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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꽃가루*
유미애
깨진 피리를 만지면 울음소리들이 일어선다
꽃가루는 가슴 중앙, 소리가 멈춘 곳에 있었다
들것에 실려 온 소년은 굴 속에 누워 천천히 귀를 접었을 것이다
벌레들이 짧은 생을 복사하는 동안
마지막 해와 달을 눈동자에 심으며 고요해져 갔을 것이다
풍뎅이 문신을 하고 온몸의 문을 닫는다
마흔이 넘도록 나는 귀를 다스리지 못했다
낯선 악보를 읽는 입술에 불꽃이 일 때, 소년은
동굴 같은 방, 내 거친 어둠으로 건너와 피리를 분다
풍뎅이가 날개를 펴면 꽃의 성체가 깨어나고
한 줌, 꽃가루를 눈에 넣고 귀가 밝아진 나는
가루가 된 음들이 악기 속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래된 피리 소리로 그림자를 닦는다
아랫입술에 겹쳐지던 향기가 희미해져갈 때
굴 밖, 어지러운 도시의 불빛과 방의 숨소리
풍뎅이를 모두 날리고 다시 어두워진 나는
온전히 복원시키지 못한 이름 위에 피 한 접시를 뿌린다
첫 국화가 다녀간 빈손을 꼭 쥔 채
귀를 빠져나가는 시간의 울음덩이를 지켜본다
-전문-
*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의 화석. 국화꽃으로 추정되는 꽃가루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함
▶ 감각의 복원 그리고 실패(발췌)_ 현순영
이 시는 '나'가 이른바 '흥수아이'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흥수아이'에 관해 여기서 굳이 설명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의 '원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해준다는 점, 성별이 밝혀지지 않은 그 아이가 이 시에서는 '소년'이라 명명된다는 점은 말해둘 필요가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이 시에서 소년은 '나'를 통해, '나'는 소년을 통해 복원되며 그 복원은 감각의 복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소년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과정을 그려본다. "들것에 실려 온 소년은 굴 속에 누워 천천히 귀를 접었을 것이다/ 벌레들이 짧은 생을 복사하는 동안 마지막 해와 달을 눈동자에 심으며 고요해져 갔을 것이다". 생명이 사그라지는 과정은 감각이 서서히 멈추는 과정이다. 귀가 스스로를 접어 청각을 멈추는 과정, 눈이 스스로를 감아 시각을 멈추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깨진 피리를 만져 울음소리들을 일으켜 세워 소년을 깨운다. 그 울음소리들은 소년의 짧은 생을 복사했던 벌레들의 울음소리, 소년의 가슴에 국화꽃을 올리고 고개 숙여 울었을 사람들의 울음소리, 어쩌면 소년의 울음소리일 수도 있다. 소년은 그 소리에 깨어난다.
깨어난 소년이 '나'에게로 온다. 그러나 그것은 낯선 악보를 읽는 '나'의 입술에 불꽃이 이는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다. 그때 소년은 동굴 같은 방, "'나'의 거친 어둠으로 건너와 피리를 분다. 풍뎅이는 소년의 변신變身인가? 악보를 읽는 '나'에게 소년이 피리를 불어주는 것은 마치 꽃의 성체成體인 풍뎅이의 꽃가루가 '나'에게 수분受粉하는 것과도 같다. 그 수분이 '나'의 감각을 바룬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감각은 온전치 못했다. 그것은 '나'가 어둠 속에 있다는 진술로서 이미 뒷받침되었다. '나'는 동굴 같은 방, 거친 어둠 속에 있다. 볼 수 없다. 어떻게 악보를 읽나. '나'가 읽는 모든 악보는 그래서 낯선 악보다. 게다가 '나'는 마흔이 넘도록 귀를 다스리지 못했다. 잘 듣지 못해 왔다. 아니, 들어서는 안 될 것까지 들어 왔다. 그런데 꽃의 성체인 풍뎅이의 한 줌 꽃가루로 '나'의 감각은 되살아나고 바루어진다. 꽃가루로 '나'의 시각, 청각, 후각, 모든 감각이 연동하고 통합된다. '나'는 꽃가루를 눈에 넣고 귀가 밝아진다. 아랫입술에는 향기가 겹쳐진다. 게다가 '나'의 어떤 기억, 그림자로 남은 이름마저도 되살아난다.
