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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혜의 수필세계
- 성찰에 깃든 격조 높은 예술혼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정양혜 수필의 경우, 우회성이 문학성을 성취하는 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입체적 구성을 통해 주제를 의미화해야 완성도가 높아지는 본격수필은 전략적 차원에서 표현의 우회성 기술을 매우 중요시한다고 하겠다. 이 수필집에서 볼 수 있는 작품에는 비유, 상징 등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학적 의미와 울림으로 가득하다. 그 힘은 수필세계는 물론 작가의 사상과 철학을 효율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끝없는 인내와 묵묵한 도전의 작가, 정양혜는 이러한 우회적 표현 방식과 매우 친숙하다고 하겠다. 제한된 지면과 언어의 부피 속에 부푼 표현 욕망을 십오 매 내외의 원고지 안에 압축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더없이 좋은 표달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여성수필 중에서 이만큼 미적 울림통을 지닌 작품이 흔치 않다. 그것은 구조시학의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모성원리를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성찰이라는 수필 본질의 특성을 가져와 이 두 개의 특성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정양혜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모성성의 원리와 반성적 성찰이라는 두 축을 근간으로 해서 수필이라는 따스한 집의 벽돌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놓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오래 전에 교육계에 투신하여 학교 현장에서 최고 경영자의 꿈을 이룬 그녀는 오늘도 “꿈꾸지 않는 꿈도 이루어진다.”하는 역설적인 생의 모토를 학생들에게 설파하며,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정진하는 구도자적인 여인이다. 정양혜는 일찍이 「문예시대」로 등단하여 문인이 되었지만 문단활동보다는 일선교육에 전심을 바쳐오고 있는 우리 시대 보기 드문 교육자다. 오래 전, 교보문고의 패밀리북 이벤트에 가족문집이 최우수당선작으로 선정되어 진주시청홀에서 출판기념회를 연 적이 있다. 그녀의 삶이 몸과 마음 사이의 균형을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수필은 모성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성찰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글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살아낸 인생 성적표의 소중함을,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어서 읽으면 감동을 받는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해 보면, 나무가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을 불러온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이 흔들어 주기를 바라는 나무도 있고,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을 불러오는 나무도 있다. 나무에게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해답을 얻어 또 다시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련다.”라고 하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가 그녀가 그려낼 세계가 어떠한지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필의 묘미는 작가의 체취를 잘 읽어내는 데 있다. 감동 또한 연상과 상상을 통해 나오는 만큼 그녀가 보여주는 내면풍경에 집중하면서 그녀 수필의 미적 구조를 함께 살펴보는 것도 청정한 바람과 햇빛을 함유하고 있는 정양혜 수필을 맛있게 읽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삶의 근원을 형성하는 따뜻한 생명력을 지닌 정양혜 수필의 주제적 지향성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는 정양혜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모성적 그리움과 진한 가족 사랑을 담고 있는 글들로 운명적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글이다. 문학적 형상화가 뛰어난 <개나리>, <엄마의 행복> 등이 대표적이며, 두 번째 부류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문제, 일상적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하고, 자기 삶의 반성적 성찰과 회고하는 등을 ‘발견과 성찰’을 담고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평행> <내려갈 때 보았네> <신호등 깨달음을 얻다> <꿈꾸지 않는 꿈도 이루어진다> 등의 작품은 자신의 내면과 시대 속에서 찾아낸 물음표를 던지는 생활에 관련된 일화를 소재로 쓴 수필들이다. 자신과의 풍요로운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출간된 이 수필집은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다. 이제 기존의 다른 수필집 해설과는 달리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문학적 맛과 멋의 생성원리를 탐구해 보겠다.
II. 모성원리와 문학의 우회성
정양혜 수필은 은은한 우회성이 드러나 문예미학을 안겨주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해설은 이 수필집에 실린 작품 중에서 여섯 편을 가려 뽑아 쓴 글이다. 필자는 작품을 읽어나가며 늘 반목되는 생활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스쳐 보낸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작품에 쓰인 독특한 표현과 형식을 통해 일상의 모습을 낯설고 특별하게 느껴보기도 했다. 필자와 비슷한 삶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떡이기도 했고, 삶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 보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분은 수필의 목적이 감동과 깨달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수필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승화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해 나간다. 이러한 작업이 문학적 기법을 통해 완성된 문예미학은 이 수필집이 가지는 고유한 미덕이다. 수필 속에서 작가의식의 깊이와 미적 울림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풀국새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지각 개화한 응달의 개나리 꽃 옆에서 울부짖는 까닭이 있는 것일까. 산 위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는지. 나와의 이별이 아쉬워 쉰 목소리로 울부짖어 내 발길 머물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소대 선임은 목이 쉬어야지 제 역할을 다 하는 자리인지 아들 편지에 목이 쉬었다고 적혀있었다.
