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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
제1권 :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독립 운동가들의 자취를 따라
제2권 :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피로 쓴 독립운동 기록물을 읽고
작가 : 김 용 균
*첫글:
<<3.1운동은 성공한 민족혁명 운동이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뿌리다>>
2021년 3월 1일 월요일 새벽 단잠을 깼다
무얼 읽을까 하는데 책꽂이에 태극기 문양을 닮은 2권 책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 김용균의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제1권-표지 빨간색. 제2권-표지 파란색)
제1권 부제 : 독립 운동가들의 자취를 따라
제2권 부제 : 피로 쓴 독립운동 기록물을 읽고
왠지, 모르게 녹천 고광순의 “불원복” 태극기 즉 “희망의 태극기”가 떠올랐다. (1권P308)
그래서,
3.1운동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인물 유관순 애국지사 편을 읽기 시작하였다.
김용균 작가가 말하는 3.1운동은,
“3.1운동은 단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항한 반일운동, 국권회복 운동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될 일이다.(1권 P175)
3.1운동은 더 나아가 나라 안으로는 5,000년 군주정치의 낡은 질서를 허물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를 태동시킨 혁명적 거사였다“.(2권 P245)
김용균 작가가 말하는 3.1운동의 핵심적인 내용을 보자
1.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헌장 전문은 대혁명으로 명시적인 선언을 하고
2.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 했다고 밝히고 있다. (1권 P5)
3.헌법재판소 2005년 6월 판결문의 핵심 내용은
“헌법 전문에 적힌 3.1운동은 항일 독립운동 전체를 뜻하는 것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뿌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관순 애국지사에 대한 훈격 평가를 살펴보자
1차 서훈은 만세 부른 단순한 애국지사로 평가하여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으로 추서함
2차 서훈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장 1등급으로 추가 서훈하였다
유관순 애국지사는 생전의 공적이 3등급, 사후의 공적이 1등급인 셈이다.(1권 P172)
김용균 작가의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제1권 . 제2권) 작품을 읽으면서
3.1 운동의 깊은 뜻을 새기며,
피로 쓴 독립운동가의 삶의 현장 이야기 중에서 전쟁이야기, 며느리 이야기 작품을 선택하여
작가가 읽고, 느낀, 소회를 중심으로 하여 나의 독후기는 “작품 내용”을 중심으로 써본다.
김경천 애국지사의 “경천아일록”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주인, 임정의 며느리가쓴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를 통째 읽어보았다
*둘째 글:
<<김경천 애국지사의 “경천아일록“>>
김용균 작가의 작품 제2권 부제 “피로 쓴 독립운동 기록물을 읽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 슬픔과 분노가 더 깊어지고
나라 잃은 민족의 애달픈 삶에 대한 슬픔은 연민으로 변한다.
독립운동가 김경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더 소상한 내용은 책을 참조 하세요)
1.망명길 선택 – 인생은 선택이다.
김경천 애국지사하면 “망명“ 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김경천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적국의 장교로 복무하며 마음을 앓던 그는 1919.3.1.운동이 터지자
기다린 듯이 군대를 탈출해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다.
가장 위험했던 망명의 주인공인 그는 일본군 현역군인으로 군문을 지청천과 탈출하였다.
잡히면 총살도 각오해야 하는 목숨 건 행로였다.
두 사람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와 26기 선후배 사이이다.
대부분의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들은 출세의 길로 나아가 일본군 장교가 되고
적국인 일본을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것을 마다하고 일본군 장교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조국으로 돌아와
일본과의 투쟁 대열에 가담했다. 기꺼이 목숨을 걸고 “형극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3.1운동을 맞으면서, 일본 육사의 직계 후배들로서 같은 일본군 장교인
이응준, 지청천(지대형)과 함께 군영을 탈출해 서간도. 북간도. 러시아령의 3곳으로
망명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조국 광복을 위한 망명 투쟁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식분’임을 자각하고 망명을 결단 한다.