그러나 어둠만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악보를 읽을 때 '나'의 입술에 일던 불꽃은 사그라지고 동굴 같은 방 밖, 어지러운 도시의 불빛마저도 사라진다. 어둠은 풍뎅이를 날려버린다. '나'는 온전히 복원되지 못한다. 이것이 진실이다. (p.116~118)
https://blog.naver.com/kiroro1956/221642809359
시집 『분홍당나귀』
트럼펫 보이
너는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거란다 흰 보에 싸인 내 울음소리는 담을 넘지 못했다 신이 주신 건 속눈썹이라는 낮은 지붕 하나였으니
자두꽃이 피는 저녁, 눈 속의 물고기를 꺼내 나무에게 바쳤다 나의 시작은 자두 한 알이었으니까 자두 너머의 세계를 들려주는 건 내 손의 비린내를 쪼다 가는 새들이었으니까
속눈썹에 빗질을 했다 악보 사이 짐승들이 우글거렸으나 눈 속에는 비늘을 번뜩이며 길을 묻는 음표들, 하이에나를 눕히고 발라드를 찾아오겠다 놈의 심장에 꽃을 던지겠다
운석 지대로 새를 날렸다 별을 깨며, 최초의 노래를 듣겠다 돌 속으로 돌아가 마지막 악기가 되겠다
자주색 달이 뜨는 밤 담장 밖으로 뛰어들 때, 이 메트로놈 소리를 따라가거라 남은 빛을 건네는 물고기
다시 환해질 때까지, 나는 자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표범
-신문지에 쓴 6호 연필
바깥귀를 접은 지 오래 나는 나를 완성시킬 수 없네
위대한, 설산의 구두소리는 내 것이 아니고
신문지에 스케치한 카카리키*는 나의 나무에 도착하지 않았네
하지만 너라는 그림자는 뜻을 굽힌 적이 없지
캄캄한 그 혀 속으로 휘파람 한 토막을 건네줄게
벌거벗은 음들이 서로의 무늬를 섞을 때
마침내 내게도 객관적인 입술이 생기는 거야
붉은 달을 부르는 순간 네 안의 짐승이 깨어날 거야
피투성이의 등을 문대던 꽃나무와
떠꺼머리 굴 한 채가 너에게 속하게 되겠지
노래를 멈추지 마, 해진 자켓이 갈기를 세울 때까지
날마다 초췌해지는 내 몸의 얼룩들을 가져가
바닥과 바닥의 심장을 관통해온 이 눈물을 마셔
필갑을 열면 검은 밀림이 타오르는 밤
네 눈 속, 두 번째 달이 둥글어질 때
가라 표범
성대가 녹아내릴 때까지 변방을 달려
휘파람도 불 수 없는 밤
국적 없는 네 울음소리가 또 다른 너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
*멸종위기 앵무새.
입체적 눈물
—종이 인류
나는 본문 밖의 존재야
서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고래처럼 어두워질 때
줄거리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말았지
움켜쥔 나뭇가지 하나, 희미한 손금처럼 멀뚱거릴 뿐
수시로 꺾이는 하체와 밋밋한 얼굴이 부끄러운 내 실체야
가위를 든 달이 뜨고 책장 속 어둠이 술렁거릴 때
재빨리 가위를 낚아채 두 눈을 벌려주었지
사내는 펜을 내던진 채 꿈속을 표류 중이고
고래는 내 눈 속으로 건너와 포효하는데
가난한 내 이야기는 더듬더듬, 도무지 꽃이 되지 못할 때
21쪽 분홍 모서리를 찢어 입술에 붙이고
남은 조각 불어 가슴으로 밀어 넣었지
목차와 목차 사이 깊은 숲과 짐승들이 깨어나는 오늘은
한 권의 눈물을 다 읽고 간 고래나
색종이 한 묶음과 달이 펼쳐놓은 도시의 명암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아
간신히 손을 뻗은 서향나무, 잃어버린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흔들리지 않을 거야 다만
사막처럼 희고 아득한
기댈 곳 없는 차가운 몸을 흐르는
보라색 잉크 방울에만 집중할래
범람하는 자두
늑대가 될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
손가락을 뚫고 나오는 어둠을 벽에 바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비틀기도 했어
허기진 저녁이 가고
새벽에 받아놓은 눈물이 질척거릴 때
나무의 어둠도 피 흘리던 이파리도 사라지고 없었지
이후 내 그늘에는 빈 의자가 놓였어
자두처럼 예쁜 계집을 갖고 싶다는 너의 뜻은
땅속 깊이를 알지 못하고
뿌리를 피해 도망만 치며 살아온 나는
지상으로부터 이십 센티 위에 떠 있어야 했으니
야성을 잃어가는 발톱과 절룩거리는 의자의 이야기는
끝을 알 수 없었지
자두를 꿈꾸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새로 못질한 의자 위 의혹의 접시가 흔들리는데
푸른 쪽이든 썩은 조각이든 버릴 수가 없네
상처 줄 맘 없었다는 너의 말이
아직 저 붉은 원 안에 살고 있으니
라면 박스를 뚫고 나온 울음소리가 귓속을 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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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될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 손가락을 뚫고 나오는 어둠을 벽에 바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비틀기도 했어/ 허기진 저녁이 가고” 늑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캄캄한 달밤에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의 이미지이다. 고독을 삼키며 야성을 향해 울부짖는 외로움과 허기이다. 그런데 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결국은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 줄 대상을 찾게 된다.