개나리 울타리 근처의 연못에 몰려 있는 잉어 떼에 이슬 머금은 눈길을 보내면서 풀국새 곁에 더 머물 핑계를 찾는다. 석양에 붉게 물든 인공 연못 주변으로 개나리 훈련병들을 사열하듯이 몇 바퀴 돌았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여 만든 환경 연못의 잉어들이 오늘따라 활발하게 움직인다.
어미 잉어 지느러미 아래로 새끼 잉어들이 떼를 지어 파고든다. 늙어서 등의 빛깔이 잿빛으로 바래진 어미 잉어 때문에 새끼 잉어들의 비늘이 더욱 반짝였다. 어미 잉어의 퇴색되어 희멀그레한 회색도 어미 따라 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반짝이는 황금 비늘이었을 테다. 등이 휘어가는 어미 잉어는 헤엄침도 둔하다. 어미가 늙어서 새끼를 돋보이게 하나보다. 나도 얼마나 더 늙으면 얼룩무늬 개나리 제복의 아들이 더 돋보이게 될까. 잉어처럼 된다면야 어서어서 늙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 <개나리> 일부
<개나리>는 문맥의 곳곳에 깔려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인해 문학적 형상화가 빛난다. 이 수필의 맛은 말할 것도 없이 ‘제재’인 ‘개나리’를 군복과 상관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감동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주제화를 위한 전개 과정이 논리성을 가져야 한다. 정양혜는 <개나리>에서 문학적 성취를 위한 첫 단계적 작업으로 정서의 객관화를 취한다. 집 근처 산책길을 내려오다가 느닷없이 풀국새 한 마리의 우짖는 소리를 듣고, 작가는 쇳덩이 하나가 자신의 발목에 끌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이어 작가는 “신병훈련에 땀 흘리고 있을 아들이 엄마 부르는 소린 줄 착각했나보다.”라는 문장을 놓아, 수필의 발단부에서부터 배치와 장치를 통한 문학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는 독자를 작품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전개부에 들어가면, 제재를 묘사한 대목에서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상상화되고 있는데, 작가는 시멘트 벽 담장의 개나리 꽃무리를 통해 훈련소에 갓 입대한 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담장 아래로 가지런히 늘어진 개나리 무리가 마치 신병들이 훈련장에 도열해 있는 모습 같아 보인다. 행여 꽃무리 속에서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봐 가까이 다가가 본다.’라고 하면서 작가는 개나리와 군복을 상관화시켜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한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그 느낌의 정서적 객관화에서 나온다. 얼룩무늬 군복의 아들 모습으로 치환된 개나리의 노오란 꽃잎과 녹색 이파리와의 조화는 존재의 전환을 기도한다. 비유와 함축 그리고 상징으로 된 진술은 ‘무엇’을 ‘어떻게’ 비유하느냐 하는 창작의 기본원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를 감동과 깨달음의 지름길로 달려가게 한다고 하겠다.