즉, 마지막 무관 생도들의 국가를 위한 선택이 뚜렸하게 갈리게 된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망명길에 동행하고 이응준은 군대로 복귀해 훗날 일본군 장성이 되었다.
경천아일록에서 김경천은 이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다. (2권 P249)
“개인적으로 15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이번 기회를 얻은 것이니
나 자신의 안식을 구하여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겁내는 것은 내 본의가 아니요,
안식만 알자 했으면 당초 부친과 형이 별세한 그때에 집안을 지키는 자가 되었을지니
이미 해외에서 무수한 고난을 견디어냄은 민족에 어떻게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함이니 그런즉 이 기회에 용맹정진 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낙오하고 실패 하더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구경하는 것은 용사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 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원수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제2의 매국자라 할 수 있다 함 이다“. (일기 P92)
2.백마탄 김장군
‘조선의 나폴레옹’을 자처했던 김경천은 지(智).덕(德).용(勇)을 겸비한 참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와 한인 빨치산들에게 ‘김일성 장군’으로 통 했다.
‘백마 탄 김 장군’으로 불리며 시베리아의 전설적인 항일 영웅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경천의 그런 명성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를 도용 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 되어온다.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1권 P226)의 행적을 기록한 “고헌실기약초”에는
경천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에 대한 만시(挽詩)가 실려 있기도 하다.
1922년 1월 말경의 일기 속에는
김경천의 용맹스러운 자화상이 잘 그려져 있다. (일기 p151)
‘(이만시 야간 습격!) 이 전쟁에서 나는 가장 많은 탄환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지금껏 여러 차례 수행한 전쟁 중에서도 제일 많이 집중하여
쏟아지는 적탄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전후좌우 장졸이 모두 여러 군데 부상을 당했으나
적탄은 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건드렸다.
한인-러시아인 양쪽 군인들이 내게 위험하다고 말하나
나는 아직 일본군과 백군과 마적들은 나를 맞힐 탄환을 못 만들었다 하고 웃었다‘.
3.허무하게 생을 마치다.
김경천은 서간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잠시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연해주 지역으로
옮겨가 일본군과 마적들을 때려잡는 한인 빨치산 대장으로 맹활약 했다.
그러자 조국 광복만을 위해 싸운 그가 억울하게 러시아 혁명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1922년 후반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일본군이 연해주 에서 물러가자
한인 빨치산들도 무장 해제를 당했다.
항일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 그는 서울에서 온 가족과 함께 수청,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옮겨가며 야인으로 살았다.
그 후 1936년 가을에
간첩으로 몰려 소비에트 당국에 전격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격고 나서,
그 사이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간 가족을 찾아 갔다.
거기서 또 다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8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2년 1월 강제수용소에서 병사 했다.
영광과 비운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4.경천아일록
김경천이 생전에 쓴 일기가 2005년 세상에 알려졌다.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에 거주하는 그의 유가족이 카라간다 정보국 문서보관소에
찾아가 그의 유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때 건네받은 서류뭉치 속에서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제목의 자필 수기가 발견된 것이었다.
그가 두 번째 체포되던 당시에 압수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경천아’는 그의 아호였는데, 나중에 그의 이름을 아예 ‘경천’으로 바꾸었다.
“경천아일록”은 군부대롤 이끌고 전투에 임했던 지휘관이 절체절명의 전장에서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7년동안 전장에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버금가는 귀중한 전쟁 일기가 아닐 수 없다. (2권 P248)
일기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1888년 6월 출생 시부터 일본 유학을 거쳐 1919년 남만주 망명 시 까지
삶의 주요 이력을 회고록 형식으로 쓰고,
후반부는 1920년 1월 1일부터 1925년 12월 말까지 시베리아에서 겪은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썼다.