“새벽에 받아놓은 눈물이 질척거릴 때/ 나무의 어둠도 피 흘리던 이파리도 사라지고 없었지/ 이후 내 그늘에는 빈 의자가 놓였어/ 자두처럼 예쁜 계집을 갖고 싶다는 너의 뜻은/ 땅속 깊이를 알지 못하고/ 뿌리를 피해 도망만 치며 살아온 나는/ 지상으로부터 이십 센티 위에 떠 있어야 했으니” 평안한 안식을 위해 외로움을 달래줄 대상을 찾아 뜨거운 밤을 보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빈 의자의 허상뿐이다. 유혹은 항상 사랑의 형상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자두처럼 예쁜 계집을 갖고 싶다는 너의 뜻은” 상큼한 연인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왔으나 땅속 깊이 뿌리 내리지는 못한다. 그런 너를 잡아둘 의지가 없었던 나 또한 “지상으로부터 이십 센티 위에 떠 있어야 했으니” 나는 사랑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성을 잃어가는 발톱과 절룩거리는 의자의 이야기”는 결론을 맺지 못한 미완으로 남겨진다.
“자두를 꿈꾸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새로 못질한 의자 위 의혹의 접시가 흔들리는데/ 푸른 쪽이든 썩은 조각이든 버릴 수가 없네” 그런데 만약에 자두를 꿈꾸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마음만 주고받는 사이였으면 어땠을까? 함께 밤을 보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추억이나 그리움으로만 남겨뒀으면 어땠을까? 이런 물음 앞에서 새로 못질한 의자 위에 놓인 의혹의 접시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시적 화자의 상대에 대한 고백 즉 사랑으로 읽힌다.
“상처 줄 맘 없었다는 너의 말이/ 아직 저 붉은 원 안에 살고 있으니/ 라면 박스를 뚫고 나온 울음소리가 귓속을 돌고 있으니” 상처를 주기위해서 시작하는 사랑은 없다. 그래서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사랑일지라도 처음부터 상처 줄 생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남기고 말 한 마디는 아직도 내 뜨거운 심장 속에 살아있다. 라면 박스를 뒤집어쓰고 울어도 틀어막을 수 없는 울음소리. 사랑의 상처가 뜨겁다.
이 시를 전체적으로 꿰고 있는 시어를 찾으라면 ‘자두’이다. 이 자두가 “자두 돼? 즉 동침해도 돼?”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너무 많은 여인들은 밤을 함께 보낸다. 자두가 범람하는 동안 의도하지 않았던 사랑의 상처들이 사방에 둥둥 떠다닌다. /조용숙 (시인)
분홍 당나귀
옆모습에 관한 전설 하나 들려줄까?
내 왼쪽 얼굴은 이야기꾼이었지
청중이 던져주는 꽃을 뜯어먹으며
갈채라는 날개를 퍼덕이며 조금씩 날아올랐지
별에서 별로 옮겨가는 주인공과 낭만적인 문장들
그러나 빈 화병이 뒹굴 때면 그믐달처럼 희미해져가는
반대편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 흘렸지
어느 바람 부는 저녁
목젖을 빠져나온 글자들이 입술 밖으로 뛰어내릴 때
그는 새로운 꽃을 찾아 떠났지
거문고를 메고 파교*를 건너, 겨울 골짜기를 헤맸지
마침내 늙은 나무 아래 닿아 거문고를 탈 때
오색 고깔에 필묵을 든 달이 봉우리 위로 솟아올랐지만
긴 혀를 접으며 그가 다리를 건너오고 말았지
벌름거리는 코와 만단설화를 잃어버린 이 행성이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 내 오른쪽 얼굴이
꽃씨 대신 얼음조각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홀쭉한 그 뺨의 수수께끼가 이야기의 시작이었으니까
파지와 고지서가 얽힌 방 나른한 연필 끝으로 돌아와
제 그림자를 밟고 있는 분홍 발굽, 면할 수 없는 내 죄는
山經 海經, 괴기 발랄한 그 어떤 이야기에도 미혹되지 못한 것
다시 바람이 부네
*파교 : 맹호연이 첫 매화를 찾아 건너갔다는 다리.