수필은 자아와 자기를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자기 고백성과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작가는 근 사반세기 만에 건져 올린 개나리에 대한 상념 조각 하나를 인터넷에 떠있는 아들 사진과 연결시켜내고서는, 풀국새 한 마리가 울부짖었던 까닭을 찾는다. 그리고 작가는 아들의 군복을 닮은 개나리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아들을 군에 보낸 엄마의 심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풀어내되 문학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 공감의 확대를 가져왔다. 대단한 문장력이다. 개나리 옆의 잉어떼와 풀국새 곁에 더 오래 머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아들의 부재’가 얼마나 작가의 젖은 슬픔을 무겁게 해주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장면은 평자에게 이산가족의 애환을 담은 애련한 사진으로 인식된다. ‘아들’ 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이보다 더 문학적으로 표현한 글이 어디 있을까싶다. 작품 속의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의 얽힘처럼 작가의 정서를 이완과 응축의 절묘한 방식으로 조절하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은 아들을 닮은 개나리를 보며 모정의 세월을 그려내는 작가, 그녀는 국가가 아들을 돌려 줄 날을 세며 기다리게 된다. ‘가버린 과거는 영원히 그 자리에 정지에 있다’고 독일 시인 실러는 말했다. 이 작품의 쾌미는 ‘아들이 돌아오는 날, 지느러미를 넓게 펼쳐 새끼 품어 주는 어미 잉어처럼, 작은 가슴 활짝 펴서 아들을 안고 담장의 노란 개나리꽃을 따서 입에 물려주련다.’는 진술에 녹아 있다고 본다. ‘개나리’와 ‘잉어떼’는 이 수필에서 ‘아들’과 ‘모성애’로 상징되고 있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작가가 개나리와 풀국새 울음, 잉어떼 등의 상징을 통해 군에 간 아들에 대한 사랑을 수놓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결말부의 마지막 문장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는 그녀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상징과 비유 등의 수사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주제를 상상화하고, 의미화하는 문학적 수법을 통해 그녀는 독자를 상상과 연상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진정한 문학적 감동은 이처럼 ‘우회성’에서 싹을 튀우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따뜻한 감정이 대상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작품 속에 자기를 용해시켜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는 수필이다. 무엇보다도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수필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군에 간 아이를 보는 작가의 눈이 사랑으로 그윽하다. 그 사랑을 절제된 정서로 문학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름답기만 하다. 인생에는 소중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외면한 삶은 겉으로 보아 화려하고 찬란한 것일지라도 항상 비어있고 시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 결핍된 삶은 겉으로 보아 그것이 성공한 듯이 보이는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패배요, 헛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에의 지향이나 그 실천 의지가 없는 인생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토록 귀한 것이 사랑이기에 그것이 결핍된 삶은 비참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수필적 화자가 갖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무엇보다도 수필가가 가져야 할 것은 따뜻한 정서다. 자식들은 무엇으로 자라는가. 부모 또는 교사의 사랑으로 자란다. 정양혜는 가슴을 활짝 열고 아들을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은 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감성의 일, 혹은 감정의 표출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름답게 승화된 감정도 사랑의 정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은 충동적이며 찰나적인 욕구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사랑은 감성과 지성과 이성과 의지, 이 모두를 배합하여야 이룩할 수 있는 전인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라는 명제에 비추어보면, 주제 지향성적 면에서 이 수필의 가치는 충족되고도 남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에 간 아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그 사랑이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더욱 맛있게 읽혀지는 것이다.
어느 자식이든 모든 인간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개나리>가 엄마의 자격을 가지고 아들을 바라본 작품이라면, <엄마의 행복>은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수필이다. 공공의 관심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교술의 한 갈래로서 의미있는 내용을 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수필은 한국적 어머니의 헌신을 노래하면서도 그 전개와 구성의 기법면에서 가해진 저문 꽃밭에 대한 해석이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데,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 ‘우회적 수법’을 잘 활용하고 있어, 미적 쾌감을 준다. 자식을 꽃 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었던 엄마의 일생을 저문 꽃밭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이기에 ‘인고와 헌신의 고단함’에 묻어나는 여성적 삶의 아이러니를 우회적 수법으로 지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수필의 문학적 맛은 행복이란 개념에 대한 작가의 역설적인 해석에서 나온다.
사실 엄마는 당신의 삶보다 반쪽의 삶을 얘기하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육십오 년여의 동반자였던 배우자의 부재와 그로인한 외로움은 환상과 자의식이 깨어나는 신호탄이 되었고, 존재의 박탈감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자기결정권이 없는 삶, 자기희생을 내세우지 않고 가족의 대리행복으로 살았던 시간들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다. 자유감이 행복의 조건에 포함되므로 혼자된 엄마는 내심으로 갈망하던 ‘자유’ 하나만으로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위안할 수 있었을 테다.
