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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56)-부처님 손바닥에서 발버둥 치다.
포항으로 돌아온 다음 날 사복을 입고 본부장을 만났다. 회사 유니폼은 쇳물 색갈인 누르스름한 유니폼에 안전화를 착용했다. 하지만 사직의 의사를 강력히 표현하려고 일부러 사복에 단화를 착용했다.
거의 한달만에 만난 본부장은 웃으며 ‘서울 신사가 되었군’ 하시며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 본부장은 기계과 선배로 엔지니어 중 금속직을 제외한 유일한 임원이었다. 내가 왜 그러는지를 어느정도 이해했다. 차 한잔하고 함께 사장실로 갔다.
평소 인자하셨던 사장님은 처음부터 고성을 내셨다. 사장도 제복을 입고 있는데 사복으로 출근한 것부터 시작하여 금속직에 비해 승진이 늦다고 해서 부장발령도 내어 주었는데 사직원을 내다니 말이 되느냐? 사장님은 대학동기 중 금속동기가 처음 부장이 될 때 고교 동문들에 비해 빠르지 않느냐고 달래신 적이 있었다. 그때 고교동문은 전공도 다르고 대학교도 다르므로 대학동기들과 비교해 달라고 해서인지 6개월 뒤에 부장으로 발령이 났던 것이다.
‘그래 지금 어디 출근하고 있어?’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하시는 말씀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제강복구비상 근무도 이겨내어 회장님이 특별히 생각하니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달래기도 했지만 ‘자네를 스카우트한 회사는 포항제철에 출입을 정지시키고 그냥 두지 않을 거야’라며 위협도 주시며 꾸지람만 주셨다. 오너가 굳이 사직을 한 후에 발령을 내겠다는 말씀이 떠 올랐지만 아무 말없이 묵묵히 서있는 걸 보고 ‘그래 어떡할 거냐?’ ‘죄송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애원을 했다. 사장님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어, 어느 회사도 우리 인력을 못 빼가’ 하며 화를 내셨다. 하지만 난 이번에 꼭 사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허락해 달라고 간청을 드렸다.
거의 한시간이 넘도록 화를 내어 꾸짖던 사장님은 ‘본부장, 자네 이 사람 데리고 회장실로 가보게’ 하셨다. 그럭저럭 한나절이 지나 본부장과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부장은 사직을 만류하지만 어느정도 현실은 이해하시는 듯했다.
오후에 비서실에서 연락을 받고 회장실로 본부장과 함께 갔다. 인사를 드리자 마자 ‘어이, 안 부장, 내가 그렇게 싫어?’ 하셨다. ‘아닙니다’ ‘그럼 왜 회사를 떠나겠다는 거야?’ 이미 본부장이나 사장님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을 터인데 회사가 아니고 회장님 때문에 떠나려고 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다.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 말 외에는 더 드릴 말이 없었다. 회장님은 아무 반응없이 결재서류만 보셨다. 거의 한시간 동안 서 있자니 다리도 아팠다. 회장님은 서류만 처리하시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 버리셨다. 본부장은 돌아가시고 난 계속 기다려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이번에 종결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해 비서실에서 계속 기다렸다.
본부장이 찾는다고 해서 본부장실로 돌아갔다. 회장님이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신다며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그날 귀경을 못하고 하루 자야 할 것 같은데 집은 있어도 팔려고 비워 놓았던 집이라 청소도 안 되어있었다. 하는 수 없어 영일대(내빈숙소)를 예약하고 기다리다가 시간에 맞추어 본부장님과 함께 부덕사(회장님 숙소)로 갔다.
집사가 안내하는 대로 응접실에서 잠깐 기다린 후 바로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만찬이 준비 되어있었다. 주삣주삣하며 서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저녁이나 먹자’고 하시자 집사가 양주를 한잔 씩 따루었다. 술을 입에만 대고 내려놓았더니 ‘한잔 마셔봐, 향기가 좋아’ 라며 말씀하셨다 술을 못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사에게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하자 집사는 포도주를 따라 주셨다. 본부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며 몇 잔 하시고는
‘그래 안 부장 계속 일하는 거지’ 확실히 의지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허락해 주십시요’라고 대답을 드렸다.
갑자기 ‘안 부장, 날 그렇게 몰라’ 하시며 똑바로 쳐다보셨다. ‘죄송합니다’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무는 무얼 했어, 아무런 것도 않은 거야? 본부장을 탓했다.’ 본부장도 아무 대답을 않으셨다.
‘난 무얼 알아서 제철소를 시작한줄 아나? 난 군인이야, 어느 날 각하께서 중석으로 가라고 해서 겨우 중석을 안정시키니 또 제철소를 만들라는 거야, 나도 일본에 가서 처음 고로(용광로)를 보고 무척 놀랬지만 맨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 실정이야’ ‘그런데 그나마 키워 논 인력들이 빠져나가면 한국의 제철업은 어디로 가란 말이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선처해주시기를 간청 드렸다.
