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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2장 42-50절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많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요한복음 자체만 보더라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라든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라든가 하는 이적들을 보이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기록하고 있는 오병이어 사건도 기록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도 기록합니다. 이런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요, 구약에서 예언 해 오던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면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이적이 눈 앞에서 나타날 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내용 속에서 지옥에 간 부자가 이런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죽은 자가 살아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반드시 믿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로 하자면 구약 성경을 의미하는데, 구약의 말씀을 통해 듣고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수많은 표적, 또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더라도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지 않으면 결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본문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믿기 시작한 것이지 참된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을 보고 믿기 시작했다면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만 알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사탄의 이적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표적 앞에서도 믿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을 들려줘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들은 표적을 보면서도, 또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53장 1절의 말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바로 이 말씀을 이루는 역사로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사야 6장 10절의 말씀을 이루는 역사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으로 믿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 때문에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믿으려고 할 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믿지 않도록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죄로 벌하실 수 있습니다. 저들의 죄에 대한 공의의 형벌로 죄를 벌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서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만,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저들에게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있지 않도록 저들의 눈을 멀게 했다,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 이어 오늘 본문으로 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부류만 있지 않고, 또 다른 부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42절과 43절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일단 믿지 않는 자들과는 달리 관리 중에서도 믿는 자가 많았다고 증거 합니다. 어쩌면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처럼 또 다른 표적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지난주 살폈던 내용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표적을 행했을 때 믿지 않는 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는 자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공직에 있는 자들 중에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많다’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보다 많다, 혹은 전체 중에서 반 이상이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믿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특별히 관리 중에서 믿는 자가 꽤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요9:22 참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믿음과 고백이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니고데모처럼 나중에 참된 믿음의 고백이 있게 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믿는다고 말하긴 하지만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는 자가 많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는 자신의 믿음을 숨기다가 나중에 고백한다는 측면에서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혹 그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이라는 전제 아래 그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의 시작은 믿음의 성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지만 참된 믿음이기에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자라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네 가지 밭 중 좋은 땅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진다고 해서 무조건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30배를 맺을 때도 있고 60배를 맺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100배를 맺으려면 완전해야 하는데, 이 땅에서 100배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항상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십니다.
어쨌든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다고 할 때 지금 사도 요한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는 긍정적으로 믿는 자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제 막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연약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43절은 좀 더 근본적인 원인, 왜 믿는다고 하면서도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지, 출교를 당하는 것이 왜 두려운지를 보여주는데,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관리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게 되면 출교를 당하게 됩니다. 출교를 당하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유대 사회의 관리로 있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일이 두려워 믿으면서도 믿음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땅의 영광을 하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3-24) 부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관리도 이 말씀에서 예외라 할 수 없습니다.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까? 동일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영광을 하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소망은 이 땅에 있지 결코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아올 당시만 하더라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밤에 찾아오는 자였습니다. 언제부터 믿음의 싹이 나오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을 숨겨오다가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유대 지도층의 승리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바로 그때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던 겁니다. 부자가,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관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할 정도로 어렵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이어지는 말씀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5-26)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다만 이런 신앙의 과정은 있을지라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그 자리는,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그 자리는, 단순히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으로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살 정도로 귀하고 복된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는 말씀도 있지만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내 목숨은 잃어버릴 수 있지만 복음은 잃어버린 목숨을 다시금 찾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자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단순히 믿음이 연약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핑계일 뿐입니다. 그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칼빈 시대 때 니고데모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주의 안에 있으면서 신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교황주의가 잘못되었다면 나와서 개신교로 들어오든가, 아니면 그 안에서 교황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든가 해야 하는데, 그 안에 머물면서 자신의 정당한 신앙을 고백하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습니다. 왜 이들을 니고데모파라고 하는가? 진리를 따라 살 것을 외면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예로 들어 자신을 변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칼빈은 너희가 말하고 있는 니고데모는 너희와 분명 다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요한복음 19장을 통해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런 성장을 바라지 않는 자처럼 있습니다. 단지 요한복음 3장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믿음이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도 씁니다(갈5:6). 당연히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연약한 믿음이고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있게 만드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가 이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단지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믿는 자로서 믿는 자답게 행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부끄러울 수는 있지만, 하나님 사랑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약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다고 말합니다(빌3:7).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 즉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는 이 칭호들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알아줄만한 모든 것들, 오늘날로 하자면 세상이 알아줄만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우리 역시 이렇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여겨야 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여겨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는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대로 생활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염려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을 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연약하다는 것으로만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44절 이하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선 44절과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많은 표적을 행했지만 그를 믿지 않는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배척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로 있다. 그리고 그의 뜻만 따르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수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오셨지만 그는 참 하나님이시도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성부이신 하나님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양자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은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본다는 것은 안다, 혹은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깨달아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알고 깨닫고 믿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표현합니다(골1:15).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히1:3).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다는 것은, 저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6절을 보시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어둠이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어둠이라면 그런 어둠 가운데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둠이 빛을 싫어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 저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빛이 아니라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도 빛으로 나아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가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깨달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둠에 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죄로 말미암는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어둠에 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탄의 결박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42절과 같이 믿기는 하지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여러분, 어둠 가운데 있을 때는 어둠의 속한 일을 행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단지 어둠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어둠에 속한 자로 어둠을 나타내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둠에 있을 때 어둠을 나타내는 자로 있었다면, 당연히 빛의 자녀가 되었다면 빛의 자녀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고백이 없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주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순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당장 심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47절을 보시면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물론 때가 되면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다시금 재림하실 때는 자기 백성의 구원의 완성과 함께 나머지 사람들의 심판을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지금 당장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지금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벌하시는 성격이 지금도 이 땅 가운데 일어나고 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형벌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구원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택자라 할지라도 때가 차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차기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인지 모르고 그렇게 열심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핍박하던 교회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교회를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아 다른 모든 사도보다 수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는가? 불순종하는데도 왜 심판을 행하시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럼 유기자와 관련해서는 어떠합니까?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심판 가운데 있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불순종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롬9:22). 당장 심판해도 결코 불의함이 없으시지만, 오히려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한 마지막 심판이 결코 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48절을 통해 알리십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7절에서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한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 다시 말해 복음 안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의 사역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모든 참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내 말’이라고 하는 것에 속합니다. 그러데 그 말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온 내가 지금 당장 심판하지는 않겠지만, 심판 자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분이 너희를 마지막 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심판의 기준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말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은 무엇입니까? 44절과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그러나 믿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믿지 않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예수님은 자신의 말의 출처가 하나님임을 말씀합니다. 49절과 50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자의로 말하지도, 자의로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성부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말하고 행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자의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의로 말할 때 그 말이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되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서 자주 이런 강조가 있는 것은 위격 상호간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부가 전 신성의 근원이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만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거기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버지의 말씀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가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율법이 가르쳐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통틀어 지금 예수님은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위구원은 거절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믿음에 합당한 삶 자체를 거절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어떻게까지 말합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야고보서는 좀 더 강하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17,19,21-22)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본문에 나오는 관리와 같은 자세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만 고백이 없는 믿음, 자기 안에서만 믿는다고 말하면서 나타내지는 않는 믿음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은 자로 남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결코 참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버린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5:17). 우리가 완전히 이룰 수 없는 모든 율법을 친히 완전히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을 통한 율법의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기에 더더욱 율법에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결국 죄인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살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 부패함이 있습니다. 연약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말씀으로 영생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반대되는 것은 거절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해야 합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영생이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어디 있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가도록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