연해주 한인 빨치산 전사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의 역사, 그리고 그 전사들을 이끄는
김경천 장군의 뜨거운 나라 사랑과 인간적인 모습들이 매우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1925년 12월 31일 목요일”
1925년 마지막 날이다. 한도 많고 감회도 많다.
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일기 P202)
*셋째 글:
<<정정화 애국지사의 “장강일기”>>
양자강 푸른 물결에 실린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파란 만장한 일대기가 장강일기다.
김용균 작가는 말한다.
한 인물의 삶에 보다 가깝게 다가 갈수 있는 방법은 본인이나 그의 가족 또는
주변 인물들이 남긴 당대의 기록물을 읽는 것이다.
이런 기록물들, 즉 “피로 쓴 독립운동 기록물을 읽고” 작품을 읽는 것은
독립운동가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특별한 체험이 될 것이다. (2권 p8)
그러면,
정정화 애국지사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1.정정화 그는 누구인가:
1900년 8월 3일 출생하여 1991년 11월 2일 한 생을 마쳤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인 10세 되던 해 동갑내기 김의한(성엄)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판서를 지낸 충남 예산의 권문세가 출신으로
서울의 권문세가 동농(김가진)의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1919년 10월 남편 김의한과 시아버지 김가진이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면서
그녀의 굴곡진 새 인생이 시작 되었다.
수당(修堂) 정정화, 그녀는 남편의 뒤를 쫓아 상하이로 가서 여성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6차례나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고 임시정부의 피난길을 따라가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고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2권 P224)
정정화가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국내 잠입은 6차례 있었다.
제1차 국내 잠입 활동:(1권 P226)
시아버지 동농과 남편 김의한이 함께 상하이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신문 보고 알게 되었다.
정정화 그녀는 1920년 1월초 상하이로 떠나게 되었고
친정 아버지는 그녀에게 800원의 거금을 건네주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부자의(김가진과 김의한) 생활 형편은 그야말로 애옥살이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요인들의 살림살이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한달 쯤 지나 자기가 직접 국내에 들어가 자금을 구해 오겠다고 나섰다.
수당 정정화는 임시정부 법무총장 김규식과 상의 끝에 임시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갖고 오라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이제 그는 명실공히 독립운동가였다.
1920년 3월 초순 상하이를 출발, 연통제의 경로를 따라 국내에 잠입해
20여 일 동안 머물며 친정집 등을 찾아 자금을 모집한 후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 왔다.
오고 가는 길 곳곳에서 위험과 맞닥뜨린 모험의 여정을 일기 에서 보자. (일기 P63)
“안동에서 신의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신의주에서 안동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고, 많은 위험이 뒤따랐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배로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세창씨의 안내로 양복점을 빠져나갔다.
압록강 하류의 강변에 도착한 우리는 신발을 벗어들고 진흙과 자갈이 섞여 넓게 펼쳐진
강변을 따라 맨발로 삼십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사방이 깜깜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은 밤길이어서 이세창씨의 바로 한 걸음 뒤에서
바싹 뒤꽁무니를 따라가자니 여간 벅차고 힘든 길이 아니었다.
거의 세 시간쯤을 걸어 북하동에 이르렀을 때 어둠 저편에서 쪽 배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당 정정화는 독립자금을 구해오는 밀입국을 1921년 늦은봄과 1922년 6월 두차례 이어지고,
그 후 사적인 용무를 겸해 세차례나 연거푸 다녀왔다. - 전체적으로 6차례 국내 잠입하였다.
2.임시정부의 안주인:
1926년에 성엄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 했다.
성엄이 취직한 후부터 상해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월급을 가지고 임시정부의 요인 중에 연로한 석오 이동녕과 성재 이시영을 비롯해,
조완구. 차이석. 안창호. 김구 등을 정성껏 뒷바라지했다.
