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노트르담 악파 13세기 중엽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완공되면서 파리는 고딕 건축 양식의 진원지가 됩니다.건축을 지휘한 파리의 주교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는 음악이 중세의 표상에 어울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능하신 신이 창조한 완벽하고 균형 잡힌 세계의 질서를 음악이 담아내야 한다는 말이죠. 이곳 노트르담 대성당은유럽의 다성음악이 탄생한 곳입니다. 레오냉(Léonin,1135경~1200경)과 페로탱(Pérotin,1170경~1236경)은 초기의 다성음악을 발전시킨 작곡가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노트르담 악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또 기보법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유럽 음악사에서 이정표를 세운 음악가들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악 교육은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는데,바로 새로운 다성음악에 맞게 수준 높은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파리는15세기에 전쟁은 치르면서 음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맙니다.유럽 음악의 중심지는 이제 폴랑드르(네델란드 악파)로,그 다음에 이탈리아의‘베네치아 악파’로 옮겨갑니다.
■ 베네치아 악파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바실리카는9세기에 베네치아 총독의 개인 예배당으로 지어집니다. 1403년에8명의 칸토르(가수)로 구성된 가수학교가 만들어지고, 16세기 말에는‘총독의 나팔수’라고 불리던 이 산마르코 바실리카 소속의 가수들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누립니다. 16, 17세기에는 무역으로 부유해져 성당의 지원이 풍족해지자 당시 유럽을 장악해 왔던 폴랑드르 악파에서 성당의 카펠마이스터를 독차지해왔으나, 아드리안 윌라르트(Adriaan Willaert),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li),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같은 당대의 유명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이들을 제치고 카펠마이스터를 맡아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곳의 카펠마이스터는 종교적인 전례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행사나 연회의 음악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아마도 몬테 베르디의<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가 연주된 때가 산마르코 성당의 최고 전성기였을 것입니다.여러 그룹의 합창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성당의 독특한 구조에 잘 어울렸으며,반주를 맡은 악기 파트는 당시에 보기 힘든 수준 높은 기악음악을 뽑냈다. 1500년 무렵부터 산마르코 성당은 독자적인 오케스트라를 보유한다.그러다가1637년 베네치아에 첫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면서 산 마르코 성당의 오페라 공연은 점차 그 명성을 잃어갔다. ■ 빈의 음악협회(무지크페어아인Musikverein)
1812년애 창설되고, 1870년에 협회 건물(건물명도Musikverein)이 완성되었다.이 건물의 웅장한‘황금홀Goldener Saal’은 그때부터 빈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이자‘빈 필하노닉’의 주무대로 이름을 떨칩니다. 음악협회는 그 밖에도 컨서버토리(지금의 빈 국립예술대학교)와 자료관을 세운다.협회는 지금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민간조직으로,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음악과 문화를 가꾸어나가는 바람직한 모델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도 ‘무지크페어아인’은 고전·낭만주의 교향곡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다.아마도1946~1989년애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듯 싶습니다.
<출처:쾰른음대,‘클래식 음악에 관한101가지 질문’,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