질곡의 세월에 흐르는 강물처럼 떠밀려온 엄마는 심장의 커다란 구멍을 인지하면서 구순 즈음에야 비로소 힐링의 여정을 향한 지푸라기를 잡았다. 외로움은 결핍이지만 행복의 지렛대이기도 하다. 엄마는 배려심이 많아 동네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품이다. 엄마집이 동네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담소와 음식을 연결고리로 이웃사람들과 네트워크를 이어간다. 엄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덕으로 배우자란 절대강자의 허물어진 울타리를 극복하고 혼자 사는 영역 구축에 성공했다. 행복의 원천은 사람이므로 이웃과 벗되는 달라진 일상, 이타적인 삶에 엄마의 행복지수는 올라갈 것이다.
- <엄마의 행복> 중에서
정양혜가 이 수필을 통해서 갈망하는 탐구세계는 ‘진정한 자유는 자기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다. 자유감이 행복의 조건에 포함되므로 혼자된 엄마는 내심으로 갈망하던 ‘자유’ 하나만으로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위안할 수 있었을 테다.’는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치밀한 주제 구체화 전략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플로베르의 ‘일물 일어설’이 생각날 정도로 작가는 구성적 비유에 성공하고 있다. 발단부 첫 문장, ‘꽃은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에 이어지는 ‘그런데 엄마의 꽃밭은 시나브로 듬성듬성해 지더니, 이젠 휑해서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코끝이 시리다. 그나마 멀쑥한 모과나무만 동그마니 모랭이에 서서 나를 바라봐준다.’란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을 통한 함축은 우회적 수법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예술수필이란 상상력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산소 같은 것이어서 사랑을 감지하지 못하고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고 한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듯한 기쁜 정서적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어머니로부터 ‘억울하다’는 단어를 작가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사법을 써서 언어를 비유적으로 제시하는 우회적 표현 능력이야 말로 모든 문학가가 먼저 가져야 할 소질이 아닐까. 정양혜는 그런 능력이 충분해 보인다. 언어는 결핍의 표현인 것이다. 현재가 과거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질곡의 세월에 흐르는 강물처럼 떠밀려온 엄마는 심장의 커다란 구멍을 인지하면서 구순 즈음에야 비로소 힐링의 여정을 향한 지푸라기를 잡았다. 외로움은 결핍이지만 행복의 지렛대이기도 하다.’라고 쓰고 있다. 정양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로부터 예상 밖의 고백을 듣게 되고, ‘나의 꿈, 내 아이들의 꿈만 소중했지 엄마의 꿈에 무심했던 내가 부끄럽다.’며 그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려세운다. 어찌 세상사의 눈물이 그녀 혼자만의 일이고, 세상사의 상처가 어찌 그녀 혼자만의 것이랴. 그녀는 어머니가 쏟아놓은 ‘외로움’과 ‘행복’, 그리고 ‘꿈’이란 형용사를 다시 ‘세상 어머니들의 심장의 커다란 구멍’으로 승화시켜, 그것이 한 여자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세상 어머니들의 상처로 의미화하고, ‘엄마의 진정한 홀로서기와 셀프 힐링을 통한 백퍼센트 행복을 응원하는 딸이고 싶다.’는 소망으로 승화시켜냄으로써, 딸과 어머니의 산소 같은 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혼자서 밤새워 일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함께 일하는 집단지성이 필요한 시대라고 아이들에게는 힘주어 훈화하면서 정작 나의 문제에는 적용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루터기에 앉아 이 글을 적을 수 있는 스마트폰은 스티브잡스 개인의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다만, 스티브잡스의 창의적인 리더십과 빼어난 혜안이 지구촌 인류의 삶의 형태를 바꿔 놓고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한 것이다.
숲 그늘이 점점 짙어지더니 벌써 어둑하다. 숲에는 도심보다 어둠이 더 빨리 내린다. 숲을 빠져 나오니 뭉술한 솜구름이 여기저기 떠도는 하늘이 좋다. 온전한 자유의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는 혼자 다니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나 난제에 부딪힐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둔다면, 산길은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더 지혜롭다는 진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내 안에 번진 파열음의 진동이 완벽하게 소멸하기에는 다소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유연성이 더 필요한 나를 채찍질하면서 안전한 길로 내려간다.