모란
—치마
몇 번의 빚을 얻으며 이어왔나 끔찍한 생
수렵의 정강이를 쫙 찢어내며 육교와 지하도를 건너가는
허리 잘록한 원피스
치마 속에 잠든 은협도와 사슴과 모란꽃손매듭
나는 피 묻은 비단 조각을 바친다
창을 던지며 피리를 불며
재봉틀을 돌려온 검정치마의 그늘 앞에
육식바늘의 귀에 화살을 꽂은 초식바늘 앞에
맨 치마에 나비를 꿰매준 어미의 굽은 손가락 앞에
야생으로 던져진 첫 드레스의 눈물 앞에
마지막 패치코트를 펼쳐놓은 공작새 날개 앞에
나는 치마를 들어올린다
모란 속에 살던 건달과 별빛과 피리소리
치마를 나온 사슴이 어린 공작을 몰고 숲으로 든 후
돌을 죽인 꽃과 꽃을 죽인 돌 이야기로 처마가 뜨거울 때
흩어진 치마들에게 묻는다
해진 밑단 아래 숨은 폭 좁은 역사에 대해
제 분홍을 다 뜯어 먹히고 가벼워진 늙은 모란에 대해
부끄러운 몸뚱이를 둘러준 푸른 치마와
그 눈의 죄를 읽게 한 내 치마의 붉음에 관해
———
* 모란 : 작약과에 속한 낙엽 활엽 관목. 난을 꾀하다.
기타를 메고 어디론가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소년은 언제나 기타와 함께였다
이별을 연주한 적 없는 그가 다른 별로 떠날 때
나는 비밀 악보를 입에 넣고 피 맛이 날 때까지 굴렸다
한 숟갈의 꽃말과 침이 겉돌던 봄이 가고
뒷마당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차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턱수염이 돋기 시작했다
삼키지 못한 노래들로 입이 무거워져 갔다
만화책을 집어던진 내가 교복에 어울리는 구두를 고를 때
외계에서 통조림을 따던 소년병의 시간은
과녁 없는 화살을 날리고 군화 속의 샐비어를 키웠다
지루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모의 훈련과 사이렌 소리로 메스꺼운 날들
나는 하모니카를 잘 부는 걸인에게 유니폼을 벗어주며
이 우스꽝스런 행성을 벗어날 방법을 묻곤 했다
마침내 운석으로 채운 배가 도착하고
오래된 옥수수 냄새와 독수리 깃털이 쏟아졌지만
기타도 소년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어린 병사들은 겁먹은 얼굴로 국경을 넘어갔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우리가 구두에 실어 보낸 노래들은 어느 별을 걷고 있을지
입속의 음표를 뽑아 허공으로 던지면
기타를 메고 어디론가 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래를 간질이는 법
-멜로디언
누이의 첫사랑은 뺏고 싶은 영원한 레파토리다
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그녀를 그리는 꽃과 입술이 부끄럽다
아름다운 늪 집의 전설은 떠도는 이야기일 뿐일까
우린 언제 바다로 가나요
이탈한 음들이 풀잎처럼 날아오르기도 했지만
검은 구름은 또 다른 웅덩이를 만들고
어느 겁 많은 눈과 흰 손이 이미 내게 와 있었다
이 어둠의 궤도를 따라 돌면
우리의 시작을 알 수 있을까
온 생을 쏟아 부은 봄
누이가 벗어놓은 신발이 꼬리를 튕겨 올릴 때
연두 한 칸, 분홍 두 칸
보름달이 뜨면 도망가리라던 그녀의 수화처럼
손가락 끝의 물고기 한 마리, 길을 트기 시작했다
새를 그리는 사람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니라고
저 위쪽 달의 젖은 뺨을 보며 달리는 붓질
낡은 벽을 채운 새들과 구석에 쌓인 새똥
그는 새처럼 우는 사람
누구보다 달의 눈꺼풀에 가까운 사람
제 눈물과 같은 꽃씨를 새의 눈에 심는 사람
이 방을 끌고 날아가라고
이렇게 퍼덕이는 방을 보았냐고
좁은 방 가득 활짝 핀 눈들이 떠다니지만
그는 새를 죽이는 사람
한 마리를 팔아 연필을 바꾸고
또 한 마리를 잡아 빵을 얻고
그러나 새들이 일제히 눈을 감는 날
그의 하늘은 붉은 구름이 솟구치곤 하지
삐걱삐걱 쉴 새 없이 돌아가야 하는
그는 새의 노예가 된 사람
죽은 꽃을 치우느라 심장이 식어버린 사람
새는, 가장 빛나는 슬픔으로 반짝여한다고
달을 향해 점프하는 새 보다 더 새 같은 사람
그러나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사람
새들이 모두 날아간 그때엔
마지막 씨앗을 물고 잠 들 사람
이글루