‘제철은 소비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야, 산업재료를 생산하는 공장이지, 철이 있어야 자동차도 생산되고 건설도 기계공업도 다 되는 거야, 그래서 각하께서 제철을 내게 맡기셨고 난 거의 인해전술식으로 연수를 보내어 지금까지 힘들게 지탱하는데 누가 제철보국을 하나?’ 제철보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제철소를 시작하면서 내린 휘호다
‘그럼 대한민국은 지금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부장이면 중견 간부인데 그런 것도 이해못하고 일신상의 이익만 따라가나?’ ‘그래, 어느 기업이야, 얼마를 더 준데?’ 하시며 압박을 하셨다. 오너가 사직 후 채용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노모도 모셔야 하고 제 전공을 살리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노모를 모시겠다고 했나?’ ‘네’ ‘포항에서 모시면 안되나?’ ‘동생 때문에 어머님이 오시지 않으십니다’고 답변을 드렸더니 ‘그럼, 동생도 데리고 와’ 하셨다.
‘정비능력도 부족해서 업무를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말씀드리며 간청했더니 ‘지금까지 잘 견뎠잖아, 이제 밤에 출동하는 일이 없도록 정비는 정비부장에게 맡기고 자네가 할 일은 따로 있어’ 하셨다.
식사가 끝나고 ‘난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너희는 조금은 배워서 나왔을 거 아니야, 자네를 데리고 가려는 기업을 내가 설득할 터이니 어디냐’고 따져 물으셨다. 오너와의 약속이 있어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본부장에게 지시하셨다. ‘좀 더 집에서 쉬게 해주라’고 하셨다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다음날 본부장에게 제 생각은 변함이 없다며 귀경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무언가 죄송하기도 하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하는 생각도 있었다.
귀경후 여늬처럼 서울에서 일을 계속했고 첫 월급도 받았다. 부장 월급보다 몇배 두툼한 봉투를 받고 집사람도 기뻐하며 ‘약국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좋아했다. 며칠 후 퇴근하는데 집사람이 ‘포철에서도 월급을 보내어 왔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인사과로 반송하라고 했지만 이런 일이 매달 계속되었다.
이런 식으로 몇달이 지났다. 오너도 사직을 해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 더 포항을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착잡했다. 앞길만 보면 우선 급여가 훨씬 많고 공장이 준공되면 지방생활이지만 그때까지는 동생을 결혼시키면 어머님을 모시고 갈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산가족을 거듭하면서 오남매를 키어온 어머님이시다. 더구나 그 사이에 가형께서 포철 석회석공급 주력회사 광업소장으로 옮겨 신규설비 확장중에 안전사고가 발생되어 직원들을 구하려 들어가셨다가 함께 순직한터라 차남이지만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었고 집사람에게도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을 결혼 전 합의를 했었다.
사복차림으로 포항으로 내려가 본부장님실을 찾았다. 본부장님은 ‘잘 지냈어’하셨다. ‘제 뜻은 변함이 없다’고 말씀드리며 허가 해 줄 것을 간청드렸다. ‘안부장도 알다시피 회장님이 허락하지 않는거야, 난들 방법이 없네’하셨다. 사장님과 회장님께 말씀드려봐’ 하셨다.
사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어, 이제 다 쉬었어, 이놈아, 회장님이 그럴 때는 뜻이 있어 그런 거야 말씀대로 해’하시고는 회장실로 가보라고 하셨다.
비서실과 연락해서 시간을 얻어 회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제 됐어’하셨다. ‘회장님, 포철이 저를 이만큼 키워 주신 데는 감사드립니다만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제 전공분야에서 나래를 펴 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라고 간청했다. ‘음, 네가 할 일은 원하는 대로 전공분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할 거야,' 하시며 ‘한국에 있는 어떤 기업도 자네를 데려갈 수 없어, 그러니 되돌아 와’하셨다.
마지막 수단으로 ‘저는 가형이 석회석 광산의 안전사고로 유명을 달리해서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집안도 책임을 져야 하는데 사기업이 대우가 훨씬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회장님은 화를 버럭 내시며 ‘난 안 그런 줄 아냐? 중석사장때가 훨씬 좋아, 하지만 이게 국가사명이라 따라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회장님은 ‘좀 더 쉬다 와’하시고는 나가 버리셨다. 드릴말씀은 다 드렸으니 되겠지 하고 귀경했다.
이렇게 세달이 지나자 오너조차 사표수리가 왜 그렇게 안되냐며 물으셨다. 이쪽 일은 공장시설물의 스펙 검토가 끝나면 곧 발주해야 되고 인력도 고령이지만 전회사의 퇴직자 중에서 구해서 그들 뒤를 이을 공고생들을 선출하여 훈련해야 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다 보니 오너도 나를 의심했는지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비서실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궁궐 같은 집에 평생 보지도 못한 한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별 이야기 없이 식사를 하고 못 먹는 술도 오너가 권하는 대로 조금 했다. 오너는 비서가 갖고 온 서류를 건네 주며 ‘안 상무, 이걸 좀 보게나’하셨다.