그러던중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일제의 압박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그녀는 난징으로 피신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여사와
함께 기거하면서 극진하게 여사를 보살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통쾌한 거사가 있었던 그날 저녁에
상해를 탈출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이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우리가 고대하던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남하 해오면서,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을 거쳐
창사로 이동했다. 그녀도 창사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 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1938년 7월 다시 광저우로 이동하면서부터 그 안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임시정부 사무소에 거주하면서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들을 수발했다. (2권 P228)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되었을 때 일기를 보자. (일기 P160)
“밥은 배 위에서 삼시 세끼를 다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식구마다 따로따로 취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밥은 한꺼번에
큰솥에다 지어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반찬만 제각기 몇몇씩 모여서 만들어 먹었다.
나는 석오, 성재, 우천, 동암 차이석, 신암 송병조 등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 전원을 돌봐드려야 했으므로 어디든지 배가 잠시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서 시장을 봐 오는 것도 일 중에 하나였다“.
임시정부가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영도자였던 석오 이동녕이 치장에서 숨을 거둘 때
열흘 동안 곁에 붙어 있다가 그의 임종을 지킨 것도 수당 그녀였다.
3.조국 해방과 고달픈 인생:
“ 왜놈이 항복했다! “ - 일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8월 6일, 악몽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고하는 전주곡이 울렸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불상사라는 불은 또 하나의
불상사라는 맞불을 놓아 꺼야만 했다.
이틀 후 소련은 대일 참전을 개시하면서 만주와 함경북도로 진공해 들어갔다.
두번째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나흘 사이에 원폭 투하를 신호로 해서 울렸던 종전의 전주곡은
이제 그 악보의 한 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일기 P232)
독립은 비록 자력으로 쟁취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임시정부와 함께 25년 동안
고난과 역경의 망명 생활을 해온 그녀로서는 독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레고 기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
수당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2권 P230)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체절명의 대명제 아래 항일 투쟁에 뜨거운 피를 뿌려 식혀가며
몸을 불사른 혁혁한 이름의 투사부터 성명 삼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이름 모를
낯선 골짜기에서 항일이라는 돌덩이 하나만을 머리에 베고 숨을 거둔 무명열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장하고 엄숙한 숨은 뜻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이순간이 있었을까?
이름이 났건 이름이 없건 간에 그들의 의기와 그들의 피가 없었더라면
결코 8월 15일은 오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고달픈 인생살이가 시작 된것은 1950년 9월 15일 남편 성엄 김의한은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고,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던 자들은 9.28수복이후 개선장군처럼 서울로
돌아와 정부만 믿고 잔류했던 시민들을 죄인으로 취급 했다.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모두 피난을 떠나는 난리 통에도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서울 집을 지켰다.
남편 소식이 궁금해서 북에서 내려온 인사를 만났다가 부역죄로 구속되어 한 달여 징역을
살기까지 했다.
조국을 위해 그토록 헌신한 그녀에게 조국은 철저히 등을 돌렸다.
“어린애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 늘 집안에 계시듯, 잃어버린 조국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있었다”고 말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일기 속에 그녀의 사부곡(思夫曲)이 너무나 통절하다. (2권 P233)
왜 이다지 험하기만 할까? 왜 이다지 매정하고 야박할까?
나는 그때 비로소 조국에 하소연했다. 잘못이 내게 있다면 나를 처벌하라고.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를 부르라고,
내가 붙들고 있는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벌주지 말라고.
그러나 조국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36년이 덧없이 흘렀다.
조국은 끝까지 침묵했고, 그 36년의 하루하루는 혹시나 하여 기다리고,
내 분(分) 이겠거니 체념하고, 그래도 또 모르지 하며 헛된 기대도 가져보면서
한 땀 한 땀 천 조각을 깁듯이 메워온 나날이었다.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일기 P301)
임시정부와 25년을 함께했던 임정며느리는 고달픈 삶을 살면서,
감옥 생활도 하고 셋방살이도 하였고, 91세 나이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넷째 글:
<<애국지사 가족의 슬픈 사연>> –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사연들 이다.
1.안중근 의사와 아들 안준생:
안중근 의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안 의사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일 것이다.