<내려갈 때 보았네> 중에서
이 수필은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짧은 시를 화두로 자신의 태도와 자세를 성찰하는 글이다. 언어인 말은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체험의 구체화를 가지고 수필시학 원리에 따라 문학적 언어로 잘 다려서 글을 쓴다면 분명 독자들을 감동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어휘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화장하는 것이 자신의 외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면,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우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하는 생활이다. 문학하는 생활은 자신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내면의 화장이다. 외면인 육체는 다만 정신의 하수인일 뿐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이 수필은 금정산 숲속에서 갈림길을 만나 남편과 서로 흩어져 길을 걷게 되면서 전개되는 솔직한 사유가 감동을 준다. 체험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우회성’을 살리는 것은 문예미학을 위한 수사적인 전략이다. 결말부 단락의 중간에 놓인 ‘그러나’란 접속사의 전후 맥락으로 유추할 수 있는 주제의식의 파악은 이 수필을 읽는 쾌미다. 주체로서의 욕망을 잠시 접어두는 ‘유연성’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안전한 길을 택하게 한다. 현실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자아와 서정적 자아의 환상적 통합이다.
자기의 사상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필에도 기교가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의 한 장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 정양혜 수필의 문학적 효과는 하나같이 주제의식이 구체적인 경험에 의지되어 구축되고 있다는 데 있다. 수필창작에서 있어서 구체화의 뒷받침은 주제를 의미화하는 데 생명적이요, 최대의 강점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어 은은한 향기처럼 배어나는 인생의 지혜를 잘 전달하고 있다. ‘내 안에 번진 파열음의 진동이 완벽하게 소멸하기에는 다소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한 발 물러서기는 ‘흔들리기-바로서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중년 여성의 딜레마다. 정양혜는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적 틀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담론을 펼치면서, 모성원리로 갈등을 해결해내는 데 성공한다. ‘우회성’이란 기법으로 한 편의 수필을 격조 높은 예술적 산문으로 승화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감추기 위하여 가슴을 닫거나 뽐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수필은 마음을 열고 그림자의 인격화를 위해 솔직한 내면 풍경을 삽화로 엮어 그려가기에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자신을 채찍질해 가면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나리>, <엄마의 행복>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확실한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의 글에는 작가의식도 뜨겁게 솟구친다.
III. 자기성찰과 행복의 메타포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를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이런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면서 깨달은 이야기를 수필화한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리고 수필가는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양혜는 이런 삶의 문제를 실존의 문제와 오버랩시켜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다. 반성적 성찰을 통해 주제의식을 공감으로 이끌어가는 면에서 인성적 통찰력이 돋보이고, 작가 자신의 태도를 실존적 삶의 수준까지 보여준 점에서 그녀의 제재통찰이 본질 마주하기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평행>이란 수필은 추상적인 제재를 취했지만, 문학적 형상화가 대단히 잘된 작품이다. 이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로 나아가는 <개나리>와 달리, 역설적이게도 주제를 통해 담론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관념어의 ‘평행’이 주는 불안함은 발단부의 구체적 사례나 삽화의 서사적 전개를 접하면서 사라져버린다. 평자는 여성적 삶에서 오는 문제, 일과 자아에 대한 담론을 통해 삶의 부조화를 잘 헹궈낸 수필이라는 데에 주목하고자 한다. 주제를 통해 문학성을 성취하기가 만만치 않음에도 그녀는 바다와 하늘이 쪽빛으로 평행을 이루는 데 주목하면서, 마음과 몸의 불균형 문제의 문학적 의미화에 성공하고 있다. 현실 체험이 연상과 상상력을 만나 햇살 같이 밝게 빛날 뿐만 아니라 사과 속의 영양분처럼 사상이 문맥에 녹아있음으로 해서 이 작품의 주제의식, 즉 ‘평행의 중요성’이 독자에게 은근하게 전달된다. 통찰 결과를 미학적으로 재배열한 거라든지 치밀한 담론구조는 이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내 몸에 좌우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불균형은 더 없나 관찰 하는 버릇마저 생기고 말았다. 출근 준비로 화장을 할 때 오른쪽 눈썹 끝이 왼쪽보다 살짝 들려서 좌우 균형을 맞춰 그리는데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쌍꺼풀도 자세히 보면 왼쪽이 더 깊어 짝눈이다. 내 몸의 불균형은 어디까지일까? 더해 가는 호기심으로 왼쪽 약지에 끼던 반지를 오른쪽으로 바꿔보니 오른 손가락 마디가 굵어 들어가지 않는다. 나의 오른손은 지금까지 균형감 없는 주인을 만나 글쓰기, 요리와 식사, 테니스, 배드민턴 등 너무도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내가 왼손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평행> 중에서-
