새로 체결된 한일협약은 한국의 지배에 대해 일본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였다"라고, 헤이그 밀사 사건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한국의 황제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대가로 아마도 폐위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기념관 소개글에는 "유럽 한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될 것이며, 나아가 한국문화 세계화의 창구, 나라사랑, 정의사랑, 평화사랑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설립 취지가 담겨 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건물 입구에 걸린 태극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단번에 눈에 띈다. 해외에 있는 한국 유적지가 태극기를 내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 부분의 태극기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일제시대에 초등교육을 받았던 북한 출신 이기항씨는 어린 시절에는 일장기가 우리나라 국기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후 월남하고 나서야 태극기에 대해 알게 됐다고. 그는 곧 다가올 이준 열사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태극기에 관한 수필을 집필중이기도 하다.
기념관 전신인 데 용 호텔 (블로그명 : 밝은 미래)
1907년 만국회의 당시 건물 모습(데 용 호텔). 네덜란드 1978년 연감 수록. 사진 옆 페이지에는 '헤이그에서 발생한 한국인들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이준 열사
1859년 12월 18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난 이준의 본명은 이순칠(호 일성(一醒), 해사(海史), 청하(靑霞), 해옥(海玉)). 이다. 그는 1894년 초시에 합격해 함흥 순릉참봉에 임명됐으나 곧바로 사직했다. 이어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한 후,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됐으나 조신들의 불법행위를 파헤치다가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됐다. 이후 독립협회 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 대학 법과 졸업 후 귀국한 뒤 독립협회 활동을 재개하다 체포됐다. 이준은 수개월 뒤 석방됐으나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이어 대한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됐으며, 그의 시신은 1963년 네덜란드 헤이그 묘지에서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됐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 요약 정리
이준 열사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terry_woo/60032521046)
박물관에 소장된 3인의 특사 사진. 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 왼쪽부터)
이준 열사의 순국
우리는 일찍이 고종 양위의 동기가 된 헤이그 밀사사건을 잘 알고 있다. 그곳에 파견된 사람은 이상설, 이위종, 이준 3인으로 이들 특사 일행들은 헤이그에 도착해서 을사조악의 무효성을 폭로하면서 열강의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로 결실을 못거두고 게다가 이준은 회의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칼로 할복자살을 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는 할복자살한 것일까? 이준은 헤이그에서 활동을 하던 중 순국하자 국내에서는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평화회의의 참석이 봉쇄된 열사가 비분강개하여 할복자결한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을 최초로 전한 매체는 대한매일신보로써 1907년 7월 18일자의 "의사가 자결"이란 제목의 호외였다. 그 내용은 '전 평리원검사 이준씨가 이번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사람이 다 알고 있거니와 어제 보내 온 동경전보에 의하면 이준씨가 충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 " 라는 기사이며 다음날에도 대한매일신보는 호외로 이런 내용을 전하였고, 당시 신문들외에도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김윤식의 속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도 동일한 소식을 전했는데 이 책들에 나오는 이준 자결설과 관련된 내용의 근거는 대부분 신문 기사나 풍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당시의 반일이라는 시대 분위기와 어루러져 국민들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현재까지도 이준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자결설을 나타내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가 이준의 자결설을 보도한 다음날인 1907년 7월 19일자 황성신문은 약간 다른 내용을 실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금번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들이 참여하고자 하다가 거절당했다는 것은 본보(本微)에서 보도하였다. 전문(電聞)한 즉 세 사람중 이준씨가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빼어 자결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同友會) 중에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더라."