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
* [새재사랑산악회] 남해 설흘산 : 무박 산행(토요일 밤 11:45, 서울 군자역 출발)
♣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
[새재사랑산악회 11월 무박산행] ☆… 남해 응봉산-설흘산 산행
<산행> 남해 선구마을→ 칼바위 능선→ 응봉산→ 능선→ 설흘산→ 가천 다랭이마을→ 바닷가
▶ [프롤로그] ‘가을, 자못 숙연해지는 계절’
☆… 쌀쌀한 바람결이 깊어가는 계절을 실감나게 하는 밤이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대선(大選, 12월 19일)을 꼭 한 달 앞두고 있는 시점, 주요 후보들의 호소가 뜨거운 열기를 더하고 있는데, 계절은 우리로 하여금 서서히 차가운 이성(理性)의 날을 세우게 한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참다운 지도자를 뽑는데 각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보라,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이 찬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인생의 유전(流轉)까지도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자못 숙연해 지는 계절인 것이다. … 오늘은 우리 <새재사랑산악회> 가족이 무박 산행을 떠나는 날이다. 몇 년 전, 밀양의 능동산-천황산(사자봉, 1,189m)-재약산(수미봉, 1,108m)-표충사로 이어지는 ‘영남 알프스’를 무박으로 다녀온 이후 처음이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같이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산을 오르는 무박 산행은, 오고가는 여정에서 시간적인 여유를 넉넉하게 하는 장점도 있지만, 같은 버스를 타고 함께 달리는 가운데 친근한 유대감이 생기고, 공유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서로에 대한 그윽한 믿음이 새겨지는 미덕이 있다.
▶ ‘밤으로의 긴 여로(旅路)’
☆… 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밤 11시 45분 군자역을 출발했다. 45인승 대형 관광버스 ‘선진항공’의 좌석이 꽉 찼다. 이런 산행을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나온 대원들도 많았다. 반가운 얼굴들! 차 안의 분위기는 달떠 있었다. 차가 서울 송파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시간은 자정(子正)의 경계를 넘어갔다. 그렇게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서울외곽순환도로를 달리는 차는 신갈분기점에서 경부선에 타고 일로 남으로 질주해 나갔다. 야반의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잠시의 지체도 없이 정상적인 속도를 유지하면서 그침 없이 내달렸다. 버스는 천안-논산선으로 진입하여 전라북도 여산에서 호남선을 만나고, 얼마가지 않아 서전주에서 순천까지 새로 난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나갔다. 서울의 톨게이트를 통과하면서 차 안은 소등을 했고 산우들은 모두 단잠에 빠져 들었다. 호산아, 차를 타면 정신이 말짱해지는 특이한 체질이라 그냥 눈을 말갛게 뜨고 거대한 버스를 홀로 운전하는 김태수 기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앞자리에 나와 있는 ‘통통공주’가 기사님을 위하여 방실방실 말을 띄운다. 마음 씀이 예쁘다. 남원의 춘향휴게소에 잠시 정차하여 뜨거운 열기를 식혔다. 밖에 나오니 캄캄한 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아, 그 동안 문명의 빛이 명멸하는 서울에서는 잊었던 별들이다. 순천J.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진주 방향으로 달리다가 하동I.C에서 내려 국도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 서울에서 4시간 이상을 달린 끝에 육지와 섬을 잇는 남해대교 앞에 당도했다. 유서 깊은 노량해협 위에 가설된 현대식 연육교를 건너가는 것이다.
▷ 어둠을 가르고 지나는 남해대교(南海大橋)
☆… 경남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노량리(露梁里)와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노량리(露梁里)를 잇는 다리이다. 1973년 외로운 섬 남해는 육지와 연결되었다. 1968년 착공하여 5년 1개월 만에 이 대교가 완공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현수교(懸垂橋)로 길이 660m, 너비 12m, 높이 52m이다. 남해섬은 불과 600여 미터의 노량수도(露梁水道)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져 산업·경제·교통·운송면에서 고립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한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서 다리를 놓기에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게 생각되던 곳이었다. 이 다리는 강상형(鋼箱桁)으로 보강된 2개의 현수교로 이루어져 있다.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 준공식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해 직접 다리를 건너며 축하했다. 다리 아래 물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모두 남해대교를 따라 건너느라 다리 개통식은 마치 마라톤대회 출발점처럼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다. 당시 남해대교는 동양 최대의 현수교였다. 거대한 다리는 일본과 국내의 합작 설계로 이뤄졌고 현수교의 핵심부품인 와이어는 모두 해외에서 수입됐다고 한다. 그 이전 노량해협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은 뱃길, 당시 배는 오전 6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 운행됐고 남해도에 사는 2천여 명 주민들에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태풍이 와서 뱃길이 끊기면 며칠이고 섬에 갇혔다. 시간을 좀더 거슬러 조선시대 중엽으로 가면 이곳 남해는 절해고도의 유배(流配)지였다.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은 이곳에서 <구운몽(九雲夢)>을 구상했고 중종 때 자암 김구가 ‘화전별곡’의 소재로 삼은 곳도 바로 이곳 남해이다. 게다가 충무공 이순신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곳도 바로 이곳 남해 노량이 아닌가. 충무공을 추모하는 충렬사(忠烈祠)가 있는 곳이다.
▷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장 노량해전(露梁海戰)… 아아, 이순신(李舜臣) 장군!
☆… 노량해전은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노량 해상에서 왜병(倭兵)을 격파한 이순신(李舜臣)의 마지막 해전을 말한다. 임진왜란 7년의 처절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숨결이 어려 있는 곳이다.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그해에 본국에 있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왜병이 철수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적의 퇴로(退路)를 막아 적을 격파하기로 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의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 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거나 부서지고 패잔선 50여척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 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주목을 받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임진왜란 동안 23전 23승을 거둔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명장이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