이 수필의 우수성은 한마디로 대립항의 도입으로 인식을 보다 명징하게 보여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비교와 대조라는 수사적 기법의 기능에서 이 수필은 가치를 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서로 상충하는 ‘몸과 마음’, ‘일과 자아’, ‘행복지수와 불행지수’, ‘왼쪽과 오른쪽’, ‘이상과 현실’, ‘일과 휴식’, ‘양심과 행동’, ‘능력과 의욕’ 등의 대립항에 머문다. 주로 둘의 조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내면에 놓인 과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평정심'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의 맛은 단순히 작가의 시선이 균형이나 평행으로만 향하고 있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평행을 이루기 위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사색이라는 자기 관조와 호르몬의 지시를 이겨내려는 의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상과 현실, 일과 휴식의 평형을 이루지 못한 요즘의 나는, 엷고 투명한 날개로 균형을 이루고 날아오르는 잠자리보다도 못한 삶이다 싶어 행복지수가 낮다.’고 하는 고백은 자기 성찰에 구체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보편성의 획득을 노린 전략적 구상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의 반성이 ‘평행의 중요성’이라는 의미발견과 만나 문학적 수필의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균형에 의한 평행을 유지하는 길을 중국 기예단 쇼에서 찾아내고, ‘균형을 잡으면 공중에서도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뽑아낸 것 또한 이 수필을 읽는 쾌미다. 이런 발견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 투영된 결과다. 그녀는 불균형의 문제가 자신의 나쁜 습관에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사색을 통해, 행복지수에 대한 소망을 이미지화한 여러 삽화와 대립항들을 절묘한 배치한다. 이런 구성적 전략이 매우 성공적이었다.
치열하게 헤매야 길이 보인다. 시야를 넓히니 앞이 훤하다. 내가 마주한 복잡 다양한 현실과의 다툼 속에 내 삶은 늘 분주하고 고단했다. 나는 걸어 다니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뛰어다닌다고 했다. 내가 진 등짐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뛰면서도 내 등의 짐 꾸러미들을 보살펴야만 했다. 겉으로 보면 비교적 평탄한 삶이었으나 그러한 삶을 꾸려가기 위한 나의 노력은 잠시도 멈출 틈이 없었다. 마치 호수에 우아한 자태의 백조가 물밑 속 분주한 발놀림에 의해 받쳐지는 것과 흡사했다.
이제 절박함이나 처절한 시간 다툼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나 가치를 개인차원으로 옮겨 ‘나 다운 존재로서의 존엄성’에 두는 것으로 삶의 프레임을 바꾸고자 한다. 무릇 깨달음이란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 신호등을 건너자’는 상징적인 구호로 비롯된 내 삶의 행태는 육신과 영혼, 공간과 시간의 이동을 포함한 마음의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다. 교차로를 지키는 신호등처럼 내 인생길의 나침반이 될 신호등 하나를 마음에 세워 불을 켠다. 빨간등은 해가 되고, 녹색등은 별, 노랑등은 달이 되어 나의 길을 밝힐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걸 실천해야겠다.
<신호등, 깨달음을 얻다> 중에서
이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한 글이다.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을 때 그 글은 향기를 지닐 수 있다. ‘최근의 나는 해넘이나 해맞이를 나서지 않는다. 해가 바뀐 것인지 달력이 바뀐 것인지 크게 의식을 하지도 않는다. 오늘의 해는 어제의 해와 다를 것이 없고 내일의 해와도 같은 것이라는 내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은 그저 얻은 것이 아니고 처절한 경험에서 얻은 것이다.’라는 작가의 진술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이 수필 역시 반성적 성찰을 축으로 깨달음을 주제로 형상화한 것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정양혜의 수필은 자신을 하면서도 이야기에 초점을 두기보다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적 성찰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림자의 인격화다. 정양혜가 성찰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나이’와 ‘품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뛰지 말고 걷자’는 깨달음은 삶의 의의가 여유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여유가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호수에 우아한 자태의 백조가 물밑 속 분주한 발놀림에 의해 받쳐지는 것과 흡사했다.’고 표현하고, 삶의 의미나 가치를 개인 차원으로 옮겨 ‘나다운 존재로서의 존엄성’에 두고, 삶의 프레임을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인식 전환은 바람직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함으로써 인식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강인함과 낙천적인 사고로 인내하여 교감이 되던 날, 그리고 내 인생 최대의 영욕들을 감내하고 교장이 되던 날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날들은 내가 꿈꾸지 않은 꿈을 이룬 날들이다. 그리고 도전하지 않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꿈꾸지 않는 꿈도 이루어진다.“라고. 그러나 가족이나 학교를 위해 헌신한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꿈꾸지 않은 꿈을 이룬 것은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낸 내 삶이 배신하지 않고 가져다준 인생 성적표이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해 보면, 나무가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을 불러온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이 흔들어 주기를 바라는 나무도 있고,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을 불러오는 나무도 있다. 나무에게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해답을 얻어 또 다시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련다.