⸻제비꽃 로켓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
내 속, 얼음집엔 새알 하나 숨어있다는 걸
깊은 상처만이 부화시킬 수 있다는 핏덩이
수술을 거부한 노파는 주름을 깔고 앉아
어깨를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했지
평생 걸치고 있던 속옷 같은 꿈을
낡은 목숨과 바꿀 수는 없다고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제비꽃 때문
그해 첫 꽃을 이글루에 보내준 당신 때문
새를 얻기 위한 비법들은 스스로를 달구며
붉은 손바닥을 보라색으로 덮어버렸지만
나는 한 번도 온전한 새를 날리지 못했지
솜이불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온 생을 궁리해 얻는 깃털 몇 개
위태로운 발목에 파닥이는 노랑을 덧칠했을 뿐
클라이맥스에 닿지 못하는 내 색과 빛은
번번이 공기주머니를 엎지르곤 하지만
명랑한 집은 언제나 구름을 보관하고 있지
단단한 흐느낌을 품고 폭발하는 얼음덩이
겨울은 지금, 내 눈물이 키운 제비꽃을 발사 중
반쪽 새를 위한 구체적인 하늘과
내 열망의 속도를 체크하는 중
동굴
고독에는 작은 구멍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나봐
가장 깊은 슬픔으로 봉한 밀서를 품고 숲으로 달아난 귀
썩은 열매를 깨물자
고대인의 꽃가루를 숨긴 동굴처럼 방이 깊어지네
꽃도 돌멩이도 되지 못한 저녁을 모아 허공으로 던지면
그러면 귀는, 제 안에서 늙어가는 사슴 한 마리를 꺼내 보이지
아직 어두운 짐승, 벽화 속의 얼굴을 고치고 있네
가끔은 왼쪽 엉덩이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
그럴 때 구멍은, 단순한 귀도 항문도 아니야
사랑해 고백하고 붉어지는 입술
은밀하고 풍성한 속눈썹이 되어 밤하늘을 펄럭이자는 거야
생각 안으로 들어온 방문자에게 술래가 되라는 거야
다른 공기, 다른 빛깔의 굽이마다 감춰진 비밀들을
출렁이는 손가락으로 불러내어 악수를 청하는 거야
그럴 때면, 아무것도 모르고 흥얼거려온 노래의 근원과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는 구멍의 꼬리까지 밝혀 보고 싶어져
소리 없는 숲과 들
오래 전에 죽은 애인의 손에 돌멩이를 쥐어주고 싶어
사슴이 벙어리 화분에 물을 주네
두툼한 책, 어디서도 읽을 수 없는 향기
아침 벽에 새겨 넣을 삼색 뿔, 해와 달이 내겐 없는데
수천 년, 입과 귀의 벽을 뛰어넘은 꽃이
이 좁은, 보라색 방 한 쪽에서 피어나네
별들이 검푸른 바닷물로 뛰어드는 원시의 밤
연화(蓮花)
꽃과 보낸 날은 내 속의 웅덩이가 투명해지오
막 분홍을 지나온 연화가 저기 있소
조금 더 붉은 연화가 있소
가둬둘 수 없는, 시뻘건 연화가 있소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 꽃씨 이야기를 들은 적 있소?
물고기를 닮은 내 첫사랑은 연화요
아직은 잠들 수 없다는 누이의 이름이 연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외할미도 연화
연화였소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연화, 둥글거나 각지거나
제 슬픔에 집중할 수 없는 꽃들
어떤 연(蓮)은 바닥이 싫어 젖은 옷 찢어 줄을 엮었소
또 어떤 연(蓮)은 제 향기에 절어 뒷골목을 떠돌았소
다른 연(蓮)은 더운 국밥 말아 웅덩이들을 먹였소
어디에나 피어있지만 아무 데도 피어있지 못한
연화가, 대를 물리며 이어온 이름이란 것을 알고 있소?
떨어져 나온 꽃잎 하나가 반쪽 연화를 깁고 있소 취한 바람이 지켜보다 갔소
누구의 가슴엔들 구멍이 없겠소? 주저앉힌 웅덩이 하나 있지 않겠소?
수장된 연화들이 다시 얼굴의 얼룩을 닦기 시작했소
점점 뜨거워지고 있소
물의 여름이, 시들했던 세상 한쪽이 노랗게 타들어가고 있소
코가 비뚤어진 당신도 짝귀를 가진 당신도 사팔뜨기 당신도
저 연(蓮)들 중 하나와는 연(緣)이 닿아있을 것이오
이 진흙탕, 한번은 뒤집혀야 마땅할 일이겠소만
침묵하는 땅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씨앗도 낳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이오?