라고 하며 자살설이라는 신중한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현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신문들도 다른 내용의 기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유력지인 헤트·화데란트란 신문의 1907년 7월 15일자 기사를 보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행위에 항거하고자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국대표 이상설, 이위종 두사람과 함께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저녁 서거하였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모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라며 할복자결이 아닌 병사로 기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지연의 이준전이란 글에서 이준의 사인을 병사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내용은 "이준은 이상설 등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이위종과 합류하여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1907년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프리카나 남미 소국들도 모두 평화회의에 참석할수 있었는데 , 유독 한국만 참석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특사 일행은 장문의 글을 써서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평화회의 회장과 구미 열강대표들에게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당하였다. 이준은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울분으로 인해 병을 얻었다. 마침내 병으로 여러 날 일체 식사조차 못하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날이 바로7월 14일이다. 그는 임종할 때에도 눈물을 철철 흘리며 비장한 얼굴로 분개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였을 정도였다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건데 이준 열사의 죽음은 익히 알려진 바처럼 회의장에서 배를 칼로 가르고 할복자살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고 할 것이다. 물론 보다 극적인 장면은 할복자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애국심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할복을 했건 낯선 이국 땅에서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병사를 했건 그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외교권이 빼았긴 상황에서 의로운 활동을 하다가 거룩한순국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애국심은 지금까지도 우리마음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흉상, (출처- http://blog.naver.com/terry_woo/60032521046)
평화 친필 휘호 (블로그명 : 밝은 미래)
아웅산 수지, 넬슨 만델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 친필 휘호. 넬슨 만델라는 1995년 9월1일, 1996년 11월26일 두 번에 걸쳐 평화 휘호를 전하기도 했다
평화기원 메시지 (카페명 : 여행 사진 모음)
평화기원 메시지
이 준 열사가 받은 훈장들
평화 지도
고종황제 칙령 (카페명 : 여행 사진 모음)
고종황제 칙령
고 박정희 대통령 휘호
당시 신문들 (출처- 카페명 : 여행 사진 모음)
이준 열사 사망 관련 자료들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순국했으며, 사인으로는 자살설과 병사설 두 가지가 있다. 네덜란드 대표언론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는 1907년 7월 17일자에서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보도한 반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7월18일자 호외를 발간,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언론의 정식보도는 7월19일자. 그러나 당시 발행된 사망 진단서에는 사인(死因)이 없다. 1907년 7월 14일 한국에서 온 이준이라는 이름의 한 기혼 남성이 죽었다는 내용이 전부다. 일본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스즈키 대사는 7월 17일 이준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친필 서한에서 단독(丹毒, 상처에 세균감염)에 의한 사망과 자살설 두 가지 모두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 참조 정리>
네델란드 당국이 발행한 사망진단서인데 병명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지금까지 걸었던 태국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기항 송창주 부부 (블로그명 : 밝은 미래)
개관자 이기항 송창주 부부 ( 블로그명 : 밝은 미래)
이와마츠가 기증한 천 마리 종이학과 평화 기원 메시지. 1999년 5월 13일 일본 나가자키 대학 이와마츠 명예교수는 손수 접은 종이학 천 마리를 갖고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어떤 곳'을 찾아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이와마츠를 비롯 일본인 관람객들은 "용서를 구한다" "잊지 말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헤이그 외곽 묘지의 이준 열사 무덤 (블로그명 : 화려한 시절)