포철 공문이었다. 내용은 포철 현직 기술직을 채용하는 회사에게는 종합상사에 철강물량을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두번 세번 읽어도 같은 내용이었다. 당시는 국가가 수출산업을 장려하면서 각 재벌기업마다 우후죽순처럼 종합상사가 생겼다. 수출가액만큼 정부지원이 있었다. 그 전까지 수출품은 면직품이나 가발, 신발류였다. 그걸 아무리 수출해도 철강 몇 톤보다 수출액이 적었다. 그래서 모든 재벌기업이 종합상사를 만들고 철강수출량의 배당에 전력을 다할 때였다.
‘아, 오너가 사직 후 채용이라는 뜻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오너는 ‘이제 회사도 정착을 해야 할 단계네, 한달을 더 기다리겠네’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달 후까지 사직처리가 안되면 나는 공중에 뜨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었다.
집에 와서 집사람과 포항 집 매매를 확인했다. 당시 주택은 회사가 1/3을 부담하고 주택은행 융자와 개인이 각각 1/3씩 분담해서 지었다. 간부 사택은 100평대지에 20평짜리 문화 주택으로 앞에는 잔디밭이 꽤 넓었고 뒤뜰에도 제법 텃밭이 있었다. 집을 팔려면 주택관리소에 내어놓아 직원 간에 매매토록 되어있는데 주택관리소에서는 매물로 접수를 해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매가 될 리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다시 포항으로 갔다. 본부장과 사장, 회장님을 뵈었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두분 다 ‘이제 포기하고 돌아오라’고만 하셨다. 별 성과 없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아내는 불안을 느꼈다. 향후 어떻게 할지 몰라 내가 실직하게 되면 약국이라도 개업 해야겠다며 알아보겠다고 했다.
또 한달이 지나가자 오너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아무래도 사직은 어려울 것 같으니 그냥 정식 발령을 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오너는 공문 하나를 보여주셨다. ‘포철의 인력차출을 삼가 해달라’는 공문이 우리에게만 온 걸 봐서 포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며 잘못하면 그룹전체에 악영향이 미치므로 한달을 더 기다리겠다고 했다. 잘못하면 낙동강 오리 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한달이 지나는 날 오너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며 그동안 고생한 대가로 두둑한 봉투를 주셨다. 사직하면 채용하겠다지만 난 이제 백수가 된 셈이다.
다시 구직을 해야 했다. 지난번에 함께 생각했던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종합상사가 없는 대기업은 없었다. 차라리 중동이나 가던지 전 직장으로 회귀할까 생각도 하며 집사람과 의논을 했다. 출근을 않는 아들을 본 어머니는 ‘내가 모르는 게 있느냐’ 따져 물으셨다. 하는 수 없이 포항에서 사직이 안되어 사직이 되면 곧 출근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어느 날 중소기업에 다니던 동생이 ‘형, 제가 포항제철로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웬 포철이야’했더니 ‘포철에서 채용해주겠다며 형하고 함께 근무할 거라고 했다고 한다. 동생은 당시 월급이 제때에 나오지 않는 중소기업에서 안정된 직장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럼, 동생도 데려오면 될 것 아냐?’ 하시던 회장님의 말씀이 떠 올랐다.
포항에서 본부장이 급히 찾았다. 내려갔더니 ‘동생도 함께 포항으로 와서 어머님을 모시면 자네 뜻대로 되지 않나’하시며 이미 백수가 되어있는 걸 다 알고 계셨다.
사장님실로 함께 갔다. 사장님은 들어서자 마자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 회사는 내 허락없이 근무 못해, 제씨도 입사 시킬거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회장님 말씀 들어’ 하셨다. 그 동안 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었다는 걸 다 아시는 듯했다.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까지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고 있은 셈이다.
회장실로 가자는 본부장께 며칠 더 생각하게 해 달라며 다시 귀경해서 가족끼리 협의했다. 어머니는 막내의 직장을 불안스러워했는데 함께 갈수 있다면 대 찬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항에서는 대구에서 사귀셨던 옛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집사람만은 전공이 다르니 영구직장이 안되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온가족이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기로 합의했다. 바로 포항으로 내려가 본부장과 함께 회장실로 찾아갔다.
회장님은 ‘이제 오는 거지’ 하시며 본부장에게 지시를 하셨다. ‘정비사고는 정비부장이 하고 안부장은 내가 임무를 줄거야’ 하셨다. 결국 뛰어 봤자 벼룩 신세였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다가 겨우 손가락 끝에 매달려 발버둥을 친 셈이었다. 하지만 정비부장과 전기정비차장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그냥 볼수만은 없었다. 야간 출동은 줄어들었지만 낮에는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