안 의사는 명실 공히 ‘대한국인(大韓國人)’이다.
우리 겨레의 사표가 된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영웅이다. (1권 P27)
안 의사가 구국 투쟁을 위해 해외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07년 8월,
당시 그에게는 노모와 처, 그리고 두 아들과 딸이 딸려 있었다. (2권 P67)
상기 내용을 읽다가 그러면, 아들 딸은 어찌 되었을까? 하여 찾아보니,
아들 안준생, 딸 안현생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터넷 글 중에서)
안준생은 아버지와 국가를 배반한 자가 되었고 이런 말을 하고 죽었다.
아버지는 나라에는 영웅이었겠지만, 가족에게는 재앙 이었죠
저는 나라의 재앙이었겠지만 내 가족에게는 영웅입니다.
너무도 슬픈 사연이다.
2.우당 이회영 애국지사와 조카 이규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1867년 3월 17일 서울 한복판 저동 (지금의 명동 YMCA 건물 옆)에서 태어났다.
우당의 부친 이유승도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유승에게는 아들 6형제(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있었고,
그중에서 이석영이 방계 백부인 이유원의 양자가 되었다. (1권 P42)
우당 6형제는 높은 신분, 많은 재산으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영화를 마다하고
집단 망명하여 구국 투쟁을 벌이며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들 가족의 가혹한 수난사를 살펴보자. (1권 P47)
한결같이 고결한 뜻을 품고 의롭게 처신했음에도, 우당 형제들의 삶의 모습은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하늘도 참 무심했다. (1권 P48)
특히, 가슴 아픈 사연은 우당 이회영 사망에 관련된 것이다.
우당이 1932년 6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주로 되돌아가
새로운 항일 투쟁을 꿈꾸었다.
관동사령관 무토가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려 했다.
주위에서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나섰다가 그는 다렌 항에서 일경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32년 11월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우당의 죽음이
밀정의 밀고 때문으로 조사 결과 혐의자로 포착된 사람은 연충렬과 이태공이었다.
이태공은 우당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던 친형 이석영의 아들,
그러니까 우당의 바로 친조카인 이규서 였다.
우당가의 가슴 아픈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2권 P364)
3.최영백 (고헌 박상진 애국지사의 처)과 경주 최부잣집 최준:
고헌 박상진 애국지사는 왕산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 항일의식과 독립 의지를 키웠다.
고헌은 1915년 7월 전국의 각 지역 인사들로 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관이 되었다.
한국인 순사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사형 판결이 확정된 후,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불과 38세였다. (1권 P232)
최영백은 고헌 박상진 애국지사의 처로 말년에 굶어죽다시피 하며 살다갔다.
마지막 경주 최 부잣집 대를 이은 최준.
그는 고헌의 독립운동 동지이기도 했으나, 고헌이 죽고 난 후의 재산 싸움에서는
지독하리만치 냉혹했다.
최준은 최영백 사촌누이와 재산 소송에서 이겼다고 한다.
경주 최부잣집 육훈 중 5번째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런 육훈을 무시했는지 아니면 고의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최영백은 보릿가루를 물에 타서 허기를 달래며 연명 하였다.
그렇게 살다가 그녀는 83세를 일기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1권 p234)
*맺는 말:
작가 김용균은 말한다.
“독립운동 하면 3대에 걸쳐 망하고, 친일하면 3대에 걸쳐 흥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순된 역사이고, 슬픈 현실이었다.
절대로 더 이상은 안 될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힘겨운 고난이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후대로 상속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어떻게 애국을 말하고 민족정기를 세울 수 있겠는가? (1권 p234)
정의가 살고 민족정기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를 바로 알고 제대로 예우하고 선양하는 일을 애국정신으로 실천해야 한다.
독립운동가의 유산을 보존하고 그의 후손들을 보호하는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의 거룩한 자취를 다 함께 찾아 나서자. (2권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