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17
개역개정)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개역한글)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공동번역) 또 그가 성벽을 재어보았더니 사람의 자로 백사십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 새번역)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니, 사람의 치수로 백사십사 규빗이었는데, 그것은 천사의 치수이기도 합니다. 현대인의성경) 그리고 성벽 두께를 재어 보니 약 65미터였는데 이것은 천사의 측량이지만 사람의 측량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설명하다가 이단이 되거나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개역개정은 개역한글에서 부족한 부분이나 조금 어색한 부분을 수정•업데이트한 성경입니다. 지금도 이단들은, 정통신학 기반의 신학•주석 같은 것들은 전혀 도외시하고,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고집에 빠져서 개역한글판만을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계속 반복하여 읽기만 하면서 엉뚱한 해석으로 빠지기 일쑤입니다. 예를 들어, 계21:17을 보고 천사의 모양과 사람의 모양이 같은 것으로만 오해하는 어수룩한 분들이 있는데요. 신학이나 주석을 보지 않아도 개역개정과 함께 다른 한글번역 성경 정도만 대조해서 보아도 그런 오해를 하거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적어집니다.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에 대하여 어설프게 개인이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실수하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 베이커 주석의 설명을 첨부합니다. 베이커는 루이스 벌코프 등이 소속한 화란 개혁주의 계열의 출판사이며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명이므로 들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 나오는 계21:17이 포함된 한 문단(새 예루살렘, 계21:9∼22:5)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도록 구분선 아래에 올립니다.
21:9~22:5 새 예루살렘
요한은 하늘나라 이곳저곳을 여행하러 다닐 때 새 예루살렘을 살짝 엿보았다(3:12; 21:2). 하지만 그 성의 의미와 취지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지금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성의 현현은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그 성이 처음에 내려온 것과 그에 대한 요약적 진술(21:9~14), (2) 그 성의 치수와 재료(21:15~21), (3) 그 성의 내적 내용과 풍경(21:22-22:5)이다.
선견자 요한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어느 산인지 알 수 없는 산으로 올려간다. 옛 예루살렘이 시온 산 위에 세워졌다면, 새 예루살렘은 그것이 이전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더 웅대한 높이의 장소에 세워져 있다(사 2:2~3; 4:1~5: 미 4:1~2; 겔 40:2). 요한이 새롭고 더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때, 요한은 그 성이 어린양의 신부라는 천사적 중재자의 말을 상기한다.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건물 비유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 성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21:9~10: 참고. 사 65:17~19), 성 전체에 대한 요한의 파노라마식 개관은 한 가지 중심 주제를 가진다. 하나님이 교회와 더불어 나누시는 깊고 영원한 친교라는 것이다.
성의 치수는 회복된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을 암시한다. 그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소의 토대에서부터 흘러나오며 그 열두 문 각각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따라 지어져 있다 (21:15~17: 참고. 겔 40:1-4; 43:1~5; 47:1~12; 48:30~35), 에스겔의 치수대로 하면 성전이 정육면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접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깬 치수대로 하면 그 것이 유면체가 된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에 대한 모든 것을 에스겔이 개관하는 종말론적 성전을 능가한다. 새 예루살렘은 길이, 높이, 넓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 (약 2,400km)인 반면, 에스겔서의 성전 치수는 약 2.4km에 불과하다. 열둘은 하나님의 사도들과 하나님의 지파들의 숫자이므로, 그리고 일천은 열(즉, 권세와 광대함의 숫자)의 배수이므로 새 예루살렘의 치수들은 수없이 많은 무리, 신구약 모두에서 나온 하나님의 전체 백성, 각 나라와 주소 방언에서 나와 (7:9) 서로서로와, 그리고 하나님과 완벽한 친교를 누리는 가운데 모여 있는 신자들을 나타내는 공간적 비유다. 그 점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 |
그 성의 재료에 대한 묘사(21:18-21)는 그 재료의 보석에 초점을 맞춘다(예를 들어,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 진주 및 다른 귀한 재료들). 이 보석들은 이중적 작용을 한다. 첫째, 이 보석들은 부활 때 교회의 영광스럽고 초월적인 성질(참고. 사 54:11)을 강조한다. 둘째, 이 보석들은 공동체의 제사장적 역할을 나타낸다. 예루살렘은 대체사장처럼 옷 입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흉배에 나열된 보석들(출 28:17~20)은 정의 벽. 토대문에 새겨진 것들과 공통점이 있다. 출애굽기 본문에서 각 돌은 이스라엘 지파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성 주위의 여러 다른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의 다양한 구성원을 나타내듯이 그 돌들은 그 다양한 구성원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한다(참고. 사 54:11~12: Josephus, Jewish Antiquities 3.8-9, 216-217).
『베이커 성경주석: 신약편』 p.748.
첫댓글 이단 교주들의 상당수가 중고등학교 수준의 문해력도 없는 상태에서 개역개정도 아닌 개역한글판을 수백번 읽어서 통달했다는 식으로 어거지 해석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신학이나 주석이 없고 자신들의 주괸적 신념만 가지고 읽었을 뿐입니다.
네, 쉰천지 이마니는 학교교육을 거의 안 받았다고 하더군요. 성경을 우습게 알고 막 해석하다가 지옥에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ㅠㅠ
잘 알겠습니다.
독사백편의자현의 뜻은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부지런히 학문을 닦으면 저절로 성취함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Daum 백과)인데요.
봉건시대에 한학을 공부하듯이, 이단 교주들은 선생이 없이 참고서도 없이 개역한글판을 읽으며 잘못된 해석으로 가버립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쉽촌지 이마니의 그룹을 group을 해석한 경우입니다.
이단교주들은 학력과 언변이 짧기 때문에 공청회나 공개석상에 나와서 해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학을 공부하듯이 타인에 의한 배움 없이 독학으로 독불장군 내가 복음을 전개하다가 이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도 짧지만 좋은 통찰력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이커주석으로 보니 내용 이해가 쉽고 정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옛 예루살렘과 새 예루살렘의 근본적인 차이를 계시록에서 확연히 알 수가 있군요.
보석들, 돌들이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며, 12사도와 12 지파로 구분해놓은 삽화도 흥미롭고 좋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사람, 즉 교회, 신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새겨 듣습니다.
깊이 읽으셨네요. 이 댓글에서 본문을 보는 도움을 더 받습니다. 😊
공감합니다.
이단교주나 그 구성원은 거의 대다수가 교만합니다. 회초리를 든 스승이나 부모의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 😢 겸손을 먼저 배우고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베이커 주석의 내용이 참 충실합니다.
네, 우리는 선생이 되려고 애쓰는 것보다 학생으로서 제자로서 배우는 일에 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딤후3:14-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흥미롭고, 생소하기도 한 본문에 대한 글을 통해 오늘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성경 읽고 주석을 찾아본 효과가 나서 좋아요!!
네,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 그러할진대 초신자나 평신도는 얼마나 성경 읽기가 어렵겠습니까? 초신자도 톰슨3 성경주삭 정도는 가지고서 함께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계시록과 같이 어려운 책은 함부로 무모히 접근하지 말고 베이커 주석과 같은 양질의 주석이나 참고서의 도움을 받으며 읽어야 힌다고 생각합니다.