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5-6.
캠코더의 암시 2.
그때 장과장이 자다가 일어난 머리로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형사에게 출동명령을 내리고 급하게 달려왔는지 양말도 제대로 못신고 온 모양이었다.
"과장님."
윤형삭 아버지 같은 장과장을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두 형사에게 사건정황을 듣고난 장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한쪽으로 치켜올렸다. 깊은 생각을 할 때마다 눈썹이 치켜올라가듯 입술이 치켜올라가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살인보다는 자살 쪽이 더 가능성이 많은 게 아닐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스코리아 진을 노리고 이루어진 독살이라는 느낌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군."
"과장님, 자살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파티가 축하파티였고 피살자는 3주 전에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그야말로 화려한 인생을 막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녀에게서 자살의 그림자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자살 장소를 파티장으로 정한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파티가 끝난 후 잠자리에서 음독자살했으면 모를까. 더욱이 유서도 없는 상탭니다."
남형사는 자살 가능성은 제로라고 못박고 있었다.
"외부인의 침입 가능성은 없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테라스에서 주방으로 통하는 문과 홀로 직접 들어올 수 있는 출입문, 그리고 미리 침입해서 2층에 숨어 있다가 살금살금 내려와서 모든 사람들이 댄스에 시선이 쏠려있을 때 파라티온을 칵테일 속에 몇 방울 떨어뜨릴 수 있겠지만 시간상으로나 현장 사람들의 증언으로나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내부인 소행이 확실합니다."
"댄스를 추고 있던 8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이라....... 그것도 주방에 있던 네 명도 진과의 독살에 무관해 보인다....... 그럼 최종적으로 남은 두 사람은 연박사와 유여사뿐인데......"
잠시 후, 여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간 장과장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권의원과 재회의 악수를 나누었다. 연예인 마약사범 때 변호를 맡았던 금지선 변호사도 함께 일어나 장과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장과장, 고인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지금 여러 분들이 곤경에 처해 있네. 축하객에서 졸지에 용의자로 몰린 심정을 이해하겠나?"
"의원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살인가?"
"현재로서는 거의 틀림없는 독살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권의원은 다리 힘이 쭉 바지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어떻게 사건을 처리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동이 틀 때까지 사건을 해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도 비공개로 수사를 진행시키고 싶지만 피살자가 워낙 뉴스감이라서 하루도 안 돼서 기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어쩌겠나. 내 안위를 위해서 여러 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세상의 온갖 눈초리와 구설수에 올라도 이 또한 내 운명이니 거역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이제부터는 장과장 방식대로 수사를 진행시키게나. 아름다운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장과장의 특수수사과 천재들을 총동원해서라도 검거를 해주기 바라네. 휴, 치명적이야....... 이번에 장관이 되면 문화계를 위해서 할 일이 참 많았는데, 허허허......"
권의원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뒤로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연박사님하고 유여사님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올라왔습니다만......"
잠바 차림의 장과장이 초대객들을 둘러보자 연박사와 유여사가 서로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 나서 장과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 말고 조용한 장소가 없을까요?"
연박사는 앞장서서 침실 옆에 있는 서재로 장과장과 유여사를 안내했다. 연박사가 두 개 달린 형광등 줄을 연속해서 위 아래로 당기자 서재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제가 듣기론 미스코리아 진이 숨졌을 때 두 분만이 테이블에 같이 앉아 계셨다는데, 다른 분들처럼 댄스를 추지 못했기에 앉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나 역시 댄스를 추고 싶었지만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보혜 양에게 한번 댄스를 청했지만 한복을 입고 있어서 불편하다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더군요."
"유여사님께서는 어째서......"
"보시다시피 저 역시 한복을 입고 왔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춤 추기 좋은 의상으로 입고 오는 건데......"
유여사는 한복을 원망섞인 눈으로 보며 권의원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여사님은 윤보혜 양을 언제 보셨습니까."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 때 미스 서울로 선발된 후에 강여사의 의상실에서 봤어요. 그때 나비향 양도 같이 봤어요."
"아, 그렇습니까? 강여사가 추천한 두 미녀가 나란히 진.선에 당선되었군요. 저 역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TV로 봤는데, 제 기억으로는 나비향이 출신지역이 경기도로 되어 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본적지나 연고지가 있으면 어느 지역에서나 출전해도 상관없어요."
"아, 네......, 유여사님은 녹미회의 회장님이라서 잘 알고 계시리라 여겨져서 여쭙는 건데요, 진의 유고시 그 권한은 누가 대행하게 됩니까?"
"당연히 미스코리아 선이 진으로 인정됩니다. 미는 선으로, 4위 입상 미녀는 미로 격상됩니다. 자연적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는 거죠."
"그럼 앞으로는 나비향 양이 진이 되어 왕관을 쓰겠군요."
"그래야 되겠죠. 세계 미녀대회에도 참가해야 되고 또 사절로서 각종 행사에 참석해야 되기 때문에 진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장과장은 잠시동안 말이 없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과장이 2층에서 두 용의자를 만나고 있을 때 윤주희 형사는 홀에서 강여사와 마주보고 선채로 수첩에다 초대객들의 명단을 적고 있었다.
"초청된 분의 위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모두가 미스코리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제 의상실 고객이시기도 하구요. 이번 일로 바쁘신 분들에게 엄청난 폐를 끼쳐드리게 되어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강여사는 진이 숨진 테이블을 애써 외면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헌데, 별장에 초대된 여성분들의 명단을 보니까 금지선 변호사님만 빼고 모두 미스코리아 출신들이시군요."
"당연히 그럴수밖에요. 저 역시도 그렇지만 모두가 녹미회 회원이예요. 보혜와 비향이를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파티가 자주 있었나요?"
"석달에 한 번 꼴로 모임이 있었어요. 여기서의 파티는 오늘이 처음이었고, 호텔 같은 장소에서는 여러 번 있었어요. 물론 다른 분들의 별장에서도 여러 번 파티가 있었고요."
강여사는 자연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보혜양을 미스코리아로 추천하신 걸로 아는데 언제 윤보혜 양을 처음 만났나요?"
"1년 전쯤이예요. 우리 의상실에서 종업원을 한 명 고용하려고 했는데 광고를 보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나봐요. 의상실을 닦고 쓰는 단순 고용직이었기 때문에 성격만 좋으면 아무나 쓸 생각이었는데 보혜가 제일 먼저 우리 의상실에 들어온 거예요. 화장기도 없고 의상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애였어요. 영락없는 미스코리아 재목감이었지요."
"올해 나이가 만으로 스무 살로 나와있던데요."
"네, 스물한 살이예요. 보혜는 고아였어요. 성남에 있는 고아원에서 일곱살 때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양녀로 입적되었는데, 보해가 열여섯 살 때 공장이 불타고 그 화재로 양부를 잃고 양모와 함께 거리로 나앉게 되었대요. 양모가 생선장수를 하면서 단칸방에 세들어 살았는데, 그때 보혜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조그만 회사에서 경리 겸 청소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나봐요. 그런데 졸업을 얼마 앞두고 양모마저 암으로 운명하는 바람에 또 고아가 되어 혼자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만 되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졸업하고 나서도 그 조그만 비디오 공급회사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했는데, 도저히 성격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며칠 쉬다가 우리 의상실 앞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광고를 보고 들르게 되었다는군요. 몇 달만 일하면서 맘에 드는 직장으로 옮길 생각으로 우리 의상실을 들른건데......"
강여사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윤형사는 진이 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