리코더 수업
웃으니 푸른 복숭아가 왔다
빈 악기를 잡고 입술을 올리면
서쪽으로 엄지
검지는 검지끼리 모래알이 호로로
소용돌이다
손을 말며 약지 또 검지
집히는 곳곳, 점점이 상처다
보이지 않는 정방형의 덫
입술을 내리면 그림자가 온다
다음 생일에는 낙타를 준비할게
얼굴을 씻어내면
부끄러운 복숭아 완성될 수도 있겠다
적나라한 우리 사막의 봄날
손바닥의 주름을 둥글게 다듬는 저녁
작은 나뭇가지 잡고
뭇 것들이 깎이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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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 손톱』 ( 2010년 /문학세계사)
초경初經
울렁증이 시작되자 애너벨은 벼랑으로 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낭떠러지에 누워
출렁이는 머리칼을 아래로 드리웠습니다
물고기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월경을 하지 않으므로
북쪽 동굴에 사는 마녀를 불렀습니다
길이 끝나는 마을의 사람들은
붉은 속바지를 태워 하늘을 달래고
귀 밝은 고양이 늑대는
무릎을 문지르며 기다렸습니다
비늘 밖으로 흘러나온 핏방울이 똑 똑
초록 머리칼을 타고 떨어졌습니다
파랑이 지우고 가면 또 다른 핏물이 피어나고
번쩍, 노파의 지팡이가 허공을 가른 후
잠에서 깨어난 인어 한 마리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동쪽 바다를 떼어낸 비린내가 뒤를 따랐습니다
손톱
—꽃잠
망초 붓꽃 패랭이
흘러간 사랑의 비린내를 핥아먹는 저녁
아— 하고 상처를 연 순간 색의 덩어리가 쏟아진다
여러 날을 늙은 나무의 그늘에 얹혀 지냈다
새장이 흔들리는 나무 밑, 고양이와 나눠먹는 앵두 한 접시
나비야, 마실 가자! 붉게 번진 입술을 문지르며 따라가던
애인과의 마지막 꽃구경
누군가는 이 열망이라는 짐승과 할퀴며 뒹굴고, 또 누구는
고양이의 눈에 비친 황금나무를 꺾어 달빛 속으로 노 저어갔지만
나는 늑대의 시를 읊기 위해 사내라는 벼랑을 탔다
타들어가는 환부를 열어젖히고 새의 허공을 흘러 다녔다
일생, 조용한 꽃나무의 묘지기로 살자던 비밀을 엎지르고
장미와 고양이의 로맨스를 탐닉했다
초승달 신부가 부풀고, 신랑이 거친 몸을 가렸던 옷을 찢었을 때
그믐에 죽은 꽃을 부르며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떠난 자의 눈물이 푸른 손톱을 다시 물들일 때까지
새들이, 장미가 낳은 앵두의 눈을 다 파먹을 때까지
내 안의 주홍빛을 비워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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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잠 : 깊이 든 잠. 신랑 신부의 첫날밤의 잠.
뱀가죽 부츠
누군가 내 멱살을 잡고 가 구둣방 한쪽에 던졌다
저녁의 잇몸 사이로 진분홍 향기가 빠져 나가고
별빛 아래 춤추던 정강이의 음률이 사라지고
구두공은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에 홀려
신과의 서약에 쓰일 내 발굽을 고쳐놓지 않았다
밤새 오두막 굴뚝 위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딸기맛이 배인 발자국을 벗겨 냄새를 맡았다
질질, 또 누군가 끌고 가 길 가운데 세웠다
구름계단이 흔들리는 골목을 지나 까치산 비탈로
베르네 천변으로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나는 게으름뱅이 구두공의 연인
그만, 울지 말아라 붉은 목젖
무심한 구두공은 푸른 이무기가 품었다는 꽃신을 메고
장거리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고
승천할 듯 내 발은 몇 번이고 허물을 벗었지만
다시 꽃 피지 말아라
사랑할 땐 온몸이 자
궁이 되어 친친 애인을 감는
이 발칙한 모가지
사과꽃 램프
식탁 위의 사과 한 알 등불처럼 흔들리는 저녁
어머니의 칼이 길을 트자, 종소리가 흩어졌다
헛간 뒤 사과밭 묘지, 봄에도 꽃 피지 않는 아버지의 나무
세잔의 열망도 파리스의 영예도 없이 침묵으로 돌아온 자식들
나무 아래 굽은 등 포개며 11월의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사막의 외딴집엔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는데
이따금, 거친 두레박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머니의 백학과 오라비의 목검이 부딪히고
어쩌면 검은 목젖을 부풀려온 이 목마름의 근원도
저 속, 말라죽은 아버지의 뿌리인지 몰라
우우우 턱을 쳐올리면 묘지기의 푸른 눈동자에
훅, 연분홍 꽃잎을 새겨 넣는 늙은 나무
겨드랑이의 노랑부리는 아직도
붉은 꽃냄새에 갇혀 울던 옛집 버리고
나귀 등에 오르는 꿈을 꿀까
칼을 물고 올려다본 고목에서 툭, 풋열매가 터졌다
식은 저녁 식탁 위, 죽은 꽃이 피운 생비린내
잊었던 사람의 눈빛처럼 뜨거운 램프 하나 덩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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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여자
내 검은 입술이 뱀을 물고 있다고 허둥대진 마
마지막 말도 뱉어버린 얼굴이니까
그때 나는, 타들어가는 꽃빛이었지
마른 발목에 피가 돌기 시작하고
자루에서 꺼낸 소년은 눈부신 초록이었지만
나는 사랑을 배운 적이 없었지
이 꽃을 삼키면 죽은 발가락이 살아날까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신선한 눈물과 몇 개의 뼛조각이면
새로운 소년을 빚을 수 있을 텐데
치마가 홀쭉해지고 있네
누군가 내 혀를 훔쳐가 불꽃을 일으키는지
당신 몸 좀 빌릴게
피 묻은 꽃이라도 조금씩 뜯어먹어 봐
망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만 끔뻑거리는 거야?