「헤이그」교외 「니에·아이큰다인」공동묘지 안에 있는 이준(李儁)열사의 묘지는 1977년 흉상과 묘비(墓碑)가 제막되어 한결 정화돼 있다. 외무부의 「李열사 묘적(墓跡)정화사업」은 3천 5백만원을 들여 이루어졌다. 조각가 백문기씨(전 이대(梨大)교수)사 높이 90cm·어깨 폭 72cm·가슴두께 40cm의 청동 흉상(胸像)과 높이 2·3m의 조석묘비, 그리고 애석(艾石)으로 만든 상석(床石)과 화강암 석병풍, 대리석 화병(花甁)·향로(香爐)들을 모두 서울에서 제작, 옮겨왔다. 묘역바닥과 울타리에 쓴 화강암은 거울같이 비치도록 7천번의 물갈기로 곱게 갈았다. 습도가 유달리 높은 「네덜란드」지역에서 돌의 산화를 막고 이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李열사의 흉상은 분사(憤死) 며칠전 「헤이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에 따라 수염이 있는 기품있는 모습이다. 열사의 묘지를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은 그침이 없고 싱싱한 꽃다발도 끊이지 않고 놓인다.「파리」의 유학생이건, 서독에서 일하는 광부들이건 한국인들은 이역(異域)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달래고 뜨거운 동족애를 확인하려는 듯이 열사의 묘지를 찾는다. 기자가 李열사의 묘역의 묘역을 찾아들었을 때에도 두 어린이를 이끈 한 한국인 주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2년엔 저녁 늦게 닫혀버린 공동묘지의 담을 넘어 들어간 한국인 청년들이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단지 애국열사의 묘역에 참배하려는 순수한 뜻」이 판명되어 석방, 화제가 된 알까지 있었다. 묘역은 원래 가로 3·6m, 세로 2m가 못돼 몹시 협소했고 묘비의 국명조차 잘못 표기돼 있었다. 확장은 「네덜란드」정부와 공동묘지측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인접 묘지의 연고자들을 설득, 이들의 묘지를 옮기고 8필지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 1978. 6. 30 중앙일보 - -이 근 량(李根諒) 특파원-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외곽의 한 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 묘지에는 열사의 묘비와 흉상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준 열사가 도착한 헤이그 역
감리교회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 구입
독실한 감리교인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순국했던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가 헤이그에 세워진다. 최근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박영준 감독(이준 열사 기념교회 추진위원회 위원)과 상동교회 서철 목사는 네덜란드 현지를 방문, 헤이그에 위치한 ‘레잇스켐담 천주교회’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로 재건축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날 서명식은 현지 공증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신경하 감독회장의 위탁을 받은 서철 목사가 계약전권위임서에 서명함으로 이뤄졌다. 레잇스켐담 천주교회는 77만 유로에 구입하기로 했다. 원화로 9억5천만원 상당이다. 앞으로 재건축 등의 마무리 작업은 네덜란드 헤이그한인교회 이창기 목사가 맡아 수행한다. 이준 열사 기념교회 설립 계획은 지난 2005년부터 추진돼 왔으며, 작년 제27회 기감 총회에서는 3월 4일을 이준 열사 기념주일로 정했다. 이준 열사 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기감 산하 전국교회는 오는 3월 4일 이준 열사 기념주일을 통해 특별헌금을 받을 예정이다. 중앙연회는 기념주일에 앞서 각 연회 2백여 교회에 이준 열사 기념주일 특별헌금 봉투를 배부했으며, 신경하 감독회장도 “기념교회 건립헌금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서신을 전했다. 2007년은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고종 황제 특사로 파견됐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려 무효화 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이준 열사를 위해 간곡히 기도한 후 출발시켰지만 이준은 일본 측의 방해로 회원이 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언권을 얻은 그는 일본을 규탄하는 연설 후 할복 자살로 쓰러졌다. 지난 2월 27일 이준 열사 순국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주한 네덜란드 라딩크. J. 반 볼렌호벤 대사는 “이준 열사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이상을 통해서 세계시민이 되었다”며 “그 분은 조국 땅에 묻혀 있지만 그의 정신은 정의와 평화의 도시 헤이그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우표
애국선열이자 감리교회 청년인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이 한창인 가운데 때마침 항일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됐던 헤이그 특사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돼 화제다. 액면가 2백50원, 발행량 1백60만 장으로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헤이그 특사 3인과 고종황제의 위임장으로 디자인 됐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항일 독립운동의 여명을 연 사건이라는 점과 열강 45개국이 모인 외교 무대에서 동양의 은둔국 한국을 알린 최초의 특사외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우정사업본부는 “100년 전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운 헤이그 특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기념우표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우표 발행에 맞춰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우표 및 전시액자를 증정할 예정이며 내달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헤이그 특사 100주년 행사에도 국가보훈처 행사 방문단을 통해 기념우표와 액자를 전달할 계획이다.
(출처- 기독교타임즈/윤선주 기자/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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