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들이 순교 당한 비극의 장소[경기 별곡] 광주 2편, 남한산성에 담긴 이야기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 당한 비극의 장소
[경기 별곡] 광주 2편, 남한산성에 담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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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그 규모만큼이나 접근방법도 다양하고 둘러보는 탐방코스도 많다.
산성 내부에 산재해 있는 유적을 답사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10킬로미터에 가까운 성벽을 도는데만
거진 3시간 반이 드는 등 그 자체로 조그마한 도시를 도는 듯하다.
성벽을 돌기 전에 성벽 내부에 있는 문화유적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현재는 음식점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에 로터리 부근은 조선시대에 번화했던 도회지였다고 한다.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주둔하였고 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행정구역이었던 유수부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로터리에서 동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은 한옥 건물의 자태가 눈에 띈다. 1625년에 군사훈련을
하기위해 건립한 지휘소인 연무관이다. 언덕 위에 자리한 연무관은 꽤 웅장한 규모로 위로 올라가면 남한산성 주위가
훤히 보일 듯하다. 예전에는 연무관에서 왕이 행차할 때마다 문과, 무과 시험이 열리기도 했었다.
연무관의 앞에는 조선시대 사용했던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구석에 장터라고 써진 조그만 표지석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은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 해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운송하기에 불편했을 텐데 이 지역이 왜 장터로 번성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설명문을 차근차근 읽어보면서 나 스스로 추측해보길, 일단은 남한산성 자체가 그 당시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수레가 다니는 길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산성이라고 해서 딱히 교통의 핸디캡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한강하고 멀지 않은 점, 인근에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요지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군사들이 많이 주둔했기에
그 자체 수요도 무시 못하지 않았을까.
연무관을 지나 바로 맞은편에 한옥과 콘크리트 건물의 기괴한 조합 같은 남한산성 교회가 보인다.
이윽고 남한산성 순교성지라는 팻말과 함께 한옥 양식의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말고도 많은 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비극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천주교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고, 이때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그 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살,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당했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신자 300명을 기리기 위해 순교성지가 따로 조성되었다. 입구에는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써졌던 칼 모양으로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멀리 서역에서
온 낯선 신을 믿게 되고, 그 믿음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는 사실에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절로 경외감이 든다.
당시 순교했던 사람 중에 양반들도 있었지만 농부들과 여인들의 숫자도 꽤 되었다고 한다.
희망이 없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신앙이란 돌파구로 만들어가고자 했던 애달픔이 느껴진다.
순교자 현양비를 지나 순교성지로 들어가면 마치 조선시대 양반가옥과 흡사한 한옥성당이 보인다.
내부는 한옥처럼 나뭇결이 드러난 원목 구조로 되어있고, 성당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는 조용히 성당의 구석으로 들어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민초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순교성지를 나와 동문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가 나오고
곧이어 ㄷ자 연못 위에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지수당이란 정자가 보인다.
남한산성의 여러 명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연과 정자의 조화가 참 훌륭하다.
지수당 앞의 ㄷ자 연못 말고도 건너편엔 ㅁ자 형태의 연못을 볼 수 있는데 예전에는 이 연못의 섬 자리에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원래는 지수당 뒤편에도 연못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남한산성의 높은 관리들이 유흥도 즐기고, 낚시도 즐기곤 했었다.
하지만 나의 눈길을 끄는 비석이 하나 있었다. "흔남 중의 흔남 서흔남 보통 사람들의 롤모델 서흔남"이라는
눈길을 끄는 안내판과 함께 서흔남의 묘비가 지수당 옆에 그의 부인의 깨진 묘비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이 서흔남이란 사람은 당시 신분제 사회가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입지적인 인물로 그의 일화를 보면 영화의 소재로
삼아도 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서흔남은 원래 남한산성 서문 밖에서 태어난 사노비로 기와 잇기와 대장장이, 장사꾼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었다. 아마 서흔남에게 병자호란이란 재난이 있지 않았다면 평범한 노비로 살다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호란이 터지고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하면서 성 안팎의 소식이 끊기자 전령을 자처하면서
그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난다.
왕이 적은 유지를 노끈으로 꼬아 옷으로 얽어매고 거지와 병자 행세를 하며 적진을 지나간 것이다.
청나라 군사가 거지인 줄 알고 먹을 것을 던져주자 서흔남은 더욱 실감 난 연기를 위하여 일부러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 먹고 그 자리에서 대변을 보는 등의 행동으로 청나라 군인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서흔남은 무릎으로 기어서 적진을 빠져나온 뒤 화살같이 달려가 전국에 이를 전했다.
이후 수차례 성 밖을 왕래하며 왕명을 전하였고, 적진에 들어가 첩자의 역할을 하는 등 공로가 어느 장군 못지않다.
그밖에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잘 걷지 못하자 등에 메고 성 안으로 들어가 하사품으로 왕이 입던 곤룡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의 공으로 천민신분을 벗고 그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정 2품 당상관인 훈련 주부와 가 의대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죽으면서 인조에게 받은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남한산성 아래 병풍산 기슭에 묻혔다.
그래서 그의 무덤을 일컫어 곤룡포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묘비가 지수당 기슭으로 옮겨진 까닭은 조금 기구하다.
수십 년 전에 후손이 그의 무덤을 처분하고 묘를 이장하면서 앞에 서 있던 묘비는 남기고,
광주문화원에서 묘비를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묘비를 보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서흔남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해주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이제 다시 로터리 방면으로 돌아와서 행궁을 바라보고 그 옆에 있는 인화관이란 건물로 길을 재촉해 본다.
바로 옆에 있는 규모가 거대한 행궁의 위엄에 가려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엔 남한산성을
찾아온 고위 관료를 위한 숙소인 객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니 그 중요성이 결코 덜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화관은
허물어졌으나 2014년 남한산성 행궁과 함께 복원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화관에선 팬데믹 이전에는 수많은 전통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로 유명했다.
판소리, 창극, 국악 등 인화관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공연은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현재는 텅 빈 정막만이 건물을 감돌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공연이 시작되어 사람들로 북적이길 바라본다. 남한산성은
그 역사적 중요성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제 행궁으로 이동하며 남한산성의 탐험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