말하자면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 지난 봄
나는 꽃이 아닌 꽃이었단 뜻이지
그러니까 지금, 백 년 전의 흔들의자에 앉아
푸른 암 늑대의 일기를 읽고 있다는 말이지
⸺계간 《열린시학》 2019년 겨울호
남다른 언어 감각과 밀도 높은 시로 자신만의 색체가 분명한 시/환상적, 몽환적 스토리의
나금숙 - 유미애 시인이 집착하는 시어 중에 손톱도 있지만 눈썹도 자주 눈에 띈다. 그냥 눈썹도 아니고 일곱 번째 눈썹? 완성의 숫자인 일곱 번째 눈썹은 일곱 번째 완전한 연인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사냥감을 돌에 새기는 기념비적인 행위는 현실에서 의미가 없다. 먹잇감을 포획하고 그들의 분홍 살점을 낄낄거리며 어금니로 뜯는 행위가 훨씬 동물적이고 실제적이다. 우리는 심장이 놓인 돌 앞에서 이 먹잇감을 어금니에서 귀로 듣는다. 대상을 갈기갈기 찢는 말의 성찬을 먼저 즐긴다. 낯선 종(種) 의 울음소리를,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바닥을 긁는 소리를 온몸으로 흡입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엿보며 흘깃거린다. 그러나, 낯선 종(種)의 사냥도, 육식도 치유는 아니어서 마지막 살점을 꽃처럼 던지는 저녁, 다시 궁금한 식욕을 자극하는 비린 한 쌍이 다가온다. 그것은 일곱 번째 눈썹일까? 완전한 사랑일까? 핏빛이 붉은 영역에서 여전히 살육하고 먹히면서 우리는 그래도 기대한다, 완전한사랑.
유미애의 하늘은 땅과 교신한다.
그믐 지나 그녀의 하늘에 뜨는 초승달은 단단히 매듭 진 허리띠처럼 그녀를 지탱해주던 중심이기도 하고 착하고 순한 노예로서 항상 대기하게 하던 사모하는 주인의 이름이다. 그리운 주인의 음성을 듣기 위해 사랑에 매인 종은 문설주에 귀대고 엿들어야 한다. 허리띠가 느슨해서도 안 되고 졸아서도 안 된다.