- <꿈꾸지 않는 꿈도 이루어진다> 중에서
위의 작품도 삶의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역설적 메시지로 전달하는 글이다. 작가는 이 수필의 제목을 ‘꿈꾸지 않는 꿈도 이루어진다’라고 정하고, 이야기의 설득력을 위해 ‘까지교사’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상식대로 돌아가는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보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재해석하는 것은 수필창작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의식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구성주의 철학적 사고방식을 역설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교장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으나 주어진 일을 강인함과 낙천적인 사고로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음으로써 그녀는 대역설의 진리를 발견한다. 이 작품의 문학적 향취는 그 역설의 명제에 담긴 의미를 ‘꿈꾸지 않은 꿈을 이룬 것은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낸 내 삶이 배신하지 않고 가져다준 인생 성적표’라고 한 진술에서 발견하는 데 있다. 그렇다. 작가는 등불이어야 한다. 교장 선생님으로서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목적 아닌 목적을 가지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 말은 의미는 사회적 책무의 완성으로 다가온다고 하겠다.
정양혜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진리를 역설적으로 해석해냄으로써 구축된 네오필리아의 미학이 빛난다. ‘꿈은 이루어진다’와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두 명제에 대한 역설에서 문학적 향취가 풍겨나는 것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신선한 사유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 ‘또 다시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련다’라는 마지막 진술 역시 도전하지 않는 이들에게 전해줄 메시지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성찰의 자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 아닌 다른 인물을 묘사하더라도 전개부 마지막쯤에 가서는 자기에게 필발을 겨누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정양혜는 교육자로서,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무엇보다도 깨달음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두 축으로 나누어지는 수필적 특성이지만 체험이 전개부의 주조를 이룬다. 특별히 무엇이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아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해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작가는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정양혜의 수필이 주는 고마움은 ‘아하경험’을 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정양혜의 수필 속에는 자조와 자성, 인연과 관계 속에서 깨닫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엄마라는 이유로, 또 딸이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소중한 인연으로 주위를 위요한 인연을 감싸 안는 작가의 모습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배려의 정이 아닐 수 없다. 정감이 흐르지 않는 인간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정양혜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이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쓴 글이 아니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의 자료로 쓰인 모든 작품에서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어 감동을 준다. 모성성과 성찰에 대한 천착은 문학적 향취를 드러내는 인자로 작용한다.
III. 나오며
이상으로 정양혜 수필세계를 비교적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 수필들은 하나같이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들 수필들은 견고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격조 높은 예술적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의 문학적 변용에서 건져낸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문학적 향취가 풍긴다는 게 강점이다. 정양혜 수필의 특징은 도입부부터 문학적인 분위기로 수놓아져 있다는 점이다. 자기 존재의 성찰과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구도의 길에서 찬연한 꽃을 피우고 있는 정양혜의 수필세계는 모성성의 발현과 반성적 성찰이라는 두 범주 외에도 여성들의 현실인식과 정체성 회복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고 본다.
정양혜 수필세계에는 인간애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수 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다. 수필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정양혜 수필의 최대 강점은 형상적 체험성의 승화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좋은 수필은 행복지수를 높이는 수필적인 생활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가족생활 속 인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수필에서부터 당대적 여성의 현실상황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수필까지 다양한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강인한 인생관과 행복 지향적 삶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미경을 들고 그녀의 수필을 읽어나가면 작가로서 또 교육자로서 누구보다도 깨어있는 자세로 성실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조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등 그녀는 구조와 담론 전략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첫수필집으로 이만한 멋과 맛의 맵시를 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쪼록 이 수필집 발간을 계기로 해서 더 큰 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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