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唐)나라 제2대 왕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治世:626∼649) 기간을 말하는
정관의 치는 태종의 시대 연호가 정관(貞觀)이어서 이름이 붙여진
중국 역사에서 가장 백성들이 편하게 황제가 정치를 한 시대를 말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 개국 초기에 당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다진 황제 였으며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훌륭한 인재를 측근으로 두고
황제로서 받아 들이기 어려운 간언도 신하들이 편하게 하도록 하였으면
가장 잘 받아들인(납간; 納諫) 황제 였으며
황제의 위치보다 백성들의 이익을 우선한 황제로 중국역사에는 기록한다.
이세민 태종(太宗, 598~649)은 18세인 617년 수나라에 반기를 들고 거병한 아버지 이연(당 고조)과 함께
당나라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28세때 황제로 등극한다.
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태자로 있던 형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 이연을 연금한 상태에서 황제를 양위 받는 현무문의 변이라는 구테타를 겪는다.
어떻게 이런 패륜을 저지르며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이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로 칭송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황제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는 인재들을 발탁하여 늘 주변에 있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한 인사정책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학습을 게을리 하거나 주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종은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만인의 천하다!”
“백성은 물이요, 황제는 배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충신들은
“감히 간언했으며 능히 간언했고 훌륭히 간언했다.”
당시 태종과 함께 당나라의 기틀은 마련한 참모중에는
방현령 (房玄齡, 578~648),위징(魏徵, 580~643),두여회(杜如晦, 585~630) 가 있는데
위징은 원래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에서 죽인 태자 이건성의 참모였으나
인재를 보는 태종에게 발탁되어 죽을 때까지 태종 곁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간언을 한다.
고구려 침략(645년)의 후유증으로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되는 태종이 위징이 살아 있었으면
자신의 고구려 출병을 막았을 것이라고 출병을 후회하는 말도 남긴다.
또한 방현령과 두여회는 당나라 초기의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며
수나라 시기에 방만하게 운영되던 관료사회를 정리하고
막대한 조정의 예산이 함부로 쓰이는 공무원 조직과 지방 행정단위를 통폐합 시킨다
당시 두 사람의 활동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방모두단(房謀杜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