그녀는 어느 시절, 그 소중한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열고 종일 문밖에 서 보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렇듯 전일하게 대상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때가 있기도 했다. 향낭에 모아 둔 향은 사랑하는 그이의 이름에서 풍기는 것이다. 향은 하모니카 곡조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에 붉게 표지된다. 그녀는 국화꽃잎을 모아 베갯속을 만들듯이 고이 모은 자신의 정념을 사랑하는 이에게 괴어주고 쉬게 했을 것이다. 이제 한때 붉었던 손톱조각 같은 추억의 편린만을 쓸어 담는 세월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인연에 대한 집착은 그녀에게 영묘한 작약뿌리로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이 그리 쉽게 치유되는 병인가? 애증의 독니를 버리지 못한 눈 먼 뱀은 그이의 발뒤꿈치를 아프도록 물고 싶지만, 그녀의 하늘에 떠 있는 이름을 향해 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길고 아픈 울음 끝에 그녀는 산해경의 뱀들처럼 날개를 얻는다. 옛사랑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상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이제야 *간신히 그대가 그립지 않다. 당신 없이도 물컹, 향기로울 수 있는 새로 보름이다.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뱀은 날로 어리고 푸르다.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흘린 눈물자국이 사방에 번지며 – 마치 선지자 에스겔이 본 이상 중에 문지방에서 스며 나와 사방을 적신 물처럼 – 망각과 소생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 드디어 끝나 간다. 하모니카라는 악기는 애조 띈 음색을 내긴 하지만 절망을 노래하진 않는다. 오히려 어떤 무거운 그림자도 하모니카를 만나면 휘파람처럼 휙휙 가벼워진다. 시인은 지금 휘파람이나 하모니카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톡톡 손톱을 깎듯 미련과 애착을 움푹 깎아내고 만월을 기다리는 상현달로 뜨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하늘에 뜬 초승달은 이제 새 피를 수혈받는다. 그녀는 새롭고도 달콤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손톱달’에서 유미애와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 시에는 우리를 신선하게 하는 낭만의 요소가 충만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낭만성은 일회적인 것, 요란하게 흘러가버리는 흐름이 아니라 영원한 요소, 영원한 바다이다. 그 속에 인간의 정신은 되풀이하여 몸을 담가야 한다. 성스러운 회춘의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출생하고 모든 형상이 탄생하는 영원한 어머니의 품이다. 마치 즐겨 듣는 음악에서 새로운 조형미가 나오고, 그리스 신화에서 미의 여신이 항상 보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석화되어 사멸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미 있던 것은 재삼 파괴, 해체되어야 한다. 변화와 변형이 사랑과 생을 수호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만월이라고 여기는 달은 자꾸만 손톱달로 깎여져 나가야한다.
모든 화석화된 사랑은 깎여져 나가야한다. 새로 자라나는 분홍 손톱을 위해서.
*장석남 시인의 시에서 인용함/ 단평 나금숙 / < 시산맥> 2011년 여름호
cafe.daum.net선린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정
2024.08.28
고양이라는 상자
유미애
고양이는 닫힌 악기다
궤적의 예술가다 고양이의 철학이 넘치는 골목에서 수직의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깨닫는다 고양이는 무릎 위의 먼 세계라는 걸
이 고독하고 우월한 종種은 양탄자 위의 봄볕처럼 우리를 간질이다 저녁 묘지의 베일 속에서 분열한다 천사와 악마가 마주보는 얼굴은 갈채에 목마른 신의 모조품, 호기심을 숭배하는 발톱은 세상을 할퀴며 질문한다
안과 밖이 모호한 고양이는 제 발자국을 사원으로 가진 구도자, 배회하는 밤의 광대, 모든 별을 꿈꾸고 파헤치는 우주의 부랑아다 타자의색에 물들지 않는 이방의 음이다 고양이의 기타에 불이 켜지면 어둠의 밑바닥마다 팝콘이 터지고 벙거지를 눌러쓴 달동네 꼭대기 방은 방랑의 도시로 나간다
고양이는 흔들의자와 뒷골목이 엮은 이야기 꾸러미, 금붕어가 잠꼬대로 튀겨낸 초신성, 장미의 붉은 숨을 갈망할 때도 금간 접시 위, 생의 비린내를 탐구할 때도 고양이는 고양이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양이를 연주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녀석이 수시로 몸을 핥는 건 제 몸의 공명을 잠재우기 위한 것, 고양이는 고양이만 열 수 있는 문이다 건너편에 놓인 의문의 상자다.
-전문(p. 177-178)
조그마한 꽃밭이 있는 조그만 집을 그리다
조그마한 꽃밭이 있는 조그만 집을 그리다
가장 먼저 핀 꽃을 꼭 쥐고 소풍 가고 싶었지
검은 눈썹 박힌 별들 여전히 반반한데
나는 말라깽이 종이 인형
어디에다 푸른 힘과 빛을 써버린 것일까
이 꽃 다 지면 이끼 낀 강물 길어와
처마 밑에 솥단지 걸고 국밥이나 말아야지
어미의 찌그러진 달, 배를 불리고
홀쭉한 아비의 낚싯줄도 살찌우고
검게 탄 밥주걱엔 늙은 시간을 못 박아야지
뒷방으로 돌아오는 구부정한 봄날을 지켜봐야지
사기그릇 실금마다 어미의 밥 냄새가 스며들고
주머니 가득 꽃냄새로 들어찰 때까지
종일 낙서나 해야지
구겨진 내 몸 눕혀놓고
죽은 아비의 이름이나 그려봐야지
[출처] 조그마한 꽃밭이 있는 조그만 집을 그리다 / 유미애|작성자 눈향나무ㅡㅡㅡㅡㅡ
[출처] 유미애시인의 시집 『분홍당나귀』|작성자 눈향나무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